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28화 〉탐식마(貪食魔) (228/429)



〈 228화 〉탐식마(貪食魔)

승하가 정신을 차린 건 그로부터 5시간이 지난 후였다. 승하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목구멍을 긁어내는 것 같은 통증이 없어졌다는 사실에 놀랐다.

불꽃을 뒤집어 쓸 때 화기가  안쪽까지 미쳐서 목구멍으로 고형물을 삼킬 수 없을 지경이라 회복이 더욱 더뎌졌는데,  끔찍했던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것이다.


승하는  주변을 손으로 더듬어 보다가 따끔하는 통증에 놀라 손을 떼었다. 손가락은 불에 그을린 고무장갑 같은 꼴 그대로였다. 목 주변부에서 느껴지는 통증도 그대로인 걸 보면, 나은 건 목구멍 안쪽뿐인 모양이었다. 승하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화련이었다.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올 것처럼 퀭한 안색의 화련은 아무 말도 없이 승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까, 깜짝이야.  있는 기척을 안 내고 그래?”
“...”

화련은 아무 대꾸가 없었다. 승하가 일어나려는 기색을 보이자 팔을 빌려주고 나서는 계속해서 뻔히 쳐다보기만 했다.

“...왜 그래? 나 뻗어있는 동안 무슨 일 있었어?”


그랬으면 이렇게 멀쩡한 침대에 누워있을 수가 없는데. 승하는 물으면서도 무슨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휘두른 일 검은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예술적으로 들어갔으니까. 류 현에게 들은 바로는 놈들도 아무런 희생도 없이 불사신 상태를 유지하는 건 아니었으니, 어지간해서는 바로 덤벼 오진 못할 터였다.


“아뇨, 아무 일 없었어요. 혜라도 옆방에서  자고 있고...”


지금 같은 상황에서 방을 따로 쓰는 건 별로 좋은 판단은 아니었지만, 승하와 같은 방에 두면 계속  것 같은 얼굴을 해서 어쩔  없이 희란을 붙여서 떼놓은 상태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표정이 아닌데?”


말끝을 흐리는 화련의 표정이 말과는 다르자 승하는 그리 물었다. 화가 났다, 당황했다, 슬퍼한다 이런 식으로 어떻게 형언하긴 힘들지만, 화련의 표정은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이런  환자한테 묻고 있을 때가 아닌데.”


화련은 고개를 떨구고 잠깐 동안 바닥을 보더니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뭐 그건 또 무슨 소리...”
“그거 어떻게 한 거에요?”
“엥?”


화련은 뭐가 망설여지는 지  번  바닥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번에는 먼젓번 보다 바닥을 보는 시간이 조금 길어졌다.


“쓰러지기 전에 ‘업화의 아이들’을 벴잖아요.  어떻게 한 거에요?”
“응? 그냥 칼을 슥하고...”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잖아요. 못 가르쳐주겠으면 차라리 그렇다고...”
“너 왜 이래?”


화련이 벌떡 일어서서 소리를 꽥 지르자 승하는 의아한 얼굴로 화련을 살폈다. 화련의 얼굴에는 스스로도 다 규정하지 못할 정도로 복잡한 감정의 회오리가 몰아치고 있는  같았다. 승하는  중에서 화련을 이리 만든 가장  원인을 읽어낼 수 있었다.

‘조급함? 뭐 때문에?’

그녀들이 처한 상황이 빈말로도 좋다고는  수 없지만, 자신이 환자라고 칭하는 이에게 소리를  정도는 아닐 것이다. 화련이 그런 성격은 더더욱 아니었고.

승하는 일단 화련의 팔을 붙잡아 자리에 앉혔다. 뿌리치려고 들던 화련도 팔에 느껴지는 생경한 촉감에 움찔하더니 승하가 이끄는 대로 다시 자리에 앉게 되었다.


“대체 뭐 때문에 그래? 내가 이런 말하는 건 좀 웃기긴 한데 지금 이러는 거 너답지 않거든?”
“.....”

화련은 고개를 숙인 채로 한 숨을  쉬더니, 그걸로는 모자라는지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그러고도 진정이 안 되는지  허벅지를 꼬집기도 했다. 승하는 다그치지 않고 진득하게 기다려주었다.


“환자한테 이런 걸 묻는 게 아닌 거 나도 알아요.”
“아니 뭐, 난 상관없는데. 뭔데 그래?”
“환자가 아니어도 기분 나빠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요.”
“뭐 길래 이렇게 무게부터 잡는 거야.”

‘이래놓고 별 거 아니기만 해라.’ 승하는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이 작지만 당찬 아가씨는 자기네 대장처럼 별 거 아닌 일을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가족이 오래 아파서 그런 걸까.’

“아무리 같은 팀이라도 말하기 전에 기술이나 깨달음에 대해서 캐묻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것도 아는데, 정말 급해서 그래요. 그러니까...무슨 대가든 간에 치를 테니까..”
“엥?”

승하의 높은 소리에 화련은 움찔하며 몸을 뒤로 빼었다. 동시에 화련은 생각했다. ‘내가 미쳤지. 아무리 눈이 멀었어도 앓아누운 사람한테...’

하지만 승하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뭐야, 그거 때문에 그렇게 뜸을 들였어? 근데 너 칼질 안하잖아. 혹시 나 몰래  들고 수련이라도 한 거야?”


승하는 불쾌해하지도, 경계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김빠진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얼굴의 대부분이 붕대로 가려져 있었지만, 두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기분이 충분히 전해졌다. 그 눈을 보고 있자니, 괜히 긴장했다는 생각마저 드는 화련이었다.

“...진짜 자기가 뭘 한건 지 모르는 거에요?”
“아니 난 그냥 저놈들 쫓아내야겠다 하고 휘두른 것뿐인데. 평소랑 다르게 이쪽으로 베면 되겠다 싶은 느낌이 있긴 했는데...너 이런 거 궁금해서 물어본 건 아닐 거 아냐?”
“말도 안 돼. 어떻게 감으로 그렇게...”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건데. 말을 해줘야 나도 알지.”


화련은 이미 엉망으로 들쑤셔진 머리를 재차 뒤엎더니 툭 내뱉었다.

“언니가 그 때  공격. ‘마녀’한테 통할지도 몰라요. 아니, 아마 십중 팔구는 통할 거에요.  때  ‘마녀’상태에서 변한  없다면.”

정말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승하는 놀라기보다는 의아함을 느꼈다. ‘내 느낌상으로도 될 거 같긴 했는데 얘가 그걸 어떻게 알지.’

“내 눈이  못된 게 아니면, 순간적으로 그 빌어먹을 정령들이 서있던 공간을 주변이랑 아예 단절시켰으니까. 아마도 통할 거에요.”
“어...그러니까. 네 눈에 보일 정도로 내 칼질이 공간을 긁었다고? 그놈들이 도망간 것도 그거 때문이고?”
“긁었다기보다도...연결을 끊은 거에 가까운데...언니 지금 내 말 하나도 이해 못하고 있죠?”

승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결을 끊었니 어쩌니 해도 앞뒤 사정을 모르는 승하에게는 별세계 이야기일 뿐이었다.


“나도 언니가 이해할 정도로 자세하게 설명은 못 해요. 언니도 그 때 어떻게 한 건지 설명 못하는 것처럼. 아님 설마 설명  수 있어요?”
“아니. 하라면 하긴 할 텐데 너 아마 듣고 화낼 걸.”

승하가  수 있는 말은 팔이 가벼웠다, 바람을 타는 것처럼 결을 갈랐다 처럼 승하 본인 말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뿐이었다. 그녀도 아직 자신이 뭘 한 건지 제대로 이해하진 못한 상태였다.

“그거랑 같아요. 언니가 걔네 본체랑 연결 끊어버리는 거 보고 혹시나 했는데...역시 나네요. 뭐 때문에 그렇게 마음 졸였는지. 에휴.”
“에이,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였어도 상관없었어. 말해준다고 뭐 닳는 것도 아니고. 한   보여줄까? 저번처럼 한 방에 될지는 모르겠는데, 혹시 알아? 보고 막힌  뚫릴지.”


승하의 시원스러운 대꾸에 화련은 빤히 그녀를 쳐다봤다. 승하가 왜 그러냐는 시선으로 맞받아치자, 화련은 픽 웃고 말았다.


“됐네요. 어차피 또 내 핑계 대고  휘두르려고 그러는 거죠? 혜라한테 욕먹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꿈 깨세요. 칼에서도 손 떼시고.”
“야, 어떻게 사람 선의를 그렇게 해석해?”

볼멘소리를 내던 승하는 소란에 깨서 들어온 혜라에게 칼을 든 것을 들키곤 거의  시간 동안 누워서 잔소리를 들어야했다.


***


‘마녀’는 자신의 왼손아귀 위에서 뒹구는 검은 안개 덩어리를 보며 웃었다.  현에게 에너지 드레인을 사용해서 뜯어낸 검은 안개는, ‘마녀’에게 반항하는 것처럼 구 형태를 거부하며 이리저리 들쑤셔대었지만  효용은 없었다.

‘마녀’는 자신의 오른팔을 도려내었던 저택에 돌아오고 세 시간이 넘도록 검은 안개를 주무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검은 안개의 반항은 수그러들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마녀’는 당장이라도 구를 뛰쳐나올  같은 검은 안개 덩어리를 움켜쥐더니,

푸욱! 오른쪽 어깨가 붙어있었던 절단면에 쑤셔 넣었다. 검은 안개가 폭발하듯이 쏟아져 나왔다.

[오웬의 빛.]

피이잉! 읊조림과 동시에 오른쪽 어깨의 절단면에서 오렌지 빛 섬광이 터져 나왔다. 검은 안개를 베어낼 것처럼 밝게 발한 빛은, 검은 안개를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잡아끌기 시작했다.

검은 안개가 뛰쳐나가고, 빛이 검은 안개를 움켜쥐는 실랑이가 반복되었다. 실랑이가 반복될수록 검은 안개와 오렌지 빛 섬광은 천천히 뒤섞여서 사람의  같은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마녀’는 고통스러운 기색도 없이, 검은 안개가 절단면에 달려 붙어서 혈관처럼 얇은 선을 꽂아 넣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이윽고, 오 분 정도가 지났을 때 ‘마녀’는 사라진 팔 대신 번개 구름마냥 우르릉 거리는 검은 안개와 오렌지 빛 섬광으로 이루어진 팔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마녀’는 몇 번 팔을 휘둘러보다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우르스.]

슈슉! ‘마녀’의 몸이 공간의 뛰어넘어 커다란 ‘점’을 향해서 날아갔다. ‘마녀’가 시야를 되찾았을 때, ‘마녀’의 발아래에 펼쳐진 광경은 이미 수차례 봤던 것이었다.

원정을 끝마치고 현실로 귀환한 플레이어들이 귀환 전에 잠깐의 휴식을 가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플레이어 무리가 자파르  사디크가 포함된 칼리프 클랜의 최정예 부대라는 것과, 던전에서 깨달음을 얻고  진보한  브레이커, 마람 압둘아지드가 있는 무리라는 건 ‘마녀’에게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마녀’의 눈에는 온 세상 빛을 빨아들일 것처럼 강렬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검고 커다란 ‘점’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마력적인 흐름과 화련처럼 공간 왜곡을 볼 수 있는 눈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었기에 거리 따윈 상관없었다.
이전의 ‘마녀’였다면 정령들을 부려서 간을 보거나, 그들이 잠들었을 때를 노렸겠지만 지금의 ‘마녀’는 그럴 이성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문명수준에 맞지 않는 강력한 아티펙트의 존재를 경계할 지성도 남아 있지 않은 ‘마녀’는 검은 안개와 빛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오른손을 펼치며 읊조렸다.

[바루스.]

콰쾅! 번개와 폭발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