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9화 〉탐식마(貪食魔)
다섯의 남녀는 노트북 화면에 빨려들어 갈 것처럼 영상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희란은 중간에 집중이 깨졌는지, 어깨가 닿고 있는 류 현을 힐끔거렸으나 또 다른 당사자인 류 현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희란은 눈치를 보다가 다시 영상에 집중했다.
협회의 한국지부 건물로 달려간 웨인이 보내준 이 영상은, 같은 시각 칼리프 클랜 본부와 백악관, 룩셈부르크의 한 저택 지하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영상의 질은 제각기 달랐으나, 담고 있는 내용은 똑같았다.
녹아내리는 것처럼 색깔이 빠지고 있는 카이로의 검은 장벽과 이집트로 향하고 있는 괴수 군단들. 전의 라가 대이동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놈들은 근처 마을을 무시하고 지나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 때문에 영상은 그 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그들은 영상이 끝날 때까지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고 화면만 바라봤다.
“유럽 놈들 골치 좀 썩겠네. 제일 급한 건 칼리프 클랜 놈들이겠지만. 이거 손 안대고 코풀게 생겼네. 안 그래도 제법 크게 데인 모양이던데.”
승하의 짤막한 감상평이었다. 그것을 부정하는 이는 없었다. 류 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칼리프 클랜에 대한 이야기는 동의하진 않았으나, 굳이 지적하진 않았다.
그도 불쾌했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전생 같았으면 몸이 회복되자마자 보복했을 것이다.
“봉쇄선 구축은 물 건너갔군요. 거기에 이거저거 많이 부은 모양이던데.”
“검은 리치성 잡고 얻은 부산물로 그보다 낮은 급수 괴수들 쫓아내는 물건도 투입했다던데, 남의 앞마당 실험실로 쓰려다가 다 날린 거지 뭐. 봉쇄선이라고 해봐야 인원은 쥐꼬리만큼 보내고 물건만 보냈으니까. 이런 일이 터지면 다 날리는 거지.”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누가 예상했겠습니까. 인원파견이야 그 쪽 인원들이 거부했을 테고요.”
“하긴 머리가 제대로 달려있으면 거부하는 게 정상이긴 하지.”
승하는 몸을 뒤로 젖히더니 크게 기지개를 폈다. 화련이 바통을 이어받는 것처럼 물어왔다.
“그래도 칼리프 클랜은 버티지 않을까요? 퍼플급 괴수가 껴있는 거 같긴 한데, 대부분은 블루급이고. 폭격으로 잔챙이를 쳐내고 나면 어떻게든 될 것도 같은데.”
“저도 당장 칼리프 클랜이 무너질 거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상처를 추스르고 있는 과정인데 이런 훼방은 꽤 치명적으로 다가올 겁니다. 그 때 죽어나간 상위 플레이어가 한국의 웬만한 대형 클랜 전체 인원수 정도였거든요.”
“진짜 깡도 좋은 놈들이라니까. 한 달 기다린 것도 아니고 며칠 잠잠하다고 바로 공략시즌 돌입이라니. 하긴 그런 놈들이니까 우리한테도 그랬겠지만.”
승하의 비아냥 섞인 투덜거림에 류 현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화련과 희란이 사건 당사자인 승하와 류 현의 눈치를 보고 있자 류 현은 쓴웃음을 털어내고 화제를 돌렸다.
“발주 물량은 못 맞춰도 맞추려는 시늉이라도 했어야겠지요. 결과가 최악이긴 했지만요. 그치들 이야기는 이쯤하고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해보죠. 칼리프 클랜이 봉쇄선을 구축하더라도 아프리카는 아마 괴멸할 겁니다.”
그게 전생의 역사였다. 아프리카는 3차 ‘대소환’초기에 사실상 무인대륙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된다. 그렇게 넓은 대륙에 숨어살 곳이 없진 않을 테니 생존자가 있겠지만, 없는 거나 다름없는 숫자가 숨어살고 있을 것이라고 다들 입을 모았다.
아프리카는 2차 ‘대소환’이 터진 시점에서 이미 괴수력 억제력은 물론이고, 자국 플레이어에 대한 통제력도 잃었으니 오래 버텼다면 버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지구 위의 지옥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테지만.
안타까운 일이지만 류 현은 그곳에 굳이 몸을 던질 생각은 없었다. 그의 몸은 하나고, 아프리카 대륙에는 괴수가 너무 많았다. 시간제한을 두지 않고 잡으려고 들면 다 잡고도 남을 전력은 보유하고 있으나, 그가 해결해야할 더 심각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그런 역사를 류 현에게 듣기만한 세 여자는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지만.
“어떻게 해볼 여지가 전혀 없어?”
“예, 없...”
승하의 물음에 무덤덤하게 대꾸하려던 류 현은 백혜라의 존재를 떠올리고 말을 멈췄다. 류 현의 전생 이야기를 들은 이들에게는 별 이상한 대화흐름은 아니지만, 그걸 모르는 혜라에게는 충분히 이상하게 들릴만한 이야기였다.
류 현이 갑자기 말을 멈춘 것에 의아해하던 승하도 혜라의 존재를 떠올리는데 성공했는데, 혜라를 돌아보는 실수를 했다. 혜라는 그것을 신호로 받아들였다.
“전 이만 일어나볼게요. 말씀들 편하게 나누세요.”
“혜라야 그게...”
“언니, 나도 이제 애 아니거든요? 이해해요.”
혜라는 그 말을 남기곤 휘적휘적 방밖으로 나갔다. 승하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며 한 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런 승하를 류 현이 위로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괜히...”
“아냐, 그게 어떻게 네 잘못이야. 내가 안 그랬으면 괜찮았을 텐데. 너무 생각 없이 굴었어.”
“혜라 씨한테도 이야기를 해야할 거 같습니다.”
이번에는 승하뿐만 아니라, 화련과 희란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돌아봤다. 류 현은 별 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저도 목숨 걸고 같이 싸우는 동료한테 이런저런 비밀 쌓아놓고 사는 게 좋진 않거든요. 승하 씨가 혜란 씨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 뻔히 아는데 매번 이럴 수도 없고요. 시간을 좀 더 가지고 지켜봐야겠지만...”
“괜찮아.”
승하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류 현은 승하의 ‘괜찮아’가 보통의 의미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읽었다. 그는 말을 신중하게 골랐다.
“혜라 씨가 더 개입하는 걸 원하지 않으시나 보군요.”
“응. 미안해.”
“아닙니다. 이런 일로 왜 미안하다고 하십니까. 이해합니다.”
같이 지내면서 승하가 혜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게 되었다. 전생에서 검성이 몸을 빼는 것을 거부하고 덤벼드는 놈들을 도륙한 게 알려지지 않은 백혜라의 죽음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말이다.
가족을 위험으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는 의도를 류 현은 비난할 수 없었다. 아니, 할 수 있더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유일한 걱정거리는 화련과 희란의 반응이었는데 그녀들은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미묘한 표정을 지은 채 침묵했다.
“이야기를 계속 해보죠. 아프리카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을 일주일 안에 전부 소개시킬 방법. 혹은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 미치는, 괴수 어그로를 끌 방법이 없으면 처리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런 방법이 존재하더라도 아프리카는 그 후폭풍을 감당 못해서 고꾸라질 겁니다. 이미 플레이어 인력을 쏟아 붓는다고 해결될 숫자가 아니니까요. 한 곳에 몰아넣은 후, 폭격만이 답이죠. 그런데 이렇게 한다고 해도 플레이어가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6성급 리치나, 지룡 같은 게 끼여 있으면 폭격만으로는 해결 보는 게 불가능할 테니까요.”
“그런 위험할 작전에 몸을 던질 플레이어가 많이 있을 리도 없고, 실력이 좋다면 소속된 곳에서 뜯어말릴 테니 불가능한 거나 다름없겠네. 아프리카 대륙내의 정부 중에서 플레이어 통제력을 유지하고 있던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는 저 꼴이 됐으니까.”
승하는 정지한 영상화면을 손으로 쿡 짚으며 말했다. 이집트 카이로를 봉쇄하고 있던 검은 벽은 그 너머를 볼 수 있게 바뀌었지만, 여전히 넘을 수 없는 상태였다. 아무도 그 안에 갇혔던 이집트 정부 수뇌부가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시 드러난 카이로는 던전 내의 유적같은 꼴이 되어있었으니까.
“전생에서는 어땠는데요?”
화련의 물음에 류 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채 어깨를 으쓱했다.
“끔찍했죠. 3차 ‘대소환’이 시작되자마자 가장 크게 피 본 곳이었을 겁니다. 무슨 힘이 작용했는지는 몰라도, 기존에 대륙을 활보하던 괴수들까지 같이 미쳐 날뛰었거든요. 이런 대규모 이동은 한참 뒤에 일어나서...더 끔찍했죠. 괴수 군단이 결성되기 전까지 괴수 손에 죽은 사람보다 같은 사람 손에 죽은 숫자가 더 많았을 겁니다. 칼리프 클랜이랑 EU에서 아예 대륙 봉쇄령을 내렸는데 그 때...”
류 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어지간한 일에 무덤덤하게 반응하는 그로서도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인간의 밑바닥을 그곳에서 봤다고 해도 될 것이다. 대륙 내의 인간이 사멸하다시피 한 후 아프리카를 방문했을 때, 류 현은 인간의 악의만으로 이루어진 지옥을 봤었다.
“굳이 듣고 참고할 만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안다고 한들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요.”
잔인한 일이지만 류 현은 아프리카 대륙이 괴수에게 넘어가는 걸 이미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었다. 현생에선 3차 ‘대소환’이 시작되고 시간이 제법 지났음에도 아프리카 대륙을 제외하면 영토를 반절 이상 뺏기거나 한 나라가 아직 없지만, 아프리카는 그 이전에 자생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아프리카 대륙을 구원하려면 강력한 개인이 아닌 강대국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냥 선심성으로 던져주는 동냥이 아니라 제 살을 베어 먹이는 수준의 희생 말이다. 류 현은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은 제 숨통이 비틀리는 순간에도 손에 쥔 것을 놓으려고 하질 않았으니까. 다들 제 살길 찾기 바쁘긴 했다지만, 목숨 걸고 네임드 몹을 때려잡는 이를 외면해서는 안 되었다. 류 현이 마지막 네임드 몹, 아지다하카를 때려잡는 순간에 뒤를 봐준 건 미국이 유일했다.
‘현 시점에서 우리팀이 가봐야 별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곳에서 건질 수 있는 건 더더욱 없고. 미안한 일이지만...개입해서는 안 돼.’
그곳에 가서 영웅 놀음하면서 인지도를 늘릴 수는 있겠지만, 그런 일을 하는 것에도 군대의 백업이 필요하다. 류 현 본인이야 괴수 군단 한가운데 떨어져도 문제없겠지만, 다른 팀원들은 그렇지 않으니까.
거기에 칼리프 클랜이 근처에 있다는 것도 켕겼다. 마지막으로 류 현이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바람에 사이가 그리 좋지 못한 정부에서 군대를 파견해 줄 리도 없고 말이다.
“우리 쪽에 유니크 아티펙트가 세 개나 있어도?”
“그것 때문에 더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류 현이 뒤에 이유를 덧붙이진 않았지만 누구도 반문하지 않았다. 이번에 있었던 칼리프 클랜의 도발을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가 알았고, 그 일이 없었어도 그런 기물을 가지고 호위 병력도 없이 타국에 가는 게 현명한 일이 아니라는 헤아릴 수 있었다.
“히어로 행세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뻔히 다 보고 있는데 할 수 있는 게 없다니 좀 씁쓸하긴 하네.”
승하가 볼을 긁적거리더니 소리 없이 한 숨을 내쉬었다.
“그 일이 아니어도 카이로에는 가야할 지도 모릅니다.”
“이것 때문에요?”
화련은 승하가 집었던 화면을 짚어보였다. 류 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예, 전에 석판에 무슨 글자가 떴는지 기억하십니까?”
“왕의 영지, 천공성이요. 카이로 쪽이 왕의 영지였나? 아마 그랬을 거에요.”
“저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대단하시네요. 예, 왕의 영지. 카이로에 나타났던 X던전의 이름이 그거였었죠. 아니, 그게 이름이라고 생각했었죠.”
원래부터 류 현에게 쏠려있었던 세 여자의 시선이 강렬해졌다. 류 현은 제 오른 손바닥을 펴보였다. X던전을 공략하던 당시에 여러 편의 기능을 제공하다가, 던전을 모두 클리어 하고나자 사라져버린 빛의 육망성이 그의 손에 다시 떠올라있었다.
육망성의 윗부분에는 빛으로 쓰여 진 글자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왕의 영지. 개방 98: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