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1화 〉탐식마(貪食魔)
알 라시드는 자신의 왼편에 앉아있는 자파르 알 사디크를 힐끔 한 번 보고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팔짱을 낀 채로 다리를 떨고 있던 알 라시드는 다리를 두어 번 떨다가 다시 한 번 힐끔 자신의 왼편을 보더니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기선들을 안고 바쁘게 돌아다니는 이들 중 하나를 붙잡고 의사를 데려오라고 지시하던 알 라시드를 말린 건 자파르 알 사디크였다.
“진통제는 오기 전에 충분히 처방 받았다. 그 이상은 받아봐야 팀 닥터가 투약을 반대할 게야. 진통제가 전부 배출되기 전에 재생시도를 할 수 없을테니.”
“......”
알 라시드는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알 사디크의 허전한 왼손목 부분을 바라봤다. 절로 한 숨이 목구멍까지 밀고 올라왔다. 알 라시드는 혹여 그것이 새어나올까 조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 사디크는 푸석해진 몰골이었지만 빙긋 웃으며 알 라시드를 자리로 이끌었다.
알 라시드가 조급증을 억누르지 못하고 다시 일어서려고 했을 때, 벽면에 걸린 모니터에 불이 들어왔다. 자리해 있던 마랍 압둘아지드나, 알 핫산의 시선 쏠렸으나 알 라시드는 그 보다는 알 사디크쪽에 더 신경 쓰고 있었다.
‘대체 무슨 깡이야? 자기가 무슨 10대 애송이도 아니고.’
그의 신경은 온통 알 사디크가 잃어버린 왼손에 쏠려있었다. 알 라시드가 그를 모시기 시작하고서 아니, 알 사디크가 칼리프 클랜의 중심이 된 이후부터 그는 이런 큰 부상을 당한 적이 없었다.
알 사디크의 증언이 맞는다면, 원정대를 덮친 것이 류 현과 사막에서 술래잡기 중인 네임드 몹일테니 목숨을 건진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할만 했지만 알 라시드에게는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무슨 꼴을 당한 건지 귀환한 원정대원들은 치료가 시급한 이들을 제하고 전부 입원보다는 영상 확인이 우선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었으니까.
그들을 덮친 ‘마녀’와 류 현이 사막에서 술래잡기 하는 영상 말이다.
‘멍청한 새끼들, 아무리 예기치 못한 사고가 있었어도 그런 걸 말해버리면 안 되지. 이놈들을 그냥...’
알 라시드는 속으로 이를 갈며 모니터 화면에 집중하려고 애를 썼다. 자꾸만 눈이 돌아가는 걸 막지는 못하였지만.
화면에 비춰지는 영상의 질은 썩 좋지 못했다. 영상이라기보다도 연속 촬영한 것을 슬라이드 쇼로 보여주는 듯 했다. 두 괴물이 마구 흩뿌리는 마력 파동 탓이었다.
‘어차피 류 현 형씨가 인파이터형이라 저럴 때는 볼 것도 없을 텐데 뭘 그렇게...어?’
화면에 비춰지고 있는 장면은 알 라시드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알 라시드는 순간적으로 전혀 엉뚱한 영상을 재생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했다. 화면 안에는 시커먼 것을 흩뿌리고 있는 남자처럼 보이는 인영과 그보다 더 커다란, 여성으로 보이는 여성이 추격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하늘을 날면서.
남자 쪽에서 검고 커다란 채찍 같은 것을 마구 휘두르고, 시커먼 구까지 날려대자, 알 라시드는 자신이 본 것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남자가 휘두른 채찍에 사막에 커다란 상처가 남았고, 검은 구는 사구를 증발시켜버렸다.
‘저 형씨, 저런 것도 할 수 있었나? 아니야, 남극에서는 꽤 위험했는데도 안 쓴 거 보면 그 때는 저런 걸 못 썼어. 능력을 각성하고 이렇게 한참 뒤에 마법사가 될 수도 있던가? 버릇이 잘 못 들어서 힘들다고 들은 거 같은데...마탑에서 받아주나? 하지만 저건 어떻게 봐도 얼마 전에 얻은 힘이...’
류 현이 보급지원을 요청하고 사막에 진입한 이래로 계속 감시를 유지했었지만, 류 현이 갑자기 저런 힘을 다룰 수 있게 된 이유에 대해선 알 수가 없었다. 화면에 비치고 있는 류 현 본인도 알지 못했으니까.
분명한 건 휘두르고 있는 힘의 크기가 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류 현이 사막으로 몰려드는 처음 보는 괴수들을 때려죽일 때와도 비교가 되질 않았다.
‘이젠 인파이터형이라고 못 하겠군.’
“알 라시드.”
알 라시드는 제 이름을 부르는 알 사디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알 사디크는 여전히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었다.
“저 검은 쪽이 류 현이라는 친구 맞나?”
“어, 맞는데...맞긴 한데...그게...”
나도 맞는지 모르겠어. 알 라시드는 자신이 생각해도 알 수 없는 그 말을 삼켰다. 저게 자신이 알던 류 현이 맞는 걸까?
“기록상으로는 그 친구는 극단적인 스트라이커 쪽이라고 써져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내가 던전에 가있는 동안 변동사항이 있었나?”
“없어. 형씨가 사막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아니, 세 시간 전만해도 저렇진 않았어. 몰려드는 괴수 때려죽일 때만 해도 영감님이 알고 있는 그대로였다고.”
“내가 보기엔 지금은 스트라이커가 아니라 마법사랑 염동술사를 반쯤 섞어 놓은 거 같은데. 저런 식으로, 저런 크기의 힘을 다루는 건 처음 보는군. 사람이 바뀌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야.”
“그치? 나도 순간적으로 같은 생각 했다니까. 그런데 저 형씨가 무슨 기연 주워 먹고 할 틈이 전혀 없었어. 중간에 공세가 멈춘 적이 있긴 한데, 그 때는 우리 애들을 붙였으니까.”
“혹여 알 라시드 네가 놓친 부분이 있다 한들, 아무리 기연이라도 저렇게 단시간에 저렇게 큰 힘을 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이전에 가지고 있었는데 숨겼다고 하는 쪽이 더 맞을 것 같군.”
알 라시드는 그건 아닐 거라고 속으로 단정했지만, 입 밖에 그것을 내진 않았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알 사디크의 추측이 옳으니까. 스스로도 왜 그리 생각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이상하단 말이지.’
자신의 감에 고개를 갸웃하느라 알 라시드는 보지 못했다. 옆에 앉아있는 알 사디크의 눈빛이 단순히 경계하는 수준이 아니라 적의가 느껴질 수준이라는 것을.
***
화르륵 쉬이이! 복사열만으로도 승하의 팔뚝보다 두꺼운 얼음벽이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녹아내렸다. 백혜라가 이를 알 물고 얼음벽에 냉기를 다시 밀어 넣었지만, 녹는 속도를 지체시키는 정도가 전부였다.
백혜라는 뚫린 구멍을 통해서 주변을 살폈지만, 불을 지른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모습뿐만 아니라, 마력적 기척까지. 주변을 불사르고 있는 불꽃만이 적의 존재가 허상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네임드 몹, ‘업화의 아이들’. 아직 머리 위의 이름도 보지 못한 끔찍할 정도로 기민하고, 화력마저 압도적인 이 괴수는 자체가 혜라와의 상성도 나빴으며, 지금도 실시간으로 짜증게이지가 착착 올라가는 중이었다. ‘오래 끌면 언니 상태가 더 나빠질 거야.’
혜라는 뒤쪽에 늘어져있는 승하를 한 번 힐끔 보고는 이를 갈았다. 보통 화상 환자에게도 좋지 않은 환경이다. 마력적인 불꽃을 뒤집어쓰고, 큰 내상까지 입은 승하에게는 어떨지는 안 봐도 훤했다. 백혜라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쳐서 승하의 팔을 잡고는 냉기를 살짝 흘렸다. 멍하니 늘어져 있던 승하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어후, 죽는 줄 알았네.”
“정말로 묫자리 알아보기 싫으면 좀 가만히 있어요. 그 몸으로 뭘 한다고!”
‘업화의 아이들’이 다시 나타나자 칼을 빼들려다가 피를 토하고 제 풀에 뻗어버린 승하에게 백혜라가 눈을 흘겼다. 팀의 유일한 스트라이커이니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마음은 모르는 건 아니지만, 지금 상태에서 그러는 건 어떻게 봐도 자살행위였다.
지금의 승하는 복사열에 노출된 것만으로도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상태가 좋지 못했다. 화련과 희란이 청뢰와 텔레포트로 놈들을 유인하지 않았다면 정말 송장을 치우게 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언니들은 어디까지 간거지? 너무 멀어지면 빠질 수가...’
콰릉! 벽력이 땅에서 하늘로 솟구쳤다. 혜라가 그 방향으로 돌아보기도 전에,
콰르릉! 재차 벽력이 하늘을 찢어발겼다.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먼젓번보다 가까워진 것 같았기에 혜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안력을 돋우었다. 곧 그럴 필요가 없어졌지만.
퍼어어엉! 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거대한 불꽃이 솟아올랐다. 번개가 솟구친 곳보다 훨씬 가까운 지점이었다. 그 거대한 불꽃은 사그러들지 않고, 이리저리 꾸물거리더니 날개달린 도마뱀 꼴로 변했다.
혜라는 드래곤이라고 지칭하기엔 조금 민망한 외형의 괴물이 입을 벌리는 것을 멍하니 지켜봤다. ‘저거 설마...?’
후우욱! 혜라의 불길한 예감은 여지없이 들어맞았다. 불꽃으로 이루어진 도마뱀은 벌린 입에서 불꽃을 쏟아내었다. 자신의 몸을 이루고 있는 오렌지 빛 불꽃이 아니라, 군청빛을 띄고 있는 불꽃을!
혜라는 도마뱀의 입에서 불꽃이 쏟아지는 것과 동시에 두 주먹으로 땅을 내려쳤다. 빠드득! 쩌적! 얼음돔 안에서 또 다른 얼음돔이 솟아나 그녀들을 감쌌다.
그러나,
빠캉! 후두두둑! 우당탕 “끄윽...”
한참은 멀리 떨어졌음에도 열기와 충격파는 큰 돔과 작은 돔 모두를 개미집 부수듯이 부수고는 두 사람을 2미터 정도 날려 보냈다. 그 짧은 순간에 승하를 부둥켜안고 자신의 배위에 올려 보호한 혜라는 빙빙 도는 시야를 잡아보려고 애를 썼다.
“아...”
빙글빙글 돌던 시야가 돌아왔을 때, 혜라의 앞에는 불꽃으로 이루어진 도마뱀이 그 큰 대가리를 쳐 박을 것처럼 가까이 들이민 상태였다. 혜라는 무정물임에도 그 눈에서 자신을 향한 맹렬한 살의를 읽을 수 있었다.
장난치는 것처럼 덤벼들던 이전이 이상한 것이고, 지금이 괴수다운 행동이었지만 혜라는 등허리에 얼음이 박힌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그 정령들이 뭉쳐 있는 거야...!’ 숱하게 사선을 넘나들어본 혜라도 ‘업화의 아이들’ 반 수 이상이 뭉쳐서 이룬 도마뱀의 살의 앞에서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콰릉! 다시금 입을 벌리려던 도마뱀의 날개를 벽력이 후려쳤다. 불꽃으로 이루어진 날개가 청뢰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어깨 죽지부터 거의 뿌리 채 잘려나갔다.
하지만 도마뱀은 공격이 날아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또 다른 자신의 방해를 떼어내며 달려오고 있는 파리들보다, 눈앞의 적들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크릉-]
살아있는 생명체였다면 콧바람이 훅 뿜어져 나왔을 동작 후에 도마뱀은 고개를 쳐들고는 입을 쩍 벌렸다. 혜라는 이전의 장면을 보지 않았어도 도마뱀의 다음 행동을 예측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저 힘을 모으는 것뿐임에도 살갗이 익어버릴 것 같은 열기가 느껴졌다. 혜라는 이를 악물고 양팔의 문신들에 마력을 휘돌렸다.
그 때,
“언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늘어져서 복사열에도 제대로 저항도 못하던 승하가 휘적휘적 앞으로 걸어 나온 것을 혜라는 보았다. 도마뱀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으나 열기를 모으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승하는 만신창이라고 표현해도 될 몸으로 혜라의 앞에 섰다.
혜라는 너무 의외의 상황에 승하를 끌어당겨서 보호해야한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못했다.
후욱! 도마뱀은 이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망설이지 않고 군청빛 불꽃을 다시 토해내었다. 어찌 보면 검은빛을 띈 불꽃은 저승사자의 손길처럼 천천히 그녀들을 향해서 뻗어왔다. 승하가 검을 들어올렸다.
‘뭐지...?’
백혜라는 모든 것이 느려진 세상에서 승하만이 빨리 움직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그녀의 감각이 초 단위 시간을 쪼개고 쪼갠 것이었지만.
혜라 또한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기에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승하의 검이 천천히 내려왔다. 공기를 가르고, 혜라가 펼쳐놓은 냉기를 가르고, 온 세상에 퍼져있던 마력을 갈랐다. 혜라는 승하가 그린 궤적을 따라 마력적으로 완벽한 진공상태가 펼쳐진 것을 보았다.
느려진 혜라의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쉭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푸화악! 퍼엉! 짜작! 군청빛 불꽃이, 도마뱀이 거짓말처럼 무너져 내렸다. 반으로 갈라진 도마뱀의 대가리가 피를 뿜어내는 것처럼 불꽃을 쏟아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