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1화 〉탐식마(貪食魔)
-칼리프 클랜놈들을 압박할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역으로 우리가 기반을 날리게 생겼군.-
-그 정도면 다행이겠지. 이 소식이 새어나가면 유럽 증권거래소는 아주 폭발할 테니.-
-볼코프 그놈은 뭐래?-
-연락도 제대로 안 돼. 생각이상으로 엉망진창인 모양이야. 하긴, 라가 대이동 때는 근처 마을을 건드리지 않았으니 그렇게 넘어간 거고, 이게 정상이지.-
-젠장, 속편하게 그런 소리 할 때야? 원금 회수도 못하게 생겼다고.-
-그 쪽 원금 회수가 문제가 아니야. 괴수 군단이 그대로 밀고 올라오면 유럽도 안전권이 아니야.-
-칼리프 클랜 놈들이 그렇게 쉽게 당하려고? 너무 과한 걱정 같은데.-
-저 친구 소식이 많이 늦네. 자파르 알 사디크는 절단된 왼손 회복시키느라 두문불출. 알 라시드나 마람 압둘아지드도 자파르 알 사디크 때문에 클랜 밖으로 안 나오지. 다른 상위권 녀석들도 못 움직이는 건 마찬가지야. 그렇게 당한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움직이게 내버려두면 그게 정신나간거지.-
-대체 얼마나 죽었길래 그래? 난 이 쪽 일 수습한다고 보고서 뒤적거릴 시간도 없었다고.-
-죽은 놈들 헌팅 레벨 평균이 170가까이 돼. 200대 진입할 거라고 예상되던 유망주들 실링까지 고려하면...칼리프 클랜이라서 안 망했다는 소리 밖에 못하겠군.-
-거기에 유니크 아티펙트 유출까지 인가.-
-글쎄, 그놈들이 워낙 우기길 잘하는 놈들이라. ‘마녀’가 원래 보유하고 있던 걸 빼내려고 거짓말을 한 건지, 정말인건지 알 수가 있나. 난 개인적으로 전자이길 바라고 있어.-
-그 전에 저런 짓을 한 괴수가 있나?-
-없지. 없으니까 더 못 믿을 일 아닌가.-
-검성이나 류 현이라는 놈이 그냥 넘어간 거 보면 아주 거짓말은 아닌 거 아냐?-
-이 친구 진짜 보고서 뒤적이지도 않았나 보네. 당시 검성과 류 현이라는 친구는 사냥을 끝낸 지 일주일도 안 된 상태였어. 상위 플레이어들이 가장 취약할 때지. 충분한 휴식을 부여받지 못한 건 덤이고, 그 친구들 앞을 막은 건 부상자 투성이긴 해도 칼리프 클랜의 최정예. 머리가 장식이 아니면 마찰을 피하지. 아무리 그 둘이 대단해도 한 손이 열 손 못 당하는 법이지.-
-칼리프 측 의심이 맞든, 틀렸든 간에 어차피 그 개미지옥이라는 건 한참동안 안 보일 텐데 그 얘길 지금 굳이 해야 해? 지금 같은 상황에?-
-아니, 마틴 저 친구가 계속 맥을 끊잖나.-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으나, 책상 위로 출력되는 홀로그램이 쏟아내는 말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이 방 주인의 부재사실은 그들에게 아무래도 좋은 일인 것처럼 보였다.
-췐, 볼코프가 못 움직이는 상황이라는 건 잘 알겠는데 그 외에는 소식이 전혀 없나?-
-왜 없겠어. 문제는 돈 안 되는 소식뿐이라는 거지. 카이로가 그 꼴이 됐던 게 떠올랐는지 콧방귀 꽤나 뀐다는 놈들은 다 외국으로 도망가고 있어. 칼리프 클랜이 나서기 전까지는 봉쇄선은 꿈도 못 꾸겠지.-
-민족이 어쩌니 하더니 가관이구만.-
-위스프는? 볼코프 라인 말고는 아예 연락이 안 되나?-
-맞아, 살아있는 라인이 없진 않을텐데.-
-이 친구들아, 볼코프에게 집중해야한다고 선택한 건 자네들이었어. 나머지 라인은 지부 하급 간부 수준이라 제 몸 건사하느라 바빠. 듣자하니 남부에 있는 지부는 괴멸상태고, 동부는 소식이 아예 안 닿는다던데. 위스프로 뭘 건질 생각은 접어. 난 그놈들이 허튼 소리 하기 전에 죽어서 묻히기를 바라고 있다고. 차라리 알렉스 쪽에 기대 거는 게 나을 거야.-
-볼코프 그놈도 췐, 네 본명도 모르는 데 무슨 걱정이야? 그놈 제 목숨하나는 끔찍하게 생각하니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거 같은데.-
-그러다가 뒤통수 맞으면 머리 터지는 거지. 괜히 개인적으로 그놈이랑 연락하다가 나중에 피 보지 말고 그냥 신경 꺼. 이제 그놈 데리고 있어봐야 얻을 것도 없어. 리스크는 몰라도. 아프리카 일이 정리되고 나면 그 놈도 조용히 치워야지.-
-치우기는 좀 아깝지 않나? 그놈이 이거저거 재긴 해도 실력은...-
-차라리 싹수 보이는 놈을 데려다가 키워. 그놈은 글렀어. 자네들이 말려서 내버려둔 거지, 아니었으면 진작 치웠을 거야.-
-끄응, 아프리카 쪽은 이걸로 손 털어야 하나. 젠장, 이제 좀 원금 회수하나 싶었는데.-
-협회 쪽은 좀 어때?-
-그 류 현이라는 친구가 휴식기 들어갔다는 얘기 들어가자마자 난리도 아니야.-
-곧 죽을 인간처럼 달리던 놈이 이야기 듣기도 전에 드러누워버린 거니까. 무리도 아니지.-
-다들 어떻게 생각하나? 몸값 올리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늦은 거 아닌가?-
-복잡하게 생각할 거 뭐 있어. 지금이라도 정상궤도로 돌아가려는 거지. 일이 너무 연달아 터지기도 했었잖아? 굳이 그 일에 다 머리를 들이민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안 죽은 게 더 말이 안 되는 거지. 보통 퍼플급만 들어갔다 와도 한 달은 아예 칼도 안 잡고 은퇴한 것처럼 쉬는 게 보통이고. 지금까지 행보를 보면 그놈한테 휴식기가 필요 없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대체 그놈 목적이 뭐지? 본 드래곤 사체도 마켓에 나온 게 없다면서?-
-없지. 그놈이 별도의 유통망을 가지고 있어도 계좌에 돈이 오고가는 건 피할 수 없는데 말이야.-
-다른 상위 괴수 부산물이랑 맞교환 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나?-
-이봐, 필. 자네 같으면 돈 좀 들이고, 발품 좀 팔면 구할 수 있는 것들이랑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물건이랑 맞바꾸겠어? 맞바꾸더라도 우리 눈에 안 띌 정도로 소규모로는 안 하겠지? 그런데 흔적이 없어. 그놈 주변으로 돈이 흘러간 흔적도, 대량의 부산물이 움직인 흔적도 없다고.-
-그 친구 개인공방 비슷한 걸 보유하고 있지 않나? 그 쪽에 썼을 수도 있지.-
-그쪽은 확신하긴 어렵지만, 아마 아닌 거 같아. 공방 쪽으로 흘러들어가는 시약이나 부산물 양이 별 변화가 없어. 본 드래곤 덩치를 생각했을 때 나올 부산물 양을 고려하고, 처음 보는 소재인 것까지 감안하면 명백하게 이상하지.-
-파면 팔수록 이상한 놈인 거 같은 확신만 드는데. 나만 그래?-
-같은 게 아니라 이상한 놈 맞아. 플레이어 짓하다가 정신 나간 놈은 많이 봤지만 이렇게 참신하게 정신 나간 놈은 처음 본다. 내가 본 놈들 중에서 성욕, 물욕, 명예욕, 식욕 이 넷 중에 안 걸리는 놈들은 대부분 일 년 내로 뒈졌는데 이놈은 멀쩡하게 살아 있잖아. 그것도 제일 쎈 것들한테 달려들었는데도 말이야. 이놈이 하는 짓이 전부 의미 부여하고 해석하려고 들면 이 쪽 머리만 깨져. 그러니까 단순하게 생각하자고. 놈이 한 행동 그 자체만 보고, 해석하지 말고.-
-그러기엔 그놈이 너무 커졌어.-
-맞아, 자네야 놈이 네임드 몹을 독식해도 상관없겠지만 우리는 회사 주가가 요동친다고.-
-그럼 계속 머리 깨져야겠네. 그런데 알렉스는 어디 갔길래 아직도 얼굴을 안 내미는 거야?-
-거너 건터한테 갔어.-
-그놈한테는 왜? 그러고 보니 그놈 남극 다녀온 뒤로 이상하게 조용하긴 했네. 그놈 성격이면 빨아달라고 난리를 쳤을 텐데.-
***
“이봐, 알렉스. 내가 저번에도 말한 거 같은데. 난 그놈 근처에도 가기 싫다고.”
“이 친구야, 누가 그 인간이랑 한판 붙어 달래? 그냥 슬쩍 가서...”
“아아, 안 가. 안 가. 그 인간 주변에 있는 인간들이 어떤 인간들인지 알아?”
“그냥 가서 보는 것도 안 되겠어?”
“알렉스, 내가 전부터 하던 소리지만 네 잘난 친구들한테 휘둘리는 것도 이제 졸업할 때 되지 않았어? 내가 듣기로는 회사도 안정화 됐고, 귀찮게 구는 아저씨들도 다 날려버렸다던데. 이제 손 털어도 되잖아?”
“지벡.”
“쳇.”
지벡 건터는 오랜 기간 염색하지 않아 색깔이 돌아온 검은 레게머리를 쓸어 올리며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주변에서는 개차반, 무뇌아 취급 받는 지벡이었으나 망명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오랜 친구에게 막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친구가 자신을 버림패로 쓰려고 하던 작자들 손에서 구해줬다는 걸 알고 있는 이상은 말이다.
말 그대로 백인이라는 개념을 형상화 해놓은 것 같은 금발 미남, 알렉스 뷸러는 제 손목을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대체 왜 그렇게 꺼리는 거야?”
“...웨인 크로이츠.”
“음?”
“일전에 협회에 들를 일이 있어서 갔다가 그놈이랑 마주쳤어. 그 때...”
지벡은 한 숨과 함께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다시 헤집었다.
“그놈은 웨인 크로이츠가 분명한데, 내가 알던 그놈이 아니었어.”
“응? 무슨 의미야 그게?”
“놈이 괴물이 됐다고.”
“자네도 강해졌잖아.”
지벡 건터가 남극 원정 이후 아무런 사고도 치지 않고 잠잠했던 건 그 때문이었다. 웨인 크로이츠나 용잡이 팀, 검성처럼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깨달음을 얻은 건 아니었지만, 지벡은 자신의 벽을 부술 수 있는 실마리를 잡는데 성공했다.
그 실마리를 쫓아 벽을 부수는데 성공했고, 현재는 천천히 산을 오르는 과정에 있었다. 부른 이가 알렉스 뷸러가 아닌 다른 스폰서였다면 들은 채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안 돼.”
“...뭐가?”
“으득...지금 그놈이랑 난 비교가 안 된다고.”
이렇게 자존심에 스스로 스크래치를 내는 발언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말이다. 알렉스 뷸러는 입을 쩍 벌리고 반문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지벡의 얼굴만 쳐다봤다. 지벡 건터는 자신이 한 말에 열이 받는 게 우스웠는지 픽 웃더니 툭 내뱉었다.
“후우우...좋아. 마지막으로 보고 오는 것 정도는 해 줄게. 다시 말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야. 알렉스, 네가 그 잘난 친구들이랑 손 털기 전에는 더는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