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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5화 〉탐식마(貪食魔) (235/429)



〈 235화 〉탐식마(貪食魔)

“끄으헉!”

괴성을 내지르며  현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등허리 부근이 터질 것처럼 당겼지만 그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안구 위로 쏟아지는 빛과 낯선 방안 풍경을 뇌에서 처리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누나! 누나는...?”

그 혼란 와중에도 류 현은 가장 최근으로 기억하는 기절한 세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대로 뒀으면 안 됐다. 잠깐이라도 상태를 확인해 볼 걸. 그렇다고 네임드 몹이 코앞에 있는데 놓칠 수는 없잖아. 온갖 생각들이 뒤엉켜서 안 그래도 어지러운 머리가 핑핑 도는 것 같았다. 그런  현의 혼란을 단박에 정리한 건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던 승하였다.


“생각보다 깨는데 오래 걸렸네.”

류 현은 익숙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승하가  처음 보는 안경을 쓴 채로 작은 책 하나를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류 현은 세아를 찾는 것이 더 급했기에 눈빛으로 다그쳐 물었고, 세아는 아래 방향을 가리켰다.

“누...나...”

세아는 침대 모서리에 머리만 기대고 앉은 채로 자고 있었다. 류 현이 승하를 돌아보자 승하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너 일어나기 전에는 절대로 침대로는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말해도 안 믿겠지만, 이 정도도 엄청 노력한 거다?”

도대체 뭘 노력했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류 현은 신경질 부리는 것보다는 세아를 살피는 걸 우선했다.  부근을 훑자 움찔하긴 했지만 세아는 깨어나지 않았다. ‘...아무 이상 없는 거 같네. 다행이다...’

지근거리에 네임드 몹이 짧은 순간이나마 두 마리가 존재했으니 탈이라도 났으면 어떡하나 싶었다. 네임드 몹쯤 되면 쉴드 자체가 공격 수단이 될 수도 있으니까. 고만고만한 수준의 플레이어면 근처에 그런 상위 괴수가 있는 것만으로도 내상을 입을  있는 것이다.

각성한  얼마 되지 않은 세아였으니  현의 걱정도 당연했다. 기우로 그치게 되었지만.


“여기가 어딥니까? 그리고 제가 얼마나 뻗어있었던 겁니까?”

가장 급한 불은 끈 류 현은 사태파악에 나섰다.


“빨리도 물어본다. 여기가 어디냐고? 메디나 외곽의 무허가 진료소. 네가 정신 잃은 지는...딱 80시간 지났네. 참고로 네 누나가 울고불고 난리친 건 72시간째야.”


류 현이 세아를 살피는 동안 독서를 재개했던 승하는 책을 덮어 옆으로 치워놓으며 대꾸했다.  현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무허가 진료소는 뭐란 말인가. 류 현의 불만은 자신을 이런 곳으로 끌고 왔다는 사실이 아니라, 세아를 정상적인 시설에서 검사받게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의혹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중간에 정신줄 놔 놓고는 화를 낼 수 없기에 류 현은 물었다.


“제가 정신을 잃은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왜 이런 곳에...”
“있었다기보다도...있을 뻔 했지. 아, 그래도  누나는 중간에 정밀검사 제대로 받았으니까 걱정 마. 아무 이상 없이 깨끗하다 라더라. 덕분에 그 남아도는 기력으로 내가 엄청 쪼였지만.”


 현의 표정에서 어떤 기색을 읽었는지 승하가 먼저 가장 궁금했던 부분을 해소해주었다. 류 현은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었지만 고개를 숙이는 건 잊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원래는 제가 챙겨야하는 건데...”
“에이, 친구끼리 이러진 말자.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내가 민간인을 그렇게 막 굴리진 않아. 각성 기록도 안 되어있어서 검사받게 하는 건 쉬웠어. 네가 문제였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칼리프 클랜 측에서 마중  나왔습니까?”


지금 이 상황은 명백하게 이상했다. 칼리프 클랜은 류 현이 사막에서 네임드 몹과 치고받는 걸 모르지 않았고, 멀찍이 드론이나 헬기를 띄워 촬영까지 했었다.

마지막에 가서는 찍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승하의 말대로라면 사흘 넘게 지난  시점에서 이런 곳에 누워있는 건 이상했다. 알 라시드와의 마지막 통화를 생각하면 다시 드론을 띄우든 해서 확인한 후에 구조대든 뭐든 보냈을 것이다.


“그게 말이지...”

승하는 선뜻 입을 떼지 못하고 뒷목을 주물럭거렸다. 필요도 없을 안경을 벗어던진 승하는 조금 더 뜸을 들인 후에 입을 떼었다.

“네가 기절하고 한 1시간 반 정도 더 지났었나? 칼리프 클랜 애들이 몰려오긴 왔었어. 꽤나 많이. 거기에 알 사디크 영감도 끼여 있었고.”
“예? 알 사디크가요?”

류 현이 알기론 알 사디크는 공략 시즌을 맞아서 블랙 던전에 들어간 상태라고 알고 있었다. 마지막 연락을 할 때만 해도 알 사디크는 칼리프 클랜에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아무리 빨라도 던전에서 나온 지 삼일도 안 된 자가, 그것도 클랜의 수장이 외부 인사의 마중을 나온다?

아주 말이 안 되진 않았지만 류 현은 그 부분에서 좋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다른 클랜이라면 모를까, 그가 아는 알 사디크는 그럴 인간이 아니었다. 칼리프 클랜은 그의 카리스마에 기대서 하나로 묶여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자였다.

“나도 구조대인 줄 알고 걔들 부르려고 했다? 근데 그 영감 기색이 어떻게 봐도 손님 마중 나온 인간이 아니었어. 그보다는...칼을 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 주변 애들 기세도 이상했었고. 알 라시드 혼자만 평소랑 비슷했는데, 걔도 가시방석에 앉은 표정이었거든. 그래서 일단 숨었지.”

거기까지 말하고는 승하는  현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류 현의 표정은 서서히 찌푸려지고 있었지만, 승하에게 화낼  같은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승하는 동의를 얻은 것처럼 신을 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헬기랑 드론 잔해 발견하고 놈들이 우릴 찾는 행동이 이상한 거야. 아, 너랑 ‘마녀’랑 싸우는  걔네가 찍고 있었던 거 같더라. 너 알고 있었어?”
“예, 알 라시드씨가 보급지점 설정을 위해서 라면서 허락을 구하길래 허락하긴 했습니다. 어차피 허락 안 했어도 찍는 걸 막고  상황도 아니었거든요.”
“그랬구나. 어쨌든 걔네가 우리를 찾는데 수색방식이 도무지 구조대 같지가 않았어. 땅을 참으로 헤집고 그러는데, 아무리 네가 그런 창질에 상처 안 입어도 그게 구조대라는 놈들이  짓은 아니잖아? 거기다가 네 누나까지 있는데. 걔네  누나도 같이 있다는 거 모르진 않지?”

류 현은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사려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까지 확인하고 냅다 튀었어. 다행이 마력파동 문제인지 드론은 못 띄워서 빠져나오긴 쉬웠지. 여기까지 오는 도중에 네 누나 검사받게 하고,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확인도 해보려고 했는데 뉴스  줄 안 뜨더라고. 그래서 이리로 왔지. 어떻게 봐도 정상적인 대응이 아니잖아?”
“...예, 그렇죠. 잘 하셨습니다. 승하씨도 정신 없으셨을 텐데, 고생 많으셨습니다.”
“에이, 그런 소리 말라니까. 아,  사디크 영감 어디서 잘라 먹혔는지 왼손이 없더라.”
“...정말입니까?”
“나도 잘 못 본  줄 알고 몇 번이고 다시 봤는데 없더라고. 그 영감 템빨 생각하면 괴수 아가리에  집어넣지 않는 이상 그럴 일은 없을 텐데 말이지.”
‘느낌이 별로인데...똥 밟은 거 같아.’

아무리 류 현이라도 ‘마녀’가 알 사디크의 왼손을 날려버리고, 개미지옥까지 빼앗아서 자신에게 달려들었다는 걸 추측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이 상황의 트리거가 되었다는 사실 또한.

“그 뒤에 다른 소식은 없었습니까? 예를 들면 수배라던 지.”
“글쎄, 있었어도 뉴스에 떡하니 나오는 수준이 아니면 알 수가 없지. 네 누나 검사 돌리고 나서부터 보통 난리가 아니라서 붙들고 있기도 버거웠거든. 네가  깨어나고 있으니까 당장 병원으로 가야한다고 난리를 치는데, ‘마녀’가 죽은 걸 알았으면 나도  말렸을 걸. 더 돌아다니면 습격당할 거라고 대충 뻥카쳐서 때웠어.”
“하하...죄송합니다.”
“아냐, 아냐. 가족이 못 깨어나는  그러는 건 당연한 거잖아?”
“지금까지 상황을 고려해보면 칼리프 클랜이 우리를 도와주려고 찾고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겠군요.”
“뭐 그렇긴 한데...너 연락시도 안 해볼 거야?  번은 찔러 볼 줄 알았는데.”

승하가 두 사람을 데리고 조용히 현장을 빠져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류 현에게 상대를 떠보기 위한 기회를 주기 위해서.


“글쎄요. 다른 클랜이면 모르겠습니다만...칼리프이라 좀...”
“응? 아...겪어봤다고 했었지. 그래도 진짜 괜찮겠어? 그 때 말한 내용대로면...”
“다 저를 떠받들고 지원해 줄 거라고는 생각  합니다. 어차피 칼리프 클랜은 위치상으로 죽어라 싸워야 하는 입장될 테니까요. 승하 씨 감이 틀렸다고 해도 별 문제될 건 없죠. 우리가 무슨 잘못 저지르고  것도 아닌데. 그리고 설마 하니 이쪽이 그런 의심하고 튀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의심이야 할 수 있겠지만, 티는 못 내겠죠. 전자의 경우가  귀찮으니 차라리 후자였으면 합니다. 그럴 가능성이야 낮아 보입니다만...”“너 대체 전생에 무슨 일을 당한 거야?”


류 현은 어깨만 들먹거렸다. 친구가 인간불신에 걸릴만한 일화를 굳이 늘어놓고 싶진 않았다. 그쪽으로 방향을 잡지 않아도, 전생 이야기를 하다보면 의도치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 쪽으로 유도하는 꼴이  테니까.

“어느 쪽이든 간에 다음 네임드 몹도  주변에서 뜨면 좀 귀찮아지긴 하겠습니다만...어떻게든 되겠죠. 한 번 데여봤으니 이번처럼 먼저 말을 꺼낼지도 모르고요.”
“류 현 너 은근히 막가파다?  때보니까, 우리가 반대한 방법도 기어코 써먹은 거 같던데.”
“저라고 이러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거든요. 주변에서 안 따라주니 어쩔 수 없이 이러는 거죠.”

승하는 세아를 의식해서 입을 틀어막고 끅끅 웃음을 삼켰다.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음을 삼키던 승하는 실실거리는 표정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맞아. 생각난 김에 물어보자. 뭘 어쨌기에 말까지 하는 ‘마녀’를 그렇게 잡은 거야? 희란이랑 련이한테 안 이를 테니까 빼는 거 없이 전부 말해봐.”

류 현은 승하의 요구에 따라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30분 후에 깨어난 세아가 방을 눈물바다로 만들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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