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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2화 〉탐식마(貪食魔) (222/429)



〈 222화 〉탐식마(貪食魔)
“쯧.”


승하는 혀를 차며 시야가 흐려진 왼쪽 눈을 비비적거렸다. 인간을 초월했다고 해도 좋을 그녀의 육체였지만, 내상 때문에 피로가 쌓이는 건 별  없는 일이었다. 승하가 운전대를 한 손으로만 잡고 왼손으로는 눈을 비비적거리고 있자 화련이 물어왔다.

“괜찮겠어요? 그냥  세우고 나랑 교대하죠?”
“됐어. 네 얼굴이나 한 번 보고 말할래?  지금 툭 치면 그대로 쓰러져서 잠들어서 못 일어날  같은 얼굴이거든?”


승하의 핀잔에 화련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거울을 꺼내보진 않았다. 얼굴 상태가 어떨지는  봐도 뻔했다. 그녀는 지금도 뇌혈관이 끊어질 것은 느낌 속에서 마법을 운용하는 중이었으니까. 상하좌우, 단순히 차체  부분뿐만 아니라 지하 3미터 깊이까지 장악한 상태였다.


계속 움직이는 와중에 장악력을 유지하자니 말은 안하고 있어도 정말 죽을 맛이었다.


“걱정 해줘도 뭐래. 내가 다시는 이런  하나 봐라.”
“너한테 운전대 잡으라고  생각 없으니까. 걱정 마셔. 그보다 이제 주변에 불탈 마을도 없어 보이는데 그냥 한 숨 붙이는 게 어때?”


뒷자석에는 백혜라와 희란이 이미 엉겨 붙어서 자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리 작더라도 승하는 내상을 입었으니 자신들이 운전대를 잡겠다고 나서는 걸 숙소 도착해서 경계 안서고 내리 잘 거라는 말로 막아두었다. 사실은 그보다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둘을 재운 것이지만.


하지만 화련에게는 그런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언니 혼자서 ‘마녀’가 다시오면 반응할 수 있어요?”

화련의 대꾸에 승하는 할 말을 잃었다. 화련의 우중충한 표정이 승하의 입을 막는데 한 몫 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류 현이 납치된 이후 화련은 계속 이런 상태였다.

“류 현이 자긴 멀쩡하다고 그랬잖아. 멀쩡하니까, 사우디까지 날아간 녀석이 우리보고 거기까지 가라고 오더를 내릴 수도 있는 거지. 너무 마음 쓰지...”
“만약에 ‘마녀’가 잡아간 게 희란 이였으면요? 혜라 였으면? 우린 무사하다고 전화 받는 대신 유해 찾는다고 온 사막을 다 뒤지고 다녀야 했을 거에요.  이전에 이길  있는가는 넘어가더라도요.”
“끙...”

저렇게 고집을 피워대니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승하는   도로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가서는 어쩔까?”
“저쪽에서 덤비면 우리끼리 처리하는 게 베스트고, 아니면 국경을 넘어야겠죠. 비행기는 안 되니까, 튼튼한 차를 찾아야겠네요.”
“국경 통과  시켜줄 거 같은데. 전세기 타고 다녀야할 인간들이 차로 대륙을 가로지르겠다고 하면 미친년들 취급할 걸.”
“그렇다고 우리 뒤에는 아무리 큰 도시라도  시간 안에 대형 화장터로 만들 수 있는 괴물이 쫓아와서 차를 타고 간다고 할 순 없잖아요?”

그녀들이 SUV에 몸을 싣고 옛 북한, 오늘날에는 특별행정구역으로 규정되는 북쪽을 향하고 있는 이유가 그거였다.

‘업화의 아이들’이 언제 재 습격해 올지 알 수가 없으니, 비행기를 타는 도박은 도무지 시도해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 생각을 안 해 본 게 아니었다. 류 현은 팀과 외떨어진 상황이었고, 상대는 네임드 몹이니 팀 전력을 모으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했다. 막말로 목적지 근처까지 도달하기만 하면 비행기가 터져도 그녀들이 죽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나 이동 중에 습격을 받아서 근처 마을이 불바다가 된 것이 불과 반나절 전 일이다.


미리 문민호를 통해서 비상령을 걸어둔 덕에 인명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반시간도 안 되는 교전 동안  하나가 불바다가 되었으니 높으신 분들이 얼마나 놀랐을지는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그 증거로 승하는 운전대를 잡고서 수도권을 벗어난 이후 차는 구경도 하질 못했다.

특수 행정 구역이라지만 구역 내의 차량 운행이 금지된 것이 아님에도 이토록 도로가 한산한  대피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리라. 도쿄를 쑥대밭으로 만든 놈들과 동급이라는 승하의 증언도 아마 크게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리고 놀란 이 중에는 승하도 들어가 있었다.

‘류 현이 왜 외딴 곳으로 유인할 생각을 했는가 싶었더니...’


이전의 네임드 몹인 엘더 리치와 본 드래곤과는 다른 의미로 피해규모가 차원이 달랐다. 최신식 안전 차단장치가 있는 가스 시설들은 놈들이 슬쩍 지나가기만 하면 펑펑 터져나갔다. 놈들의 몸에서 떨어져나간 바람만 불어도 훅 꺼질  같은 작은 불티는 건물에 내려앉으면 10분 안에 건물을 통째로 잿더미로 돌려놓았다.

이쯤 되니 재산 피해 같은 거 신경 쓸 시간에 더 빨리 잡는  이득이라는 지론을 가진 승하도 두 손  발 드는 수밖에 없었다. ‘업화의 아이들’에겐 인류 문명은 커다란 불쏘시개에 불과했다. 의식하지도 않은 불티에 모든  잿더미로 변했다.


‘어떻게 네임드 몹끼리 이렇게 격차가 나지?’ 승하의 의문을 류 현이 들었다면 전생에서 엘더 리치가 일본은 어떻게 갈아버리고, 류 현이 원치도 않던 용사 특공을 했는지 말해줬겠지만 그는 지금 한국에 없었다.


칼리프 클랜에서 빌렸다던 위성전화로 그녀들에게 개마고원 쪽으로 이동할 것을 주문하고 최대한 버틸 것을 주문했을 뿐. ‘혼자 아니지, 언니도 같이 있다고 했으니까. 보호해야 하는 민간인까지 끼고 외떨어졌으면서 이쪽 걱정하긴.’


두 번 세  주의사항을 강조하던 그를 떠올린 승하는 픽 헛웃음 지었다.

“왜 그래요?”
“아니 류 현이 잔소리하던 게 생각나서.”

류 현은 혼자서 ‘마녀’와 ‘업화의 아이들’을 상대해야할 수도 있는 현 상황이 두렵지도 않은지,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자신이  때까지 최대한 도망가면서 시간을 끌라고 했었다.


곧 정리하고 합류하겠다며 안심시키려는 태도에 승하는 오기마저 느꼈다. ‘누나 지킨다고 잠도 거의 못자고 있을 녀석이 누굴 걱정해? 이쪽이 먼저 정리하고 그 말 되돌려주마.’


하지만 그 ‘업화의 아이들’에 대한 공략 방법이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류 현이 있으면 모르되, 그가 없는 상황에서 그것들을 잡을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질 않았다. 백혜라는 극상성을 만나서 맥도  추는 수준이었고, 화련은 ‘마녀’ 때문에 발이 묶였다. 희란이 가지고 있는 청뢰도 그렇게 덩치가 작은 놈들 상대로는 명중시키는 것 자체가 일이었다.

그런 놈들을 여섯 마리를 동시에 해치운 다음에 단시간 내에 뭉친 녀석을 다시 잡으라니, 그것을 공략법이라고 말하는 류 현이 새삼 괴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해봐야지. 혼자서 개고생 하고 있을 텐데.’

승하는 액셀에 올려놓은 발에 힘을 더 했다.

***

“그러니까 그 D-110도 한주먹에 작살이 났다고?”
“D-101입니다. 화면상으로 확인되는 바로는 그렇습니다.”

D-101은 새로 발견된 아직 이름이 정해지지 않은 신종 용종괴수를 임시로 지칭하는 말이었다.

“류 현 형씨가 때려잡은  시체로 이번에 박살난 유전들  재건하고도 남겠네.”
“알 라시드님, 아무리 생각해도 이 땅에서 잡은 괴수들을 그대로 넘겨주시겠다는 건...”

얼빠진 얼굴로 허허 웃던 알 라시드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알 라시드는 부동자세로 서 있는 자신의 부관을 향해서 혀를 찼다.

“허튼 생각마라. 하잘. 그 시체에 손대는 놈들은 내가 직접 손모가지를 뽑아버릴 거니까. 잘 처리해서 창고에 집어넣어놔. 창고에 경계 병력 평소보다  배로 배치하고.”
“...칼리프께서 알 라시드님을 문책하실 수도 있습니다.”
“욕을 먹어도 내가 먹어. 그리고 영감이 저런 걸 보고도 괴수 시체 몇 체 갖겠다고 강짜 부릴 거 같아?”

그냥 괴수 시체가 아니지 않습니까! 압둘 무함마드 알 하잘은 미칠 것 같은 기분 속에서 필사적으로 표정관리를 했다. 하잘은 자신이 모시고 있는 이에게 무례를 범하지 않는 선에서 어떻게  시체들의 중요성을 어필할까 머리를 굴렸다.

“강짜를 부려서 뺏는 게 아니라 구매 우선권 정도는 주장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게 국제관례고요.  불신자가..”
“류 현.”
“예?”
“하잘, 네가 얼마나 독실한 놈인지는 내가  알아. 니가 매일 옆에서 외워댄 덕택에 나도 코란을 외울 정도니까. 하지만 그 독실한 마음도 좀 가려서 티내라. 형씨 앞에서 불신자가 어쩌고 하면 나도 커버 쳐 줄 생각 없으니까.”


알 라시드는 할 말 다했다는 듯이 티비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계속해서 흔들리는 대다가 피사체가 휙휙 날아다니고 있어서 제대로 찍힌 장면은 일 분에 십초도 되질 않았지만, 알 라시드는 그보다 더 진귀한 볼거리가 없다는 듯이 집중했다.

“그 남자에게 다 넘겨줄 수는 없습니다. 왕궁 측에서도 항의 해 올 거고요. 핫산님이나 장로회에서도 그냥 넘길 리가 없다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저 불신자에게 우리 땅에서 나온 것들을 넘겨줄 수는 없단 말입니다. 이번에 처음 관측된 신종 괴수 시체라면 더더욱. 하잘은 류 현이 아니라 알 라시드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렇지 않아도 내리신 명령 때문에 불만을 가진 팀들이  둘이 아닙니다. 공을 세울 기회가 막혔다고 불만을 표하는 팀들도...”


하잘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사고가 연달아 터지면서 토벌 시즌에 던전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대기 중인 팀들은 남아도는 힘을  곳을 찾아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현이라는 불신자가 불쑥 나타나서 헬기와 보급 지원을 받아가더니, 사막 한가운데서 괴수와 데스매치를 벌이고 있으니 근질거리다 못 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하는 팀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평소라면 하잘의 선에서 다 차단했겠지만, 이번만큼은 차단하지 않고 그대로 그의 주인에게 전했다.

알 라시드의 성정이라면 그들을 이끌고 괴수를 신나게 때려잡은 다음, 칼리프의 대리인으로서 자리를 안 지켰다고 욕을 먹으면서도 실실 웃을 게 뻔하니까. 하잘은 제 주인이 이런 식으로 불신자를 밀어주다가 신임을 잃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럼 가서 잡아보라고 해.”
“예?”

 라시드는 영상을 멈추고 하잘을 돌아보며 말했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서 하잘은 서늘한 느낌을 받았다.


“팀원 꼬라박았다가 사고 터져도 내가 커버 쳐줄테니까. 자신 있으면 저기 가서 신종 괴수들 잡아보라고 전하라고. 왜 구두로는 모자라나? 명령서라도 써줘?”

하잘은 감히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아, 아닙니다. 그리 전하지요.”

하잘이 뒷걸음질 쳐서 물러났다. 알 라시드는 사라지는 하잘 쪽을 바라보다가 콧방귀를 뀌고는 리모컨을 조작했다.


멈춰있던 화면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 라시드는 화면으로 뛰어들 것처럼 바짝 붙어 앉았다.


“진짜 말도  되는 인간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면서도 시선은 바쁘게 움직이는 검은 점 하나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시력으로도 영상의 질을 높일 방법은 없었지만, 알 라시드는  점의 정체를 알고 있었기에 짜증이나 조급증은 느끼지 않았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점은  현과 그에게 업혀있을 그의 누이 류세아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벌써 48시간째, 류 현은 사막 한가운데서 꾸역꾸역 몰려드는 괴수들을 때려죽이면서 북상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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