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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0화 〉탐식마(貪食魔) (230/429)



〈 230화 〉탐식마(貪食魔)

구구극-

쇠구슬비가 떨어진다면 이런 느낌일까? 류 현은 검은 안개의 장막을 두드리는 마력의 파도에 업힌 세아를 살폈다. 세아는 여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세아의 상태를  더 살피고 싶었지만 장막을 누르고 있는 압력이 그런 여유를 부릴 정도가 아니었다.

‘저거 그거겠지? 개미지옥.’

류 현은 마지막 순간에 보았던 녹색빛과 자신의 발밑으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모래의 흐름을 보고 ‘마녀’가 무슨 일을 벌인 것인지 유추해내었다.


청뢰, 유성우와 같은 유니크 아티펙트인 개미지옥. 그것이 벌인 현상인  분명했다. ‘마녀’가 전생보다 더 강력한 마법들을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도  높겠지만, 녹색빛과 힘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 류 현에게 확신을 주었다.


‘대체 무슨 재주를 부렸길래...그 때 본 거랑 출력이 비교도  되잖아.’

전생에서 개미지옥은 3차 ‘대소환’ 초기에 사라진 유니크 아티펙트였다. 사하라 사막에서 실행된 아프리카 봉쇄선 구축작전에 투입되었다가, 행방이 묘연해진 기물.


이름처럼 다수의 괴수들을 구덩이 한 점으로 끌어당겨서 매몰시켜버리는 마법을 품고 있는  아티펙트는, 류 현도 어디에서 발견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아티펙트였기에 찾아 나설 생각은 없었다.

 개미지옥의 특성상, 류 현의 주적인 네임드 몹에게는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거라는 예상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류 현이 펼친 검은 안개 장막을 두드리고 있는 압력은 전혀 예상외의 것이었다. 퍼플이하의 괴수들을 한꺼번에 처리하기에는 유용하지만, 상위 괴수에게는 별 효과가 없을 거라고 생각한 류 현의 예상을 비웃는  같은 위력.


‘유니크 아티펙트들 최대 출력은 나도 정확히는 모르니까,  정도 출력이 나오는 게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대체 저게 왜 들고 있는 거야?’


‘마녀’가 류 현을 공격해오기 직전에 칼리프 클랜을 습격해서 빼앗은 전리품이라는  류 현이   있을 리가 없었다. 류 현은 점점 위에서 찍어 누르는 것에서, 한 점으로 끌어당기는 것으로 바뀌고 있는 마력의 흐름을 경계하며  현은 머리를 굴렸다.

‘좋아, 개미지옥자체는 크게 위협적이진 않아. 문제는 다른 유니크 아티펙트를 가지고 있을 경우인건데 뭘 가지고 있는지 내가 알 수가 있나.’
‘...별  없지. 정신 바짝 차리는 수밖에.’

류 현은 세아와 자신의 허리를 묶는 벨트를 채워놓고는, 세아를 한 번 더 돌아봤다. 아직 멍한 상태인 게 마음에 걸렸지만, 방금 전까지 나눈 이야기를 생각하면 조절만 잘 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강림’에 걸어놓은 자물쇠들을 풀어헤쳤다. 자신이 정한 제어한계인 딱 반만큼만.

몸에서 스며 나오던 검은 안개가 그치더니, 다른 검은 것이 맹렬하게 몸 주변을 휘돌기 시작했다. 업혀있는 세아까지 포함해서!  현의 눈 흰자위가 검정으로 물들어갔다.

“하나, 둘!”


퍼엉!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모래먼지가 솟아올랐다. 단숨에 ‘마녀’의 지척까지 솟아오른 류 현은 허공에 대고 갈고리처럼 세운 검지와 중지를 내휘둘렀다.

후왕! 한 박자 느리게 류 현의 몸 위로 휘돌던 검은 것이 커다란 발톱이 되어 ‘마녀’를 내리찍었다. 하지만,

슈슉! ‘마녀’는 이미 모든 공격에 대해서 대비를 마친 상태였다. 검은 발톱이 피부에 닿자마자, 조건부 텔레포트가 발동되었다.

다시금 류 현의 뒤를 잡은 ‘마녀’는 바로 공격하지 않고, 오른손에 쥔 녹색보석에 검은 안개를 다시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녹색보석이 터질 것처럼 빛을 내뿜었다. 류 현은 세아의 외침이 없었음에도 ‘마녀’를 향해서 바로 뒤돌았다. 그와 동시에 ‘마녀’가 다시금 손가락을 위에서 아래로 내휘둘렀다.

쿠웅! 퍼엉! “크윽...뭐야...?”

류 현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모래바다 위였다.  현은 자신을 찌부러뜨릴 것처럼 내리 눌러오는 압력에  뒤에 업힌 세아쪽 방비를 더 강고히 하고는 굽혀진 무릎을 펴려고 했다.

‘이게...개미지옥이라고?’

하지만 바로 일어설 수가 없었다. 위에서 내리누르는 압력과 아래에서 끌어당기는 압력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허벅지 근육이 찢어질 것 같았다. 업혀있는 세아를 신경 쓰느라 더욱 힘겨웠다.

‘찍어 누르는 거랑 끌어당기는 힘이 동시에 이렇게 작용한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류 현이 아는 바로는 개미지옥을 발동시켰을 때 아주 잠깐 동안만 위에서 누르는 압력이 작용하고, 그 뒤로는 구덩이 중심부로 끌어당기는 힘만 작용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마저도 이렇게 강하지도 않았다. 전생에서도 이정도 위력을 보였다면,  현은 어떻게 해서든 개미지옥을 확보하려고 들었을 것이다.


‘사용자의 수준 빨을 탄다고 쳐도...아니면 엘더 리치놈마냥 다른 괴수 갈아서 아티펙트로 만들어온 건가? 젠장, 골고루 골치 썩이는군.’


류 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는 남은 반의 자물쇠들도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외견적인 변화는 없었다. 오히려 맹렬하게 휘돌던 검은 것의 움직임이 수그러들었다.


 현의 머릿속은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젠장, 이건 또 뭔...’


류 현이 읽을 수는 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정보들이 넘실거렸다. 류 현은 자신을 질식사 시킬 것처럼 범람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엘더 리치의 마법들에 대한 것을 잡아채었다. 그것들도 이해할 수 없긴 매한가지였지만,

후웅!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류 현의 몸이 보이지 않는 낚시에 채인 것처럼 휙 떠올랐다. ‘마녀’와 같은 높이까지 도달한  현은 ‘마녀’가  것처럼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붙여서 쭉 펴고는 마력을 밀어 넣었다. 검은 것이 그의 의지에 호응해서 주욱 늘어나더니 채찍 같은 꼴이 되었다.


엘더 리치와 그 부하 리치가 보여준 부유 마법과 불채찍 마법! 자신이 씹어 삼킨 적들의 마법이 류 현의 손끝에서 부활했다.

‘마녀’도 가만히 보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류 현의 어깨가 움직임과 동시에 ‘마녀’의 손이 재차 위에서 아래로 내휘둘러졌다. ‘마녀’가 이번에 발동지점으로 잡은 것은 류 현의 오른쪽에 위치한 모래바다! 좌표가 설정되자 순식간에 인위적인 인력이 발생하며 류 현의 오른팔을 잡아끌었다. 류 현은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쉬릿! 그 와중에도  현은 타격점을 아예 놓치지 않고 ‘마녀’의 머리를 범위 안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채찍은 ‘마녀’에게 닿지 못하고 허공을 휘젓는  같은 감각만이 있을 뿐이었다.  현은 혀를 찼다.

‘이걸로 확실해졌군.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눈깔에 시커먼 빛이 들고 나서 내가 아는 ‘마녀’로 변했어. 완전 ‘강림’상태여도 타격은 아마  들어갈 거야. 대신 판단력은  날아간 거 같은데.’

결론을 내리자  현은 손을 휘저어 추락하던 몸을 허공에 고정시켰다. 화련이 보면 이젠 마법사 노릇까지 한다고 어이없어 하겠지만 류 현은 이해를 하고 지금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 안에 들어와 있는 엘더 리치의 지식을 쓰고 있을 뿐.

화련이  자리에 있었다면 모르는 마법을 어떻게 그리 마음대로 쓰냐고 따졌겠지만, 그 부분이 가장 궁금한 것은 류 현이었다. 눈앞의 변화를 종처럼 종잡을 수가 없는 네임드 몹 때문에 그것에 집중할 수는 없겠지만.


‘몇 가지 더 시험해봐야겠지만...저 녀석이 잠수 탈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마녀’의 도주를 우려하던 류 현에게 지금의 변화는 나쁘진 않은 것이었다. 유니크 아티펙트를 어디서 주워와서 자신을 당황시키긴 했으나, 그것이 개미지옥이니 감당하기 힘든 정도는 아니었다.


손가락에 아직 매달려있던 검은 채찍을 지워버린 류 현은 ‘마녀’가 모래의 바다 위에 벌여놓은 참상을 곁눈질 했다.

처음 개미지옥을 발동시킨 곳은 이미 싱크홀이라도 발생한 것처럼 공동이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고, 두 번째 발동지점은 뭘 어떻게 한 것인지 아직도 오른팔이 당겨지는 것 같은 기분인데 구덩이가 아니라 손가락 두 마디 보다 조금 큰 좁은 구멍이 모래만 계속 빨아들이고 있었다.

 현조차 본 적 없는 개미지옥의 사용법. 전생에 개미지옥을 보유했던 이 보다 ‘마녀’의 이해도가 높다는 걸 여지없이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좋게좋게 생각하자. 저거 잡으면 개미지옥도 같이 딸려오니까. 못 찾을 아티펙트 찾아서 앞에 대령해줬으니 당연히 가져가야지.’
“혀, 현아.”
“어? 누나 정신 들었어?”
“너,  지금...”


류 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세아의 말을 막았다. 뭘 말하려는 건지는 알  없으나, 아마 ‘강림’상태의 류 현이 정상이 아니라고 만류하려는 말일 것이다.


“누나, 나중에. 저거부터 잡고 나서 천천히. 그 때처럼 방향 지시해 줄 수 있겠어? 힘들면 굳이 안 해도...”
“할 수 있어. 할 게. 하게 해줘.”

류 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을 관찰하는 것 같은 시선을 보내고 있는 ‘마녀’를 흘겼다. 방금 전의 기습과 연달은 공격이 거짓말 같았다. ‘여전히 상태가 좀 이상하긴 한데...도망만 안 가면 되는 거지.’ 그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만족했다.

그리고 팀 동료들이 들었다면 기함 했을 생각을 품은  현은,

‘그 때처럼 잡으면 되겠다.’

한 차례 심호흡 하고는,

퍼엉! 허공을 박차며 마녀의 반대쪽으로 몸을 날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검은 것이 별동별의 꼬리처럼 길게 늘어졌다.

[...? 우르스!]

의외의 상황에 당황한 것인지 ‘마녀’는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류 현을 따라 ‘마녀’의 모습이 사라지자, 모래를 끊임없이 빨아들이던 개미지옥 구덩이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

“뭐, 뭐야. 영감님이 왜 지금 이리로 와?”

알 라시드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감시위성으로 류 현의 움직임을 확인하다가 겨우 25시간 만에 단잠에 빠졌던 알 라시드를 깨운  자파르 알 사디크의 귀환 소식이었다.

던전에서 현실로 돌아온 날에 장비 점검 겸 휴식으로 하루를 보내고, 보무도 당당하게 개선식을 가질 예정이었던 알 사디크의 갑작스러운 귀환 소식은 알 라시드를 당황스럽게 했다. 무슨 일이 있지 않는 이상 항상 지키던 루틴을 깰 리가 없었으니까.

던전에서 돌아온 알 사디크가 현실로 돌아오자마자 좋지 않은 소식으로 휴식에 방해받지 않게, 그 동안 있었던 사고에 대해서 입단속을 철저히 한  라시드에게는 아닌 중의 홍두깨가 따로 없었다. ‘어디서 새어나간 거지? 핫산 아저씨가 아무리 날 싫어해도 영감님 쉬지도 못하게 그랬을 거 같진 않은데.’

클랜건물 정문을 향해 걸어가면서 머리를 열심히 굴려봤지만,  라시드는 도무지 범인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윽고 정문을 들어서고 있는 플레이어 무리를 발견했을 때, 알 라시드의 머릿속은 뒤엉키는 걸 넘어서 폭발해버렸다.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플레이어 무리의 몰골이 너무나 처참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라시드는 플레이어 무리가 입은 상처들이 던전에서 얻은 게 아니라, 방금 전에 공격당해서 얻은 상처라는 알아보자마자  사디크를 찾았다.


“영감, 영감님은 어디 있어?”


선두의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사내를 붙잡은  라시드는 대답하지 않으면 그를 집어삼킬 것처럼 다그쳤다.

“알 라시드, 나는 여기 있다. 고생한 전사들은 그만 괴롭히고 나나 도와주지 그러나.”


알 라시드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칼리프, 그에겐 아버지나 다름없는 익숙한 얼굴이 그가 기억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서있었다.

“여, 영감님...?”
“뭘 사람 죽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나. 예전처럼 재생 못 시키는 것도 아닌데.”


사정없이 떨리고 있는 알 라시드의 동공에 비친 알 사디크의 왼팔에는 붕대가 감겨있었다. 원래 자리하고 있어야할 왼손은 사라진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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