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4화 〉탐식마(貪食魔)
휘오오! 승하는 망토를 뜯어갈 것처럼 몰아치는 바람이 망토 속을 파고들어도 개의치 않고 밑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주황빛 늪 같은 것이 들끓고 있었다. 원리는 알 수 없지만 ‘업화의 아이들’ 본체-정확히는 분열하지 않은 상태의-가 넘어오는 방식일 것이다.
왜 평소처럼 텔레포트가 아니고 이렇게 대놓고 온다는 티를 내는 지 승하는 알 길이 없었다. 그저 ‘마녀’가 함께 덤벼오지 않는다는 부분이 그녀의 우려를 덜어주었다. ‘이 정도까지 몰아붙였는데, 지원도 안 오는 걸 보면 류 현 쪽은 문제없다는 거겠지. 곧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승하는 야트막한 동산 꼭대기에 서서 지평선 방향을 빤히 바라봤다. 그런다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화련과 희란이 보이진 않았지만, 그녀들이 움직이면서 내고 있는 마력적 파동은 느껴졌다. ‘투덜거리긴 해도 맡은 일은 잘 한다니까.’
승하는 주황색 늪을 중심으로 반경 일 키로 미터에 달하는 범위를 감싸는 무색의 마력벽이 서는 것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화련이 승하의 계획을 들었을 때, 그녀는 자신이 작업 중에 과로사할 게 분명하다고 투덜거렸지만 지금 이렇게 승하의 예상보다 더 훌륭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가장 크게 반대한 백혜라도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승하는 망토 위에 내려앉는 성에의 존재를 통해서 백혜라가 얼마나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지를 알았다. 조금 과할 정도로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도 말이다.
본체가 오게 되면 이전의 불장난정도로는 그치지 않을 거라는 승하의 말에 그녀들은 의심을 제기하지 않았다. 놈의 본체는 혼자서 상대할 테니, 개마고원 전체가 불바다가 되지 않게 막아달라는 요청에는 길길이 날뛰었지만 말이다.
결국, 자신들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승하에게 무대를 마련해주는 역할로 물러났지만.
‘...혜라 쓰러지기 전에 빨리 끝내야겠다.’
승하는 칼을 쥐고 있지 않은 왼팔을 슬슬 돌리며 몸을 풀었다. 망토하나만 두른 탓에 망토가 벌어지며 맨몸이 드러났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이 망토도 혜라가 기를 쓰고 덤벼들지 않았다면 두르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승하는 솜털 하나하나로 공기나 마력적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상태를 스스로 억누르고 싶지 않았다. 혜라에겐 아무리 말해봐야 이해하지 못해서 억지로 망토라도 둘렀지만 말이다. ‘대체 여기 누가 있어서 본다고.’ 혜라의 반응이 뻔했기에, 승하는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음, 류 현이랑 대련할 때도 이 상태면 좋을 텐데. 이 상태면 끝까지 갈 수 있지 않으려나?’
자신이 그대로 일어나지 못해도 이상하지 않은 부상에서 털고 일어났다는 사실은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미 없었다. 가장 재미나가 놀 수 있는 친구와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할 뿐. 당사자인 류 현은 동의할 지는 의문이지만.
“아, 입술 텄다.”
입술 부분에서 따끔 하는 통증이 올라오자 승하는 곧바로 조금 느슨하게 운용하고 있던 마력의 흐름을 돋우었다. 마치 류 현의 ‘강림’상태처럼 그녀의 몸 윤곽을 타고 마력이 흐르며 막을 이루었다.
그 직후,
퓽! 주황빛 늪에서 그녀의 손바닥만 한 크기의 불의 정령이 불쑥 튀어나왔다. 승하는 칼끝을 명치까지 치켜세우며 경계를 더했다.
그런 승하의 경계가 무색하게, 솟아난 불의 정령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열기로 인해서 주변이 일그러져 보이는 현상조차 없는 것을 보면 이전의 ‘업화의 아이들’에 비해서 약한 인상마저 있을 정도였다. 짧은 팔을 턱에 대고 주변을 살피는 모습은, 괴수보다는 작은 동물에 가까워보였다.
하지만 그 시선이 승하를 향했을 때,
뿌지직! 화르륵! 승하는 적의나 어떤 마력적 기미가 아니라 단순히 감만으로 허리를 역으로 휙 젖혔고, 허공이 불타면서 그녀의 감이 맞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그것만으로 그치진 않았다.
후르르! 멀찍이 떨어져서 불붙을 일 없어보였던 승하의 망토자락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승하는 망설이지 않고 망토를 훌렁 벗어던졌다. 망토는 순식간에 재로 화했다.
승하는 이를 드러내며 씨익 미소 지었다. ‘기대 이상인데?’ 그 생각과 함께 그녀는 쏜살이 되었다.
걸음을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거리가 1미터씩 줄어들 때마다 제 몸뚱이를 감싸고 있는 마력의 막이 타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열기가 느껴지지도, 그로인한 일그러짐도 일체 보이지 않았으나 그대로 달려가는 것만으로도 타죽게 될 것이다. 승하는 웃으며 칼을 내휘둘렀다.
후웅! 치이익! 일 검으로 몸을 감싸고 있던 막이 타들어가는 느낌은 사라졌으나, 칼 등 부분이 반쯤 패인 채 녹아내렸다. 승하는 칼을 내버리고는 ‘가방’에서 새 칼을 빼들었다. ‘흠, 칼등 부분 방어가 생각보다 부족했구나. 참고해야겠어.’
쾌적한 상태는 오래가지 않았다. 불과 10미터 정도 거리를 좁혔을까? 승하는 마력막이 빠르게 소모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었다. 다시금 일 검을 내지르려는 그녀에게,
피이잉! 퍼어엉! 정령의 시선이 불의 창이 되어 그녀의 옆구리 근처를 훑고 지나갔다. 재빠르게 몸을 틀지 않았다면 그대로 꼬치구이 정도가 아니라 숯 덩어리가 되었을 것이다. 정말 감이라는 말로 밖에 표현 할 수 없는 회피였다.
승하는 화련이 둘러놓은 마력장벽을 종이마냥 뚫고 나가, 동산 하나를 폭파시킨 오렌지 빛 섬광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구경했다. ‘와, 예전 같았으면 방금 그거에 휘말려서 끝났겠네.’
공격에 기척이 없고, 속도, 사정거리 모두가 그녀를 압도하는 수준이다. 예전 같았다면 이런 공격이 들어오기 전에 멋모르고 돌격하다가, 달리는 도중에 타죽었겠지만.
‘류 현이 그렇게 치를 떤 이유가 있었네. 분열해 있을 때랑은 비교도 안 되잖아. 용케 얘들한테 멸망 안 당했네.’
전투중에 딴 생각은 금물이었지만, 승하는 저 조그마한 불덩어리가 세계의 도시들을 거니는 상상을 해보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젖다가 발치에서 솟아오른 불기둥을 굴러서 피했다.
그러면서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도시가 괴멸하는 건 그야말로 한 순간일 테고,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토벌을 왔다가 영문도 모르고 다 타죽었을 것이다. ‘걔는 대체 어떻게 저런 놈들 잡을 생각을 했지?’ 류 현이 있었다면 저런 수준은 아니었다고 정정해줬겠지만, 그는 이 자리에 없다.
승하는 칼을 내휘두르며 훌쩍 뛰어올랐다. 마력막을 태우던 힘이 사라지자, 그녀는 상쾌함마저 느꼈다. ‘업화의 아이들’과의 거리는 불과 50미터.
돌연 불의 정령이 고심하는 듯한 자세를 풀고 짧은 팔을 휘둘렀다. 화르륵! 하늘을 여섯 갈래로 찢을 것처럼 맹렬하게 타오르는 다섯줄기의 불의 갈고리가 땅을 할퀴었다.
콰르르! 치이이! 나무뿌리고, 돌이고 전부 김을 피워 올리며 녹아내렸다.
그러나 닿은 부분 이외에는 복사열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야말로 마법이나 초능력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일. 불의 정령은 승하를 맞추지 못한 것이 불만스러운지, 연이어 반대편 팔을 휘둘렀다.
쉬익! 후웅! 승하는 불의 갈퀴가 나타나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검을 마주 휘둘렀다.
스칵! 불의 갈퀴가 금속으로 된 갈퀴마냥 그녀의 검격에 두 동강이 났다. 승하는 뒤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양자 간의 거리가 10미터 가량 남았을 때,
후르르르! 불의 정령의 몸집이 폭발적으로, 아니 말 그대로 폭발했다. 폭발로 일어난 불꽃을 그대로 제 몸뚱이로 삼은 불의 정령은 다른 부분과는 다르게 검게 불타고 있는 눈으로 승하를 내려다보며 소리 없는 포효를 내질렀다. 승하는 제 몸을 감싸고 있는 마력막이 찢어질 것처럼 흔들렸다.
놈은 승하가 제 사정거리를 확보하기 전에 그녀의 몸뚱이가 두 개는 들어가고 남는 팔을 휘둘렀다. 주변 공간이 찢어질 것 같은 파공성이 울렸다.
승하는 넋 놓고 있진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그러면서 힘 있게 올려 베었다. 그녀의 검격을 따라 허공을 채우고 있던 마력이 갈라지며 마력적 진공상태가 재현되었고,
쒸익! 진공의 칼날이 불의 정령이 내휘두르던 오른팔을 끊어놓았다. 퍼엉! 놈의 팔이 지면에 닿자 폭발하며 사방으로 불을 흩뿌렸다. 승하도 피해가 없진 않았다. 그녀의 왼쪽 허벅지 부분에 별안간 불꽃이 피어올랐다.
승하는 당황하지 않고, 그 부분의 마력막을 통째로 떼어내서 뒤로 휙 던져버렸다. ‘예상은 했지만...가까이 접근하니까 진짜로 숨만 쉬어도 불붙을 거 같네. 오래 끌면 안 되겠어.’
승하는 벌써부터 덜그럭 거리는 칼의 날을 눕히고 훌쩍 뛰어올랐다. 화륵! 그와 동시에 그녀의 왼쪽 어깨부분이 불꽃이 피어올랐다. 마력막을 땔감으로 삼아 피어오른 불꽃은 금방이라도 그녀의 몸에 닿을 것처럼 맹렬하게 그녀의 마력을 먹어치웠다. 승하는 이를 악 물고 검을 휘두르려고 했다.
그 순간,
슈슉! 정말 뜬금없이 불의 정령과 승하가 있는 공간을 감싼 회색빛이 그들을 집어삼켰고, 빛이 사그라졌을 때 그 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
“잡았다.”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이는 류 현의 반응에 ‘마녀’는 흠칫했으나, 에너지 드레인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마녀’는 금세 밀려드는 황홀한 검은 힘에 자신감을 되찾았다.
[이미 늦었어. 무슨 발버둥을 쳐도 이젠 모두 다 내 것이...]
류 현은 ‘마녀’의 팔을 덥썩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너무도 생생한 감촉이 그를 다시금 미소 짓게 했다. 류 현은 이번 싸움 내내 자신 안에 가둬두었던 것을 해방했다. ‘탐욕’을 말이다.
후왁! 푸스스스! 검은 안개가 용틀임을 하는 것처럼 그의 등 뒤에서 뿜어져 나왔다. 검은 안개는 ‘마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둘을 완벽하게 포위한 후 순식간에 조여들어갔다.
[끄윽?! 이게 대체...!]
검은 안개가 몸에 닿자마자 ‘마녀’가 반응을 보였다. 자신의 일부가 뜯겨져 나가는 감각은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자신이 사냥감에게 일방적으로 선사하던 절망의 일부였지.
류 현은 ‘마녀’에게 생소한 경험을 마음껏 배불기로 했다. 붙잡은 두 손으로도 에너지 드레인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마녀’의 입장에서는 에너지 드레인이 아니었지만.
[끄아악! 어떻게? 어떻게! 네가? 네가...!]
‘마녀’는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꿰뚫은 손으로 에너지 드레인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박차를 가했다. 나약한 인간이 무슨 해괴한 수를 내밀던 간에, 자신의 승리는 흔들림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류 현은 전혀 동의하지 않았지만.
‘이 정도로 소모된 상태에선 좀 위험할지 모르겠지만...팻감 아끼고 자시고 할 때가 아니지...!’
‘강림’! ‘탐욕’에 대한 억제도, 주도권을 쥐기 위한 최소한의 제한마저도 풀어헤친 ‘강림’이었다. 류 현보다 먼저 ‘마녀’가 그의 변화를 눈치 채었다. 검게 불타던 ‘마녀’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없어! 그 분의 권능을 담고 있으면서 여태 억누를 수 있을 리가...!]
‘마녀’가 비명을 내질렀지만 류 현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뭐야, 저번에는 쓰자마자 필름 끊겼는데?’
꾸역꾸역 끝없이 솟아나오는 ‘탐욕’을 제하면 그의 정신은 흐려지지도 않았다. 눈앞의 괴수의 대가리를 씹고 싶다는 충동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지식의 격류가 그를 질식시킬 것처럼 밀려들었다. 엘더 리치의 것과 똑같았다. 그는 이해할 수 없지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것들이 말이다.
[이래선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왜, 왜, 왜 너 같은...게 선택되었던 말이냐!]
‘젠장, 이건 또 뭐야?’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어!]
혼란 중에도 류 현은 에너지 드레인을 멈추지 않았지만, 멈칫한 틈을 노리지 못할 정도로 ‘마녀’가 무력하지도 않았다. ‘마녀’는 자신의 몸을 텔레포트로 빼려다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자신의 충실한 손발을 강제 텔레포트 시켰다.
[우르스!]
슈슉! 화르르! 더 뜨거워질 것도 없을 것 같은 사막이, 터질 것처럼 타올랐다. 류 현은 그 열기의 근원을 확인하기 위해서 고개를 돌렸다가 하마터면 에너지 드레인이 끊길 뻔했다. 두 팔이 잘린 채 넘어가고 있는 불의 정령과 천천히 땅으로 내려서는 승하가 갑자기 뒤편에 나타났으니까.
퍼엉! 불의 정령의 몸뚱이가 사막에 드러누우면서 다시금 폭발이 일었다. 류 현은 천천히 착지하고 있는 승하와 눈을 마주쳤다. 승하의 눈이 기분 좋은 호선을 그리는 것을 보고 류 현은 시선을 ‘마녀’에게로 되돌렸다.
‘마녀’는 ‘업화의 아이들’의 패배는 생각지도 않았는지, 지금 상황을 이해 못해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류 현이 에너지 드레인에 더욱 집중하자, 통증 때문에 류 현을 다시 돌아보았지만.
그러나 ‘마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류 현에게 행하고 있던 에너지 드레인도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할 정도였다. ‘마녀’는 자신을 ‘뜯어먹고 있는’ 검은 안개를 휘 둘러보고는, 다시 부르짖기 시작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어찌, 어찌! 제가 아니라 이런...! 커윽...!]
‘마녀’는 피를 토하려고 했지만, 나오는 것 목 졸리는 신음소리 뿐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힘으로 몸을 비틀어 류 현의 몸에 박힌 손과 잡힌 손을 빼려고 했지만, 류 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흰자위가 온통 검은 빛으로 물들고, 동공이 하얗게 불타고 있는 류 현은 꿰뚫을 것처럼 ‘마녀’를 노려봤다.
12시간 동안 일방적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 술래잡기를 왜 계속했는가. 바로 이 때를 위해서였다. 세아를 업은 채로 몰리는 모습을 보인 것도, 힘을 비축하는 게 아니고 무의미한 반격을 계속한 것도 이 때를 위해서였다.
단 한 번의 반격. 전생에서 류 현이 죽음 직전까지 몰리면서도 포기하지 않았기에 잡을 수 있었던 기회.
뭣 때문인지는 몰라도 ‘마녀’는 전생과 동일하게 류 현의 마력에 격렬하게 반응해 주었다. 그 와중에 세아까지 타겟이 된 것은 상정외의 상황이었지만, 류 현은 자신이 가진 미덕을 지켰다. 인내심 말이다.
‘마녀’가 가진 패를 최대한 털어보이게 끔 도주와 적극적인 응전을 반복했다. 이 이상 미루지 말고 잡아야한다는 결심이 서자마자, ‘마녀’가 자신을 노출할 상황을 유도했다. 연기가 아니라 류 현은 정말로 12시간의 술래잡기 동안 가진 힘 대부분을 소진한 상태였다. 복부에 벌어진 구멍이 아물지 않고 있는 게 그 증거였다.
남겨둔 것은 ‘탐욕’을 억제할 힘과 그 제한을 풀었을 때, ‘마녀’를 붙들어들 수 있는 힘.
다행스럽게도 ‘마녀’는 전생과 비슷하게 육체적 능력은 대수롭지 않은 수준이었다.
‘이제 진짜 끝이네. 빌어먹을 것아!’
[왜...왜...어째서...]
기세 좋게 부르짖던 ‘마녀’는 이미 눈에 보일 정도로 피부나 근육이 쪼그라들어서, 예전의 모습을 상상하기도 힘든 몰골이 되었다.
‘마녀’가 약해져가는 현상은 가속도가 붙어,
가장 처음에는 목소리가 끊겼고,
그 다음으로는 류 현의 가슴에 박아 넣은 손이 깨져나갔다. 얼마가지 않아 ‘마녀’의 눈에 어린 검은 빛이 사그라지며 초점이 사라졌다. 그 다음은 ‘마녀’의 몸이 허물어졌다.
그 직후, ‘마녀’의 머리 위에 글자가 떠올랐다.
마신의 추종자, 페릭스 알데히드.
류 현은 자신의 기억과는 다른 글자가 떠오르자 흠칫했지만, 그 단어들을 머릿속에 새겨두고는 ‘마녀’의 말라비틀어진 목에서 머리를 떼어내었다. ‘마녀’의 머리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목에서 떨어져 나왔다.
‘마녀’의 말라비틀어진 머리를 휙 던져버린 류 현은 마찬가지로 말라비틀어진 ‘마녀’의 흉부를 잡아 뜯더니, 심장이 자리하고 있어야할 곳에 박혀있는 타원형 구슬을 뜯어내었다. 그 구슬은 오렌지 빛과 검은 빛이 서로 뒤섞일 것처럼 빙빙 돌고 있었는데, 류 현은 검은 빛에서 왠지 모를 친숙함을 느꼈다.
‘마녀’의 시신은 그것으로 정말 힘을 다했는지 부스러져 허공으로 흩어졌다. 류 현은 구슬을 뜯어낸 당사자답지 않은 생각을 품었다.
‘...이런 게 있는 줄 어떻게 안 거지?’
엘더 리치의 지식 중에 이런 정보가 있었을까? 아니면 ‘마녀’를 에너지 드레인으로 빨아들일 때 들어온 것들 중에서 있었을까? 류 현은 길게 고민하진 않았다. 자신이 잘 못 본 것이 아니라면 승하가 ‘업화의 아이들’ 본체와 이쪽으로 날아왔을 테니까.
‘뭘 어쩌다가 둘 만 날아온 거지? 진짜 가까이 접근해서 칼질하다가 딸려온 거야? 대체 무슨 정신머리로...’
몸을 돌려 승하를 찾던 류 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승하가 덩치를 잔뜩 키운 불의 정령의 머리통을 날려버리고, 몸통을 난도질해서 불꽃을 모두 흩어버리던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에.
퍼어엉! 후르르! 류 현은 제 눈을 의심했지만, 그의 발은 의심을 재차 확인해보기도 전에 움직였다. 사방으로 흩어진 불꽃이 순식간에 사그라지자, 류 현은 승하와 그녀의 앞에 뭔가 반짝거리는 구슬 같은 것이 같이 추락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류 현은 한 눈에 저 구슬이 ‘업화의 아이들’의 심장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것이 꿈틀거리며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도.
승하 또한 어떻게 알았는지, 그것을 향해 검을 휘둘러갔다.
쉭! 정말 손가락 한 마디 차이로 승하의 검격이 빗나가자, 구슬은 어떻게 추진력을 얻는 것인지 총알처럼 하늘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류 현이 급하게 날개를 내뻗으려고 했지만, 뭐가 엉킨 것인지 핏물만 토하게 되었다.
구슬이 둘의 시야에서 멀어지기 위해서 박차를 가하던 그 순간,
덥썩! 콰직! 류 현의 몸에서 아직 미약하게나마 휘돌고 있던 검은 것이 쭉 뻗어나가 구슬을 덥썩 물더니, 그대로 깨부숴버렸다.
“어...?”
전생, 현생 통틀어 이런 꼴을 처음 보는 류 현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정말 멍청한 소리를 내었다. 류 현은 대체 이게 무슨 현상인지 고민해보던 찰나에 밀려든 또 다른 정보의 격류에 이번에는 버티지 못하고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