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화 〉탐식마(貪食魔)
구구극-
쇠구슬비가 떨어진다면 이런 느낌일까? 류 현은 검은 안개의 장막을 두드리는 마력의 파도에 업힌 세아를 살폈다. 세아는 여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세아의 상태를 좀 더 살피고 싶었지만 장막을 누르고 있는 압력이 그런 여유를 부릴 정도가 아니었다.
‘저거 그거겠지? 개미지옥.’
류 현은 마지막 순간에 보았던 녹색빛과 자신의 발밑으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모래의 흐름을 보고 ‘마녀’가 무슨 일을 벌인 것인지 유추해내었다.
청뢰, 유성우와 같은 유니크 아티펙트인 개미지옥. 그것이 벌인 현상인 게 분명했다. ‘마녀’가 전생보다 더 강력한 마법들을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도 꽤 높겠지만, 녹색빛과 힘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 류 현에게 확신을 주었다.
‘대체 무슨 재주를 부렸길래...그 때 본 거랑 출력이 비교도 안 되잖아.’
전생에서 개미지옥은 3차 ‘대소환’ 초기에 사라진 유니크 아티펙트였다. 사하라 사막에서 실행된 아프리카 봉쇄선 구축작전에 투입되었다가, 행방이 묘연해진 기물.
이름처럼 다수의 괴수들을 구덩이 한 점으로 끌어당겨서 매몰시켜버리는 마법을 품고 있는 이 아티펙트는, 류 현도 어디에서 발견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아티펙트였기에 찾아 나설 생각은 없었다.
또 개미지옥의 특성상, 류 현의 주적인 네임드 몹에게는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거라는 예상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류 현이 펼친 검은 안개 장막을 두드리고 있는 압력은 전혀 예상외의 것이었다. 퍼플이하의 괴수들을 한꺼번에 처리하기에는 유용하지만, 상위 괴수에게는 별 효과가 없을 거라고 생각한 류 현의 예상을 비웃는 것 같은 위력.
‘유니크 아티펙트들 최대 출력은 나도 정확히는 모르니까, 이 정도 출력이 나오는 게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대체 저게 왜 들고 있는 거야?’
‘마녀’가 류 현을 공격해오기 직전에 칼리프 클랜을 습격해서 빼앗은 전리품이라는 걸 류 현이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류 현은 점점 위에서 찍어 누르는 것에서, 한 점으로 끌어당기는 것으로 바뀌고 있는 마력의 흐름을 경계하며 류 현은 머리를 굴렸다.
‘좋아, 개미지옥자체는 크게 위협적이진 않아. 문제는 다른 유니크 아티펙트를 가지고 있을 경우인건데 뭘 가지고 있는지 내가 알 수가 있나.’
‘...별 수 없지. 정신 바짝 차리는 수밖에.’
류 현은 세아와 자신의 허리를 묶는 벨트를 채워놓고는, 세아를 한 번 더 돌아봤다. 아직 멍한 상태인 게 마음에 걸렸지만, 방금 전까지 나눈 이야기를 생각하면 조절만 잘 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강림’에 걸어놓은 자물쇠들을 풀어헤쳤다. 자신이 정한 제어한계인 딱 반만큼만.
몸에서 스며 나오던 검은 안개가 그치더니, 다른 검은 것이 맹렬하게 몸 주변을 휘돌기 시작했다. 업혀있는 세아까지 포함해서! 류 현의 눈 흰자위가 검정으로 물들어갔다.
“하나, 둘!”
퍼엉!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모래먼지가 솟아올랐다. 단숨에 ‘마녀’의 지척까지 솟아오른 류 현은 허공에 대고 갈고리처럼 세운 검지와 중지를 내휘둘렀다.
후왕! 한 박자 느리게 류 현의 몸 위로 휘돌던 검은 것이 커다란 발톱이 되어 ‘마녀’를 내리찍었다. 하지만,
슈슉! ‘마녀’는 이미 모든 공격에 대해서 대비를 마친 상태였다. 검은 발톱이 피부에 닿자마자, 조건부 텔레포트가 발동되었다.
다시금 류 현의 뒤를 잡은 ‘마녀’는 바로 공격하지 않고, 오른손에 쥔 녹색보석에 검은 안개를 다시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녹색보석이 터질 것처럼 빛을 내뿜었다. 류 현은 세아의 외침이 없었음에도 ‘마녀’를 향해서 바로 뒤돌았다. 그와 동시에 ‘마녀’가 다시금 손가락을 위에서 아래로 내휘둘렀다.
쿠웅! 퍼엉! “크윽...뭐야...?”
류 현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모래바다 위였다. 류 현은 자신을 찌부러뜨릴 것처럼 내리 눌러오는 압력에 등 뒤에 업힌 세아쪽 방비를 더 강고히 하고는 굽혀진 무릎을 펴려고 했다.
‘이게...개미지옥이라고?’
하지만 바로 일어설 수가 없었다. 위에서 내리누르는 압력과 아래에서 끌어당기는 압력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허벅지 근육이 찢어질 것 같았다. 업혀있는 세아를 신경 쓰느라 더욱 힘겨웠다.
‘찍어 누르는 거랑 끌어당기는 힘이 동시에 이렇게 작용한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류 현이 아는 바로는 개미지옥을 발동시켰을 때 아주 잠깐 동안만 위에서 누르는 압력이 작용하고, 그 뒤로는 구덩이 중심부로 끌어당기는 힘만 작용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마저도 이렇게 강하지도 않았다. 전생에서도 이정도 위력을 보였다면, 류 현은 어떻게 해서든 개미지옥을 확보하려고 들었을 것이다.
‘사용자의 수준 빨을 탄다고 쳐도...아니면 엘더 리치놈마냥 다른 괴수 갈아서 아티펙트로 만들어온 건가? 젠장, 골고루 골치 썩이는군.’
류 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는 남은 반의 자물쇠들도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외견적인 변화는 없었다. 오히려 맹렬하게 휘돌던 검은 것의 움직임이 수그러들었다.
류 현의 머릿속은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젠장, 이건 또 뭔...’
류 현이 읽을 수는 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정보들이 넘실거렸다. 류 현은 자신을 질식사 시킬 것처럼 범람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엘더 리치의 마법들에 대한 것을 잡아채었다. 그것들도 이해할 수 없긴 매한가지였지만,
후웅! 쓸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류 현의 몸이 보이지 않는 낚시에 채인 것처럼 휙 떠올랐다. ‘마녀’와 같은 높이까지 도달한 류 현은 ‘마녀’가 한 것처럼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붙여서 쭉 펴고는 마력을 밀어 넣었다. 검은 것이 그의 의지에 호응해서 주욱 늘어나더니 채찍 같은 꼴이 되었다.
엘더 리치와 그 부하 리치가 보여준 부유 마법과 불채찍 마법! 자신이 씹어 삼킨 적들의 마법이 류 현의 손끝에서 부활했다.
‘마녀’도 가만히 보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류 현의 어깨가 움직임과 동시에 ‘마녀’의 손이 재차 위에서 아래로 내휘둘러졌다. ‘마녀’가 이번에 발동지점으로 잡은 것은 류 현의 오른쪽에 위치한 모래바다! 좌표가 설정되자 순식간에 인위적인 인력이 발생하며 류 현의 오른팔을 잡아끌었다. 류 현은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쉬릿! 그 와중에도 류 현은 타격점을 아예 놓치지 않고 ‘마녀’의 머리를 범위 안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채찍은 ‘마녀’에게 닿지 못하고 허공을 휘젓는 것 같은 감각만이 있을 뿐이었다. 류 현은 혀를 찼다.
‘이걸로 확실해졌군.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눈깔에 시커먼 빛이 들고 나서 내가 아는 ‘마녀’로 변했어. 완전 ‘강림’상태여도 타격은 아마 안 들어갈 거야. 대신 판단력은 다 날아간 거 같은데.’
결론을 내리자 류 현은 손을 휘저어 추락하던 몸을 허공에 고정시켰다. 화련이 보면 이젠 마법사 노릇까지 한다고 어이없어 하겠지만 류 현은 이해를 하고 지금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 안에 들어와 있는 엘더 리치의 지식을 쓰고 있을 뿐.
화련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모르는 마법을 어떻게 그리 마음대로 쓰냐고 따졌겠지만, 그 부분이 가장 궁금한 것은 류 현이었다. 눈앞의 변화를 종처럼 종잡을 수가 없는 네임드 몹 때문에 그것에 집중할 수는 없겠지만.
‘몇 가지 더 시험해봐야겠지만...저 녀석이 잠수 탈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마녀’의 도주를 우려하던 류 현에게 지금의 변화는 나쁘진 않은 것이었다. 유니크 아티펙트를 어디서 주워와서 자신을 당황시키긴 했으나, 그것이 개미지옥이니 감당하기 힘든 정도는 아니었다.
손가락에 아직 매달려있던 검은 채찍을 지워버린 류 현은 ‘마녀’가 모래의 바다 위에 벌여놓은 참상을 곁눈질 했다.
처음 개미지옥을 발동시킨 곳은 이미 싱크홀이라도 발생한 것처럼 공동이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고, 두 번째 발동지점은 뭘 어떻게 한 것인지 아직도 오른팔이 당겨지는 것 같은 기분인데 구덩이가 아니라 손가락 두 마디 보다 조금 큰 좁은 구멍이 모래만 계속 빨아들이고 있었다.
류 현조차 본 적 없는 개미지옥의 사용법. 전생에 개미지옥을 보유했던 이 보다 ‘마녀’의 이해도가 높다는 걸 여지없이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좋게좋게 생각하자. 저거 잡으면 개미지옥도 같이 딸려오니까. 못 찾을 아티펙트 찾아서 앞에 대령해줬으니 당연히 가져가야지.’
“혀, 현아.”
“어? 누나 정신 들었어?”
“너, 너 지금...”
류 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세아의 말을 막았다. 뭘 말하려는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강림’상태의 류 현이 정상이 아니라고 만류하려는 말일 것이다.
“누나, 나중에. 저거부터 잡고 나서 천천히. 그 때처럼 방향 지시해 줄 수 있겠어? 힘들면 굳이 안 해도...”
“할 수 있어. 할 게. 하게 해줘.”
류 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을 관찰하는 것 같은 시선을 보내고 있는 ‘마녀’를 흘겼다. 방금 전의 기습과 연달은 공격이 거짓말 같았다. ‘여전히 상태가 좀 이상하긴 한데...도망만 안 가면 되는 거지.’ 그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만족했다.
그리고 팀 동료들이 들었다면 기함 했을 생각을 품은 류 현은,
‘그 때처럼 잡으면 되겠다.’
한 차례 심호흡 하고는,
퍼엉! 허공을 박차며 마녀의 반대쪽으로 몸을 날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검은 것이 별동별의 꼬리처럼 길게 늘어졌다.
[...? 우르스!]
의외의 상황에 당황한 것인지 ‘마녀’는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류 현을 따라 ‘마녀’의 모습이 사라지자, 모래를 끊임없이 빨아들이던 개미지옥 구덩이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
“뭐, 뭐야. 영감님이 왜 지금 이리로 와?”
알 라시드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감시위성으로 류 현의 움직임을 확인하다가 겨우 25시간 만에 단잠에 빠졌던 알 라시드를 깨운 건 자파르 알 사디크의 귀환 소식이었다.
던전에서 현실로 돌아온 날에 장비 점검 겸 휴식으로 하루를 보내고, 보무도 당당하게 개선식을 가질 예정이었던 알 사디크의 갑작스러운 귀환 소식은 알 라시드를 당황스럽게 했다. 무슨 일이 있지 않는 이상 항상 지키던 루틴을 깰 리가 없었으니까.
던전에서 돌아온 알 사디크가 현실로 돌아오자마자 좋지 않은 소식으로 휴식에 방해받지 않게, 그 동안 있었던 사고에 대해서 입단속을 철저히 한 알 라시드에게는 아닌 중의 홍두깨가 따로 없었다. ‘어디서 새어나간 거지? 핫산 아저씨가 아무리 날 싫어해도 영감님 쉬지도 못하게 그랬을 거 같진 않은데.’
클랜건물 정문을 향해 걸어가면서 머리를 열심히 굴려봤지만, 알 라시드는 도무지 범인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윽고 정문을 들어서고 있는 플레이어 무리를 발견했을 때, 알 라시드의 머릿속은 뒤엉키는 걸 넘어서 폭발해버렸다.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플레이어 무리의 몰골이 너무나 처참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알 라시드는 플레이어 무리가 입은 상처들이 던전에서 얻은 게 아니라, 방금 전에 공격당해서 얻은 상처라는 알아보자마자 알 사디크를 찾았다.
“영감, 영감님은 어디 있어?”
선두의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사내를 붙잡은 알 라시드는 대답하지 않으면 그를 집어삼킬 것처럼 다그쳤다.
“알 라시드, 나는 여기 있다. 고생한 전사들은 그만 괴롭히고 나나 도와주지 그러나.”
알 라시드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칼리프, 그에겐 아버지나 다름없는 익숙한 얼굴이 그가 기억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서있었다.
“여, 영감님...?”
“뭘 사람 죽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나. 예전처럼 재생 못 시키는 것도 아닌데.”
사정없이 떨리고 있는 알 라시드의 동공에 비친 알 사디크의 왼팔에는 붕대가 감겨있었다. 원래 자리하고 있어야할 왼손은 사라진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