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화 〉탐식마(貪食魔)
승하는 멍하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에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별들이 푸지게 걸려있었다. 승하는 그 위로 이리저리 가상의 선을 그어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텄어. 이걸로는 못 잡아.”
승하는 입으로 내뱉은 말과는 달리 허리춤의 칼을 뽑아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칼날이 묵직한 빛을 품었다. 그녀는 천천히 처음 할 때처럼 마력검을 둘렀다.
푸스스 연푸른색 막이 씌워지자 대기가 갈라지는 것처럼 칼 주변에서 기괴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최정상급 플레이어치곤 각성한 능력이 보잘 것 없었던 그녀를 플레이어 정점에 올려준 기술.
마력검은 그녀의 의지대로 칼날보다 세치는 더 길어졌다가, 칼날 안으로 숨어들었다가를 반복했다. 누군가 이 매끄러운 마력 조종을 봤다면 찬사를 늘어놨겠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마력검을 보는 승하의 표정을 좋지 못했다.
‘컨디션에는 별 문제가 없어. 그런데 왜...?’
그녀는 낮에 있었던 싸움을 떠올렸다.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서 싸움이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그건 거의 농락에 가까웠다.
‘업화의 아이들’ 5체가 네 여자가 숙소로 삼고 있는 이곳 전 보급 창고를 습격한 건 점심때가 조금 지나서였다.
잔뜩 경계를 하다가 반나절 넘게 놈들이 재 습격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점심을 해결하고 있던 네 여자들에게 들이닥친 놈들은, 처음에는 3체가 희란을 물고 늘어졌다.
지난 사흘 가까이 되는 시간동안 희란이 수차례 청뢰를 흩뿌린 것 때문이었을까? 가장 방어가 취약한 희란이 몰리자 남은 세 여자는 어쩔 수 없이 질질 끌려다는 수밖에 없었다. 희란이 무너지면 이 팀의 유지력은 반 토막 정도가 아니라 아주 박살이 날 테니까.
처음부터 불리함을 안고 시작한 싸움에 ‘업화의 아이들’ 2체가 더 끼어들어오자, 승하는 희생 없이 이번 싸움을 마무리할 수 없다고 직감했다. 자신의 컨디션은 이번일 들어서 내내 좋지 못했고, 방어가 가장 취약하며 이 팀의 유지력의 핵심인 희란이 초장부터 방어용 아티펙트 대부분을 날리면서 도망치는 것조차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승하가 몸을 던져서 틈을 만들어보려는 그 때, ‘업화의 아이들’이 내뺀 건 정말로 천운이 아니면 설명 불가능한 일이었다. 10초 정도만 늦었어도 결과가 어찌되든 마력을 몸이 못 견딜 정도로 끌어낸 승하는 내상을 크게 입었을 테니까.
‘대체 왜 내뺀 거지. 뭔가 다급해 보였었는데. 설마 류 현이...?’
그 외에는 다른 추측거리는 떠오르지 않았다. 승하에게는 사지 한 두 개 잘리지 않고 내빼는 괴수는 아직도 적응이 안 되는 존재였다. 류 현이 ‘마녀’와 ‘업화의 아이들’이 전번 네임드 몹이었던 엘더 리치와 본 드래곤 같은 관계일거라고 내놓은 추측들이 그녀의 뇌리에 남아있었다.
‘마녀’의 부하인 놈들이 류 현을 상대하고 있을 ‘마녀’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 도망치는 것처럼 돌아갔다는 것도 그럴싸하지 않은가? 심증조차 되는대로 짜깁기한 것일 뿐이었으나, 승하는 왠지 맞는 거 같다고 확신이 드는 것을 느꼈다.
‘그에 비해서 내 성적은...처참하네.’
승하는 자조했다. 낮의 싸움뿐만 아니라, 이번 사건 내내 제 실력도 못 내고 빌빌거리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걔는 누나까지 돌보면서 뛰고 있을 텐데.’
심지어 친구는 전투시에는 짐이나 다를 바 없는 가족까지 혼자서 보호하고 있을 터였다. 이틀 가량 연락을 못하고 있지만, 납치된 첫날에 연락받은 바로는 류 현이 갑자기 미치지 않는 이상 세아를 떼놓고 싸울 것 같진 않았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없는 승하조차 그럴 테니까.
승하는 한 숨과 함께 산 아래쪽을 내려다 봤다. 한반도에 속한 땅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동산과 가파른 돌산들이 물결치는 것처럼 밀집해 있었다.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인 승하는 경외감까지는 느끼진 않았으나, 묘한 감상에 젖어들었다.
이곳 개마고원은 승하가 한창 주가를 높이며 ‘예거즈’의 자리를 굳혔던 북한 안정화 때 마지막으로 오게 된 곳이었다. 어떻게 보자면 추억이 서린 장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추억을 곱씹는 바보짓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승하는 당시 살아있었던 ‘예거즈’ 창립 멤버들과의 추억보다는 그 당시 자신의 상태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그 때는 칼 휘두르는 것보다 쉬운 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때의 승하는 거칠 것이 없었다. 옆에서 휴식기의 중요성을 세뇌하는 언니, 오빠들과 그녀가 닥치고 돌격을 감행하면 혼이 나간 것 같은 표정을 짓는 장성들이 귀찮게 굴었지만, 그녀는 자유로웠다. 아무도 돌격하는 그녀를 따라잡지 못했고, 그녀 앞에 선 괴수들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마력이 늘어날수록 펼칠 수 있는 검의 길이 더 넓어졌고, 더 오래 싸울 수 있었다. 싸움이 길어질수록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검의 길이 보였고, 그것을 따라가면 여지없이 저보다 두 세배는 큰 괴수들이 죽어나자빠졌다.
그것이 즐거웠다. 칼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다는 것이, 베고 베어도 넘어뜨릴 적이 있다는 것이 즐거웠다. 옆을 지켜주던 이들이 하나 둘 사라져가고, 현실의 벽을 마주한 뒤에 이전처럼 그러진 못했다.
그래도 그녀에게 칼을 휘두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지금처럼 꽉 막힌 것처럼 원래 쓰던 기술조차 잘 되지 않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인데 첫 슬럼프라니...나도 참...’
류 현의 ‘강림’을 보고 만들어낸 검은 검기가 잘 조절 안 되는 것을 넘어서 쓸 데마다 그녀의 몸에 자잘한 내상을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업화의 아이들’을 잡을 전략은 당연히 없고, 수단조차 없는 상황에서 전력의 유지력을 깎아먹는 내상은 아무리 작아도 치명적인 틈이 될 수 있는 문제였다.
‘어떻게 속이고 있긴 하지만 이제 슬슬 걔들도 눈치 채겠지.’
지금까지야 ‘업화의 아이들’의 히트 앤 런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라 어찌어찌 속여 넘겼지만, 이젠 슬슬 습격 패턴이 읽힐 정도로 경험이 쌓였으니 이상을 눈치 채는 건 시간 문제였다.
‘애들 끌고 그쪽으로 가겠다고 큰소리 쳐놓고 내가 제일 큰 짐이네. 하하...’
찝찝한 기분을 떨쳐내려고 칼춤이라도 한 번 추러 나왔는데, 그럴 기분조차 들질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칼을 쥔 손의 악력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궁상 그만 떨고 들어가야...”
“승하 언니 빨리 안으로!”
숙소로 삼은 전 보급창고 안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는 화련의 것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마력을 잔뜩 실은.
승하는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지 않고 보급창고로 몸을 날렸다. 안에 있는 인원으로는 견제는 가능해도, 놈들이 대놓고 돌격해올 때에 막을 저지력은 부족했다. 돌격해오면 그냥 중상으로는 몸을 뺄 수 없을 것이다.
날듯이 문까지 도달한 승하는 문고리가 손을 익힐 정도로 달아올랐다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문을 열었다.
“언니 잠깐...!”
후와악! 화르륵! “아악!”
치이익!
화련의 제지보다 덮쳐드는 불꽃이 훨씬 빨랐다. 승하가 문을 열자마자 본 것은, 기다렸다는 듯이 머리 위에서 달려드는 불꽃의 정령 2체와 불을 지르며 문을 가로막아서고 있는 정령 3체!
“끄으윽...”
“언니!”
“혜, 혜라야 가면 안 돼.”
“어떻게 좀 해봐요!”
플레이어의 몸뚱이마저 평범한 땔감 취급하는 정령의 불꽃에 휩싸인 승하는 미친 듯이 마력을 휘돌렸다. 억눌러둔 내상이 덧나면서 코와 입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승하는 멈출 수 없었다. 내상으로 인한 고통도 끔찍했지만, 밖에서 자신을 태우고 있는 이 불꽃을 막지 못하면 타죽을 게 뻔했으니까!
자신은 류 현이 아니었다. 탄 부분을 대충 긁어내고 하루 만에 재생시킬 수도, 이 불꽃을 대충 훑어낼 항마력도 지니지 못했다. ‘그래..류 현!’
승하는 피부 바로 아래까지 맹렬하게 휘돌리던 마력의 회전을 더욱 가속시키더니,
뻐엉! 자신의 내부가 엉망이 되는 걸 신경 쓰지 않고 몸 밖으로 폭발시켰다. 그녀가 내뿜은 마력과 함께 불꽃이 흩어졌다. 건물 지붕이 날아갈 정도로 강렬한 폭발이었지만, 그녀는 지붕이 날아가는 것은 보지 못했다. 흉흉한 기세에 ‘업화의 아이들’마저 흠칫해서 몸을 뒤로 뺄 정도였다.
승하는 그대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끄으으...헉!”
승하는 눈을 찌르는 것 같은 빛에 눈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따끔한 통증에 다시금 놀랐다. ‘왜 이래?’
눈가로 손을 뻗던 그녀는 재차 놀라는 수밖에 없었다. 눈가를 짚자 올라오는 통증은 둘째 치고, 손가락에 감각이 없었다. 눈가를 짚는데 까지는 문제가 없었는데, 손가락 끝 감각이 느껴지질 않았다.
“언니! 나 보여요?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겠어요?”
“...표정 보니까 혜라는 아닌 거 같은데.”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혜라의 얼굴이 잠깐 찌푸려졌다가 다시 돌아갔다. 승하는 자신의 발음이 이상하다는 것에 의구심을 느꼈지만, 혜라의 표정이 워낙 심각해서 말을 꺼내진 못했다. 느낌상 그 얘기를 꺼내면 혜라가 울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거야? 급한 불은 껐어도 죽을 줄 알았는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언니 쓰러지고 나서 그놈들도 얼마 안 가서 돌아갔어요. 돌아가는 꼴이 좀 이상하긴 했는데...지금 그게 급해요? 눈은 제대로 보여요?”
“응, 보여. 네 눈에 눈물 그렁그렁한 거 보니까 환각은 좀 보는 거 같긴 해.”
혜라는 그 농담으로 조금 안심했는지, 문 쪽으로 달려가더니 밖을 향해서 뭐라고 외쳤다.
승하는 놀랄 거리를 또 찾을 수 있었다. ‘저 거리인데 안 들린다고?’
플레이어인, 그것도 최정상급 플레이어인 그녀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생각보다 상태가 엉망진창인가 본데.’
곧 화련과 희란이 달려왔다. 화련은 여전히 다크써클이 짙게 낀 얼굴로 괜찮은 척을 하려고 애쓰고 있었고, 희란은 승하의 몸 여기저기를 살피며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어보임으로서 승하에게 힌트를 잔뜩 안겨주었다.
“내 꼴이 말이 아닌가 보네.”
그 말에 혜라가 고개를 숙이더니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해졌다. 승하는 통증을 애써 무시하며 손을 내저었다.
“울지 마, 울지 마. 운다고 해결되면 좋겠지만 내가 겪어본 바로는 별 도움이 안 되더라고. 내 상태가 어떤지는 너희들 표정 보니까 대충 알겠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너희들 표정 보면 내가 불벼락 맞은 게 꿈은 아닌 거 같은데.”
“언니가 그렇게 되고 나서, 언니 데리고 텔레포트로 대피하려고 했어요.”
“그놈들 옆에 있으면 공간좌표인지 뭔지 잘 안 찍힌다면서?”
괜히 자동차로 이곳까지 온 게 아니었다. 화련이 텔레포트를 남발 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었고, 놈들이 근처에 있을 경우 좌표 계산이 어그러져서 끔찍한 사고를 당할 수도 있었기에 최대한 자제했다. 24시간 감시 레이더 역할을 하는 화련에게 텔레포트까지 강요했다간 피 한바가지만 토하고 아무것도 없을 가능성이 높아서이기도 했다.
“당장 사람이 죽게 생겼는데 뭐라도 해야죠.”
“다음부턴 세 번 생각하고 결정해. 그러다가 남은 사람들도 다 죽어.”
화련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고 표정을 굳히기만 했다.
“혜라가 화기 억누르면서 응급조치 취하고 저랑 희란이가 어떻게 견제하면서 버티는데 갑자기 놈들이 발광하더라고요. 자기들끼리 불쏘고, 뒤엉켜서 서로 두들기고, 뒷산에 뛰어들어서 불바다로 만들고.”
“갑자기 웬 발광?”
“우리야 모르죠. ‘마녀’처럼 그 녀석들이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표정을 알아 볼 수 있지도 않았으니까. 그랬었어도 그 상황에서 그런 걸 볼 수 있는 건 마스터뿐일 걸요.”
“날 걱정해줬다는 건 충분히 전해졌어. 그래서?”
“갑자기 발광질 하더니 불이 꺼지는 것처럼 훅하고 사라졌어요. 텔레포트가 아니라 어디로 끌어당겨지는 그런 느낌이었죠.”
“끌어당겨져? 어디로?”
“그냥 느낌일 뿐인데 그거까지 내가 어디로 간지 어떻게 알겠어요?”
“그래?”
그 뒤로 승하는 응급처치 할 때 어떻게 했는지, 현 위치가 어디인지, 류 현과의 연락은 되었는지 등을 물어보면서 간간히 울먹거리는 세 여자에게 농담을 걸며 멀쩡한 채를 했다.
실제로는 깨어난 후 5분 뒤부터 말할 때마다 목구멍을 도려내는 기분이었고, 팔을 움직일 때 마다 근육이 말라비틀어져 끊어지는 끔찍한 기분이었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감정적인 부분을 다 쳐내고, 자신이 드러누운 시점에서 버티는 것조차 난이도가 끔찍할 정도로 상승했을 테니까. 류 현이 팀원들에게 억지로 쥐여 준 송장목 진액 가공물과 엘릭서-07 덕택에 이대로 누워서 죽을 걱정은 없지만, 당장 털고 일어나긴 요원해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심리적인 짐을 지우고 싶진 않았다.
화련은 당분간은 내상을 감수하더라도 텔레포트로 시간을 끌겠다는 말을 끝으로 방을 나갔고, 자는 채 하는 승하의 얼굴을 조금 닦아주다가 수건을 적실 물을 가지러 방을 나간 상태였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외상이랑 내상이 이렇게 큰 데 정신이 또렷한 것도 그렇고...’
승하는 팔이 떨어져나갈 것 같은 통증을 무시하며 팔을 눈앞으로 뻗었다. 손끝감각이 사라진, 불에 그을린 고무장갑 같은 꼴이 된 손가락이 남의 것처럼 오그라들었다가 펴졌다가 했다.
‘손이 이 꼴인데 이렇게 칼을 휘두르고 싶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