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3화 〉탐식마(貪食魔)
“9시 방향!”
류 현은 크게 움직이지 않고 왼손 약지를 한번 까딱이는 것으로 날개를 조종했다. 비행 궤도가 확 꺾이자,
꽈르릉! 기다렸다는 듯이 허공에서 검은 번개가 쏟아졌다. 검은 번개가 멎자마자 류 현은 급제동을 걸었다.
슉! 허공에서 ‘마녀’의 것으로 보이는 손이 튀어나왔다. 그대로 진행했다면 꼼짝없이 머리나 목덜미를 잡혔을 위치였다. 그냥 받아넘길 수 없는 각도에서 마법 공격 후 연속해서 텔레포트를 이용한 기습.
단순하지만 효과는 확실한 공격법이다. 벌써 여섯 시간 넘게 이 짓을 반복하고 있음에도 섬뜩한 걸 보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류 현도 전생에서 이 공격법이 수차례 엿을 먹었었다. 아니, 한 번의 공격을 제외하면 일방적으로 얻어맞았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텔레포트를 제한 ‘마녀’와 맞먹는 기동성, ‘마녀’의 위치나 공격조짐을 읽을 수 있는 감지능력.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걸 피할 수 없다.
심지어 ‘마녀’본인은 보통 상황에서는 이쪽의 공격을 모두 무시하기까지 하니, 혼자서 대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방대한 마력량과 그에 버금가는 재생력으로 어지간한 건 몸으로 때우고 보는 류 현도 그 깔짝깔짝 견제 같은 공격에 정말 죽을 뻔 했었으니까.
칼리프 클랜이 ‘마녀’에게 알 라시드를 잃고, 그 상처가 치명타가 되어서 분열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조건이 맞지 않으면 ‘마녀’는 무적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류 현도 ‘마녀’를 공략한 게 아니라 운 좋게 죽일 수 있었던 것뿐이니까.
‘화력 같은 건 엘더 리치가 우위겠지만...저런 말도 안 되는 특성이 달려있으니 그런 건 의미가 없지.’
다시 붙어서 죽이라고 하면 백퍼센트라고 확신하기 힘든 녀석이었는데, 다른 놈들은 나타나질 않는 데 저 녀석이 순서도 뛰어넘어서 떡하니 나타날 줄은 몰랐다. 아마 세아의 각성과 지금 같은 기연 둘 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도망 다니는 것만으로도 큰일이었을 것이다.
세아가 아무리 ‘마녀’의 위치나 공격 방향을 예측하더라도 류 현의 기동력은 그저 그런 수준이고, 기동력을 얻었어도 저 단순하지만 강력한 공격패턴을 기동력 하나로 다 피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엘더 리치라...날개 형태도 그렇고, 아까 그 채찍도...내가 진짜 놈의 지식을 흡수한 건가?’
류 현 본인도 생각지도 못한 기연이었다. 전생에서도 이런 일은 없었다. 네임드 몹을 뜯어먹고 경지가 일 진보 한 적은 있어도, 이런 식으로 지식이 남았던 적은 없었다. 웃긴 건 류 현은 그 지식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뜯어볼 수는 없다는 거였다.
날개를 만들 수는 있지만, 어떻게 만든 것인지는 본인도 몰랐다. 파괴 구체를 만들고, 그것을 엿가락처럼 변형 시킬 수 있지만 중심부 밀도조절 어쩌고 하는 설명은 하지 못한다. 어림대중으로도 말이다. 그저 할 수 있고 없고의 구분만이 처음부터 그의 머릿속에 들어있었던 것 마냥 자리 잡고 있었다.
온갖 괴상한 경험을 다 해본 류 현이 보기에도 명백하게 이상했다. 플레이어들이 각성 후 능력을 다루는 과정이 이보다는 더 착실할 것이다.
그 부분을 제하더라도 이렇게, 연구나 연습도 없이 이렇게 바로 이런 규모의 힘을 다룰 수 있게 된 경우는 플레이어 전체를 통틀어도 극히 드물리라. 지식의 출처를 생각하면 이상할 정도였다. 겉보기에는 마법 같아 보여도, 류 현이 하고 있는 짓은 엘더 리치의 기술로 제 마력을 다루는 것이었다. 마법보다는 초능력에 가깝다.
마탑의 연구자들이 봤다면 그를 두고 마법과 초능력의 경계에 대한 격렬한 토론을 벌였겠지만, 류 현은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평온한 상황이었다면 이 지식을 써먹어도 문제가 없는 걸까 하고 고민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가릴 때가 아니었으니까.
“앞쪽 4시 방향!”
류 현의 손짓에 검은 날개가 기괴하게 변하며 감속과 동시에 하강을 동시에 수행했다. 그러면서도 멈추진 않았다. 피잉! 류 현은 오렌지 빛 섬광이 허공을 꿰뚫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머리 위쪽 대각선 방향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슈슉! 맞춘 것처럼 ‘마녀’의 팔이 어깨까지 허공에서 쑥 뻗어 나왔다. 류 현은 미리 뻗어둔 손을 움켜쥐었지만, 얻을 수 있는 건 잡히지도 않은 팔을 기겁하며 빼는 반응뿐이었다. 류 현은 개의치 않고 늦추었던 속도를 다시 올렸다.
‘왜 인지는 몰라도 이성이 남아있었을 때가 잡을 수 있는 틈이 있었지. 딱 봐도 당황하는 티도 났었고. 용사가 어쩌니 이상한 소리만 하는 통에 뭘 건지진 못 했지만...쯧, 그 때 끝을 봐야했어. 타격이 들어오는 거랑 동시에 텔레포트 되게 조건을 걸 수 있을 줄은.’
몇 번의 반복 끝에 류 현은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데미지를 줄 방법이 거의 없다시피 한 ‘마녀’가 타격이 들어옴과 동시에 도망가는 조건부 텔레포트까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게 결정타였다. 류 현이 틈을 노려서 데미지를 쌓는 방식을 포기하게 된 이유였다.
지금 상태에서는 데미지를 줄 수나 있을까 의구심이 들 지경이지만.
‘...한 번에 잡아야 한다. 놈의 텔레포트는 엘더 리치랑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이야. 방해를 한다고 먹히지도 않을 거야. 여기로 올 때처럼 그런 행운은 없다고 생각하는 게 맞아. 놈이 그런 실수를 두 번할 것 같지도 않고.’
“밑에서! 엄청 많아!”
세아의 목소리가 째질 것처럼 울렸다. 류 현은 망설이지 않고 등 뒤의 날개로 제 몸을 감싸고, 그 안을 제 몸에 휘돌고 있는 검은 것으로 가득 채웠다. 등에 업혀있는 세아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숨 안 참아도 돼.”
투두두두! 따다다다! 콩 볶는 소리와 그 보다 좀 더 굵은 소리가 동시에 날개와 장막 위를 때렸다. 류 현은 그 와중에 코끝이 아려지는 것 같은 냄새를 잡아내었다. ‘이젠 독탄까지 날리냐. 가지가지 하는군.’ 류 현은 검은 것을 끌어당겨 세아의 머리주변을 꼼꼼하게 둘러쌌다. 그 주변을 매만지며 독기를 빨아들이도록 조치를 하던 류 현은,
“현아 정면!”
슈슉! 치이익! “끄윽?!”
다시금 허공에서 뻗어 나온 ‘마녀’의 손길을 피하지 못했다. 뜨끔하는 통증과 함께 자신의 일부가 뜯겨져 나가는 이 감각은 에너지 드레인이 분명했다. 류 현은 주먹을 휘둘러 ‘마녀’의 손을 떨쳐내려고 했으나, 허망하게 통과될 뿐이었다.
후웅! 날개를 원래대로 되돌리고 힘껏 솟구친 후에야 류 현은 ‘마녀’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현아 괜찮은 거니? 현아?”
“어어, 괜찮아. 좀 놀라서 그랬어.”
가슴께를 짚으며 얼버무리는 류 현의 시야에는 어느새 몸 전체가 다 튀어나온 상태의 ‘마녀’가 들어왔다. ‘마녀’는 에너지 드레인을 행한 손을 움켜쥐고 무엇이 그리 기쁜지 부르르 떨더니, 검은빛으로 불타고 있는 눈으로 류 현을 흘겼다. 류 현은 자신이 표정 읽는 재주는 없지만 ‘마녀’의 눈에 깃든 것이 무엇인지는 알 것 같았다.
증오와 소유욕. 그것들이 ‘마녀’의 검은눈 안에서 뒤섞여서 회오리치고 있었다. 당연히 류 현도 괴수에게서 이런 시선은 처음 받아봤다.
‘미친 이젠 별...’
류 현은 더 볼 것도 없이 몸을 날렸다. 검은 날개가 좀 전보다 크고 화려한 문양을 그리자, 류 현의 몸이 소리를 따돌릴 기세로 쏘아져나갔다.
그 와중에도 류 현은 엘더 리치의 지식으로 검은 구체를 띄워 올려, 뒤에서 따라 날아오고 있는 ‘마녀’에게로 날렸다.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아니, 그렇기에 그는 이를 악물고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었다.
***
“...라시드! 빨리!”
알 라시드는 갑자기 눈을 찌르고 들어오는 빛에 두 팔로 눈을 가렸다가, 팔을 잡아끄는 손길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그리곤 바로 아차했다. 그의 완력을 생각하면 깨우던 이가 큰 부상을 입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반인이라면 빨리 조치를 취해야하는 상황일지도 몰랐다.
후다닥 몸을 일으킨 알 라시드는 자신 앞에 서 있는 이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람 압둘아지드가 다급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공주님이 왜 저러지? 대련하다가 영감님 팔이라도 부러뜨렸나?’
잠에서 덜깬 머리로 한 생각이 지금 상황에서는 일어나는 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마람이 그의 팔을 잡아서 방밖으로 끌고 나갔다.
‘잠깐만, 영감님 왼손이 날아갔잖아. 그럼 대련 못하는데. 어, 공주님도 어제 던전에서 돌아왔잖아? 어제? 아, 날 샜지.’
점차 정상궤도로 돌아오는 알 라시드의 사고가 끝나기 전에, 마람은 마호가니 문을 밀어젖혔다. 벽면 하나를 다 가리고 있는 거대한 모니터가 두 사람을 반겼다. 방안에 있던 이들 중 몇몇이 그들을 돌아봤지만, 그건 정말 소수였다. 대부분은 모니터에 비춰지고 있는 광경을 더 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공주님 왜 또...”
마람은 말로 대답하는 대신 화면을 턱짓했다. 이런 때에는 다그쳐 물어도 백말이 소용 없다는 아는 알 라시드는 눈을 비비적거리며 화면에 집중했다.
그리고 방안의 사람들 중에서 가장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화면에는 흐릿하지만 검은 날개를 펴고 있는 남자가 힘없이 하얀 ‘마녀’의 폭격에 몰리고 있는 모습이 반복해서 비춰지고 있었다. 한 눈에 봐도 남자 쪽은 힘이 다 한 것 같았다. 검은 날개는 알 라시드가 기억하던 것에서 반 이상이 찢겨져나갔고, 남자를 감싸던 검은 기운도 화면상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누가 봐도 12시간 가까이 계속된 술래잡기에서 류 현이 패하기 직전의 상황.
“이 뒤는?”
“‘마녀’쪽이 감지한 건지, 드론이고 헬기고 다 격추돼서 이게 끝이야.”
알 라시드는 그대로 방밖으로 뛰쳐나가려다가, 어깨를 붙잡는 손에 눈을 흘겼다. 어깨를 붙잡아 세운 이는 마람이 아니라 알 사디크였다.
***
퍼엉! 검은 불꽃이 타닥하고 튀더니 강렬한 폭발이 류 현의 복부를 후려쳤다. 류 현은 맥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류 현의 날갯죽지 부근에 떠있던 검은 날개가 연기처럼 흩어져버렸다. 류 현은 몸을 일으키려다가 울컥 피를 토했다. 12시간 가까이 지속된 소모전 앞에서 류 현의 재생력도, 항마력도 힘을 다한 것이다.
하지만 ‘마녀’는 그것으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후웅! 파아악! ‘마녀’의 손끝에서 오렌지 빛 채찍이 뻗어 나와 류 현의 어깨를 후려쳤다. 이전과는 다르게 검은 빛이 완연해진 채찍은 류 현과 세아를 연결하는 어깨부분 벨트로 모자라서, 류 현의 오른쪽 어깨회전근을 찢어놓았다. 눈앞에서 동생의 피가 튀자 세아의 새된 비명이 울렸다.
“현아!”
짜자작! 빠지지! 퍼엉! 류 현은 대답할 새도 없이 검은 번개를 받아내야 했다. 등 뒤에 세아가 있었기에 류 현은 정신이 반쯤 날아간 상태에서도 항마력을 복부에 집중해서 관통을 막았다. 관통되는 대신 세아와 류 현을 연결하는 마지막 벨트가 터져나갔고, 세아는 뒤로 날려가는 류 현보다 멀리 나뒹굴었다.
“현...아...”
“끄륵...누...커윽...”
단번에 정신을 잃을 정도로 큰 충격은 아니었으나, 며칠 동안 긴장상태를 유지하면서 갓 각성한 능력을 계속 사용해온 세아는 그것으로 정신을 놔버렸다. 류 현은 내장이 쏟아질 정도로 배에 크게 난 구멍을 손으로 틀어막은 채로 일어서서 세아에게 가려고 했으나,
촤악! 찌익! ‘마녀’의 채찍이 류 현을 다시금 후려쳤다. 이번에는 슬개건을 잃은 류 현은 모래바다에 얼굴을 쳐 박았다. ‘마녀’는 쓰러진 류 현의 바로 머리 위까지 내려오더니 씹어뱉듯이 말했다.
[이처럼 약하고 멍청한 존재가 그 분의 것을 잇다니...그 분의 것을 가지고도 이렇게 약할 수가 있는 거지? 어째서 왜! 내가 아니라 너 같은...]
류 현이 일어서기 위해서 땅을 두 손으로 짚자 ‘마녀’는 그의 머리에 대고 발길질을 날렸다. 류 현은 저항하지 못하고 옆으로 넘어갔다. ‘마녀’는 당장이라도 류 현의 머리를 밟아 터뜨릴 것처럼 눈으로 증오를 불태웠다.
그러다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숨이 넘어갈 것처럼 자지러지게 깔깔거리던 마녀는 웃음을 그치더니 류 현의 터진 어깨를 짓밟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도 덕분에 나도 그 분의 것을 잇게 되었으니 네게 고맙다고 해야 할까? 이렇게 잘 될 줄이야. 네가 가진 재능은 그릇으로서의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형태를 잃지 않고, 그 분의 것을 이렇게 순화시켜서 보관할 수 있다니.]
‘마녀’는 검은 안개와 빛으로 이루어진 제 새 오른팔을 황홀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처음의 오렌지 빛은 희미해져서, 이젠 검은 안개만으로 팔을 만들었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마녀’의 시선이 다시 류 현에게 돌아왔을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그렇다고 네가 그것을 가지고 있어도 좋다는 건 아니지. 그건 네겐 너무 과분한 것이야.]
‘마녀’는 류 현의 멱살을 쥐고 일으켜 세웠다. 좀처럼 시선을 고정하지 못하는 류 현은 제 발로 서지 못했다. ‘마녀’는 목이 졸리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자신의 눈높이까지 류 현을 끌어올렸다. 류 현의 목에서 숨 막히는 헐떡임이 터져 나왔다.
[자, 그럼 받아가도록 할게?]
‘마녀’는 놀고 있던 오른 손을 뾰족하게 세워 류 현의 가슴으로 내질렀다. 그 순간 반쯤 기절한 것처럼 보였던 류 현이 몸을 틀어 심장의 직격을 피했다. 오른쪽 폐가 뚫리는 중상을 피하진 못했지만.
‘마녀’는 일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 여유를 되찾고 자신의 말을 실현하는 데 집중했다. 에너지 드레인! ‘마녀’는 류 현으로부터 흘러드는 검은 힘에 입가를 끌어올렸다.
그 때였다.
‘마녀’는 류 현과 눈을 마주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다 죽어가던 남자가, 더 없이 유쾌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자신이 쳐놓은 함정에 빠진 사냥감을 보는 사냥꾼의 모습으로.
류 현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