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화 〉탐식마(貪食魔)
[이해가 안가는 구나. 어떻게 그 분의 마력을 불신자가 가지고 있을 수가 있지?]
‘마녀’의 얼굴에는 사흘 전만 해도 가지고 있던 여유로움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도무지 한 자리에 있지 못하고 왔다 갔다 하는 ‘마녀’를 반보다 약간 모자라게 남아 있는 불의 정령들이 쫓았다.
[그 분을 모시는 생텀조차 없었는데, 어떻게 그 분의 마력을 이어받을 수가 있는 거지?]
‘마녀’가 당황스러워 하는 원인은 사흘 전, 류 현을 습격하면서 보게 된 검은 안개 때문이었다. ‘마녀’는 그 때 처음으로 류 현의 검은 안개를 제대로 볼 수 있었고, 거의 보자마자 도망을 쳤었다.
[내가 발견하지 못한 생텀이 있더라도, 그 힘이 유지될 리가 없지. 이곳의 불신자들은 그 용사를 빼고 생텀을 돌볼 능력조차 없으니.]
‘마녀’는 그 뒤로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왔다 갔다 하며 시간을 보냈다. 거의 한 시간을 채우고 나서야 멈춰 섰다.
[별 수 없겠구나. 직접 확인 하는 수밖에.]
‘마녀’의 혼잣말에 불의 정령들이 반응했다. 당장이라도 엉겨붙어올 것 같은 기세의 불의 정령들에게 ‘마녀’는 손을 내저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 불신자가 그 분의 마력을 품고 있다면 너희가 굉장히 위험해 질 수도 있단다. 다른 용사의 견제에 계속 신경을 써주렴.]
정령들은 광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격렬하게 긍정을 표해왔다. ‘마녀’는 마주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읊조렸다.
[우르스]
***
퍼걱! 퍽! 츄아악! 지룡은 그 하얀 동체의 곳곳에서 진득한 검붉은 피를 흘리며 모래의 바다에 반쯤 쓰러진 채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목과 배 부분이 숨이 끊어지지 않았음을 알려왔지만, 그마저도 정수리를 뚫고나온 주먹에 끊어졌다.
꾸웅! 지룡의 거대한 몸뚱이가 무너지며 주변의 사구 몇 곳이 무너져나갔다. 사방이 모래먼지로 뿌연 가운데, 류 현은 지룡의 머리에서 몸을 빼었다.
“어떻게 된 게 더 질겨진 거 같냐.”
류 현은 퉷 하고 핏물을 뱉으며 궁시렁 거렸다. 그의 등에는 여전히 세아가 업혀있었기에 대놓고 욕지기를 하진 못했다.
류 현은 조심조심 세아의 머리쪽에 둘러둔 물늑대 가죽을 벗겨내었다. 물늑대 가죽은 지룡의 피 때문에 물먹은 종이마냥 흐물흐물해진 상태였다. 아무리 비싼 가죽이라도 화이트 급 괴수에게도 먹히는 독성을 가진 지룡의 피를 맞고도 무사하긴 힘들었다.
류 현에게는 한 번의 전투를 버텨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어치를 한 셈이었지만 말이다.
시야를 가리던 가죽이 사라지자 잔뜩 웅크려있던 세아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그녀의 입에는 담배 같은 것이 물려있었다.
팔색갈대라는 식물로 독성 늪에서 자라며 섭취하면 해독효과를, 입에 물고 그리로만 숨을 쉬면 방독면 같은 효과를 내는 놈이었다. 당연히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고 던전 내에서만 자라는 식물이었다. 같은 무게의 금값이 아니라, 같은 무게의 달러화로 가격이 매겨질 정도로 비싼 물건.
강력한 현금동원력을 가진 칼리프 클랜의 보급을 받고 있는 류 현은 갈대의 색깔이 변하기도 전에 새로운 갈대를 세아의 입에 물리면서 펑펑 써 제꼈다. 칼리프 클랜의 재무담당이 봤다면 거품을 물만한 일이었지만, 저만큼 고고도에서 촬영을 하면 그 모습이 찍힐 가능성은 한 없이 낮았다.
칼리프 클랜 측에서 봤더라도 류 현은 상관하지 않았을테지만.
“잡았어. 근처에 다른 놈은 안 느껴지는데 잠깐 내려서 스트레칭이라도 할래?”
류세아는 류 현의 등에서 내려왔다. 류 현은 ‘가방’을 조작해서 새로운 물늑대 가죽과 팔색갈대를 꺼내서 껍질은 다 쳐내고 속살만 남은 것을 세아에게 내밀었다.
“혹시 모르니까, 먹어둬. 중독 안 됐어도 몸에 좋은 거니까 먹어둬서 나쁠 건 없고. 노폐물 배출? 인가 뭔가에 좋아서 부자들이 꾸역꾸역 먹는다더라.”
세아는 그것을 받아들더니, 류 현이 ‘가방’을 닫아거는 것을 보며 물었다.
“현이 너는?”
“난 이 정도로는 그런 거 안 챙겨먹어도 괜찮아. 중독되면 그거대로...”
‘독 저항력이 늘어나니까. 좋지.’ 류 현은 뒷말을 삼켰다. 저도 모르게 화련과 희란에게 설명하던 대로 다 말할 뻔했다. 세아가 들었다면 또 눈물바다가 됐을 것이다. 당장이야 순순하게 류 현의 말을 따르곤 있지만, 속으로 아픈 거 다 참으면서 몸으로 때우고 있다는 걸 알면 또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었다.
“누나 동생 누나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튼튼하다고. 쟤 핏물 한 바가지 퍼마셔도 아무 문제없어. 못 믿겠으면 보여줘?”
“얘가! 독 있다면서 왜 그런 걸 먹니? 장난으로라도 그런 짓하면 진짜 화낼 거야.”
‘그런 거라니...얘가 걸어 다니는 영약 덩어리인데.’
전생에서 지룡은 군벌의 수장이나, 대통령, 시장들에게 두통을 넘어서 절망감을 선사하는 도시파괴자였지만, 플레이어들에게는 살아 움직이는 영약으로도 유명했다. 눈깔, 피, 힘줄, 발톱, 꼬리, 혓바닥, 성기까지 버릴 곳 하나 없이 몽땅 영약의 재료가 되는 아주아주 비싼 놈이었다.
영약 먹을 생각에 혹은 영약 팔아서 돈 벌 생각에 달려드는 플레이어들을 갈아버리는 걸로도 유명한 놈이었다. 그야말로 비싼 몸값을 하는 놈인 것.
생살에 대고 마력검으로 칼질을 해도 어지간한 수준으로는 칼이 안 박히는 단단한 몸에, 그보다 훨씬 단단하면서 무기역할까지 하는 온몸을 뒤덮은 날카로운 비늘.
피는 상대를 단시간에 황천길로 보내는 극독 수준은 아니어도 같은 급의 괴수에게도 충분히 먹힐 정도로 독했으며, 거기에 놈은 강력한 재생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일견 둔해 보이는 몸뚱이와 달리 엄청난 동체시력과 그것을 받쳐주는 기민한 몸놀림까지 가진 놈은, 도시에 대고 깽판 친후에 포위망을 뚫고 튀는 게 일상이었다. 날개 없는 용종 괴수가 괜히 도시파괴자니 하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류 현에게는 커다랗고 오래가는 샌드백이었지만.
‘재료만 있으면 해독해서 누나한테 피 한 바가지라도 먹이면 딱 좋을 텐데. 안 그런 척 해도 꽤 지친 거 같은데.’
아쉽게도 해독에 쓸 재료도, 시간도 없었다. 그 전에 독성이 있다는 놈의 몸을 헤집으면서 피를 받으면 세아가 난리를 치겠지만 말이다.
“지금 점심 먹고 잠깐 쉬자.”
류 현이 괜히 ‘가방’을 닫아걸었다고 생각하며 다시 ‘가방’을 조작하려는 때였다. 세아가 비명처럼 외쳤다.
“현아 위!”
류 현은 거의 척수 반사하는 것처럼 곧바로 몸을 숙였다. 납작 엎드리는 것과 동시에 검은 안개를 일으켰다.
슈슉! 후욱! ‘마녀’의 손길은 류 현에게 닿지 못했다. 그리고 류 현이 내뿜은 검은 안개도 ‘마녀’에게 닿지 못했다. ‘마녀’가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손을 내뻗다가 끌어당겼기 때문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류 현은 거의 구르다시피 세아에게 뛰어가서 그녀를 감싸고돌았다. ‘마녀’가 세아를 노리는 공격패턴을 보인 이상, 세아를 떼놓고 싸우는 건 불가능했다. 세아가 ‘마녀’를 볼 수 있기 때문에 패널티만 안은 건 아니었지만.
‘젠장, 또 누나를 물고 늘어질 건가?’
심리적으로 위축되기에는 충분한 패널티였다. 세아가 류 현이 괴수 근처에 가는 것이 트라우마 스위치인 것처럼, 류 현 또한 세아가 이런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 끔찍했다.
[이상하구나. 이상해. 어떻게 그 분의 마력을 지니고 있지? 그것도 저렇게 주먹구구식으로 휘두르는 걸 보면 생텀을 관리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마녀’의 말소리에 등 뒤의 세아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으나, 세아는 대꾸하거나 류 현에게 저게 대체 뭐냐고 다그쳐 묻진 않았다.
동생의 기세가 전에 본 적 없을 정도로 흉흉한 것도 있고, 왠지 모르게 저 사람같이 생긴 괴수가 하는 말이 시기를 놓쳐버린 것을 알지 못하는 자의 헛손질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저 물음에 대꾸를 해주면 지금보다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류 현이 괴수와 치고받는 지금 상황자체가 더 끔찍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말이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안타깝게도 그녀의 의문에 대꾸해 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세아가 의문을 가지거나 말거나, 혼잣말을 하는 ‘마녀’의 감정은 더 격화되어갔다.
[용사를 후원하는 거야 이상할 건 없지만...네가 생텀을 짓고, 관리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고.]
“누나, 업혀.”
세아는 군말하지 않고 업혔다. 세아가 허리에 두르고 있던 벨트까지 채우는 것을 확인한 류 현은 두 어번 통통 뛰었다.
[별 수 없겠구나. 무례를 무릅쓰고서라도 네 몸에 묻는 수밖에.]
류 현은 그 말을 들음과 동시에 뒤로 뛰었다.
피잉! 이 나라, 사우디아라비아로 납치될 때 봤던 광선마법이 류 현의 다리가 있었던 곳을 꿰뚫었다. ‘마녀’는 빗나간 것에 실망하지 않고, 광선을 투사하는 손을 위로 향해서 휘둘렀다. 오렌지 빛이 사막에 커다란 호선을 그렸다.
“누나, 나 믿지?”
류 현의 입에서 수천 년 동안 남자들이 사기 치겠다는 말 대신 사용되었을 말이 흘러나왔지만, 세아는 류 현의 목을 감싼 팔에 힘을 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좀 놀라도 절대로 떨어 지지마.”
그 다음 순간,
‘뭐야?’
세아는 세상이 암흑으로 뒤덮이는 것 같다고 착각했다. 한 번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그녀는 그것이 자기 위안을 위한 희망적인 왜곡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녀의 턱 밑부터 시커먼 것이 깨끗한 물에 떨어진 물감마냥 퍼져나갔다. 다른 점이 있다면, 퍼질수록 옅어질 물감과 다르게 ‘그것’은 모든 것을 제 색으로 물들여갔다. ‘저게 뭐지...?’
세아는 그게 동생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몸서리를 쳤다. 그런 걸 퍼뜨리고 있는 자에게 업혀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눈앞에 펼쳐진 초자연적인 광경에 압사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화련조차 근접하지 않으면 알아보질 못하는 ‘마녀’의 존재를 꿰뚫어보는 세아도 저 검은 것이 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마력을 기반으로 한 뭔가가 아님은 확실했다.
이 사막을 횡단하면서 류 현이 싸우는 모습은 수 십 차례 보았고, 그 때마다 트라우마가 발동한 것인지 숨이 턱턱 막히는 증상을 겪었지만, 그녀의 눈은 류 현의 마력이 움직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검은 안개가 괴수의 마력을, 생명을 빨아들이는 것을 모두 보았다.
하지만 지금 저 ‘검은 것’은 그녀의 시각으로도 꿰뚫어 보는 것이 불가능했다. 류세아는 류 현이 일으킨 기현상에 대해서 본인에게 묻는다는 선택지조차 잊고, 그 광경에 압도당했다.
물론 장본인인 류 현도 세아의 의문에는 대답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생각보단 제어가 잘 되는데...?’
‘강림’! 류 현은 엘더 리치를 씹어 삼킨 후, 시험조차 삼가고 있던 자신의 에이스 카드를 뽑아들었다. 애초에 ‘마녀’를 이 카드를 뽑아들지 않고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고, 이미 검은 안개를 보였으니 놈이 자신의 기술들에 적응하기 전에 때려잡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세아의 눈도 있고, 상황상 세아를 떨어뜨려놓고 싸울 수가 없으니 제어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는 ‘강림’을 자제해왔으나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세아에게 해를 끼치지 않게 제어하는 쪽에 중심을 두려고 했는데, 상상했던 것과 달리 ‘강림’의 제어가 너무나도 쉬웠다. 여태껏 쓰지 않은 게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로.
[....어떻게? 그분은 더 이상 화신을 만들어 낼 수...]
‘마녀’의 반응도 류 현의 그런 생각에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마녀’는 저번에 냅다 도망쳤을 때보다 훨씬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쉭! 덥썩 찌이익!
류 현은 적이 보인 틈을 즐길 정도로 헐렁한 인간이 아니었다.
블링크라도 쓴 것처럼 순식간에 접근한 류 현의 손에는 ‘마녀’의 팔뚝 살점이 한 움큼 쥐여져있었다. ‘마녀’가 몸을 돌리지 않았다면 목이 뜯겨져 나갔을 것이다. 살점이 뜯겨져나간 ‘마녀’의 팔뚝이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류 현은 뒤에 업힌 세아가 잘 보호되었는지 확인하고는 고개를 꺾었다.
‘이 상태에서는 그냥 타격이 되는구만. 이거 생각보다 쉽게 갈 수도 있겠네. 진짜 괜히 안 쓰고 쫄아있었잖아.’
하지만 류 현의 그런 희망찬 전망은,
[우, 우르쓰...]
슈슉! ‘마녀’의 텔레포트 시동어와 함께 사라졌다.
“...씨발.”
세아가 업혀있음에도 이번만큼은 류 현도 참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