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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6화 〉탐식마(貪食魔) (226/429)



〈 226화 〉탐식마(貪食魔)

-좋아, 그럼 계약서 초안은 그렇게 잡기로 하고. 뽑아 놓을 테니까, 광년인지 마녀인지 잡고 나서 세부 조정가자고. 우리 애들은  해?-


류 현은 임시 캠프 주변에서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는 인기척들을 한 번 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꾸했다.

“예, 다들 꼼꼼하게  하시네요.”
-지체 돼서 습격에 휘말리면 나가는 건 자기 목숨이니까. 그나저나  의외네.-
“예?”
-절대로 사체들 안 팔 거라고 생각했거든.-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관례상...”
-그 관례라고 해봐야 실제로는 나라에서 플레이어 삥 뜯는 거랑 다를 것도 없잖아?-

류 현은 잠깐 수화기를 떼고, 보이지도 않는 알 라시드의 얼굴을 상상해봤다. ‘이 인간이 왜 이런 소리를 하지?’

자신이 때려눕힌 괴수들의 사체를 구입하는 인간이 할 소리가 아니었다. 류 현이 때려눕힌 괴수들이 아직까지 발견이 안 됐거나, 한 두 개체 밖에 관찰이 되질 않아서 전부 실험실로 직행한 놈들이니 더했다.

류 현은 칼리프 클랜과 사우디 정부 측에서 강짜를 부리는 상황도 예상해 뒀었다. 독점할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도 않았으니 어지간히 짜증나게 나오지 않는 이상은 어느 정도 떼서 팔 생각이었다. 칼리프 클랜 측에서 싸움을 걸어오지 않는 한 지금 같은 관계를 유지할 생각이었다. 거기에 이번 일로 도움을 받기도 했으니까.

“저야 이번에 귀 클랜의 도움을 많이 받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D-101 발톱하나로 퉁칠  있는 건데 뭘.-
“D-101요?”
-아, 형씨가 노테일 드래곤이라고  그 녀석 말이야. 발톱강도가 장난이 아니라던데. 아마 영감이  칼로 뽑힐 거 같은데.-
‘갑옷에 코팅하는 게 훨씬 나을 텐데. 유연성이 없다시피 해서.’


그렇다고 아직 알려지지 않은 정보까지 전부 깔 생각은 없었다. 거래는 할  있겠지만 지금은 한가롭게 그런 거래를 진행할 때가 아니었다.

-한국 정보를  알려주고 싶어도 쉽지가 않네. 비상이 걸린 것도 있고, 그쪽 팀이 완전 오지로 들어 가버리는 바람에...-
“아니었으면 피해가  커졌을 테니까요.”

류 현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자신의 지시로 개마고원까지 이동한 승하네 팀은 연락이 되었다가  되었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류 현의 본인이 하루 종일 위성 전화기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처지도 아니었기에  했다. 지금이야 시간 여유가 생겨서  라시드와 계약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그래 그렇겠지. 형씨한테는 면목이 없구만. 우리 사정 생각해줘서  사막에서 싸우는데 보급 말고는 해줄  있는 게 없다니.-
“저도  나라에서 싸우는 걸 의도한 것도 아니고, 칼리프 클랜에서도 이럴  알고 공략시즌을 지금으로 잡은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걸로 충분합니다.”

알 라시드는 그 뒤로도 행운을 빌어주는 말 몇 마디를 늘어놓고는 통화를 마쳤다. 알 라시드와의 통화가 끝나자 임시 캠프 주변에서 바쁘게 움직이던 이들도 헬기를 타고 떠나갔다. 류 현은 바로 옆 텐트 문을 들추고 들어갔다.

세아는 누가 들어온 것도 모르고 곤히 자고 있었다.


‘이럴 만하지. 훈련도  받은 사람이 사흘 넘게 선잠만 조금씩 잤으니.’

사막 횡단 내내 업혀있었다지만, 그 긴 시간 동안 업혀 있는 것도 보통일은 아니었다. 거기에 업은 류 현이 그냥 걷기만 했는가?

달려드는 괴수를 걷어차고, 잡아 뜯고, 공격을 피한다고 공중에서  바퀴 도는 등 도무지 편히 업혀있을 수 없게 마구 돌아다녔다. 세아가 플레이어로 각성하지 않았다면, 정말 피로로 초죽음 상태가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그것만으로는 그녀가 겪은 고초는  설명되지도 않았다.


세아는 괴수로부터 어떻게든 떨어뜨리고 싶은 동생 류 현이,  싫은 괴수와 치고받는 걸 바로 눈앞에서 계속 봐야만 했다. 세아의 입장에서는 트라우마 스위치를 연타당하는 그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류 현이 되지도 않는 장난을 걸면서 그녀의 상태를 살핀 게 괜히 그런 게 아니었다.

‘뭐 지금이야 당장 다른 길이 없어 보이니까 꾹 참고 있는 거겠지만. 녀석들을 다 잡고 나서도 문제구만...’

 현은 한 숨을 삼켰다.


‘역시  때 다 털어놨어야 했나?’ 그는 엘더 리치를 잡고 귀국했을 때, 세아가 다른 방식으로 ‘본다’는 사실을 알았을  자신의 상태를 떠올려봤다. 빈말로라도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특히 멘탈적인 부분이.


‘아니야. 그 때 털어놨으면 나도 정신 반쯤 나가서 안 해도 될 소리까지 다 했을 거야.’
‘문제는 이 일 마무리 되고나서 털어놔도 반대  할  같진 않은데. 하필이면 이런 놈들 상대로 싸우는 걸 봐서..’

 현의 머릿속에는 희망찬 미래보다는 세아와 감정소모를 해가며 싸우는 미래 밖에 그려지지 않았다.

‘...이것도 다 뻘 짓이지. 아직 코앞에 있는 것도 해결 못 했는데.’

류 현은 고개를 내저으며 부정적인 생각들을 떨쳐내었다. 류 현은 텐트 구석에 설치되어 있는 작은 냉장고에서 생수  통을 꺼내서 입에 물었다.


‘왜 공세를 멈춘 걸까?’


터덜터덜 자리로 돌아와 소리 내지 않고 앉은  현은 눈은 세아를 살피면서 고민했다. 이틀 전, 자신에게 팔뚝을 쥐어뜯긴 ‘마녀’가  공세를 멈췄는지에 대해서.


추측할 재료가 그리 많지 않았기에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내가 아는 한 영향을 줄만한  내 공격이 먹힌 것 정도지. 그게 내 앞에 안 나타나고 있는 동안 뭔 짓을 하고 다니는지 모르니까. 확신은 금물이긴 한데...’
‘나한테 공격당하고 나서 그 분의 화신은 어쩌고 했었지. 그 분이라는  자기보다 상위 괴수를 말하는 건가? 그게 아니면 배후가 있다는 소리인가? 하지만 말하는 걸로 봐선    있는 상태가 아닌 거 같았는데.’
‘그 분의 마력 어쩌고 하는 것도 켕기네. 칼리프 그 여자 뭔가 설명해주려면 확실하게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어중간하게 힌트만 주니까 괴수 헛소리까지 신경 쓰이잖아.’
‘젠장, 괴수가 하는 말도 해석하려고 머리를 싸매야 하나. 진짜 때려치우고 싶다.’

 현은 짜증을 온몸으로 표현할 기세로 팔을 내뻗으며 뒤로 넘어갔다. 어느새 다 마셔버린 생수통이 바닥에 뒹굴었다.

‘곧 있으면 48시간째지.’

‘마녀’는 류 현에게 공격당하고 도망간 이후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류 현을 표적으로 괴수를 몰아넣는 것도 그만 둔 것인지 류 현은 거의 이틀 동안 아무런 공격도 받지 않았다.


칼리프 클랜에서 사람을 보내서 이 임시 캠프를 차려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람이 상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공격이 다시 재개돼서 안에 있는 물건이 전혀 못쓰게 되더라도 약간의 호감을 사는 게  이득이라는 알 라시드의 계산 이었다. 세아를 그래도 더 나은 잠자리에서 재울 수 있게 된 류 현은 배려에 감사했으나,  고마움은 곧 조바심에 잡아먹혀 흔적도 남지 않았다.

‘젠장, 그냥 그 동안 전용기라도 뜯어내서 한국으로 갔어야 했나?’

당장 자국에 네임드 몹이 들어 와있는 걸 아는 칼리프 클랜이 전용기를 대뜸 내줄지 의문이었으나, 팀원들 걱정에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2시간 전쯤에 통화를 하긴 했지만, 그 통화는 류 현에게 근심거리를 안겨주었다.

‘화련 씨가 뭔가 숨기는 거 같았어. 이 상황에서 일 터질만한 건 누가 부상당하는 것 정도인데...그 때 엘릭서나 송장목 진액 좀 더 챙겨줬어야 했나.’

화련은 숨긴다고 숨겼으나, 너무 완벽하게 숨기려고 한 탓에 류 현은 이상 징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마녀’의 공격이 멈춰서 여유가 생긴 덕에 발견할 수 있는 이상이었지만.

‘12시간, 아니, 6시간만 더 참아보자. 그 때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괴수 사체를 넘기든 해서 한국으로 가자.  정도 시간 지나고 나면 칼리프 클랜 애들도 아주 대놓고 반대는 못할 거야.’


공세가 멈춘 이유를 알지 못했기에 판단이 늦어졌다. 업혀있던 세아의 존재도 과감한 판단을 내리는 데 걸렸다. 플레이어로 각성하긴 했으나, 각성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수련할 기회도 전혀 없었던 그녀가 비행기 폭발 사고를 견뎌낼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의미 없는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속으로 빌었다.

‘제발 6시간 동안만 얌전히 있어라...한국 가서 죽을 때까지 상대해 줄 테니까.’

***


[크흣...끄으윽...]

까드득 까득 지직

손가락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살벌했다. ‘마녀’는 어느 부유한 플레이어가 살았던 짐을 점거하고 그 집 바닥의 타일들을 맨손으로 긁어내고 있었다. 그 주변을 척 봐도 불안해하는 기색을 풍기고 있는 불의 정령들이 둘러싸고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타일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어서는 당연히 아니었다. ‘마녀’의 신경질적인 행동의 원인은 살점이 뭉텅이 뜯겨져나간 오른 팔뚝이었다. 정확히는 오른 팔뚝을 타고 어깨까지 영역을 넓힌 시커먼 것 때문이었다. ‘강림’을 사용한 류 현으로부터 옮겨 붙은 것.

[어떻게...! 어떻게  분의...화신이 이런 곳에...]

‘마녀’의 주변에는 불의 정령들 말고도 포위진처럼 둘러싸고 벽을 이룬 불꽃이 맹렬하게 타고 있었는데, ‘마녀’는 갑자기 그 불의 벽으로 손을 뻗더니 불꽃을 한 움큼 떼어내었다.

그리고는,


치이이익! 오른 팔뚝의 환부에 대고 비비적거렸다. 혈색이라곤 없는 ‘마녀’의 얼굴에 순간 붉은기가 돌았나 싶을 정도로 ‘마녀’는 고통에 겨운 얼굴이었다.

그러나 ‘마녀’는 원했던 결과를 얻지 못하고 손을 떼야만 했다.

정화의 불꽃은 팔뚝에 들러붙은 검은 것을 정화하기는커녕, 천천히 먹혀서 꺼져버렸으니까. ‘마녀’는 왼손이 닿기 전에 급하게 손을 물려야했다.

[있을 수...없는 일이야. 있을 수...없는...!]

‘마녀’의 부릅뜬 눈에는 핏발이 서있었지만 그보다 눈에 띄는 것은 먹구름처럼 흰자위 부분을 잠식하고 있는 검은색이었다. 아주 천천히, 하지만 물러서는 법 없이 영역을 늘려가는 검정의 영역이 넓어질수록 ‘마녀’의 외침은 더욱 격해졌다. 집이 들썩거릴 정도로 마력이 요동치는 것은 덤이었다.


발작하듯이 몸부림치던 ‘마녀’가 움직임을 멈춘 것은 거의 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마녀’의 움직임이 실 끊어진 인형마냥 덜컥 멎자, 불의 정령들이 걱정하며 다가섰다.


그리고 그게 ‘업화의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장면이 되었다.

죽은 것처럼 엎어져있던 ‘마녀’는 다가온 불의 정령 하나를 덥썩 잡더니, 제 마력을 있는 대로 때려 붓기 시작했다. 겉보기에는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한 몸인 다른 불의 정령들은  행동을 제지하려다가, 붙잡혀 있던 녀석처럼 뻣뻣하게 굳어서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마녀’의 손을 타고 마력과 검은 안개 같은 것이 불의 정령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움켜쥔 불의 정령을 원독 어린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는 ‘마녀’의 눈은 흰자위와 동공조차 보이지 않는 칠흑빛이었다.


마침내 ‘마녀’가 손을 떼었을 때, ‘업화의 아이들’ 또한 같은 눈빛을 띄었다.

‘마녀’는 그 모습을 만족감 어린 표정으로 내려다보다가, 제 오른 팔뚝을 힐끗 쳐다봤다. 여전히 검은 것이 불타는 것처럼 일렁거리고 있었다.

썩둑! ‘마녀’는 망설이지도 않고 오른쪽 어깨를 통째로 도려내었다. 몸에서 떨어져 나온 팔과 어깨부분이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지고,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마녀’는 가루를 발로 뒤채더니 씩 웃고는 읊조렸다.


[우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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