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8화 〉탐식마(貪食魔)
“아니, 진짜 괜찮다니까. 의사 선생님도 그러셨잖아.”
“마력부분은 어떻게 못 해준다고도 하셨잖아. 현이 너, 지금 텅 비었어.”
류 현은 세아의 말에 이렇다 할 반박도 못하고 그대로 건물 안으로 끌려갔다. 웨인은 벤치에 앉아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매가 틱탁거리는 모습을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바라보고 있던 그는, 남매의 모습이 사라지자 골몰하고 있었던 문제를 다시 뒤적거렸다.
‘지금까지 연락이 없다는 건...그 때의 태도를 유지하겠다는 거겠지. 알 사디크...이렇게 과격한 남자는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웨인의 고민은 칼리프 클랜, 그들이 한국으로 오기 직전에 보여준 태도였다. 한국에 입국한 지 닷새째. 칼리프 클랜은 웨인의 개인 항의 서한과 협회 측의 핫라인을 통한 항의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무반응.
어떻게 봐도 긍정적인 면은 없었다. 류 현이나 승하가 별 말 없이 자기 시간을 보내는 게 신기할 정도로 말이다. 더 급한 일이 있기 때문에 우선순위에서 밀려서 그런 거겠지만, 별 다른 화도 안내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그 일에 휘말릴 뻔 했던 웨인도 꽤나 화가 났었으니까.
‘하지만 일이 해결된 뒤에도 그냥 넘어갈 거라는 보장은 없지.’
웨인이 동행했던 협회 소속 당직팀을 돌려보내고 한국에 남은 이유였다. 칼리프 클랜이 먼저 걸어온 시비지만, 둘이 합심해서 칼리프 클랜과 정면충돌하면 골치 아픈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시국이 시국인 만큼, 웨인은 그런 소모전을 어떻게든 말려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남았으나 정작 둘과 일대일로 이야기도 못 나눠보고 있지만.
류 현과 승하는 이번에 출현한 네임드 몹을 상대하면서 늘어난 힘을 다루기에 여념이 없었다. 승하는 병원의 가장 큰 병실을 차지하고 식사 때나 씻을 때 말고는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고, 류 현은 병원 주변이나마 돌아다니긴 했으나 도저히 말을 붙일 상태가 아니었다.
방금 전에 세아가 말한 것처럼 마나통은 텅 비었고, 내상도 안고 있었으니까. 그 이전에 옆에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않는 세아가 허락해줄 리도 없고 말이다.
‘당장은 두 사람이 쳐들어갈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만, 칼리프 클랜이 얌전히 있을까?’
용잡이 팀이나 검성 앞에서 티를 안 내서 그렇지, 웨인은 칼리프 클랜이 부린 패악질을 웬만한 클랜 간부보다 자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1차 ‘대소환’이 일어나고 2차 ‘대소환’이 일어나기 전까지 각 국들이 플레이어들에게 가한 반인륜적인 행위들이 까발려지고, 플레이어를 군인으로 쓸 수 없다는 합의가 법제화 되었다.
미국처럼 협회의 테두리 밖에서 지내는 경우에도 서류상으로는 민간 길드에 고용된 형태로 플레이어들을 부렸다. 그런 상황에서 플레이어 협회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각국의 견제도 있지만, 실질적인 전력이 단체 규모에 비해서 형편없었기 때문이었다.
플레이어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단체가 플레이어들을 사병처럼 거느린다는 시선을 받기 시작하면 버틸 수 없을 테니까. 자연히 협회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거대 길드의 치부 같은 목줄을 잡아챌 수 있는 정보를 끌어 모는 쪽으로 말이다.
유럽 쪽은 성과가 시원찮았다. 오히려 성과는 칼리프 클랜이 자리를 잡고 있는 중동 쪽에서 났다.
유럽 쪽의 정보원은 돈을 주고 매수할 수 있었으나, 반대쪽에서 돈을 더 주면 배신하기 일쑤였다. 그 때문에 역으로 정보를 털리기도 했었다. 반대로 비집고 들어가기 힘들 거라고 생각하고 처음부터 장기전을 염두에 두고 침투를 시도한 칼리프 클랜에 밀어 넣은 인원들은 본부 간부까지는 가지 못했어도 하위 간부자리 정도는 꿰차는 데 성공했다.
칼리프 클랜이 초기 때부터 줄기차게 막장짓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서슴없이 지르는 곳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진 점은 초기 때는 하는 둥 마는 둥했던 정부와의 연계와 언론통제를 아주 열심히 한다는 것 정도였다. 행동 수위는 변하지 않았다. 때문에 칼리프 클랜에 원한을 가진 플레이어들이 많았다.
그렇게 파악한 칼리프 클랜의 패악질은 대체 무엇을 치부라고 집어야할지 감이 안 잡힐 정도였다. 플레이어들을 억압했다가 공식적으로는 손도 댈 수 없게 된 각국 정부가 보면 국제법이고 뭐고 깡그리 무시할 법한 죄악의 요람이 칼리프 클랜이었다.
그런 칼리프 클랜이 자신들의 의도를 이렇게 드러내고 그냥 물러날 리가 없었다.
‘당장 칼리프 클랜 전체를 때려 박아도 검성을 이긴다는 보장은 없겠지만 그놈들은 하고도 남지. 아마 알 사디크가 중상 중이 아니었고, 급하게 친위대 정도만 끌고 오지 않았다면 그놈들은 들이박았을 거야.’
이전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해진 승하가 류 현과 합류해 있었기에 망정이지, 웨인 혼자서 그들과 마주쳤으면 피를 꽤 보고서 몸을 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이대로 얌전히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유니크 아티펙트 얘기가 완전히 거짓말이 아니라면...들이박을 이유는 차고 넘치지.’
류 현이나 승하의 반응으로 봐선 아주 없는 말을 지어낸 것 같진 않았다.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에서 ‘마녀’와의 싸움과정에 대해서 조금 들을 수 있었는데, 개미지옥이라는 아티펙트의 스펙이 유성우나 청뢰보다 월등한 것처럼 들렸다.
직접 겪어본 류 현은 ‘마녀’와 플레이어의 격차 때문에 차이가 나는 것 같다고 말했지만, 이런 얘기를 들을 기회가 없는 칼리프 클랜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그들은 두 강자에게 후환이 남을만한 짓을 했으니, 어떻게든 그것을 끝맺음하려고 들 것이다. 어떤 항의에도 묵묵부답인 현 상황에서는 추가 공격이 가장 유력하다.
‘류 현씨는 ‘마녀’가 말도 하고 약자를 인질 삼으려고 들 만한 지능도 남아있다고 했었지.’
이 또한 칼리프 클랜은 모를 정보였다. 인간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괴수가 나타났다는 사실.
결국 다른 괴수들과 동일하게 괴수의 행동 원칙에 충실하다가 사냥 당했지만, 그럴 지능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용잡이 팀도 운이 좋지 않았다면 그 끔찍함을 맛봤을 거라고 승하와 류 현도 입을 모았다.
‘그런 괴물이 더 튀어나올 수도 있는데 칼리프 클랜과 용잡이 팀이 으르렁 거리는 건 인류차원의 손해야.’
웨인은 승하나 류 현이 칼리프 클랜에 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승하는 자신이 엘더 리치 원정 때 이룬 성취가 우습게 보일 정도로 경지가 올랐고, 류 현은 네임드 몹과 맨몸으로 치고받을 정도니까.
칼리프 클랜의 전력을 다 갈아 넣더라도 둘을 상대로 승리하진 못할 것이다. 그냥 있으면 사이가 좋지 않더라도 괴수를 잡아 죽일 고급 전력들만 죽어나가겠지. 그 와중에 칼리프 측의 수적우세로 다른 용잡이 팀원에게 문제라도 생긴다면...
‘끔찍하군.’
그런 일을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이곳에 남았다. 승하나 류 현이 그 때 일을 분풀이 하려고 드는 것도 최대한 막을 생각이었다. 이겨봐야 남는 게 없는 싸움이다. 문제는 어떻게 말려야 할지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거였지만.
“후우우...”
웨인은 한 숨과 함께 일어섰다. 오늘은 류 현과 면담을 할 수 있으려나 하고 찾아온 것인데 아까 세아의 말을 봐선 무리였다. 승하는 여전히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고.
숙소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의 오른쪽 바지 주머니가 부르르 떨렸다. 웨인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윈스턴 경이었다. 영국과 한국의 시차를 생각하면 아직 협회로 출근하지도 않았을 시간이다. 웨인은 불길한 예감 속에서 전화를 받았다.
“예, 웨인입니다.”
“...예? 카이로에 있는 그거 말입니까? 예, 예. 봉쇄선이...알겠습니다. 곧 지부로 가지요.”
웨인은 통화가 끝나자마자 병원 건물로 내달렸다. 류 현을 만나서 전해야하는 소식이 있었다. 요주의 인물과 가장 가까운 이의 원성을 사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그의 뇌리에 남아있지 않았다.
‘카이로를 봉쇄한 검은 벽이 무너지고 있다니...거기에 괴수들이 단체 이동 중이라...느낌이 좋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