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6화 〉탐식마(貪食魔)
“아니요. 간섭하려는 것이 아니라...예, 알겠습니다. 예. 연락 주시길 기다리겠습니다.”
웨인은 전화가 끊어지자마자 수화기를 부술 것처럼 제자리로 되돌렸다. 뻣뻣해져오는 뒷목과 미간을 주물럭거리며 웨인은 자문해보았다.
‘그 때 억지로라도 합류했어야 했나?’
그가 내놓은 답은 아니오였지만, 웨인은 자신이 내놓은 답의 문제점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 답을 따랐다가 지금 같은 상황이 벌어졌으니까.
류 현과 그의 누이, 검성이 실종된 지 벌써 나흘 아니, 닷새째. 웨인 크로이츠는 나흘 째 같은 답변만 반복하고 있는 칼리프 클랜으로 쳐들어가고 싶은 충동마저 느끼고 있었다.
‘뭐가 최선을 다해서 수색 중이라는 말이야. 언론 통제에나 힘쓰고 있겠지!’
웨인의 생각처럼 칼리프 클랜은 류 현 찾는다면서 그 소식이 외부로 새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에 더 신경을 쓰는 듯한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실종된 류 현을 아예 안 찾는 건 아니었는데, 은인을 찾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사우디아라비아 당국으로부터 입국 거부를 당하고 협회 본부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웨인이 그런 분위기를 읽어낼 정도면 말 다한 셈이었다.
‘촉이 안 좋아. 어떻게든 입국을 해야 하는데...강행할 수야 있겠지만 그 후가...’
저번 류 현의 네임드 몹 추적행에 따라붙은 덕에 경지가 더욱 오른 웨인이 입국을 강행한다면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알 라시드, 마람 압둘아지드, 자파르 알 사디크, 알 핫산 중 둘 이상이 몰려오지 않는 이상 그를 막지는 못할 테니까. 두 명이서 같이 덤벼들어도 웨인은 자신 있었다.
문제는 그 뒷감당이었다. 칼리프 클랜은 부유함이나 강대함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클랜이고, 왕가와의 결속도 단단하다. 류 현이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강행돌파를 시도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상대임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웨인 크로이츠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협회의 간판이니 더했다.
‘그래도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카타르에 그 친구가 아직...’
부우웅! 밀입국 계획을 세우던 웨인은 오늘 내내 잠잠하던 휴대폰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업무용이 아닌 아는 사람이 몇 되지 않는 개인용 휴대폰이. 처음 보는 번호에 국제전화이기까지 했지만 웨인은 망설임 없이 받았다.
“예, 웨인 입...검성님? 지금 어디계신 겁니까? 예? 카타르요? 거기에는 왜...류 현님도 같이 계시다고요? 아, 아니 잠깐만요. 그러니까 류 현님이랑 류세아님까지 해서 세 분이서 같이?”
“예, 그건 가서 듣기로. 예, 의료반 준비랑...더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예, 예. 일단 제가 접견 장소를 찾아보겠습니다. 예,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웨인은 전화를 끊고 멍하니 제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카타르라니. 사우디아라비아의 사막 한 가운데서 싸우던 류 현이 왜 거기 있고, 개마고원에서 정령 상대하던 승하는 무슨 수로 거기까지 갔단 말인가?
‘...칼리프 클랜이랑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군.’
승하는 통화 중에 칼리프 클랜의 칼 짜도 꺼내지 않았지만, 웨인은 직감했다. 칼리프 클랜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클랜의 손님으로 대접받아야할 이들이 몰래 국경을 넘고, 그 상황에서 자신에게 은밀하게 도움을 요청한다? 어떻게 봐도 정상적인 상황이 아님은 분명했다.
이동편만 요구했으면 모르되, 승하는 의료진도 데리고 올 수 있으면 데리고 와달라고 했었으니까. 몸에 이미 문제가 생겼든, 생겼을 거라고 의심하고 있는 상황이든 간에 외부에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칼리프 클랜은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할 것이다. 승하가 요구한 사항들을 생각하면 자신들이 상대해야 될 괴수를 대신 상대한 손님을 푸대접한 정도가 아니니까.
하지만 그건 협회 홍보팀이나 한국 정부가 담당할 일이었다. 웨인은 업무용과 개인용 휴대폰 모두를 챙겨서 집무실을 빠져나오면서 생각했다.
‘혹시 모르니까. 당직팀도 같이 데리고 가야겠군. 오늘 당직팀이....’
당직 팀장의 얼굴을 떠올린 웨인은 발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
웨인은 자신이 짜둔 인사말이 전부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이 상황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전쟁 난민. 충격으로 인해서 과장이 조금 붙긴 했지만, 웨인이 세 사람의 몰골을 보고 받은 첫인상은 그거였다.
새로 사 입은 게 분명해 보이는 옷 덕분에 지저분하다는 인상은 없었으나, 어딘가 어수선한 분위기는 지울 수 없었다. 잠을 제대로 못잔 것인지, 아니면 식사가 시원찮았던 것인지 푸석해 보이는 몰골이 깨끗한 옷과 대비되어 더욱 강조되었다. 주변을 살피는 것 같은 승하의 태도도 그런 분위기에 보태었다.
가장 충격적인 건 휠체어에 앉아있는 류 현이었지만.
“류 현님은...비행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라면 요양할 장소를 수배해서...”
“그 정도는 아니고. 싸우진 못하지만 일상생활은 혼자 다 할 정도는 돼.”
‘그럼 왜?’ 웨인은 그런 의문을 담은 눈빛을 승하에게 보냈다. 그가 아는 류 현은 내상을 입고도 자신 때문에 작전실행이 미뤄지는 걸 막으려고 사실을 숨기는 이였다. 운신이 힘들 정도라면 승하도 이렇게 말하진 않았을 터.
승하는 말 대신 류 현의 뒤에서 휠체어를 붙잡고 있는 세아를 눈짓했다. 웨인은 그제야 류 현의 누나가 같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었다. 류 현이 그 누나를 몹시 신경 쓴다는 것도. ‘다행이군. 별 일이 아니어서.’
“그럼 일단 타시죠. 말씀하신 검진은 도착하면 바로 받을 수 있게 해놓았습니다.”
웨인의 말에 굳어있던 세아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승하는 그런 세아를 돌아보고 픽 웃으면서 앞으로 나가다가 덜컥 걸음을 멈췄다. 웨인은 승하의 기세가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끼고 기겁하려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허공을 때리는 것 같은 로터음이 멀리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웨인은 직감했다. 좋은 이야기를 나누려고 다가오는 이들은 아닐 것이다. 승하 일행은 몰래 국경을 넘었고, 웨인도 카타르 국방부 장관과 맺은 인연 덕에 빠르게 이 자리에 올 수 있었지만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서 온 건 아니었다.
‘카타르 정부군은 아닐 테고...칼리프 클랜인가?’
웨인은 저 헬기들이 시야 안으로 접근하기 전에 전세기가 기다리는 공항으로 내빼면 어떨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푸홧! 팍!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모래언덕들이 폭발하며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한 눈에 봐도 훈련을 단단히 받은 플레이어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한 정 이상의 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전력 질주를 한 것인지 그들의 어깨가 파도치는 것처럼 오르락내리락했다. 웨인의 뒤에서 병풍처럼 서있던 플레이어들이 눈에 띄게 동요했다.
‘칼리프 클랜이군. 그것도 아주 작정을 했어.’
이렇게 노골적으로 플레이어들을 군인처럼 무장시키는 곳은 칼리프 클랜 밖에 없다. 미국은 플레이어 이전에 군인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편이니까. 이 거리에서 들릴리는 없겠지만 웨인은 속삭이듯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말씀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무슨 일이랄 것도 없어. 괴수 잡아줬더니 쟤들이 기를 쓰고 우리를 추적하기 시작했거든.”
승하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언덕위에서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플레이어들을 훑었다. ‘숫자가 너무 많은데. 한 번에 떨쳐내진 못하겠어. 첫 돌격만 막아내면 잡는 건 문제가 아닌데.’
그런 승하의 속내를 알 리가 없는 칼리프 클랜의 플레이어들은 굳건히 자리를 지킨 채, 다가오는 로터음을 기다렸다.
웨인이 동요하는 일행을 진정시키고 승하 일행을 감싸는 것 같은 진형을 꾸리려고 하자, 승하가 손을 내저어 그것을 막았다. 그러는 동안 헬기가 언덕을 넘어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니 헬기 4개 편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헬기가 내려앉기도 전에 세 명의 인영이 헬기에서 뛰어내렸다. 그러자 다른 헬기에서도 세 네 명씩 인영이 뛰어내렸다. 착지에 실패하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지면에 착지한 이들은 뛰는 것처럼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승하는 그 중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이를 보고 이죽거렸다.
“칼리프 클랜은 참 변함이 없네. 도와주면 뒤통수 칠 생각하는 것부터가 말이야.”
이죽거림의 대상은 왼손이 사라진 자파르 알 사디크였다. 알 사디크는 자신의 왼손목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뜨는 웨인을 무시한 채 승하와 마주봤다.
“오랜만에 보는 군. 검성.”
“그러게, 다시는 안 봤으면 했는데 말이야.”
승하의 대꾸에 알 사디크를 감싸듯이 시립해 있던 친위대들이 으르렁거렸다. 승하는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무슨 핑계로 도와준 사람들을 찌르러 오셨나?”
“마음대로 생각하라. 나는 그저 잃어버린 물건을 찾으러 온 것뿐이니.”
“잃어버린 물건?”
“너희가 ‘마녀’라고 부르는 괴수가 걸고 있던 목걸이 형태의 아티펙트. 우리가 귀환길에 습격을 받고 잃어버린 물건이다.”
승하는 기억을 더듬을 것도 없이 그것이 뭔지 떠올렸다. 자신의 ‘가방’ 안에 들어있는 유니크 아티펙트, 개미지옥. 류 현은 귀국해서 한 번 써봐야 확신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긴 했지만, 승하 안에서는 이미 그 아티펙트는 개미지옥이었다.
‘그게 쟤들이 찾은 거였다고?’
그런 소리는 류 현에게 듣지 못했다. 알 사디크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럴 만도 했다. ‘마녀’가 귀환 도중인 원정대를 덮쳐서 유니크 아티펙트를 훔쳤을 거라고는 류 현도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승하는 일단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이런 상황이 나올 줄은 몰랐기에 류 현과 상의해두진 않았지만, 유니크 아티펙트씩이나 되는 물건을 그냥 말만 믿고 넘길 수는 없었다. 류 현에게 들은 바로는, 청뢰나 유성우를 넘어서는 위력을 발휘했다고 했으니 말이다. 사용자가 ‘마녀’였지만.
“그럴 리가. ‘마녀’와 저 친구의 전투 중간 중간에 아티펙트가 발동하는 장면이 찍혔다. 사막에는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있고.”
전투 중 부서졌을 확률도 있겠지만 알 사디크는 그런 경우는 고려도 하지 않는다는 듯이 단언했다.
“승하 씨는 모를 법 하지요. ‘마녀’는 제가 혼자서 상대했으니까요. 유감스럽게도 전투 도중에 파괴됐습니다.”
웨인에게 짧게 감사를 표하는 것 외에는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류 현이 입을 열었다. 알 사디크는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로 물었다.
“파괴되었다고?”
“예. 귀 클랜의 소유물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거든요. 거기에 저도 썩 여유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요. 엘더 리치 때와 유사한 상황이라고 생각해서 그것부터 파괴했습니다.”
승하는 무표정을 가장한 채 속으로 웃었다. ‘이런 거짓말은 잘 하네.’
리치를 상대할 때 반지파괴는 할 수만 있다면 최고의 공략법이다. 리치의 반지를 건질 수 있다면 말 그대로 빌딩과 맞바꿀 수 있겠지만, 리치의 반지가 주인의 소멸에 저주를 품지 않을 확률은 그리 높지 않으니까. 높은 확률로 그냥 같이 소멸되기도 하고.
그 이전에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아티펙트를 파괴했다는 주장 자체도 이상할 게 없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계산기를 두들기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니까.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류 현의 논리에 그건 우리 클랜 소유라고 화낼 수 있는 이는 없다.
“흠, 그러한가.”
알 사디크도 수긍하는 기색을 보이자, 승하는 어깨에 주었던 힘을 조금 풀었다.
“하지만 이렇게 말로만 넘어가긴 곤란하군. 우리가 발견했던 아티펙트는 자네들이 유니크 아티펙트라고 부르는 그런 물건이었거든. 추가 검증이 필요하긴 하지만, 거의 확실했던 터라. 자네 말만 믿고 넘어가긴 좀 그렇군. 더군다나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클랜이 큰 피해를 입어서 그 아티펙트가 더욱 필요했거든.”
“그렇다면...?”
“미안하지만 자네들의 ‘가방’과 몸을 수색해야 할 거 같군.”
승하는 힘을 풀었던 근육을 다시 조였다. 그리고 가둬두었던 기세를 풀어헤쳤다.
“그럼 그렇지. 시비 걸러 온 게 아니면 이런 식으로 우리를 찾지도, 몰려오지도 않았을 거야. 그렇지 영감?”
알 사디크의 친위대의 입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들은 폐가 압착기에 짜부러지는 것 같은 압박 속에서도 자리를 지키려고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의지와 노력도 별 의미 없는 것이었다. 승하가 검을 뽑아들자 친위대는 짜부러질 거 같은 압력이 아니라, 폐부가 이미 칼로 관통당한 듯한 고통을 느꼈다. 이번만큼은 알 사디크나 내내 불편한 표정이었던 알 라시드, 마람 압둘아지드도 자유롭진 못했다.
그들은 검성이 그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더 괴물이 되었는지 반 강제로 실감했다. 따라잡을 수 있다고, 거의 다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젠 저만치 멀어졌다 정도도 아니었다.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해도 무방한 격차.
승하 입장에서는 아직 완벽하게 다루지 못하는 기운을 풀어헤치고 전투태세를 잡은 것뿐이었으나, 마주한 입장에서는 전혀 달랐다. 웨인마저 당황을 금치 못하고 있을 정도니까.
승하는 칼을 뽑아든 채로 터덜터덜 걸어서 일행의 최선두에 섰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툭 내뱉었다.
“해 봐. 할 수 있으면.”
뒷골목 왈패 같은 도발이었지만 아무도 앞으로 나서진 못했다. 그들을 짓누르고 있는 승하의 기세가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앞으로 나오면 피를 보게 될 것이라고. 그녀는 거기에 못을 박았다.
“어지간하면 그냥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는데 니네 깡패짓은 더는 못 봐주겠다. 이거 완전 물에서 건져놓으니까 보따리 내놓으라는 거잖아.”
반박이라도 대꾸하는 이는 없었다.
***
“근데 너 의외다.”
“예?”
“난 네가 뜯어말릴 줄 알았거든. 칼리프 클랜이랑 척질 바에야 이미 두 개나 있는 아티펙트 줘버리자! 하고. 지중해 검은 리치성 잡을 때 그 귀찮은 클랜놈들 얘기 다 들어주는 거 보고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
“그 때하곤 경우가 다르니까요. 걸린 물건도 그렇고, 상대 태도도 그렇고요.”
“하긴 걔들은 시비 걸려고 다 준비해서 뛰어온 수준이었지. 왜 안 달려들었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가. 난 웨인네 애들이 시간 끌고 있으면 어느 순서로 쓸어버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승하는 좌석 옆에 쌓아둔 맥주탑에서 하나를 꺼내 쭉 들이켰다. 그녀는 거품을 대충 털어내고는 말을 이었다.
“알 라시드는 딱 봐도 억지로 끌려나온 꼴이긴 했는데, 알 사디크 영감이랑 그 여자는 싸울 생각만만이었던 거 같던데. 그러고 보면 알 라시드 상태도 좀 이상하긴 했지. 영감을 직접 위협했는데도 계속 꽁한 얼굴이었고.”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군요. 그냥 물러난 이유는 알 것 같은데 말입니다.”
“응? 뭔데?”
“승하 씨가 다 하셔놓고는 저한테 물어보시면 어떻게 합니까.”
“엥? 나 때문에 물러났다고?”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 자리에서는 가장 크게 작용한 이유가 그걸 겁니다. 거기에 승하 씨가 말씀하신 대로 물에서 건져놨더니 봇짐 내놓으라고 하는 상황이었던 것도 꽤 클 거고요.”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아티펙트 찾아내겠다고 그 몸으로 승하랑 싸우는 건 밑지는 정도가 아니라 자살행위지.’
류 현은 승하를 빤히 쳐다봤다. 어이없다는 자신의 심경을 담아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미친 재능을 자랑하던 친구는 며칠 안 본 사이에 아주 수준이 달라져서 나타났다. 나타났다기보다도 딸려왔다고 해야 맞겠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승하가 자신의 경지 상승을 다 감당하질 못해서 평소에 감각을 억제하는데 힘을 쏟을 지경이라는 사실이 중요할 뿐.
승하 스스로도 어느 정도인지 감을 못 잡은 급격한 경지 상승은, 그녀를 감당해야하는 입장에 놓은 이들에게 더욱 위협적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이미 큰 부상을 입은 상태였던 알 사디크의 발길을 돌리게 만드는 데 이르렀다. 알 사디크는 명분도, 승산도 시원찮은 싸움에 거는 것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오늘 전까지는 승하가 있는 줄도 몰랐을 테고, 설사 그 전에 알았더라도 이렇게 강해졌을 거라는 건 상상도 못했을 테니까. 명분도 부족한 싸움에 승산마저 확실하지 않으면 그건 그냥 도박이지.’
류 현과 승하가 아무런 상처 없이 전용기에서 맥주캔을 부딪히고 있게 된 건 깡패짓은 해도, 도박은 하지 않는 알 사디크의 성격 덕이었지만 류 현은 고마움은 요만큼도 느끼지 않았다.
승하가 우연히 이리로 오지 않고 서로 있던 곳에서 각개격파로 싸움이 끝났다면, 류 현은 굉장히 곤란한 처지에 몰렸을 테니까. 아마 알 사디크는 폼으로 병력을 끌고 온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줬을 것이다.
‘이해 못할 건 아니지만 높은 점수는 못 주겠군. 적만 늘린 셈이니까.’
제 3자처럼 알 사디크의 판단을 뜯어본 류 현은 그대로 그 일을 기억의 저편으로 밀어두었다. 무력충돌이 일어날 확률이 굉장히 높았고, 그걸 알았지만 딱히 욕하며 화를 내고 싶진 않았다. 지금은 그럴 신경도 자신의 내부에 집중해야하는 상황이니까.
그저 칼리프 클랜을 블랙리스트 최상단으로 올려놓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