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5화 〉탐식마(貪食魔)
“끄으헉!”
괴성을 내지르며 류 현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등허리 부근이 터질 것처럼 당겼지만 그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안구 위로 쏟아지는 빛과 낯선 방안 풍경을 뇌에서 처리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누나! 누나는...?”
그 혼란 와중에도 류 현은 가장 최근으로 기억하는 기절한 세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대로 뒀으면 안 됐다. 잠깐이라도 상태를 확인해 볼 걸. 그렇다고 네임드 몹이 코앞에 있는데 놓칠 수는 없잖아. 온갖 생각들이 뒤엉켜서 안 그래도 어지러운 머리가 핑핑 도는 것 같았다. 그런 류 현의 혼란을 단박에 정리한 건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던 승하였다.
“생각보다 깨는데 오래 걸렸네.”
류 현은 익숙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승하가 웬 처음 보는 안경을 쓴 채로 작은 책 하나를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류 현은 세아를 찾는 것이 더 급했기에 눈빛으로 다그쳐 물었고, 세아는 아래 방향을 가리켰다.
“누...나...”
세아는 침대 모서리에 머리만 기대고 앉은 채로 자고 있었다. 류 현이 승하를 돌아보자 승하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너 일어나기 전에는 절대로 침대로는 안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말해도 안 믿겠지만, 이 정도도 엄청 노력한 거다?”
도대체 뭘 노력했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류 현은 신경질 부리는 것보다는 세아를 살피는 걸 우선했다. 목 부근을 훑자 움찔하긴 했지만 세아는 깨어나지 않았다. ‘...아무 이상 없는 거 같네. 다행이다...’
지근거리에 네임드 몹이 짧은 순간이나마 두 마리가 존재했으니 탈이라도 났으면 어떡하나 싶었다. 네임드 몹쯤 되면 쉴드 자체가 공격 수단이 될 수도 있으니까. 고만고만한 수준의 플레이어면 근처에 그런 상위 괴수가 있는 것만으로도 내상을 입을 수 있는 것이다.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세아였으니 류 현의 걱정도 당연했다. 기우로 그치게 되었지만.
“여기가 어딥니까? 그리고 제가 얼마나 뻗어있었던 겁니까?”
가장 급한 불은 끈 류 현은 사태파악에 나섰다.
“빨리도 물어본다. 여기가 어디냐고? 메디나 외곽의 무허가 진료소. 네가 정신 잃은 지는...딱 80시간 지났네. 참고로 네 누나가 울고불고 난리친 건 72시간째야.”
류 현이 세아를 살피는 동안 독서를 재개했던 승하는 책을 덮어 옆으로 치워놓으며 대꾸했다. 류 현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무허가 진료소는 뭐란 말인가. 류 현의 불만은 자신을 이런 곳으로 끌고 왔다는 사실이 아니라, 세아를 정상적인 시설에서 검사받게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의혹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중간에 정신줄 놔 놓고는 화를 낼 수 없기에 류 현은 물었다.
“제가 정신을 잃은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왜 이런 곳에...”
“있었다기보다도...있을 뻔 했지. 아, 그래도 네 누나는 중간에 정밀검사 제대로 받았으니까 걱정 마. 아무 이상 없이 깨끗하다 라더라. 덕분에 그 남아도는 기력으로 내가 엄청 쪼였지만.”
류 현의 표정에서 어떤 기색을 읽었는지 승하가 먼저 가장 궁금했던 부분을 해소해주었다. 류 현은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었지만 고개를 숙이는 건 잊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원래는 제가 챙겨야하는 건데...”
“에이, 친구끼리 이러진 말자.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내가 민간인을 그렇게 막 굴리진 않아. 각성 기록도 안 되어있어서 검사받게 하는 건 쉬웠어. 네가 문제였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칼리프 클랜 측에서 마중 안 나왔습니까?”
지금 이 상황은 명백하게 이상했다. 칼리프 클랜은 류 현이 사막에서 네임드 몹과 치고받는 걸 모르지 않았고, 멀찍이 드론이나 헬기를 띄워 촬영까지 했었다.
마지막에 가서는 찍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승하의 말대로라면 사흘 넘게 지난 이 시점에서 이런 곳에 누워있는 건 이상했다. 알 라시드와의 마지막 통화를 생각하면 다시 드론을 띄우든 해서 확인한 후에 구조대든 뭐든 보냈을 것이다.
“그게 말이지...”
승하는 선뜻 입을 떼지 못하고 뒷목을 주물럭거렸다. 필요도 없을 안경을 벗어던진 승하는 조금 더 뜸을 들인 후에 입을 떼었다.
“네가 기절하고 한 1시간 반 정도 더 지났었나? 칼리프 클랜 애들이 몰려오긴 왔었어. 꽤나 많이. 거기에 알 사디크 영감도 끼여 있었고.”
“예? 알 사디크가요?”
류 현이 알기론 알 사디크는 공략 시즌을 맞아서 블랙 던전에 들어간 상태라고 알고 있었다. 마지막 연락을 할 때만 해도 알 사디크는 칼리프 클랜에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아무리 빨라도 던전에서 나온 지 삼일도 안 된 자가, 그것도 클랜의 수장이 외부 인사의 마중을 나온다?
아주 말이 안 되진 않았지만 류 현은 그 부분에서 좋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다른 클랜이라면 모를까, 그가 아는 알 사디크는 그럴 인간이 아니었다. 칼리프 클랜은 그의 카리스마에 기대서 하나로 묶여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자였다.
“나도 구조대인 줄 알고 걔들 부르려고 했다? 근데 그 영감 기색이 어떻게 봐도 손님 마중 나온 인간이 아니었어. 그보다는...칼을 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 주변 애들 기세도 이상했었고. 알 라시드 혼자만 평소랑 비슷했는데, 걔도 가시방석에 앉은 표정이었거든. 그래서 일단 숨었지.”
거기까지 말하고는 승하는 류 현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류 현의 표정은 서서히 찌푸려지고 있었지만, 승하에게 화낼 것 같은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승하는 동의를 얻은 것처럼 신을 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헬기랑 드론 잔해 발견하고 놈들이 우릴 찾는 행동이 이상한 거야. 아, 너랑 ‘마녀’랑 싸우는 거 걔네가 찍고 있었던 거 같더라. 너 알고 있었어?”
“예, 알 라시드씨가 보급지점 설정을 위해서 라면서 허락을 구하길래 허락하긴 했습니다. 어차피 허락 안 했어도 찍는 걸 막고 할 상황도 아니었거든요.”
“그랬구나. 어쨌든 걔네가 우리를 찾는데 수색방식이 도무지 구조대 같지가 않았어. 땅을 참으로 헤집고 그러는데, 아무리 네가 그런 창질에 상처 안 입어도 그게 구조대라는 놈들이 할 짓은 아니잖아? 거기다가 네 누나까지 있는데. 걔네 네 누나도 같이 있다는 거 모르진 않지?”
류 현은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사려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까지 확인하고 냅다 튀었어. 다행이 마력파동 문제인지 드론은 못 띄워서 빠져나오긴 쉬웠지. 여기까지 오는 도중에 네 누나 검사받게 하고,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확인도 해보려고 했는데 뉴스 한 줄 안 뜨더라고. 그래서 이리로 왔지. 어떻게 봐도 정상적인 대응이 아니잖아?”
“...예, 그렇죠. 잘 하셨습니다. 승하씨도 정신 없으셨을 텐데, 고생 많으셨습니다.”
“에이, 그런 소리 말라니까. 아, 알 사디크 영감 어디서 잘라 먹혔는지 왼손이 없더라.”
“...정말입니까?”
“나도 잘 못 본 건 줄 알고 몇 번이고 다시 봤는데 없더라고. 그 영감 템빨 생각하면 괴수 아가리에 손 집어넣지 않는 이상 그럴 일은 없을 텐데 말이지.”
‘느낌이 별로인데...똥 밟은 거 같아.’
아무리 류 현이라도 ‘마녀’가 알 사디크의 왼손을 날려버리고, 개미지옥까지 빼앗아서 자신에게 달려들었다는 걸 추측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이 상황의 트리거가 되었다는 사실 또한.
“그 뒤에 다른 소식은 없었습니까? 예를 들면 수배라던 지.”
“글쎄, 있었어도 뉴스에 떡하니 나오는 수준이 아니면 알 수가 없지. 네 누나 검사 돌리고 나서부터 보통 난리가 아니라서 붙들고 있기도 버거웠거든. 네가 안 깨어나고 있으니까 당장 병원으로 가야한다고 난리를 치는데, ‘마녀’가 죽은 걸 알았으면 나도 못 말렸을 걸. 더 돌아다니면 습격당할 거라고 대충 뻥카쳐서 때웠어.”
“하하...죄송합니다.”
“아냐, 아냐. 가족이 못 깨어나는 데 그러는 건 당연한 거잖아?”
“지금까지 상황을 고려해보면 칼리프 클랜이 우리를 도와주려고 찾고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겠군요.”
“뭐 그렇긴 한데...너 연락시도 안 해볼 거야? 한 번은 찔러 볼 줄 알았는데.”
승하가 두 사람을 데리고 조용히 현장을 빠져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류 현에게 상대를 떠보기 위한 기회를 주기 위해서.
“글쎄요. 다른 클랜이면 모르겠습니다만...칼리프이라 좀...”
“응? 아...겪어봤다고 했었지. 그래도 진짜 괜찮겠어? 그 때 말한 내용대로면...”
“다 저를 떠받들고 지원해 줄 거라고는 생각 안 합니다. 어차피 칼리프 클랜은 위치상으로 죽어라 싸워야 하는 입장될 테니까요. 승하 씨 감이 틀렸다고 해도 별 문제될 건 없죠. 우리가 무슨 잘못 저지르고 튄 것도 아닌데. 그리고 설마 하니 이쪽이 그런 의심하고 튀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의심이야 할 수 있겠지만, 티는 못 내겠죠. 전자의 경우가 더 귀찮으니 차라리 후자였으면 합니다. 그럴 가능성이야 낮아 보입니다만...”“너 대체 전생에 무슨 일을 당한 거야?”
류 현은 어깨만 들먹거렸다. 친구가 인간불신에 걸릴만한 일화를 굳이 늘어놓고 싶진 않았다. 그쪽으로 방향을 잡지 않아도, 전생 이야기를 하다보면 의도치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 쪽으로 유도하는 꼴이 될 테니까.
“어느 쪽이든 간에 다음 네임드 몹도 이 주변에서 뜨면 좀 귀찮아지긴 하겠습니다만...어떻게든 되겠죠. 한 번 데여봤으니 이번처럼 먼저 말을 꺼낼지도 모르고요.”
“류 현 너 은근히 막가파다? 그 때보니까, 우리가 반대한 방법도 기어코 써먹은 거 같던데.”
“저라고 이러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거든요. 주변에서 안 따라주니 어쩔 수 없이 이러는 거죠.”
승하는 세아를 의식해서 입을 틀어막고 끅끅 웃음을 삼켰다.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음을 삼키던 승하는 실실거리는 표정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맞아. 생각난 김에 물어보자. 뭘 어쨌기에 말까지 하는 ‘마녀’를 그렇게 잡은 거야? 희란이랑 련이한테 안 이를 테니까 빼는 거 없이 전부 말해봐.”
류 현은 승하의 요구에 따라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30분 후에 깨어난 세아가 방을 눈물바다로 만들기 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