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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2화 〉탐식마(貪食魔) (232/429)



〈 232화 〉탐식마(貪食魔)
피를 쏟는 것처럼 불꽃을 쏟아내는 도마뱀의 모습에 모두가 멈춰 섰다. 뒤늦게 승하의 앞을 막아서기 위해서 움직이던 혜라, ‘업화의 아이들’ 네 체에게 견제를 받으면서도 달려오려던 화련과 희란도. 일 검에 도마뱀의 대가리를 갈라버린 승하의 위용 앞에 굳어버렸다.


승하 본인은 전혀 아니었지만.

“우웩-”

피가 아니라 검은 젤리 같아 보이는 덩어리를 토한 승하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토하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혜라가 부리나케 달려들어 그녀를 부축했다. 혜라는 옷위로 느껴지는 열기에 놀랐다. 이건 단순히 복사열 때문이 아니었다. 승하의 몸에서 나고 있는 열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몸으로...!”
“헤헤, 그래도 생각보다 잘 됐네.”

혜라는 헤실헤실 웃으면서 신소리를 늘어놓는 승하를 엎어 쳐버리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무리 최상위 플레이어라도 이렇게 몸에서 열이 끓는 건 웃어넘길 상태가 아니었다. 그 대단한 면역체계와 회복력도 감당을 못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 이전에 승하는  달간 요양해야할지 모를 큰 부상도 안고 있는 상태였다. 무슨 재주로 평상시를 웃도는 검기를 발휘한 것인지는 몰라도, 부상 악화에 보태고 있다는 건 명백해보였다. 위기 상황에 대처한답시고 무리를 하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드러난 살갗부분이 가뭄 온 논바닥마냥 쩍쩍 갈라지다 못해, 떨어져 나갈 지경이었으니까.

사지 중 하나가 잘리거나, 배나 폐부에 관통상을 입거나  것은 아니었으나 혜라에게는 이 쪽이 더 섬뜩하게 느껴졌다. 승하가 칼을 더 휘두르게 내버려두면 안에서부터 무너져 내려서 폭삭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혜라가  고집 세다 못해 무모하기까지 한, 언니를 어떻게 뒤로 빼놓을까 고민하는 사이에 갈라진 도마뱀 대가리에서 ‘업화의 아이들’이 튀어나왔다. 나온 수는 도마뱀 합체에 보탠 일곱의 반이 안 되는 셋.

지난 경험으로 그 셋의 장난치는 것 같은 행동도 감당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는 혜라였다. 더욱이 지금 와서는  장난치는 것 같은 태도도 버리고, 괴수답게 악착같이 덤벼들고 있지 않은가.


‘혼자서는...못 버티는 것도 힘들어.’ 혜라는 팔근육이 뒤틀리는 것 같은 통증을 애써 무시하며 마력을 돋웠다. 양팔에 빛으로 새긴 것 같은 문신들이 떠올라 백열했다. 저 멀리서 뛰어오고 있는 화련과 희란이 도착할 때까지는 어떻게든 버텨야했다.


그런 혜라의 각오를 비웃는 것처럼 불의 정령들은 다시 하나로 뭉치더니, 이번에는 5미터는 족히 넘어 보이는 골렘이 되었다. 혜라는 이를 악물었다. 이놈들을 상대로 저지력이 거의 없다시피 한 자신에게는 쥐약인 형태 변화다.


후르르!

그리고 천천히 사그라지고 있는 불꽃 도마뱀의 몸뚱이에서 상태가 안 좋아 보이긴 하나 ‘업화의 아이들’이 2체 더 튀어나오자, 혜라의 눈에 서린 적의의 빛이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흔들렸다.

혜라의 머릿속에 도망부터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지만, 골렘은 그녀가 결정하는 것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질량이 없을 것 같은 불꽃으로 이루어진 주먹이 육중한 파공음과 함께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동시에, 둘이 합쳐서 하나 힘을  것 같은 상태의 2체도 그보다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젠...장!”

빠드득! 빠지직! 치이익! 양쪽에서 달려드는 불의 정령 2체를 얼음으로 멈춰 세웠지만 급하게 끌어올린 냉기는 그것들을 붙잡아둘  없었다. 금세 몸을 빼낸 불의 정령들은 다시금 도약하며 덮쳐들었다. 혜라의 품에 안겨있던 승하가 혜라를 밀어낸 것도  때였다.


“어? 언니...?”

혜라는 승하가 검을 뽑는 것을 보지 못했다.

키이익! 뿌지직! [끼아악!]


검은 검기가 달렸다. 승하의 칼끝에서 뻗어 나온 검은 선이 살아있는 뱀 마냥 서로 반대편에 있는 불의 정령 둘을  동강 내버리고는 지평선 너머까지 내뻗어나갔다. 이전에 내보인 것과 같은 기술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담긴 기세나, 선의 굵기가 차원이 달랐다.

혜라는 그보다는 직후 승하의 팔에서 후두둑하고 떨어지는 것들에 더 기겁을 했지만 말이다. 팔이 어떻게 칼을 쥐고 있나 싶을 정도로 큼직한 살점이었던 덩어리들이 쏟아졌다. 굉음 뒤에 터져나온 파열음은 승하의 팔에서 난 소리임이 분명했다.


이대로 승하의 몸에서 살점이고 뼈고 모두 떨어져 나가서 폭삭 내려앉을 거라는 두려움이 구체화되기 전에, 골렘의 떨어졌다. 원래의 궤적이 아닌, 좀 더 앞으로 튀어나온 승하에게만 영향이 가는 궤적이었지만 혜라는 가슴을 쓸어내기도 전에 비명을 질러야했다. 그녀가 의식하기도 전에 그녀의 발이 앞으로 내달렸다.


“언...”

그러나,


피익- 퍼억! 화르르! 골렘의 내려친 주먹이 반쪽이 나고, 그대로 마른 대나무에 도끼를 가져다 댄  마냥 주먹에서 시작된 금에 팔의 반절이 골렘의 오른쪽 어깨에서 떨어져 나가자 혜라는 지르던 비명을 저도 모르게 도로 삼키게 되었다.

후두둑! 칼을 내려친 상태로 정지해 있는 승하의 얼굴에서 살가죽과 살점들이 쏟아져 내렸다. 혜라는 완전히 비어버린 얼굴 피부 사이로 드러난 하얀 살갗을 보곤 달려가던 발을 멈추었다. 핏물이 살짝 덮고 있긴 했지만, 분명히 승하 원래의 하얀 살갗이었다.

[끼아아아아!] 성대가 없을 텐데도 골렘은 찢어지는 것 같은 기성과 함께 남은 왼팔을 채찍처럼 내휘둘러왔다. 이미 검은 끌어당겨서 준비를 끝내놓은 승하는 덤덤하게 그에 맞섰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몸에서 탄화된 살갗들이 떨어져 나왔지만 그녀는 웃었다. 웃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후웅! 승하는 골렘의 주먹보다 한 발 빠르게 풀스윙을 날렸다. 허리를 뒤틀면서 상체의 탄화된 껍질들이 쏟아져 내렸다.

피시식! 퍼엉! 효과는  박자 느리게 나타났다. 골렘의 주먹을 이루던 불꽃이 매가리 없이 꺼지더니, 골렘의 상체와 하체에 균열이 일고는 어긋나서 뒤로 고꾸라졌다. 골렘의 몸뚱이가 불꽃으로 흩어지자, 백린탄이라도 터진 것 마냥 산위의 모든 것이 불타올랐다.


승하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훌쩍 뛰어올랐다. 종아리와 허벅지 대부분을 뒤덮고 있던 붕대가 눌러붙은 피부와 살점과 함께 벗겨지며 하얀 살결이 드러났다.


화르르르! 쉬익! 쉭! 거의 승하가 뛰어오르자마자, 무너진 골렘의 몸뚱아리에서 불의 정령들이 뛰어나왔다. 생물이 맞나 싶은 놈들도 몸의 반절을 잃어 한 눈에 보기에도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었는데, 눈이 돌아서 승하만 보이는 지 무너지는 제 몸뚱이는 돌보지도 않고 3체가 각기 다른 방향에서 덤벼들었다.

후르르! 승하에게 바로 들이박을 것처럼 달려들던 불의 정령들은 거리가 확보되자마자 서로 엉겨 붙었다. 서로를 뒤섞어서 불꽃으로 된 구형 감옥을 만들어낸 것이다. 불의 정령들의 그야말로 목숨을 태워 피운 불꽃이  번째 태양처럼 한껏 빛을 발했다.

하지만 부질없는 저항이었다.

키이이- 끼이익! 뻐엉! 철판을 쇠못으로 긁는 소리와 함께 검은 검기가 감옥을 뚫고 튀어나왔다. 검은 선은 지평선 너머까지 날아갈 것처럼 내뻗다가 갑자기 방향을  꺾어서, 구형 감옥을  번 더 꿰뚫었다. 전혀 기세가 줄지 않은 검은 선은 다시  번, 또 한 번 불꽃으로 이루어진 감옥에 구멍을 내고, 넓히기를 반복했다.


퍼어엉! 열네 번째 새로운 구멍이 났을 때, 구형 감옥은 형태를 잃고 무너져 내렸다. 검은 선 또한 사명을 다했다는  그대로 사그라졌다. 불꽃이 사그라지자 하얀 나신이 드러났다. 승하였다.

승하는 어떻게 보면 끔찍한 화상을 입기 전보다  멀끔한 모습으로 불꽃 감옥 안에서 걸어 나왔다. 그 때의 기습으로 반절 이상이 타고, 녹아버렸던 자색 머리카락마저 원래대로 돌아온 모습. 아직 붙어있는 ‘예전 가죽’에 불이 붙어 있었으나, 승하는 대수롭지 않게 툭툭 털어 내버렸다.

승하에게 뛰어가다가 예상치 못한 상황의 연발에 발이 꼬여, 주저앉아 있던 혜라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의도치 않게 몇 번이고 본 몸인데도 지금은 전혀 달라보였다.

‘뭔가 전보다 더...’

혜라는 중간에 고개를 내저어 제 생각을 끊어내었다. 지금 할만  생각이 아니었다. 그렇게 심란한 혜라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승하는 알몸뚱이 상태로 옷을 입을 생각은 하지도 않고 칼만 휙휙 휘둘렀다. 그리곤 혜라를 돌아보더니 씩 미소 지었다.

“마무리 하고 올 게. 잠깐만 기다려.”
“네? 대체 뭘 마무리...”


퍼엉! 승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발을 굴러  멀리 날아갔다. 혜라는 멍하니  모습을 지켜보다가 제 머리를 쥐어박았다.

“바보야, 언니 방어구도 안 챙겨 입고 갔잖아!”

살아있는 불꽃을 상대해야하는 상황인데 저렇게 알몸으로 뛰어가게 내버려두다니, 혜라는 뒤늦은 자책을 해보았지만 그런다고 승하가 돌아와서 옷을 입진 않았다.


[끼아아악!] 퍼엉! 화르륵! 끼이익! 동산 아래쪽에서 비명소리 같은 것과 폭발음이 연달아 터져 나오더니, 이내 들리지 않게 되었다.


‘설마...?’

혜라는 설마설마 했지만 알몸뚱이 상태로  여자를 끼고 펄쩍펄쩍 뛰어오는 승하의 모습을 보곤,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승하의 옆구리에 끼여서 오고 있는 화련과 희란의 표정이 방금 전에 자신이 지은 표정일 것이다.

동네 마실 나온 것처럼 가볍게 뛰어와서 두 여자를 내려놓은 승하는, 그 차림새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어조로 경고했다.

“근처 다른 빈창고로 최대한 빨리 이동해서 쉬자. 곧 다시 몰려올 거야. 이번에는 본체랑 싸울 수도.”


화련과 희란, 혜라는 승하가 늘어놓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조차도 오래 보진 못했다. 민망해하며 고개를 돌리는 화련과 희란 대신 혜라가 힘겹게 말을 짜내었다.

“일단 옷부터 입어요...좀...”


***

꾸웅! 오늘로만 사막에 열한 번째로 만들어진 인력(引力)의 구덩이가  현을 잡아끌었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우당탕! 푸스스- 검은 날개를 펴고 날아다니던 류 현이 인력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류 현은 추락 직전에 몸을 돌려서 배부터 호되게 모래 바다에 부딪혔다.

“끄으응...”


 현은 신음과 함께 몸을 일으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마녀’를 올려다보았다. ‘마녀’는 여전히 검은 빛으로 물든 눈에서 살의를 맹렬히 불태우며, 녹색보석에 힘을 계속해서 불어넣는 중이었다.


‘개미지옥이라 별 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그 생각 취소해야겠군.’

 현이 이번 공격을 피하지 못한 데는 중첩된 피로, 세아의 존재, 지형문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마녀’가 갈수록 개미지옥의 사용에 능숙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제는 인력 발생 좌표를 땅이 아니라 허공에 찍을 정도였다.


유니크 아티펙트에 상당히 높은 점수를 주는 편인 류 현조차 놀랄 정도로. 미리 경고 해주는 세아가 없었다면 아마 몇 번은 더 아래로 쳐 박혔으리라.

‘그걸 감안해도 너무 오버스펙인데. 아무리 대단한 아티펙트라지만 저렇게 연발로 펑펑 쓰면 과부하가 오는 게 정상이야.’
‘형태도 내가 알던 개미지옥이랑  다르고. 원래는 손톱만한 보석이 달린 목걸이로 아는데...저 녹색빛이랑, 첫 발동 때 생각하면 개미지옥이 아닐 리는 없겠지만...혹여 아니어도 우리가 쓸 수만 있으면 상관없긴 하지만.’


‘마녀’는 자신의 우세를 자랑하는 것처럼 천천히 내려왔다. ‘마녀’의 발이 지면에 닿기 직전,

슈슉! ‘마녀’의 모습이 전형적인 텔레포트 노이즈와 함께 사라졌다.  현이 묻기도 전에 세아가 소리쳤다. “정수리 위쪽!”


류 현은 확인하지도 않고 옆으로 몸을 날렸다. 쉬익!  직후 세아가 가리킨 곳에 모습을 드러낸 ‘마녀’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오렌지 빛이 류 현이 있던 자리를 후려쳤다.

류 현은 돌아보지 않고 다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어깨 죽지 부근의 검은 것들이 엿가락처럼 늘어나서 피막과 깃털 없는 날개 형태를 이루었다. 퍼덕임도 없이 류 현은 그대로 날아올랐다.


‘마녀’가 진절머리 난다는 것처럼 고래를 휘휘 젓고 따라 날아올랐다.


‘그래, 따라와라. 그래야 괴수지.’

‘마녀’와의 본격적인 술래잡기를 시작한 지 3시간 째, 한 번의 공격도 성공시키지 못했지만  현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비행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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