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화 〉탐식마(貪食魔)
왕의 영지. 개방 98:49. 끝에서 두 번째 자리 숫자가 줄어들었다. 휴대폰 시계와 류 현의 손바닥을 번갈아가며 힐끔거린 화련은 남은 시간이 나흘하고 3시간 안 되게 남았음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얼마 안 남았네요.”
“예. 그렇죠.”
“언제 다시 나타난 거에요? X던전 전부 클로징하고 나서는...”
“그 땐 제가 못 느꼈다고 말씀드렸었죠. 정말 그랬었고요. 웨인 씨가 달려와서 횡설수설하기 직전에 다시 떠올랐습니다.”
“거의 검은 벽에 색깔 빠지자 마자네요.”
화련은 기울였던 상체를 다시 의자에 기대었다. 그녀는 한숨처럼 내뱉었다.
“어째 엉덩이 붙이고 있을 시간을 안 주네.”
“괴수가 우리 사정을 헤아리면서 출현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걸 감안해도 너무 텀이 짧긴 합니다만.”
전생에서도 이렇게 텀이 짧진 않았다. 이번에는 네임드 몹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골치 아픈 일임은 틀림없었다. 류 현의 예상으로는 더하면 더 했지, 덜할 것 같지는 않았다. 네임드 몹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었던 칼리프 드 오르시아가 그렇게 경고를 했었으니까.
‘최소 준 레이드몹급이 세 넷 정도는 나온다고 보는 게 맞겠지. 최악은 거기서 네임드 몹이 튀어나오고, 잡고 있는 동안 또 다른 네임드 몹이 순서 맞춰서 튀어나오는 거고.’
그건 정말 최악의 경우였다. 아마 그렇게 되면 류 현은 전장이 어디든 미련 없이 손을 털고 몸을 뺄 것이다. 몸을 키우고, 정보를 수집하다가 다른 변수를 감안해도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 서면 그 때 다시 나설 것이다.
그러는 동안 피해는 끝도 없이 확산되겠지만, 류 현은 자신의 한계를 겸허하게 인정하는 법을 배운 이였다. 신이 아니고서야 모든 불행을 막을 순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걸 안 물어봤었네. 전생에는 텀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데?”
“편차가 너무 심해서 평균 내는 게 의미 없을 정도였습니다만...중반부까지는 한 달 걸러서 튀어나오는 일은 없었죠. 뭐 제가 네임드 몹이 뜨자마자 다 때려잡은 것도 아니고, 이번 생처럼 주변에서 튀어나오거나 존재를 확인하기도 전에 먼저 덤벼들거나 한 적은 없으니, 확신은 금물이지만 말입니다.”
“새삼스럽긴 한데 너 진짜 괴물이긴 하다. 비행기도 띄우려면 리스크 감수했어야 했다면서? 어지간하면 띄워주지도 않고. 비행기도 없이 전 세계 돌아다니면서 괴수 토벌이라니...어우. 끔찍하네.”
그게 곧 우리가 겪을 미래일지도 모르는데요. 류 현은 그렇게 입을 놀리진 않았다.
현재 지지부진한 게이트가 괴수를 쏟아내는 현상이 본격화 되면 뱃길이 가장 먼저 막히고, 그 다음이 하늘이 될 테지만 그것을 최대한 막아야 하는 게 자신의 일이니까. 적어도 운행불가 수준까지는 가지 않도록 어떻게든 해볼 생각이었다.
“안 된다고 하는 데 뭐 어쩌겠습니까. 그냥 되는대로 한 거죠. 전생 이야기는 다시 기회가 닿으면 더 하기로 하고...이 녀석에 대해서 계속 해보죠.”
류 현은 오른 손바닥을 천장을 향하게 편 채로 탁자 위에 올렸다.
“희란 씨, 여기에 손 좀 올려보시겠어요?”
“네...? 네엣!”
희란은 쭈뼛쭈뼛 손을 뻗어왔다. 한 두 번 잡아본 손도 아닌데 대체 왜 저럴까. 류 현은 어디 안 좋으냐고 물으려다가, 역효과가 날 것 같아서 관두었다. 아직도 희란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희란은 손이 닿자 흠칫 몸을 떨더니, 그 이후로는 쭈뼛거리지도 않고 류 현의 말이 없었음에도 자신의 능력을 활성화 시켰다. 류 현은 원래 그런 것처럼 자신의 손바닥 위로 마력이 통하는 통로를 연결하는 희란의 솜씨가 새삼 놀라웠다.
‘전생의 ‘링커’는 확실히 뛰어넘었어. 적극성만 조금 더 키우면...’
‘링커’는 시한부의 몸을 이끌고 합류한 것이라 실력 비교가 별 의미 없겠지만, 그렇다고 놀라움이 사라지진 않았다. 그렇지만 아쉬운 부분도 없진 않았다.
‘링커’는 제 판단 하에 필요하다 싶으면 지시하지 않은 일도 했으니까. 그 때문에 진땀 뺀 적도 꽤 되었지만, 등을 완전히 맡길 동료로 생각하고 있는 이상 조금 더 능동적으로 자기 판단도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예민한 아가씨에게 어떻게 접근할지 감이 안 잡혀서 손을 못 댈 뿐.
류 현이 자신에 대한 생각을 하는 걸 알 리가 없는 희란은 조사를 끝마쳤는지, 겹친 손을 떼서 조심스럽게 끌어당겼다.
“끄, 끝났어요.”
“어떠셨습니까?”
희란은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눈알을 데룩데룩 굴리더니 더듬더듬 말문을 텄다.
“끌어당겨지는 느낌이었어요. 당기는 힘은 강하진 않은데...방향은 정확하게 알 수 있는...그런 느낌?”
“당겨지는 느낌? 희란아, 어느 쪽 얘기하는 거야?”
화련의 물음에 희란은 오른팔을 들어 벽을 가리켰다. 류 현과 희란을 제외한 둘의 시선이 벽을 돌아봤지만, 투시 능력도 없는 두 여자가 볼 수 있는 건 벽뿐이었다.
“아마 그 방향 끝에 카이로가 있겠지요. 희란 씨가 말씀하신대로, 이 ‘열쇠’가 살아난 순간부터 저쪽에서 끌어당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집중 안하면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긴 한데...”
“너도 이런 건 처음이지?”
“예. X던전부터가 저도 처음 보는 던전이었으니까요. 아주 정보가 없었으면 저도 당황해서 클리어 시기를 놓쳤을 겁니다.”
“응?”
“네? 정보라뇨?”
류 현의 말은 그녀들도 듣지 못한 것이었다. X던전 원정 당시, 그리고 그 직후에도 류 현은 생전 처음 겪는 일에 대처하는 이치고는 너무 의연하게 행동했지만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전생에 대해서 털어놓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이걸 말씀드린다고 무슨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혼란을 드릴 수도 있고요. 아마 제 마음이 편하고 싶어서 털어놓으려고 하는 게 맞는 거 같습니다.”
“...뭔데 그렇게 무게 잡아?”
승하는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회귀자인 것 까지 까발린 녀석이 저렇게 심각해질 일이 뭐가 있을까 겁이 날 정도였다. 슬쩍 돌아보니 그건 희란과 화련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승하는 류 현이 이대로 입을 여는 걸 내버려 둬도 되나 하고 고민하다가 류 현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고민하는 것을 포기했다.
류 현의 입술이 자아낸 이야기는 길지는 않았지만 그의 전생만큼 황당했다. 어떤 면에서는 회귀사실보다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세 여자는 인내심 있게 류 현이 말을 끝마치길 기다렸고, 류 현이 이야기를 끝내고 마른 목을 달래려고 냉장고에 가서 생수통을 꺼내올 때까지 침묵을 유지했다. 포문을 연 건 승하였다.
“그 여자는 대체 뭐야? 무슨 신이라도 되나?”
“글쎄요. 저도 처음 보는 존재라.”
“‘마녀’, 아니 ‘펠릭스’처럼 말할 줄 아는 괴수 같은 거 아니에요?”
“야, 그게 더 끔찍하겠다. 류 현 과거를 알고, X던전에 뭐가 들어있는지도 아는 걸 어떻게 잡아? 류 현 말하는 거 보니까 최소 네임드 몹 둘은 찜쪄먹겠구만.”
“‘펠릭스’ 경우처럼 아는 거에 비해서 실질적인 전투력이 약할 수도 있죠. 마스터가 그랬었잖아요. 붙잡고 나서는 엘더 리치 때보다 별 거 없었다고.”
“그건 저 녀석이니까 할 수 있는 소리고. 보통은 그 단계가기 전에 몰려서 끝장나지. 솔직히 말해서 말이 실질적인 전투력이 약한 거지, 에너지 드레인 하려고 들기 전에는 물리적 타격이든 마법적 타격이든 다 씹는다니 그걸 어떻게 잡아? 잡으려고 생각할 수 있는 저 녀석이 이상한 거야.”
졸지에 이상한 녀석이 되었지만 류 현은 어깨만 들먹거렸다.
“최악은 그 여자랑도 싸워야 하는 거고, 그게 아니면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류 현 네 감으로도 못 때려 맞추겠어?”
“당시에는 적대적이지 않았다는 건 분명합니다만...네임드 몹이라지만 괴수가 말도 하는 판국에 괴수가 저한테 사기 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기도 좀 그렇죠.”
“끄응...너 이런 걸 잘도 숨기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확신이 안 서서...”
류 현이 냅다 고개를 숙이자 승하의 표정이 더 썩어 들어갔다. 그녀는 류 현의 어깨를 붙잡고 억지로 허리를 펴게 만들었다.
“야야, 내가 너 갈구려고 그런 소리 한 거 같아? 네 성격 뻔히 아는데, 혼자서 끌어안고 끙끙 앓았을 테니까 하는 소리지. 난 이 일로 뭐라고 할 생각 없어. 쟤들은 모르겠지만. 련이 너 류 현 갈굴 거야?”
“갈군다가 뭐에요. 갈군다가. 그럴 생각 없어요. 조금 맥 빠지긴 하지만. 회귀했다는 게 전부일 줄 알았더니...무슨 양파도 아니고.”
승하가 턱짓으로 희란을 가리키자, 희란은 고개가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고개를 붕붕 내저었다.
“이거 봐. 봤지? 암울한 분위기 그만 조장하고 할 일을 하자고. 그 여자 이야기를 꺼낸 게 지금 대책을 세우자고 꺼낸 건 아니지? 그런 거면 난 진짜 할 말이 없는데. 직접 보기 전까지는 견적이고 뭐고 못 내.”
“예, 저도 칼리프 그 여자에 대한 대책을 세우자고 꺼낸 건 아닙니다. 카이로에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서 얘기하기 위해서죠.”
류 현은 한 번 숨을 골랐다. 그리곤 쏘아붙이는 것처럼 말을 쏟아내었다.
“지금 당장은 저곳에 가도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이 시간 동안은 그냥 손 놓고 있어야겠지요. 이 안에 뭔가를 할 수 있게 되더라도, 우리팀의 상태가 좋지 못하죠. 당연한 일입니다. 네임드 몹을 두 무리나, 그것도 넷을 연달아서 상대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여기에 출력되는 시간과 관계없이 휴식기를 가질 생각입니다.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서 최소 일주일. 이 기간은 카이로 내부에서 네임드 몹이 튀어나왔을 경우, 그것도 데스나이트 같은 부류가 나왔을 경우에 한해서 적용할 겁니다. 이게 제가 상정하고 있는 최악의 경우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괴수 군단이 폭주를 멈출 때까지 휴식기로 잡을 생각입니다. 휴식기도 길지 않은데 이리 튀고 저리 튀는 괴수 군단까지 신경 쓰는 건 족쇄를 다는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어디까지나 우리팀의 전력을 최대한 보존하는 게 최우선으로 둘 생각입니다.”
“칼리프 드 오르시아가 제공한 정보가 많지는 않습니다만, X던전을 클리어할 시에 유예를 얻을 수 있다고 했었죠. 그 유예가 지금까지 카이로가 열리지 않은 것일 수도 있고, 다른 유예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느 쪽이든 제 방침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예, 아프리카 대륙을 방파제 대신 쓰겠다는 뜻입니다. 근처에 칼리프 클랜도 마찬가지고요. 앞서 말씀드린 최악의 경우가 아니라면 어떤 피해가 나더라도 제 방침은 그대로일 겁니다. 카이로에서 튀어나온 게 데스나이트 네임드 몹이 아닌 이상, 네임드 몹이 튀어나와도 우리팀은 휴식기가 끝나고 정보를 모은 후 돌입할 겁니다. 여러분이 반대하지 않으신다면 말이죠.”
류 현은 좌중을 돌아보며 가볍게 손뼉을 쳐보였다. 그가 묻지 않았지만 그녀들은 류 현이 대답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들은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제각기 류 현의 부담감을 덜어주려고 위로 비슷한 말을 건넸으나 알맹이는 똑같았다.
반대는 없었다. 류 현은 곧바로 웨인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류 현과 웨인의 통화가 끝나고 정확히 5분 뒤, 협회 본부에 비상소집으로 모여 있던 위원회에 이 소식이 전해졌고, 위원회는 한차례 뒤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