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2화 〉탐식마(貪食魔)
류 현은 가부좌를 틀고 병실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기왕이면 좀 더 부서져도 괜찮은 곳에서 수련을 하고 싶었지만, 세아가 반대를 해대는 통에 어쩔 수 없이 타협한 것이었다.
류 현의 몸뚱이는 여전히 움직일 수 있는 최소한의 마력만 품고 있고, 그것을 보고 있는 세아를 류 현이 당해내기는 무리였다. 굳이 그런 요소가 없더라도 이기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높지만.
자신의 안쪽을 관조하던 류 현은 긴 한숨과 함께 한껏 당겨놓았던 집중의 끈을 느슨하게 했다.
휴식기를 선언한지 벌써 사흘째. 오른손 바닥에 떠오른 글자는 이제 시간이 만 하루도 남지 않았다고 재촉하고 있지만, 류 현의 수련은 통 진전이 없었다.
“...오늘도 허탕이네.”
혼잣말과 함께 자리에서 털고 일어선 류 현은 터덜터덜 문 근처까지 걸어갔다가 멈칫했다. 소리 나지 않게 문을 연 류 현은 문 옆에 기대서 웅크린 채로 잠든 세아를 내려다봤다.
‘이러지 말고 피곤하면 방에 가서 자라니까.’
속내와는 달리 류 현은 혀 차는 소리도 내지 않고 세아를 살며시 안아들고 병실로 향했다. 중간 중간 간호사들과 마주쳤지만,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라 만성이 되었는지 눈인사만 하고 스쳐지나갔다.
‘영 진도가 안 나가네. 후딱 해결될 거라곤 생각 안했지만...좀 피곤해지겠는 걸.’
세아가 지내고 있는 병실에는 금방 도착했다. 류 현은 세아를 침대에 눕히고 몇 번이고 누운 자리를 살피다가 나왔다. 병원 주변 산책로라도 돌면서 머리를 식힐까 하고 발걸음을 옮기던 류 현은 막 병원으로 들어서던 화련과 마주쳤다.
“오셨습니까.”
“아, 네. 안녕하세요...음, 세아 언니는요? 어디 가셨어요?”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화련이 뒷말을 흐리긴 했으나 류 현의 청력은 그 말을 정확하게 잡아내었다.
‘내가 그렇게 누나랑 붙어 다녔나.’ 인사말 대신 세아가 옆에 없는지 살피는 화련을 보며 류 현은 괜히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세아가 깨어있을 때는 수련이나 화장실 같은 경우를 빼면 계속 붙어있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제가 수련하는 곳까지 따라붙더니 기다리다가 잠들었네요. 방금 방에 데려다 주고 오는 길입니다.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를 않으니 원...”
푸념과 함께 어깨를 늘어뜨리는 류 현.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화련이기에 보여주는 반응이었다. 그걸 모르지 않는 화련은 픽 웃으며 대꾸했다.
“어쩌겠어요. 누워있던 본인은 어떤 상태로 누워있었는지 기억도 못하니 별 수 없죠. 초기에 아팠던 것만 기억하고, 그 뒤로는 쭉 비몽사몽 상태였다고 하니. 저도 이모가 자꾸 주방에 들어가려고 할 때마다 덜컥덜컥 한다니까요.”
“아, 이모님은 괜찮으십니까?”
“네, 혼자서 몰래 장보러 나갔다가 구급차 탄 뒤로는 별 이상은 없네요. 보약 잘 먹겠다고 전해달라셨어요.”
그리 말하며 화련은 킥킥 웃었다. 그녀의 이모는 류 현이 보약이라고 선물한 물건이 얼마짜리 인지 모르니까 그런 반응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 점이 참을 수 없게 웃겼다.
안에 들어간 것이 쓰기에 따라선 잘린 팔도 바로 붙이는, 상위 플레이어들조차 없어서 못 먹는 물건이라는 걸 알면 입에 대지도 못했을 것이다. 생활력이 강한 걸 빼면 소시민 그 자체인 사람이니 말이다.
그녀는 딸로 대하는 조카가 그냥 빌딩이 아니라, 빌딩촌을 살만한 돈을 연봉으로 벌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몰랐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몸이 조금 아프다가, 잠깐 잠들었다가 깨보니 몇 년이 흘러있는 상황이라 그런 걸 신경 쓸 상황도 아니었고 말이다.
“좋으시다니 다행이네요. 혹시 누나를 보러 온 일 외에 다른 일이 없으시면, 잠깐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네, 그러죠. 이것만 프런트에 맡기고요.”
화련은 프런트로 쌩하니 달려가서 간호사와 뭐라고 말을 주고받더니 들고 온 종이 가방을 넘기고는 돌아왔다. 화련이 나란히 서자 류 현이 선도하며 말했다.
“조금 걸을까요.”
화련은 말없이 옆에 따라붙었다. 병원이 멀어져갔다. 류 현이 병원을 인수할 때 주변 공원을 통째로 사들인 탓에 통행객은 없었다. 그는 병원의 모습이 조경수에 가려서 보이지 않게 됐을 때쯤 발견한 벤치를 보고 화련에게 자리를 권했다. 화련이 자리에 앉자 류 현도 앉았다.
“그 정리라는 거 잘 안 되시나 봐요.”
물꼬를 틀 말을 고르던 류 현은 선수를 놓친 사람처럼 화련을 빤히 쳐다봤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눈가를 짚으며 말했다.
“잘 풀리는 데 그런 눈 하고 있으실 거 같진 않아서요.”
‘그런 눈?’
세아에게 거짓말이나 딴청을 늘어놓을 때마다 듣는 이야기였지만 들을 때마다 당혹스러웠다. 거기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 화련이 그리 찌르고 들어오니 당혹스러움은 배가 되었다.
“세아 언니가 그러셨거든요. 마스터는 거짓말을 하거나 할 때 눈을 보면 다 티가 난다고요. 제가 언니만큼은 못 알아보겠지만, 오늘은 확실히 보이네요. ‘펠릭스’의 기억이 잘 정리가 안 되시나 보죠?”
“...예. 진전이 거의 없습니다.”
“엘더 리치 때는...아, 그냥 하니까 됐다고 하셨지.”
“맞습니다. 그냥 하니까 그대로 이루어졌고, 이해도 수반되지 않았었죠. 그런데 이번에는 영...”
“‘펠릭스’랑 엘더 리치의 수준 차이 때문 아닐까요? 마스터가 낸 견적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말도 하고 상황 판단할 이성도 남아있었잖아요. 무력이 흡수 난이도를 정하는 기준도 아닐 테고요. 거기다가 패시브로 달고 나타난 겹친 차원 상태는...”
“예. 그 말씀대롭니다. 문제는 엘더 리치쪽도 안 된다는 거죠.”
류 현의 말이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려던 화련의 주의를 잡아끌었다.
“어, 그럼 둘 다 안 된다는 건가요?”
“예. 이미 흡수한 기술은 이렇게 쓸 수 있는데, 다른 부분은 손도 못 대겠더군요.”
류 현의 왼손 검지에서 검은 실가닥 같은 것이 솟아나더니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흩어졌다. 화련은 그것이 엘더 리치와 그 수하인 7성리치가 사용한 불꽃 채찍의 응용임을 알아보았다. 류 현의 이야기로 알고는 있었지만, 저런 고등 술식을 장난치는 것처럼 펼쳐 보이는 걸 보니 맥 빠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지난 사흘 동안의 자신이 한 노력이 정말로 헛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사람이라니까.’
화련은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머리를 굴렸다.
“마력적인 문제가 아닐까요? 저만해도 마력양이 늘어나기 전에는 전혀 이해 못하던 기술들을, 마력양이 늘어나자마자 단 번에 이해한 적이 있잖아요. 마스터 지금도 마력 안 채워넣고 계시죠?”
류 현을 처음만나고 용잡이 팀에 스카웃하던 때의 이야기였다. 그 때 화련은 류 현이 밀어넣은 마력으로 벽을 깨고, 늘어난 마력통과 함께 마법의 진보도 얻었었다. 류 현의 정체를 알고 난 후인 지금도 그 때 일을 생각하면 말이 안 된다고 고개를 내저을 정도였다.
“그건 아마도 아닐 겁니다.”
“어째서요?”
“그게...”
류 현은 주변을 한 번 두리번거리고도 안심이 안 되는지, 없는 마력을 쥐어짜서 마력탐지까지 돌린 후에 말을 이었다.
“어제 새벽에 잠깐 던전에 들어가서 채워넣고 시험해 봤거든요.”
“네...?”
화련은 중간에 피부를 벗어던지고 모든 상처를 회복한 승하를 빼면, 이번 네임드 몹 사태에 가장 큰 부상을 입은 류 현이 던전에 몰래 들어간 것에 화를 내야할지, 아니면 마력을 채워넣었다는 사실에 놀라야할지 바로 정할 수가 없었다.
결국 승리한 것은 호기심 쪽이었다. 지금 화내봐야 류 현은 필요하면 또 그런 짓을 할 거라는 아주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류 현이 채워넣었다고 할 정도면 그 양이 보통은 아닐 텐데, 하룻밤 사이에 어떻게 채워넣었다는 것일까?
화련이 아는 바에 의하면 류 현이 마력을 수급하는 방법은 괴수를 뜯어먹는 것과 에너지 드레인이다. 전자나 후자나 상대하는 괴수 질에 따라서 마력 수급양이 갈리기 때문에 류 현이 몰래 들릴 수 있는 던전에서는 만족할만한 양은 나올 수가 없었다.
“어디서요? 병원 뒷산에 퍼플 던전이라도 뜬 거에요?”
“그건 아니고요. 가까운 블루 던전에 들어가서...”
“블루 던전? 거기 있는 괴수들 다 뜯어먹어도...”
“어, 음...그게 말입니다. 저도 그 때 처음 안 건데...너무 놀라거나 화내시지 마시고요.”
“...일단 말씀이나 해보시죠.”
“호흡하니까 되던데요.”
“...네?”
“던전 안에 들어갔더니 될 거 같아서 했더니 되더라고요.”
“마스터.”
“예. 말씀하시죠. 화련 씨.”
“제가 잘 못 들은 게 아니고, 마스터가 잘 못 말하신 게 아니라면 그냥 호흡했더니 모였다는 얘기죠?”
“정확합니다.”
화련은 와락 미간을 찌푸렸다.
플레이어들은 살아있는 한 계속해서 마력을 빨아들인다. 그 양이 극소량이라 던전에서 괴수를 사냥하고, 던전을 클리어해서 그 때 뿜어지는 마력을 흡수하는 것 이외에는 신경 쓰지 않아서 그렇지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마력은 모인다. 마력이 가득 한 던전에서는 의미가 아주 없진 않으나, 아무도 그걸 위해서 던전 안에서 죽치고 있진 않는다. 그럴 시간에 던전 하나라도 더 도는 것이 나으니까.
마력통이 텅 비었을 때는 그 양이 의미 있는 수준까지 올라오지만, 어디까지나 주 단위로 휴식을 취했을 때나 해당되는 이야기인 것이다. 류 현이 말한 것처럼 몰래 던전에 들어가서 몇 시간 만에 의미 있는 수준까지 채울 수는 없다.
류 현이 신소리를 하는 타입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화련은 화내지 않고 물었다.
“얼마나요?”
류 현은 말 대신 손가락을 두 개 펴보였다. 화련은 그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힉”하고 헛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닌가 하고 확인에 들어갔다.
“그거 단위가 저 맞죠?”
“예.”
화련은 다시 헛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그 모습에 류 현은 괜히 뒷머리만 긁적거렸다.
“혹시...지금 보여주실 수 있나요?”
“안 될 건 없는데...음, 혹시 모르니까 보호막을 치고 계시겠습니까?”
화련은 곧바로 능력을 활성화해 보호막을 쳐두었고, 그것을 확인한 류 현은 천천히 심호흡을 시작했다.
첫 호흡은 평범했다. 두 번째도 비슷했다. 세 번째도 류 현과 계속 붙어 다닌 화련이 아니었다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변화가 미미했다. 네 번째도, 다섯 번째도 비슷했다. 화련이 변화를 피부로 느낀 건 서른 번째쯤이었다.
후우욱! ‘이런 미친...!’
화련의 시각에서는 마력적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일반적인 회오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 격렬한 흐름은 수챗구멍처럼 사방의 마력을 빨아들이는 남자가 중심에 있다는 거였다. 그저 심호흡을 하고 있을 뿐인 남자가.
탐욕스럽게 주변을 갉아대던 검은 안개와는 달랐다. ‘강림’상태에서 주변을 장악하던 검은 것과도 달랐다. 검은 안개나 ‘강림’상태의 검은 뭔가가 사냥감을 뜯어먹는 맹수 같은 느낌이라면, 지금은 거대한 진공청소기를 켜놓은 것처럼 마력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화련은 그런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에 놀랐다. 동료에게 이런 평가를 내리는 건 하고 싶지 않지만, 류 현의 능력 행사에는 반드시 뭔가 이질적인 것이 끼여있었다. 지금도 보면 흠칫하는 검은 안개라던지, 아무런 기색이 없어서 더욱 이질적인 ‘강림’상태의 검은 것이라던지.
이질적인 기운이 없나 뜯어보던 화련은 류 현의 호흡에 자신이 쳐놓은 보호막에 들어간 마력까지 들썩거리는 것에 두 번 놀라게 되었다.
“마, 마스터. 그, 그만하...”
“후욱-”
화련의 제지에 류 현이 심호흡을 멈추자마자 주변의 마력을 죄다 빨아들이던 회오리바람이 잦아들었다. 화련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류 현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류 현은 겸연쩍다는 듯이 볼을 긁적거렸다.
“대충 이런 식입니다.”
“...하루 안 본 사이에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에요?”
“아니, 뭘 한 건 아니고 던전에 들어가니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와서요.”
“대체 무슨 상식을...근데 그 때 모은 마력은 어쩌셨어요? 설마 그 안에서 다 쓴 거에요?”
그렇다고 하면 화련은 이번에야 말로 화를 낼 생각이었다. 내상은 다 나은 상태였지만, 류 현은 제 입으로 마력을 움직일 때 이질감이 들어서 당분간은 마력을 안 모으고 회복에 힘 쓸 거라고 했었다. 제 입으로 한 말을 한 지 이틀도 안 돼서 어긴 거라면 그도 할 말은 없을 터였다.
“아뇨, 희란 씨한테 보냈죠. 보내기 전에 연락도 했고요.”
“...희란이 얘는 그런 일이 있으면 언질이라도 주지.”
“어쨌든 마력양이 문제인 건 아닌 것 같...응?”
류 현의 고개가 공원 입구 쪽으로 돌아갔다. 이내 화련도 류 현이 느낀 기척을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인기척의 주인은 나는 것처럼 빠르게 다가와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승하 씨?”
“야, 너 왜 연락을 안 받아? 전화는 안 되고, 병원 근처 오니까 마력 폭풍이 몰아치고 그래서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무슨 일 없는 거 맞지?”
“예? 무슨 연락을...아.”
승하의 타박에 류 현은 바지주머니를 뒤졌지만 걸리는 게 없었다. 아무래도 휴대폰을 수련방에 두고 온 모양이었다.
“웨인이 뜬금없이 전화 걸어서 니가 전화 안 받는다고 징징거리더라고. 나도 해보니까 안 받는 거 아니겠어? 확인 차 산책 겸 걸어오는 데 갑자기 주변 마력이 요동쳐서 깜짝 놀랐다니까. 그거 니가 한 거 맞지?”
“끙...죄송합니다.”
“됐어. 아무 일 없어서 다행이다. 아, 맞다. 웨인이 이 소식 전해달라더라.”
“카이로에 또 무슨 일 생겼습니까?”
“지벡 건터가 왔데.”
“예?”
그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란 말인가. 류 현은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아니, 전생에서는 한국 한 번 밖에 안 온 인간이 왜 지금 같은 시기에 와?’
류 현보단 화련이 현실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더 빨랐다. 화련은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