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7화 〉탐식마(貪食魔)
그마저도 오래 신경을 두지 않았다. 칼리프 클랜을 블랙리스트 최상단에 올려놓은 류 현은 것으로 그 일에서 신경을 거두었다. 꽤나 심각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더 급한 일이 있었으니까.
류 현은 승하에게 양해를 구하고 내부를 관조하기 시작했다. 비가 쏟아지는 날의 강처럼 흙탕물이 부옇게 일어나서 휘몰아치고 있어 어떻게 보아도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저것들이 그냥 흙탕물이 아니라 지식의 격류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류 현은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흙탕물 같던 격류가 뒤를 비쳐 보이기 시작했다. 대신 지끈거리는 두통이 찾아왔으나, 류 현은 그것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끌어왔다. ‘마녀’가 남긴 지식을.
‘역시 엘더 리치쪽이 더 마법사에 가깝네.’
‘마녀’를 잡아 흡수하던 당시에는 이렇지 않았다. 엘더 리치의 지식들이 떠오를 때 마냥, 해석 불가능한 단어들이 휘몰아치기만 했었다.
그런데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달랐다. ‘마녀’에게서 흡수한 어느 부분인지는 몰라도, 실시간 번역기마냥 그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바꿔주었다. 엘더 리치의 지식까지 말이다.
‘그 때 그렇게 부르짖었던 건...아무래도 자기가 모시던 마신인가 뭔가 하는 괴물이겠지. 아니, 모시려고 했던 이라고 해야 하나.’
전부가 그런 건 아니었다. 상당부분은 말을 알아들을 수 있고말고 문제가 아니라, 아예 볼 수가 없었다. 빈 부분은 의식할 수 있었기에 비어있다는 건 알 수 있었지만 그 뿐.
‘이건 아마 칼리프 드 오르시아가 말했던 권한 문제겠지. ‘마녀’도 용사가 어쩌니 하면서 잔뜩 뭐라고 나불거렸으니까. 젠장, 그 권한인지 뭔지 때문에 되는 일이 없군.’
이런 해괴한 경험은 난생 처음이었지만 류 현은 당황하진 않았다. 처음 보았을 때로부터 시간도 흘렀고, 그보다 더 해괴한 경험을 시켜준 칼리프 드 오르시아가 이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말을 해주었으니까. 그녀는 이럴 의도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마녀’ 아니, 마녀도 아니지. 페릭스는 지구로 치면 마법사 보다는 신관에 더 가까워. 문제는 그게 섬기던 괴물 거랑 내 마력이 유사하다는 건데.’
‘페릭스’의 기억을 뒤적여 몇 번이고 확인한 사실이다. ‘페릭스’가 섬기던 것이 대체 뭐하는 괴물인지, 뭐라고 불리는 지는 그놈의 권한이 모자라는지 볼 수 없었으나 그것만큼은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유사했다.
그 괴물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 덕에 엄한 의심은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찝찝함이 싹 사라지진 않았다.
‘그건 나중에 더 고민해보기로 하고...’
류 현은 엘더 리치에게서 흡수한 지식들을 끌어 모았다. 정확히는 엘더 리치의 마력에 뒤섞여있던 지식들을 말이다.
‘이대로 내가 다 흡수해도 나쁠 건 없어. 확실히 마력을 다루는 데 큰 도움이 돼. ‘마녀’것도 있긴 하지만...이쪽 것만 다 믿고 가기도 찝찝하고.’
‘페릭스’를 집어삼키기 전까지는 그저 손발을 움직이는 것처럼 그냥 하니까 되더라. 식으로 써먹기만 했던 엘더 리치의 지식을 이젠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류 현이 이것을 써먹으려면 이전과 똑같이 그것을 흡수해야한다는 점이었다. 원리를 안다고 따라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사실 이해하지도 못했다. 볼 수야 있지만, 못해도 류 현이 살아온 시간의 배가 되는 시간이 들어간 기술이었으니까.
앞서 써먹은 날개나 채찍을 뽑아내는 술식은 흡수되어 사라졌는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낭패한 기분까지는 아니었지만, 모처럼 읽을 수 있게 된 것이 별 쓸모없게 느껴지는 건 별 수 없었다.
‘내 능력 특성 때문인 건지, 아니면 또 그놈의 권한 때문인 건지 알 수가 없군. 하기야 결과는 똑같으니 당장 골몰할 문제는 아니긴 하지만.’
류 현의 고민은 이것을 혼자 다 흡수하느냐, 팀원들과 나누냐 문제였다.
‘어느 쪽이든 손해는 안 나겠지만...좀 불안하단 말이지. 지식을 이런 식으로 전하는 것 자체도 이상하고. 나 말고는 실험해볼 대상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좋은 실험체냐면 그것도 아니니.’
공평함의 문제가 아니라, 전력을 고르게 하기 위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팀원들의 성장세가 무시무시하긴 했지만, 네임드 몹은 기세를 앞질러 전생보다 빨리, 그리고 강해져서 나타났으니까.
회귀 후 첫 해였으면 모를까, 전생 얘기까지 다 까발린 지금은 혼자 다 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괴수를 끌어내는 데 쓸 도구로도 생각되지 않았고.
승하에게 한국 쪽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욱더 고민이 되었다. 승하가 정말 짜 맞춘 것처럼 그 때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끔찍하다는 말로 퉁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을 테니까.
이번에 나타난 네임드 몹들이 그녀들과 상성이 좋지 못하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맞대결에서 결과가 좋지 못했다. 승하가 다 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
‘가만히 있어도 희란 씨의 ‘연결’ 덕분에 마나통 같은 건 계속 늘어나겠지만...화련 씨나 혜라 씨는 마법사니까. 이게 꽤 도움이 되겠지. 두 사람한테 이걸 심어줬는데 문제를 안 일으킨다는 가정 하에.’
류 현이 괜히 넘치는 마력을 자랑하려고 가능하면 24시간 ‘연결’을 유지하라고 희란에게 주문한 게 아니었다. 마력을 펑펑 쓰고, 견딜 수 있을 정도 선에서 마력을 넘치게 담고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수련이 된다.
뒤늦게 이 혜택을 받게 된 백혜라는 억지로라도 돈을 주려고 했을 정도다. 희란이 능력을 다루는 경험을 쌓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그러니 육체 스펙은 류 현도 어찌할 길이 없는 시간만 지나가면 상승할 것이다. 류 현이 고민하게 만드는 건 단순히 시간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을 엘더 리치의 지식이 채워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자신의 내부도 아직 정리를 시작도 못한 터라 빠른 판단이 더욱 필요했다. 흡수할 거라면 덜 켕기는 엘더 리치 쪽을 다 흡수하고 안의 난리통을 정리하고, ‘페릭스’의 것을 어디까지 흡수할지 정하는 게 편할 테니.
‘반반을 조금만 넘어도 넌지시 운을 띄워볼 텐데.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니...이걸 어째야 하나.’
전용기가 인천 국제 공항이 도착할 때까지 류 현의 고민은 끊이지 않았다.
***
“할 게요.”
“...예?”
“한다고요. 그거. 제 의사 알아보려고 말해주신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합니다만...”
예상외의 쿨한 대답에 류 현은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예전 같으면 뭔가 불만이 있어서 저런 표정인가 하고 따졌을 화련도 그의 기분을 이해했다.
“리스크가 꽤 크다는 건 이해했어요. 이렇게 말해봤자 마스터 입장에서는 겪어보지도 않은 걸 다 아는 척하는 걸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다는 아니어도 위험성 정도는 제대로 인지했어요. 마스터가 상정한 최악의 경우면 엘더 리치랑 한 몸 쓸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 정말 재수가 없으면 내가 밀려날 수도 있다는 거고. 아니면 그냥 미쳐버리거나.”
“예...뭐 말하자면 그렇죠.”
류 현도 확신하긴 어려웠다. 화련이 이렇게 쉽게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수긍할 줄도 몰랐고, 수락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적어도 사나흘은 시간을 줘야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근데 그거 마스터도 써 봤는데 별 문제 없다면서요? 처음부터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다뤘다고 그러셨잖아요.”
“그래서 더 불안한 거죠. 없는 게 정상이었던 게 원래 있었던 것처럼 더 해지는 거니까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 마냥, 이게 당연하다는 듯이 그 지식으로 힘을 다룰 수 있다는 게 류 현에게 불안을 심어주었다. 마치 ‘강림’같지 않은가. ‘페릭스’가 마신 어쩌고 하면서 부르짖은 소리도 불안감에 힘을 더했다.
‘그냥 사나흘 생각하라고 기한을 두고 나중에 안 된다고 해버릴까?’ 자신이 말을 꺼내놓고 이러는 게 우습다는 건 알지만,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마스터를 무시하는 건 아닌데, 플레이어들은 그게 일반적이에요. 마스터 경우처럼 세부 컨트롤까지는 별도로 수련을 해야 하긴 하지만. 어떻게 다뤄야할지 고민하는 경우는 드물잖아요? 보통은 각성하자마자 어떻게 해야 할지 깨닫죠.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그야 그렇긴 합니다만...”
류 현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질감을 그렇게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말을 늘어놓지도 않았다. 자신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으니까.
“뭐 그렇게 말해도 이 경우랑 똑같지 않다는 건 저도 알아요. 리스크도 비교가 안 된다는 것도 이해했어요. 근데.”
조곤조곤 말하는 화련의 어조는 높지도 낮지도 않았지만, 류 현은 왠지 음울하다고 느꼈다.
“이대로 있으면 그 리스크 원하게 되도 못 지게 될 거 같아서요. 더 이상 뒤처지면 말이에요.”
화련이 쓴웃음을 머금으며 그리 말하자 느낌은 확신이 되었다. 류 현은 적절한 말을 고르려고 했지만 대부분 입안에서 녹아 사라졌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저는...”
“알아요. 알아. 마스터가 그럴 성격도 아니고, 이미 그러기도 어렵다는 거.”
“그런 비밀까지 알아버렸는데 발 빼긴 너무 늦었죠. 좀 빨리 뺏어야 했는데.” 라며 화련은 애써 너스레를 떨어보였다. 류 현의 표정은 굳은 채였지만.
“당장은 저도 실행할 생각이 없습니다.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연구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마스터 성격에 당장 안 할 거라는 것도 알고 수락했죠. 제가 뭐 도와드릴 거 없어요? 밖에 보이는 거면 모르겠는데, 그런 상태라니 감이 안 오네요.”
“‘마녀’쪽을 먼저 정리하고 나면 더 수월해질 것 같아서요. 일단은 그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습니다.”
“좋아요. 그럼 제가 필요하면 연락주세요. 아으, 마스터가 중요한 이야기라고 해서 잔뜩 긴장했더니 어깨가 다 뭉쳤네. 희란이도 잔뜩 긴장해서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얼른 가죠.”
짐짓 쾌활한 몸짓으로 방밖을 나서는 화련을 류 현은 웃으며 따라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