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27화 〉탐식마(貪食魔) (227/429)



〈 227화 〉탐식마(貪食魔)
피잉!

“씨발.”


류 현은 격렬한 자기혐오에 휩싸인 채 몸을 앞으로 던졌다. 등에 업혀 있는 세아 때문에 그대로 구르지는 못했다. 류 현은 슬라이딩 자세에서 벌떡 일어나서 재차 앞으로 몸을 던졌다. 이번에는 앞에 있는 ‘마녀’를 노리기 위해서!

휙! 그러나 류 현이 내휘두른 주먹은 ‘마녀’에게 닿지 못했다. ‘마녀’가 범위 내에 있었음에도 주먹이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통과해버린 것이다. 검은 안개도, 파쇄권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허공에 북 때리는 소리만이 남았다. 류 현은 혀를 차며 뒤로 물러섰다.


‘역시 이 상태로는 안 먹히나.’


‘강림’. 그것밖에 없을 것 같았다. 화련과 승하, 희란이 모두 학을 떼며 반대한 자살 특공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누나가 괜찮으려나?’

류 현이 전생과는 전혀 다른 효과를 발휘하는 것을 보고도 난적을 상대로 ‘강림’을 꺼리고 있는 이유는 세아의 존재였다. ‘강림’을 사용한 전투를 바로 뒤에서 본 뒤로 세아는 류 현이 말을 걸때마다 흠칫흠칫 놀라했다. 거기에 잊을 만 하면  괜찮냐는 말까지.


 현이  그러냐고 물어도 도통 입을 열지를 않으니 정확히 뭐가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엘더 리치 때처럼 정신줄 놓지는 않았는데...그 상태에서 흘리는 마력이 누나한테 안 좋게 작용하는 건가?’


누구도 전투중인 자신과 이렇게 딱 붙어서 있어본 적이 없으니 참고할만한 것도 없었다.


‘최대한 짧게 가보자.’


류 현은 이를 악물고 닷새 넘게 수면을 취하지 못해서 조금은 무뎌진 집중력을 날카롭게 가다듬었다. 그의 몸 안에 똬리를 틀고 있던 검은 안개보다 검은 뭔가가 스멀스멀 스며 나왔다. 물론 세아와 닿은 부분에는 스며 나오지 않도록 했다.

눈이 검은 것들에 잠기면서 세아가 흠칫하는  느껴졌지만, 류 현은 최대한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애썼다. ‘강림’ 상태에서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그냥 내상으로는 끝나지 않으니까.

검은 것들이  윤곽을 타고 흐르기 시작하자 감각이 확장되는 것이 느껴졌다. 마법의 여파로 엉망으로 뒤엉킨 마력, 텐트가 타면서 피어 올리는 열기, 떨지 않는 척하려고 애쓰고 있는 세아의 떨림까지.

유감스럽게도 ‘마녀’의 기척이나 화련과 세아가 말한 마녀가 점한 공간의 일그러짐 같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이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완전히 ‘강림’을 펼치지 않은 상태에서 내상이 안 터지고, 이렇게 원활하게 힘을 다룰 수 있는 것만 해도 어딘가 싶었다.

‘마녀’ 또한 변화를 느꼈는지, 바로 달려들지 않고 서서 경계했다. 입가에 걸린 그 소름끼치는 미소는 거두지 않았지만 말이다.


‘저건 또 어디서  잘 못 쳐 먹고 저러는 거야?’

류 현은 ‘마녀’의 사라진 오른쪽 어깨 부위를 힐끔거리면서 왼쪽 발을 뒤로 슬슬 뺐다. 50시간 만에 모습을 드러낸 ‘마녀’는 류 현이 기억하던 것보다 꽤나 많은 것이 바뀐 상태도 덮쳐왔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오른쪽 어깨부분부터 깔끔하게 사라진 것이었다. 지금도 시커먼 절단면이 보였는데, 무게 중심이 흐트러지거나 통증을 느낀다거나 하는 일과는 자신은 관계없다는 듯이 마음껏 날뛰었다.

어떻게 보면 이전보다  저돌적이고, 움직임에 망설임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소름끼치는 미소는 덤이었다.

‘눈깔 상태만 봐도 정상은 아닌 거 같긴 한데...진짜 그  공격 때문에 눈깔 돌아서 마구 들이대는 건가? 그럼...나야 좋지!’


 현은 카운트도 없이 바로 스타트를 끊었다. 류 현의 변화에 시선이 쏠려 있었던 ‘마녀’는 순간적으로 반응하지 못했다. 류 현은 두 팔을 벌리며 ‘마녀’에게 뛰어들었다.


후욱! “어?”


닿지 못했다. ‘마녀’의 몸은 그곳에 분명히 있었지만, 류 현은 ‘마녀’를 붙잡지 못하고 통과해버렸다. 류 현은 당황 속에서도 몸을 휙 돌리며 세아를 노출하지 않으려했다. 별로 좋은 판단은 아니었다.


슈슉! ‘마녀’가 텔레포트를 이용해서 그의 뒤를 잡아왔으니까!

 현은 바람빠지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세아가 외치기도 전에 직감했다. 뒤쪽이구나!


‘마녀’는 사우디아라비아로 남매를 납치하고 한 번 도망간 이후로 계속해서 세아를 노려왔다. 류 현을 보고 용사가 어쩌니 하면서 궁시렁거린 것과는 대조적으로 말이다.

 현은 덕분에 괴수가 사람간의 관계를 보고 공격 순위를 정할 수도 있다는 끔찍한 전제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래서 세아의 외침이 터져 나오기 전에 움직일 수 있었다. 도망치는 게 아니라면 어디로 나타날지는 뻔했다.

후우욱! 그의 몸에서 검은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공격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시야를 가리기 위해서, 적을 흠칫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단 몇 초간의 여유를 만들기 위해서 류 현은 코에 핏물이 들어차는 것을 감수했다. 뿜어져 나오는 검은 안개처럼 코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마녀’는  현이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해왔다.

“뭣?”

‘마녀’는 물러서지도, 시야가 걷힐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았다. 검게 변한 눈을 빛내며 검은 안개를 정면으로 뚫고 들어왔다. 류 현은 예상외의 사태에  박자 늦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마녀’의 손이 가슴팍에 닿았다. 류 현의 이성이 아닌 본능이 반응해 검은 안개를 더욱 거세게 내뿜었지만 ‘마녀’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오히려 ‘마녀’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입가만 웃는 것이 아니라 눈까지 날렵한 호선을 그렸다.


치이익! “크윽?!”

 현이 소름끼치는 기분을 느끼기도 전에 가슴에 뜨끔 하는 통증이 느껴졌다. 관통하는 마법이라도 당하면 누나가 위험하다!

류 현은 ‘마녀’의 팔을 붙잡으려고 하면서도 제 멍청함을 질책했다. ‘젠장, 못 잡잖아!’

하지만 류 현의 예상과는 달리 그의 손이 ‘마녀’의 팔을 붙잡았다. 류 현은 스스로 행해놓고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뭐야?  한 거지? 어 잠깐만?’

한 가지 가정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현은  생각을 확신으로 바꾸기도 전에 이미 놀고 있는 왼주먹을 움켜쥐고 잔뜩 뒤로 당겨 넣은 상태였다.

후욱! 뻐엉! 주먹에 잔뜩 먹여두었던 마력이 폭발하며 허공을 찢어놓았다. ‘마녀’에게는 닿지 못했다. 주먹이 닿는 것과 동시에 ‘마녀’가 모습을 감춘 것이다.


이 나라로 처음 납치된 날처럼 주먹으로 때린 느낌은 났는데, 대상은 사라져버린 그런 상황. 외부에서 물리력이 들어오면 어디로 날아가게 마법이라도 짜둔 것일까? 화련이 없는 상황에서 류 현이  수 있는 건 주먹구구식 추측 정도였다.


류 현은 뜨끔 했던 가슴부분을 쓸어내리면서 한숨을  쉬었다. 순간적으로 너무 당황해서 헷갈리긴 했지만, 가슴에 손을 대었을  ‘마녀’가 한 짓은 다른  아니라 에너지 드레인이었다. 전생의 ‘마녀’도 가지고 있었던 기술. 이번 공략의 키포인트.


‘뭐 때문에 에너지 드레인을 지금 쓴 거지? 마력이 딸릴 정도로 밀어붙인 것도 아니고, 나도 멀쩡했는데?’


다른  같았으면 괴수가 멍청한 짓을 알아서 해준다고 쾌재를 불렀겠지만, ‘마녀’의 달라진 태도와 소름끼치는 미소가 영 마음에 걸렸다. 세아와 자신의 관계를 유추해서 취약한 세아를 물고 늘어질 정도로 지능이 남아있는 녀석이 아무런 의미 없이 위험을 감수했을 것 같진 않았다.

‘한 번에 못 잡아서 다른 패턴이 튀어나온 건가? 젠장...역시 그  잡았어야 했어.’

좀 더 과감하지 못했던 자신을 자책하는 류 현을 상념에서 끄집어낸 건 세아였다.

“현아? 현아?”
“어어, 누나.  다리 아파? 쫓아낸 거 같은데 내려줄까?”

***


스릉 살갗이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칼이 칼집에서 몸을 드러내었다. 승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칼날 상태를 살폈지만, 그런 승하를 바라보고 있는 두 여자의 표정은 전혀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승하는 살갗이 보이는 부분보다, 붕대로 두르고 있는 부분이  많은 중상자였으니까.

“그게 그렇게 좋아요?”
“응, 전에는 이렇게 좋은 건  왜 몰랐나 싶을 정도로.”

화련이 반쯤 비꼬기 식으로 내뱉은 물음에도 승하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대꾸했다. 어떤 악의도 없어 보이는 맑은 미소에 화련도 더 뭐라고 하진 못했다.

하지만 백혜라는 전혀 아니었다. 혜라는 화련에게 이대로 물러날 거냐고 호소하는 눈빛을 보내도 화련이 뭐라고 할 기색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결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니.”

백혜라는 승하를 부르고는 손을  내밀었다. 승하는 그 의미를 모르진 않았지만, 멀뚱히 내민 손을 한  혜라를  번 보고는 가만히 있었다.

“칼 이리 줘요. 언니는 누워있어야 하는 상태라구요.”

희란은 말로 보태주진 않았지만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승하의 상태는 겉보기만으로도 서서 칼 뽑아들고 히죽거릴 상태가 아니었고, 내부로 들어가면 더했다. 희란이 걸러서 건네주는 마력조차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그리고 그건 전력 이탈 정도가 아니라, 보통의 경우에는 플레이어 활동 은퇴를 고민할 정도로 심각한 부상임을 의미했다. 플레이어로 살면서 몸 안에 구축해놓은 마력 유통로가 망가졌다는 의미니까. 최상위 플레이어의 회복력을 생각하면 그 정도까진 가진 않겠지만 말이다.


그렇더라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은퇴 생각이 아니라 목숨을 부지하는 것에 집중해도 모자랄 상황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으리라.


하지만 승하는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자기 칼을 가져다 줄 것을 요구했고 피를 토할 것처럼 외쳐대는 환자의 고집을 꺾을 이는 없었다. 백혜라는 승하가 히죽 웃는 것을 보자마자 바보 같은 결정이라고 후회했다.

저런 표정을 하고, 저런 눈빛을  승하는 언제나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랄 무대포 짓을 강행했었다. 지금 같은 상태에서는 정말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기행들을.


“다음 텔레포트 때 언니를 병원으로 보내야겠어요. 화련 언니, 평양까진 가능하죠?”
“응? 어. 되긴 되는데...돌아올 때 힘이 달려서 바로는 못 돌아올 거야.”
“그럼 제가 중간지점까지는...”
“야, 왜 멋대로 사람을 병원으로 보내고 그래? 아직 있을 만 하거든?”


승하가 항의했지만, 제대로 듣는 이는 없었다. 승하의 몰골은 어떻게 봐도 중환자였고, 지금 준 미라꼴을 하게 된 부상을 입은 지 이제 이틀 지나서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류  같은 경우가 아닌 이상, 아무리 플레이어라도 그런 상처를 회복하긴 힘들었다. 그냥 단순 외상도 아니고 내상 때문에 밥도 못 넘기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지난 이틀 동안 공세가 거짓말처럼 멎은 덕에 근처 군부대를 통해서 치료에 필요한 물품들을 보급받긴 했으나, 승하는 여전히 고형물을 제대로 삼키지 못했다. 이렇게 서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하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세 여자는 승하가 암울한 상황 때문에 허세를 부리고 있다고 확신했다.


당사자인 승하는 전혀 딴 생각이었지만.


‘진짜 끝내주네. 이럴 때  현이랑 대련 한  붙어봐야 할 텐데.’

 가죽은 오그라들어서 불에 대인 고무장갑 꼴이라 손끝에는 감각이 없다. 화기 때문에 팔 근육에 구멍이 뚫리기까지 해서 팔을 들 때마다 팔을 드는 것인지, 스스로를 고문하는 것인지 알  없는 지경이었지만 승하는 칼을 쥐고 있다는 사실이 마냥 즐거웠다.

몸은 괴로웠지만 정신은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탐지계도, 화련같이 공간 왜곡을 읽어낼 지식도 없는 승하가 가장 먼저 이상을 알아차린 건 그런 또렷한 정신 덕분이었다.


화르륵! 승하가 백혜라와 화련을 안고 뒹굶과 동시에 그녀들이 있던 자리에 불꽃에 쏟아졌다. 덕분에 온몸이 찢겨나가는 통증이 엄습했지만 승하는 집중력을 잃지 않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디가 터진 것인지 종아리 부분에 감겨있는 붕대가 빨갛게 물들었다.


“언니 뒤로 빠져서...!”
“희란아! 승하 언니 챙겨서 빠져!”

습격에 얼이 빠질 만도 하건만 화련과 혜라는 입을 모아서 승하를 챙겼다. 하지만 승하는 뒤로 빠질 생각은 물론, 둘의 보호를 받을 생각도 없었다.

그녀는 잔뜩 경계하고 있는 화련과 혜라의 앞으로 나섰다. 승하가 아무리 고집을 부려도 그녀의 표현대로 ‘짐덩어리’인 상태에서 그럴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혜라와 화련은 잠깐 동안 승하의 행동에 반응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불덩어리들은 열심히 움직여, 작은 눈사람 꼴을 갖추었다. 그렇게 늘어선 불의 정령의 숫자는 다섯.

다섯 체의 정령들은 이전보다는 조금 탁한 오렌지 빛 불꽃을 피워 올리며 네 여자를 관찰하는 듯하다가, 불현  손을 뻗어 불꽃을 내쏘았다.

화련과 혜라는 훅 다가오는 열기에 정신을 차리고, 승하의 앞을 가로막으려고 앞으로 내달렸다. 저 무식한 불꽃에 정면으로 맞서면 자신들도 부상 입을 게 뻔했지만, 그녀를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녀들은 승하가 웃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후웅! 일 검. 승하가 내보인 건   내려치기였다. 적의도, 검기도 뭣도 느껴지지 않는 그런 것.


하지만 건물을 꽉 채우는 것 같은 검풍에 모두가 자신이 하던 일을 잊은 것처럼 멈춰 섰다. 승하의 앞을 가로막아 서려던 화련과 혜라, 청뢰를 쏘기 위해서 차징 중이던 희란도, 불의 정령들이 내쏜 불꽃마저.

푸스스 짜자작! 파창! 검풍에 이은 진짜 위력은 반 박자 늦게 터져 나왔다. 가장 먼저 내쏘아지던 불꽃이 꺼졌다. 건물의 유리창들이 터져나갔다.

그리고,

[끼아아아!]


검의 간격에 있지도 않은 불의 정령의 몸뚱이가 불티를 쏟아내며 갈라졌다. 하나가 아닌, 반절이 넘는 3체가 터져나갔다. 남은 불의 정령 둘은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터져나간 놈들이 남긴 불티를 끌어 모으더니 훅하고 불이 꺼지듯 사라졌다.

너무 순식간의 일이라, 놈들이  공격에 녹여버린 콘크리트 벽이 녹은 자국이 아니었다면 백일몽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화련은 녹은 콘트리트 벽을  번 더 확인하고는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대체...대체 뭘 한 거에요?”

화련의 질문에 승하는  웃더니 핏물을 울컥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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