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화 〉탐식마(貪食魔)
쨍그랑! 컵에 담겨있던 보드카가 벽을 질척하게 적셨다. 알 라시드는 그러고도 짜증이 풀리지 않는지 보드카를 병째로 들이키기 시작했다. 최상위 플레이어인 그의 몸뚱이가 그런다고 취할 리가 없었고, 그는 결국 더 짜증나게 되었다.
“젠장, 대체 어떻게 일이 이렇게 꼬이지?”
알 라시드를 이토록 짜증나게 하는 건 한 시간 전에 알게 된 류 현의 실종소식이었다. 자신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곳으로 올 준비를 하던 류 현이, 아라비아 반도를 휘젓고 있는 괴수 때문에 실종됐다는 거였다. 협회에 연락해서 재차 확인을 해본 알 라시드는 희소식 대신 두통을 얻었다.
물론 그가 류 현의 엄청난 팬이라서 이리 짜증을 내고 있는 건 아니었다.
‘이대로는 안 돼. 그 미친 괴물을 막을 방법이 필요해. 이 페이스로는 이 주 안에 퍼플급 실력자들이 전부 다 갈려나가게 생겼다고.’
문제는 그 괴물이 류 현을 실종시키기 전에 칼리프 클랜의 주력들을 신나게 갈아버리던 와중이었다는 거였다. 그것도 던전 안에서! 아무런 경고도 받지 못하고 괴물의 습격을 받은 원정대들은 말 그대로 박살이 나는 중일 거다.
원래라면 던전 안에서 봉변을 당한 이들의 생사를 확인하는데 최소 삼 주에서 한 달 가량이 걸리지만, 빌어먹을 정도로 친절한 괴물들 덕택에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놈들이 무슨 생각인지 숯덩이가 된 시체들을 던전 입구에 던져놓은 것이다. 유전 사고 때 사망한 카심이랑 똑같은 꼴이 된 시체를 말이다.
시체가 확인된 경우만 해도 삼백을 넘게 헤아리고, 기한이 다 찼는데도 아직 나오지 않은 원정대가 놈에게 당했다고 계산하면 그 숫자가 칠백에 달한다. 류 현에게 오 백이라고 말한 건 정말 희망적인 관측 하에 내놓은 결론이었다.
물론 기한 내에 나오지 않고 있는 원정대가 모두 놈에게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놈이 가지 않아도 던전 안에서 사고를 당할 확률은 어떻게 줄여 봐도 0이 아니니까. 그렇다고 위안이 될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우연찮게 던전 안에서 사고를 당했든, 그놈에게 당했든 인명피해는 똑같으니까.
‘하필이면 공략 시즌에 던전에 난입하는 괴수가 등장하다니...’
공교롭게도 칼리프 클랜은 현재 클랜 전체가 던전 공략에 힘을 쓰는 기간에 돌입한 상태였다.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건 그 때문이었다. 던전 공략에 온 신경을 쏟고 있을 원정대에게 네임드 몹-으로 추정되는-이라는 변수는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변수였을 테니까.
‘거기다가 영감까지 원정 중이고.’
가장 끔찍한 건 현재 칼리프 클랜의 최고 서열이 알 라시드 자신이라는 거였다. 자파르 알 사디크는 현재 블랙 던전 원정을 떠난 상태였다. 자신 대신 마람 압둘아지드를 경호원으로 대동하고.
알 사디크 입장에서는 북극에서 깨달음을 얻고 그걸 정리 중인 알 라시드를 배려한다고 한 일이었으나, 알 라시드는 그 때문에 머리가 깨질 지경이었다. 칼리프가 부재한 상황에서 이런 대형 사고가 터졌으니, 그렇지 않아도 클랜 내부의 정치나 서류 업무에는 취미가 없는 알 라시드는 자신도 어디 아무 던전이나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영감은 별 문제 없을 거야. 문제는 영감이 언제 나올지 모른다는 건데.’
알 사디크가 진입한 블랙 던전은 경계 병력이 쫙 깔려 있는 상태. 원래부터 알 사디크의 경호는 대국의 대통령 못지않은 수준이었으나, 원전 사고가 터지고 알 라시드가 그것을 괴수 소행이라고 주장하면서 더욱 강화된 상태였다. 아무리 날고 기는 괴수라도 아무런 소란도 일으키지 않고 그 안으로 진입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어떻게 던전으로 잠입해도 안에 들어가 있는 원정대 전력도 만만찮기는 마찬가지.
단지 알 사디크가 얼마나 던전에서 머물지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젠장, 그래서 그 형씨를 부른 거였는데.’
알 라시드는 도무지 클랜 건물을 떠나기 힘들었다. 앙숙이라도 해도 좋을 알 핫산 마저 자신을 보고 으르렁거리기보다 상황파악을 위해서 이리저리 뛰어다닐 정도로 비상사태였으니까.
대응팀을 꾸리자니 던전에 들어가지 않고 있는 상위 플레이어들 숫자가 각 던전으로 파견하기에는 너무 적었다. 그 인원을 다 끌어 모으더라도 당장 이곳으로 그 괴물이 들이닥쳤을 때 방어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사태를 진정시킬 방법은 그 괴물에게 생명의 위협을 안겨줄 또 다른 괴물을 불러들이는 것뿐이었다. 알 라시드가 언론 통제로 알려지지 않은 이번 참사를 알리면서 까지 류 현에게 도움을 청한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엘더 리치마저 도망가게 만들었던 그라면 그 역할을 수행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다른 이라면 이 상황을 핑계로 이것저것 뜯어먹고, 그 뒤에도 귀찮게 굴게 뻔하기에 알 라시드도 고민을 더 해봤겠지만 그는 그러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망설임 없이 불렀다. 류 현이 뭔가를 뜯어내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면 일본 건 때 그냥 넘어가진 않았을 것이다.
그가 외부인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사실을 안 알 핫산이 이 일을 칼리프께 고할 것이라고 압력을 가해왔지만 알 라시드는 상관하지 않았다. 클랜 내의 서열 같은 건 처음부터 별 관심도 없었을 뿐더러, 그 괴물이 다른 괴물을 물어뜯는 걸 보고 나면 그 고집 센 아저씨도 입을 다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괴물이 실종됐단다. 그것도 클랜 소속의 플레이어들을 갈아버린 것으로 추측되는 괴물에 의해서 말이다.
‘그 인간도 못 당해낼 정도면 진짜 답 안 나오는데.’
알 라시드는 속으로 이미 류 현을 플레이어 최강자 자리에 올려놓은 상태였다. 알 핫산이 알았다면 경을 쳐야한다고 난리를 쳤겠지만, 알 사디크에 대한 존경심과는 별개로 그가 동격으로 취급받는 최상위 플레이어들에 비해서 쳐진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깨달음을 얻고 경지가 오른 뒤부터 그런 생각은 확신으로 굳어진 상태였다. 검성 정도가 그와 대적할 수 있으며, 그 검성 조차도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 괴물이 별 저항을 못해보고 당했다면...
‘영감이랑 나, 공주님, 핫산까지 다 덤비더라도 잡을 수 있을까?’
칼리프 클랜의 최대 전력들이 모두 덤벼도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 것이다. 이기더라도 상처뿐인 승리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칼리프 클랜은 승리하더라도, 알 라시드 본인이나 마람 압둘아지드, 알 사디크 개인적으로는 패배나 다름없는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알 라시드는 그런 클랜의 승리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일단 조사단 꾸리려는 핫산 아저씨를 뜯어말리고 영감이 오면 짐 싸고 튀는 것도 진지하게 고려를...’
그 때였다. 탁자 위의 전화가 울리며 알 라시드의 상념을 깼다. 알 라시드는 전화기 쪽을 시선을 던지고는 한 숨을 푹 쉬었다. 안 봐도 뻔했다.
알 핫산이 조사단은 안 꾸리고 외부인에게 클랜의 비보를 광고하고 다니는 자신을 꾸짖기 위해서 건 전화일 것이다. 그렇다곤 안 받을 수는 없었다. 알 라시드는 발을 질질 끌어가며 천천히 전화기에 다가서서 전화를 받았다.
“알 라시드 입니...뭐? 무슨 소리야. 천천히 말해. 천천히. 제다? 거기 또 불났냐? 더 탈 것도 없을...뭐?”
알 라시드는 귀를 수화기를 귀에서 떼더니 귀를 한 번 후비고는 버튼을 눌러 스피커 폰 모드로 전환했다.
“다시 말해봐. 누구라고?”
-류 현입니다. 류 현이 자기 누이와...-
“뭔 개소리야? 그 인간 방금 전에 실종됐다고 연락을...제대로 확인한 거 맞아? 아니다, 니가 봐봐야 동양인 얼굴 구분도 못 할 테니까. 전화 돌려봐. 그 인간 어디있...”
-예, 전화 바꿨습니다.-
알 라시드는 속으로 제다 지부 임시 지부장에게 욕을 퍼부었다. 옆에 있으면 옆에 있다고 눈치껏 말하고 시작해야할 것 아닌가!
“어, 형씨. 내가 한 시간 전에 형씨가 납치됐다고 들었거든?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내가 형씨인 걸 확인할 수 있게...”
말하면서도 알 라시드는 계속해서 임시 지부장을 씹어대었다. 멍청한 새끼! 영상통화였으면 이럴 일도 없을 거 아냐! 류 현과 똑같은 얼굴이 화면에 비췄어도 똑같은 질문을 했겠지만 알 라시드는 아랑곳 않고 지부장을 씹었다.
-멸룡의 둥지.-
“어?”
-파주에 있었던 멸룡의 둥지 말입니다.-
알 라시드는 단박에 그곳을 떠올렸다.
X던전! 클리어 이후에도 지금까지 잊을만하면 이야기가 나오는 등급 외의 던전. 뉴욕에는 여전히 괴상한 환영이 허공에 투사되고, 이집트 카이로의 검은 벽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런 이상현상을 남기지 않고 완전히 클리어 된 곳은 단 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 파주의 X던전도 강한 인상을 남기기에는 충분했다. 던전 내의 유적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알 라시드조차 그 안에서 조그마한 마법사 여자가 읽어낸 내용은 기억할 정도였다.
멸룡의 둥지. 작은 여마법사 화련은 그렇게 말했었다. 자신들이 있는 이 던전이 멸룡의 둥지로 향하는 문이라고. 이 내용은 칼리프 클랜 내에서도 아는 이가 두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갑자기 자신이 류 현이라고 주장하며 나타난 동양인 사기꾼 알 리가 없는 기밀.
“형씨가 맞군. 방금 실종됐다고 들었는데 대체 어떻게...아니, 아니다. 일단 이리로 오는 헬기를 보낼 테니까. 전화로 이야기할 것도 아닌 거 같고.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어차피 이리로 올 예정이었잖아?”
-예, 그럼 조금 있다가 뵙지요.-
전화가 끊어지자 알 라시드는 뒤돌아서 터덜터덜 걸어가 침대 위로 엎어졌다. 시트에 푹 파묻힌 그로부터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살았드아...’
그로부터 네 시간 후.
알 라시드는 류 현을 보자마자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었다. 지부장 이 미친 새끼! 옆에서 다 듣고도 욕실을 쓰라고 안 권했냐!
류 현이 입은 상의는 불에 타서 구멍이 숭숭 뚫려있었고, 얼굴에 묻은 그을음 때문에 거의 준 거지꼴이었다. 알 라시드는 처음으로 클랜원에게 징계를 내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류 현이 대동하고 온 동행을 본 순간 분노는 의문감으로 바뀌었다. 류 현과 대조적으로 여자 쪽은 방금 씻고 나온 것 같았다. ‘뭐야 저 여자는 뽀송뽀송한데?’ 거기에 여자가 걸치고 있는 옷은 명백하게 골수 무슬림인 임시 지부장의 취향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알 라시드는 지부장의 징계 여부를 미뤄두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류 현에게로 시선을 옮기자 그는 류 현의 눈에 어린 다급함을 읽어낼 수 있었다. 알 라시드가 그 다급함을 해석하기도 전에 류 현이 말했다.
“용량이 큰 ‘가방’을 다룰 수 있는 플레이어 스물 정도랑 헬기 편대 둘 정도가 필요합니다.”
어디 가서든 그런 소리를 했다간 미친 놈 취급을 받겠지만, 알 라시드는 조금 다르게 반응했다. 그는 류 현이 이런 표정을 하는 걸 처음 보았고, 그 사실에서 불안감마저 느꼈다. 알 라시드는 요구를 그냥 거절하기 보다는 불안감의 원인을 확인하고자 했다.
“어, 형씨. 그걸 어디에 쓸지 말을 해줘야 나도 결제를 받든가 말든가 하지 않겠어?”
거짓말이었다. 알 라시드는 알 사디크의 대리인으로서 그 정도 병력은 재량껏 움직일 수 있었다. 물론 그 뒤에 시말서보다 더 끔찍한 청문회의 연단에 올라야겠지만.
“‘업화의 아이들’이 아니, 네임드 몹이 곧 들이닥칠 겁니다. 인적이 없는 사막지역으로 유인해서 결판을 볼 테니, 보급지원을 부탁합니다.”
“뭐? 아, 아니 잠깐만. 뭐가 온다고?”
“유전 폭발 사고를 일으킨 그놈들이 이리로 오고 있을 겁니다. 당장은 아니어도 저를 쫓아서 들이닥치겠죠. 이곳에서는 못 싸웁니다. 알 라시드씨도 곤란하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지. 알 라시드는 머릿속에서 온갖 말들이 휘몰아치는 것을 느꼈다. 대부분은 클랜 동료가 아닌 류 현에게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리는 것들이었다. 알 라시드는 그것들 대부분을 지워버렸지만 마지막 오지랖은 지우지 못했다.
“그거야 그런데...혼자 싸우겠다고?”
류 현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 라시드는 저도 모르게 자신도 같이 작게 끄덕거렸다. 미쳤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선언에도 류 현의 굳건한 얼굴을 보니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미친 괴물이 아니었군.’
알 라시드는 뒷말은 그냥 삼켜버렸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건 알 사디크를 섬기는 입장에서 품을 생각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