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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3화 〉탐식마(貪食魔) (243/429)



〈 243화 〉탐식마(貪食魔)
화련은 주변 공기가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아주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풍겼다. 지벡의 방한에 의미를 고심하고 있던 류 현이 움찔할 정도였다.

“왜 왔데요?”


화련의 질문을 받은 승하마저 움찔할 정도니 말 다한 셈. 그만큼 화련은 지벡 건터라는 인간에게 아주 이골이  상태였다.


용잡이 팀에 들어오기 전에 껄떡거리는 인간들은 두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성으로 원한 접근이든, 플레이어로서 수완을 높이 산 접근이든 짜증나긴 매한가지였다.

그 당시 화련은 이모라는 큰돈이 들어가는 부양가족이 있어서 거절에도 크게 신경을 써야하는 입장이었으니까. 일이 끊긴다고 당장 끼니걱정을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매달 큰돈이 들어가는 가족의 존재는 거절의사도 명확하게 밝히기 어렵게 만들었다.


지벡 건터는 그런 상황에서 벗어난 이후 처음 마주친 껄떡남이었다. 그것도 역대급으로 질척거리는 껄떡남. 앞선 경험들 때문에 그에 관한 스트레스가 한계까지 쌓여있던 화련에겐 결정타였다.

남극에서 류 현이 쓰러지고, 본인도 상태가 좋질 않아서 좋게좋게 넘겼으나 평상시였다면 그냥 대판 붙으려고 들었을 것이다. 옆에서 보고 있던 승하가 개입하려다가 화련의 만류에 물러설 정도였다.  때는 말리기에 기분 나빠해도 금방 잊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 글쎄. 나도 입국했다는 소식만 전달받아서. 웨인도 이유는 모르지 않을까? 류 현이랑 의논하고 싶어서 연락했을 거 같은데.”
“마스터는 가실거죠?”
“예? 예에...가야겠죠. 다른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 말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현은 지벡 건터가 한국에서 깽판을 쳐도 신경을 쓸 입장은 아니었다. 필요도 없었다. 한국 정부나 ‘예거즈’, ‘산군’같은 대형클랜들이 신경 쓸 일이지.


청뢰를 얻은 퍼플 던전이나,  드래곤이 나왔던 던전을 접수할 때 편의를 제공받긴 했지만, 그건 태양그룹 쪽에서 꽤나 윤활유를 쳐준 결과물이었다. 태양그룹 측은  대가로  현이 기억하고 있는  다른 포션 레시피를 얻었다.

거래는 그걸로 끝났으니, 지벡 건터의 갑작스러운 방한에 정부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웨인 크로이츠가 아니라면 말이다.

‘크게 시간 드는 일도 아니고...옆에서 듣는 척만 해도 정보가 들어오니까.’
“죄송하지만 전 못 가겠어요. 가면 사고 칠 거 같거든요. 오늘 온 것도 세아 언니 보러온 거였고요.”

류 현이나 승하가 보기에는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 벌어질  같았지만 굳이 그 사실을 입에 담진 않았다. 애초에 그녀를 대동할 생각도 없었기에 류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동안만 누나를 부탁드립니다.”
“부탁까지야. 언니가 거동 못하는 환자도 아닌데요 뭘. 그럼 일 잘 보고 오세요.”


화련은 그대로 일어나 휘적휘적 병원으로 향했다. 류 현은 그 모습을 멀거니 지켜보다가 승하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쟤 저러는 거 보니까. 지벡 녀석 빨리 자기 집으로 돌려보내야겠다.”
“오래 뭉개고 있을 일로 온 게 아니길 빌어야겠죠.”

같은 시각 플레이어 협회 한국 지부에서는,


“지금 그게 무슨...”
“말한 대로야.”
“아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웨인은 사라진 편두통이 재발한  같은 느낌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평소라면 지벡 건터라는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 앞에서 이런 모습을 절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벡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각성과 동시에 사라진 편두통이 돌아온 것 같은 착각이 들게  정도였다.


“그러니까...지금 저를 감시하러 왔다는 걸 고백하시는 겁니까?”
“뭘, 거창하게 고백씩이나. 그냥 알고 있으라는 거지.”
“대체...무슨 속셈입니까?”
“속셈 같은 거 없어. 나 알잖아? 그냥 꼴리는 대로 막 사는 또라이.”


웨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세간에서는 지벡 건터를 그렇게 평가한다. 그렇다고 웨인까지 그 평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는 건 아니었다. 그가 보기에 지벡 건터는 구제불능의 또라이는 맞지만, 누울 자리도 못 보는 멍청이는 아니었다. 그랬다면 미국인 플레이어들의 대규모 망명사태 때 지벡은 죽었을 테니까.

“막 사는 또라이는 헌팅 레벨 300대에 도달할  없다는 걸 잘 아시잖습니까.”

협회도 바보는 아니었다. 지벡 건터가 무사히 망명하는데 손을 쓴 스폰서의 존재를 정확하게 규명하진 못했으나 후보자 명단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또 화가 난 미국의 손에서 이렇게 무사할 수도 없죠.”
“와, 자기 감시하러 왔다니까 이제 막 나가네. 이렇게 막 남의 트라우마 후벼 파도 되는 거야? 응?”
“그럴 리가요. 저는 사실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나도 사실만 말했다고. 그런데 손님 대접이 이래도 돼?”

지벡 건터는 비어버린 찻잔을 흔들어보였다. 웨인은 표정 변화 없이 멀거니 그가 하는 짓을 보기만 했다. 지벡 건터가 찾아왔을 때는 그도 손님으로 대접할 생각이었다. 그가 웨인과 용잡이 팀을 감시하러 왔다는 얘기를 꺼내기 전까진 말이다.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봤지만 명확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웨인은 더 머리를 굴려보는 대신 툭 내뱉었다.

“글쎄요. 조금 고민되는군요. 지금 당신을 응접실에 둬도 되는지 말입니다.”

웨인이 말을 마치고 직후, 바늘의 파도가 지벡을 덮쳤다. 투기라는 이름을 가진 무형의 바늘이! ‘이런 씹...!’


지벡 건터는 온몸이 오그라드는  같은 감각에 이를 악물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움직였다간 투기가 아니라 진짜 칼날이 자신의 몸뚱이를 난자할 것을 알았다. 웨인 크로이츠는 일전에 마주쳤을 때보다, 더욱 괴물이 되어있었다. 마법사인 지벡이 만전상태라도 도주 이외에는 다른 것을 장담할 수 없을 만큼!

“류 현님이나, 검성님, 저, 용잡이 팀원분들까지 감시 대상인 건 이해가 갑니다. 기분이 썩 좋진 않지만, 이상할 건 없는 일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다른 부분은 이해가 안가는 부분은 없는데. 건터 씨가 갑자기 찾아와서 나는 너희를 감시하려고 파견됐다. 라고 고백하시는 게 이해가 안 간단 말이죠.”

웨인이 말을 마치자 사방에서 조여들던 기세가 조금은 느슨해졌다. 마치 대답해보라는  같은 변화에 지벡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말 그대로 속으로만 화를 삭혀야 했다.

“...알렉스 뷸러라고 알아?”
“...! 예, 압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공식적으로 시가 총액 11위 기업체를 소유하고 있을  아니라, 비공식적으로도 최소 그만큼의 재산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추측되는 젊은 부호였다. 그리고 협회에서 ‘광대들’과 지벡 건터의 스폰서 후보 중 하나로 꼽고 있는 자였다. 최근에는 ‘광대들’과 지벡 건터의 스폰서인 것은 거의 확실시 되었고, 위스프와의 커넥션마저 의심받고 있는 요주의 인물.

“내가 망명할 때 큰 도움을  친구야. 그리고 지금은 내 스폰서기도 하지.”
‘역시...!’


지벡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걸 잊은 건 아니었지만, 저도 모르게 속으로 쾌재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협회의 행보에 번번이 훼방을 놓던 이  하나의 정체를 확신할 만한 증언이 늘어난 셈이었다.  증언의 신뢰도가 꽤 떨어진다는  문제였지만.


“알렉스 뷸러씨 얘기를 왜 지금...?”
“그리 복잡한 이야기는 아니야. 계속 들어봐. 내가 망명할 때  친구는 그 뒤로  스폰서 중 하나가 됐고, 더불어 내게 직접 지령을 전달하는 사람이 되었지. 내 스폰서들이 정한 지침을 전달해주는 일종의 전령인 셈이지.”
‘그런 거물이 전령이라고?’
“너희가 집중해야할  알렉스가 아니라  친구와 함께 장막 뒤에 있는 다른 스폰서들이야. 알렉스가 그놈들 하수인인  아니지만...그놈들한테 빚이 있어서 궂은일에 직접 얼굴을 비추는 역할을 맡은 거거든.”
“그 말은 한 패라는 뜻 아닙니까?”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러기가 어렵군. 그래서 내가 그 친구 이름까지 까면서 이러고 있는 거기도 하니까.”
“무슨...?”
“내 스폰서들이 회의 끝에 그쪽이랑, 검성, 류 현이라는 괴물 양반, 그 양반이 데리고 있는 팀원들한테 날 붙이기로 한 모양이야. 한 판 붙는다는 게 아니니까. 이 살벌한 투기는 좀 치워줬으면 좋겠는데.”


웨인은 굳은 표정을 풀진 않았지만, 투기의 포위망을 조금 헐겁게 했다. 어차피 지벡 건터가 무슨 수작을 부리든 3초 안에 멱을 따버릴 자신이 있었기에 할  있는 행동이었다.

“단순 감시로 당신을 붙인다고요?”


지벡 건터가 아무리 개종자 취급받더라도 이런 취급을 받을만한 이는 아니었다. X던전 사태나, 네임드 몹 때처럼 지벡 같은 거물이 움직여도 별 의심을 받지 않을 상황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 괴물 코리안이 보통 방법으로 뭘 캐낼 수 있는 인간은 아니잖아? 나처럼 관종짓을 하길해, 아니면 파비오  새끼처럼 여자를 밝혀? 같이 붙어 다니는 인간들도 보통 이상한 인간들이 아니라 맨날 붙어 다녀서 도청도 별 재미 못 보잖아. 그쪽도 시도해 봤을 테니   아냐?”

아주 없는 말은 아니었지만 웨인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를 해봐야 손해 볼 것이 뻔했다.

“그래서 그걸 밝히시는 이유가 뭡니까? 아까부터 이야기가 빙빙 돌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아아,  필요가 있으니까 하는 거지. 다시 돌아가서 내 스폰서들은 그쪽이랑 다른 괴물들을 감시하고 싶어 해. 그런데  그 괴물 코리안은 만나기 싫었거든. 만나는 것뿐만 아니라 연루되는 것 자체가 끔찍해. 그런데 보통 이런 감시는 끝이 좋게 나는 경우는 없잖아?”

플레이어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로 실종이나 의문사가 늘어났다는 우스갯소리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웨인 크로이츠는 그것이 그냥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사실에서 파생된 도시괴담임을 모르지 않았다. 2차 ‘대소환’ 이후, 높으신 분들의 과격함은 전에 없을 정도로 격해졌다.

‘몰랐던 건 아니지만...감시자 입에서 직접 들으니 기분이 썩 좋진 않군.’

웨인은 턱짓으로 계속 할 것을 주문했다.

“그 양반들은 아직도 자기들이 뭐든 할 수 있다고 믿는  같은데 내 생각에는 절대 아니거든. 그쪽도 알겠지만 그 괴물은 건드리면 안 되는 괴물이야. 순해 보인다고 장난치다가 팔 째로 뜯어 먹히고 남지.”
“...그렇게 무서우시면  현님을 괴물이라고 지칭하는 건 그만두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왜? 이 나라에는 안 보이는 곳에서는 왕 욕도 한다는 말이 있던데. 설마 일러바칠 생각이야?”
“......”


웨인은 말로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느슨하게 했던 투기의 포위망을 조였다. 효과는 발군이었다.

“아, 알았어. 관두지. 어쨌거나 난  친구랑 척을 질만한 일은 요만큼도 하기 싫거든. 내 친구가 겁도 없이 펄펄 끓는 용암에  집어넣는 걸 그냥 보고 있지도 못하겠고.”
“자백으로 상쇄시켜달라는 말씀입니까?”


지벡은 엄지와 중지를 튕겨 딱 소리를 내더니 검지로 웨인을 가리켰다.

“바로 그거지.”
“그러기엔 정보가 너무 부실하다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그게 말이야. 내 입으로 말하긴 심하게 쪽팔리긴 하는데 난 알렉스 말고는 스폰서랑 직접 대면해 본적이 없거든? 정보를 주고 싶어도 얼굴도, 이름도 몰라. 그 치들이 보기에 내 중요도는  정도였다는 거지.”
“알렉스 뷸러 씨는 알고 있을 거 아닙니까.”
“나 살고, 친구 살리려고 하는 짓인데 친구가 당장 죽을 짓을 하라는 거야? 너희도 내 스폰서 캐내려고 열심히 조사했을 거 아냐. 내 친구가 정보 싹 넘기고 보호 요청하면 안 뚫릴 자신 있어?”

없다. 협회가 보유한 최고 전력인 웨인 크로이츠는 다른 경쟁자들과 거리를 벌리는 수준이 아니라 아래에서 내려다 볼 수 있게 되었으나, 협회 소속팀들은 그렇지 못했다. 실력이 형편없는 건 아니지만, 지벡 건터를 저런 식으로 굴리는 거물들의 공세에 버티지 못할 것이다.


지벡 건터는 웨인의 침묵을 금방 해석해내었다.


“그것 봐. 나도 좋아서  쪽한테   들어먹고 얻어맞을 수 있는 포지션을 택한 게 아니라고. 나 살길이랑 내 친구 살길이 그거 밖에 없었던 거지.”
“그렇다고 이런 허술한 정보로 봐 드릴 순 없습니다. 그건 아시고 찾아오신 겁니까?”
“알다마다. 별 수 없지. 지금 당장 들이미는 칼 안 맞고, 나중에 날아오는 핵폭탄도 피하려면 나도 리스크를 감수해야지. 그냥 그 괴물 친구들이 알았을 때 혹은 물었을 때 사정 설명만 슬쩍 해줘.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아.”

***


“갔다고요?”
“예, 숙소로 부리나케 돌아가시더군요. 류 현님이 오시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마자요.”
“뭐야 그 인간. 대체 왜 온 거야?”

 현은 협회 지부에 도착하자마자 지벡 건터가 자기 숙소로 가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어이없어 하는 중이었다. 따라온 승하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에게 용건이 있어서 한국에 온 줄 알았더니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도망을 쳤다고 하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너 보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닐  아냐. 그랬으면 미리 연락을 했을 테니까. 대체 왜 온 거야?”


승하가 턱짓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하자 웨인은 곤란하다는 듯, 허허 웃기만 했다.


“아무래도 두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기는 곤란해서 그러신 거 같습니다.”
“응? 너 뭐 들었어?”
“대체 무슨 얘기길래...”

웨인은 볼을 긁적거리며 적합한 말을 고르다가, 자신이 스파이임을 밝히러 왔던 남자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속으로는 지벡 건터의 명복을 빌어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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