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화 〉탐식마(貪食魔)
“절대 안 돼.”
“하지만 너 그것들 보지도...”
“그래도 안 돼. 안 보이는 괴수를 상대하는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솔직히 말해서 누나가 옆에 있으면 내가 신경 쓰여서 실력의 반도 못 내. 누나가 위험한 건 말할 것도 없고.”
류 현은 그대로 시선을 내렸다. 세아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그 트라우마도 극복 못 했으면서.’
류 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어쉬었다. 그의 누나는 괴수라고 하면 노이로제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곤 했다. 부모님이 괴수에게 살해당하는 걸 두 눈으로 봤으니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류 현을 곤란하게 만드는 건 그 방향성이었다.
류세아는 괴수를 두려워하지만 자신이 관계되어 있는 경우에는 보통의 두려움만 보인다. 딱 일반인들이 막연하게 느끼는 공포감 정도일 뿐이다. 그러니 괴수 사체를 가공하는 공장에도 취직할 수 있었던 거다.
그러나 그녀의 동생이 괴수와 관계되면 그녀의 반응은 180도 달라지는 것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토할 것처럼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부들부들 떨면서, 스스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고집을 부리는 것처럼.
실제로 세아는 사흘 전 류 현과 ‘업화의 아이들’로부터 벗어나자마자 성대하고 토하고는 거의 기절하듯이 잠이 들었었다. 동생이 괴수의 공격이 노출되는 꼴을 본 게 그녀의 트라우마 스위치를 사정없이 난타한 탓이었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동생이 괴수에게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혼자서 거동이 불가능해질 정도로 몸 상태가 나빠지면서, 동생이 괴수 잡은 돈으로 연명을 하는 상황에 놓이면서 그녀는 눈을 돌리는 법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동생이 괴수에게 노출되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지만, 의식하지 않기 위해서 애쓰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트라우마는 사라진 것도, 약해진 것도 아니었으니 사흘 전 같은 일에는 당연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류 현은 지난 사흘간 세아의 뇌리에 새겨진 트라우마가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재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 경험으로 류 현이 플레이어 일을 그만 두게 하는 것이 당장을 힘들다는 걸 깨달은 세아는 합류하겠다고 고집을 부려왔다. 류 현의 실수한 탓이었다.
도주 때만해도 긴가민가했던 세아는 류 현의 말실수 몇 마디로 자신의 각성과 자신이 꽤나 희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류 현이 뒤늦게 수습해보려고 애는 썼지만 별 의미 없는 짓이었다.
세아는 자신이 위험에 노출되는 것보다, 남들 눈에는 안 보이고 기척도 안 나는 해괴망측한 괴수와 동생이 싸운다는 사실에 더 집중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지금 난리가 난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나겠다는 동생을 붙들고 말도 안 되는 고집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누나가 아무리 고집 부려도 거기로는 못 데려가. 지금 난리가 나서 입국통제까지 하고 있으니까. 그 전에 내가 누나를 데려갈 생각도 없고.”
“그 정도면 더더욱 내가...”
“몇 번을 말해? 누나가 근처에 있으면 내가 신경 쓰여서...”
[그럼 둘 다 가면 되겠구나.]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것이 들려왔다. 류 현은 오소소 소름이 돋기도 전에,
부웅! 뻐엉! 있는 힘껏 주먹을 휘두르며 파쇄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의 주먹은 닿는 곳 없이 허공만 터뜨릴 뿐이었다.
‘화련 씨는? 설마...’
세아를 품으로 끌어당기면서 류 현은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이 집은 전체가 화련의 눈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화련에게 이상이 생긴 게 아니라면 분명히 그녀가 신호를 줬을 것이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우르스.]
슈슉! 생각을 가다듬기도 전에 류 현은 배꼽이 바닥으로 잡아당겨지는 느낌과 함께 다른 공간으로 내팽개쳐졌다. 류 현은 밤하늘보다 새카만 공간에 떠있는 자신과 ‘마녀’를 발견했다. 그의 감지센서에도 ‘마녀’의 존재가 확실하게 느껴졌다. 텔레포트 도중에는 아무리 ‘마녀’라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화련이라면 접촉하지도 않고 공간채로 텔레포트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더 놀랐겠지만, 류 현은 ‘마녀’가 노출되었다는 사실 하나만 바라봤다.
텔레포트를 도중의 블랙아웃 현상. 평소라면 제대로 인식도 하지 못하고 스쳐지나갔겠지만, 한계까지 끌어올려진 그의 집중력이 찰나를 잡아채었다.
류 현은 자신이 느끼기에는 느릿하게 주먹을 끌어당겼다. 그의 의지에 호응해서 검은 마력이 출렁거리며 그의 주먹으로 모여들었다. 목표는 뒤를 잡고 있는 ‘마녀’!
그의 주먹이 영겁동안 전진할 것처럼 느릿하게 내뻗어졌다. 실상은 극한까지 끌어올려진 집중력 탓에 느리게 보이는 것이었지만, 류 현은 이제 서야 자신의 주먹을 인지한 ‘마녀’를 보며 속으로 빌었다. ‘먹어라!’
류 현의 주먹이 ‘마녀’에게 닿는 순간, 블랙아웃이 끝나며 빛이 들이쳤다. 갑자기 들이친 빛에 류 현은 순간적으로 시각을 잃었다.
뻐엉! 쿠당탕!
‘걸렸다!’
분명히 후려친 감각이 있었다. 류 현은 시력이 회복되지 않았지만 그대로 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서 몸을 던졌다. 아직 ‘마녀’의 존재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몸 주변에 검은 마력을 옷처럼 두른 채로!
‘기회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이대로는 못 끝내지!’
마력만 끌어올리고 나머지 것들은 전부 억누르자, 내부에서 ‘탐욕’과 검은 안개가 들끓었지만 그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은 깔 때가 아니야.’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류 현은 ‘마녀’가 기척이 느껴지는 것을 향해서 다시금 있는 힘껏 주먹을 휘둘렀다.
때 맞춰 시력이 돌아왔다. 뇌가 흔들린 것인지, 바닥을 짚고 일어서지 못하고 있는 ‘마녀’의 턱을 류 현의 주먹이 재차 후려쳤다. 뻐억! 뻐벙! 파쇄권이 작렬하며 검은 불티같은 것이 흩날렸다.
하지만 류 현은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그대로 몸을 내던지는 것처럼 앞으로 내달렸다. 얼어터진 물병이 세는 것처럼 검은 안개가 나오려는 걸 그는 꽉 눌렀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강림’과 검은 안개를 동원하면 큰 타격을 입힐 수는 있겠지만,
‘지금? 아니야. 놈이 무슨 패를 더 가지고 있는지 몰라. 스스로 들러붙기 전까지는 패는 못 까.’
수 십 차례 사선을 넘나들면서 단련된 감이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지금은 전부를 내던질 때가 아니라고!
[...오웬의 빛.]
류 현이 왼쪽 주먹을 날리려는 그 때, 마녀가 검지로 그를 가리키더니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치익! 어떠한 마력적인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류 현은 본능적으로 직선상에서 몸을 빼었다. 그의 움직임을 다 따라오지 못한 상의 끝부분이 불타며 그의 감이 옳았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치이익! 지평선 끝까지 갈 기세로 내뻗어 나가던 오렌지 빛 광선은 그대로 부채꼴 모양으로 확산했다. 돌아볼 것도 없이 궤도 안에는 세아가 있었다. ‘이런 씨발!’ 류 현은 더 이상 가리지 않고 검은 안개를 내쏟아내었다.
순식간에 검은 안개로 이루어진 갑옷을 걸친 꼴이 된 류 현은 광선이 확산되는 궤도에 두 박아 넣고 서더니,
후웅! 뻐벙! 주먹을 휘둘러 검은 안개를 내쏘았다.
치이익! 기세 좋게 걸리는 것들을 전부 잘라놓으며 확산하던 광선도 검은 안개 앞에서는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사그라졌다. 광선이 증발시킨 물과 화재로 인한 연기 때문에 시야가 좋지 못했다. 류 현은 인상을 쓰며 안력을 끌어올렸다. ‘젠장, 너무 패를 빨리 깠어. 그런 광범위 파괴 마법을 그렇게 쉽게 쓸 줄은...’
[끄으읏...]
연기 너머의 ‘마녀’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어깨에는 검은 안개가 들러붙어서 불타는 것처럼 일렁거리고 있었고, 이마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류 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먹힌다. 젠장, 아까 그냥 다 까고 잡았어야 했나? 괜히 탈출기가 있을 거라고 지레 짐작해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류 현은 이미 앞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검은 안개가 아까보다 더욱 흉흉한 기세로 주변으로 뻗어나갔다.
‘여기서 잡을 수만 있으면...!’
‘마녀’는 검은 안개 탓인지, 아니면 당황했는지 류 현이 코앞까지 다가올 때까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류 현은 한껏 당겨놓았던 오른팔을 해방하는 것처럼 내뻗었다.
‘닿았...어?’
슈슉! 그러나 류 현이 바라는 광경은 벌어지지 않았다. 주먹이 닿는 것과 동시에 ‘마녀’가 바람빠지는 소리와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
***
화륵! 화르륵! 승하는 다가오려는 것처럼 일렁거리는 불길에 대고 신경질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류 현마저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그녀의 마력검 앞에 불꽃이라고 무사하진 못했다. 오히려 마력을 땔깜으로 삼아서 타고 있는 불이기에 더했다. 그녀는 턱에 맺힌 땀을 훔치며 투덜거렸다.
“지들이 두더지야 뭐야? 이놈들 괴수 맞긴 맞아?”
“내 잘못이에요. 위만 신경 쓰고 밑은 방비를 안 해서...”
공격은 갑작스러웠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갑자기 불꽃이 바닥에서 솟구친 것이다.
운 좋게도 아무도 기습공격에 직격 당하진 않았고, 승하가 조금 그을린 수준이었다. 적이 아직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지만, 그녀들은 기습을 가해온 것이 ‘업화의 아이들’이라고 확신했다.
아무리 지하의 방비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지만, 그냥 괴수였다면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됐어. 그렇게 치면 너 빼곤 다 잉여 취급해야지. 류 현은? 걔 쪽은 괜찮아? 무슨 일이 없으면 터지는 소리 듣고 바로 달려왔을 텐데.”
“아무래도 ‘마녀’가 이쪽 결계를 역으로 이용한 거 같아요. 마스터 쪽은 아무 일 없...어?”
“왜? 무슨 일인데?”
“‘마녀’가 마스터가 있는 방에...세아 언니도 아직 있는데!”
“젠장, 희란아. 넌 청뢰 있는 대로 뿌리고 내가 길 뚫을 테니까. 바짝 붙어서 와.”
승하는 화련이 전한 소식을 듣자마자 칼끝에 마력이, 적의가, 검기가 모이기 시작했다. 대체 불에다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몰라도 살짝 데인 부분 때문에 집중이 잘 되질 않았다. 승하는 이를 악물었다.
끼이이이- 키아악! 검은 선이 내달리며 문을 완전히 박살내고, 벽을 타고 있던 불꽃을 꺼트리며 활로를 열었다. 승하의 코에서 핏방울이 몇 방울 떨어졌지만, 그녀는 대충 손등으로 훔쳐내고는 뒤를 보고 외쳤다.
“바짝 붙어와!”
“잠깐만요! 마스터가...마스터가...”
“왜? 무슨 일인데?”
“...사라졌어요. 아, 아마도 텔레포트된 거 같은데...”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괴수가 대체 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하려던 승하는 흠칫했다. 보통의 괴수라면 그럴 이유가 없다. 첫 네임드 몹인 엘더 리치도 아마 그럴 것이다.
하지만 ‘마녀’는 다를 수도 있지 않은가?
말을 하고, 변수를 피해서 후퇴를 선택할 지능도 남아있으며 류 현조차 평범한 상황에서는 타격할 수 없는, 화련이 아니면 타격을 줄 수 없는 괴물. 승하는 소름이 돋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미친, 우리를 각개격파 하려는 거야?’
‘우리를 사냥하겠다고?’
상상만으로도 섬뜩해지는 상황이었지만 승하는 그것에 정신 팔려있을 생각은 없었다.
“일단 류 현 방으로! 이동 흔적이든 뭐든 빨리 가야 남아있을 거 아냐!”
승하의 외침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불길이 들고 일어나며 그녀를 덮쳐들었다. 화련이 그것을 보고 외쳤다.
“저기, 그놈이 섞여있어요!”
대충 마력검으로 쳐내려던 승하는 다시금 칼끝에 자신의 모든 것을 끌어 모았다. 모인 검기와 마력과 적의는 검은 선이 되었다.
끼이익! 후왕! 검은 선은 불길에 섞여 덤벼들던 불의 정령마저 꿰뚫고 집에 커다란 구멍을 내놓았다. 승하는 올라오는 핏물을 삼키며 복도를 내달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나는 것처럼 뛰어올라갔다. 화련과 희란, 혜라는 승하의 지시대로 바짝 뒤에 따라붙었다.
언제 그곳까지 올라갔는지 불길이 위에서 쏟아지며 그녀를 가로막았다.
‘젠장, 오늘 컨디션 별로인데.’
그녀가 욕지기와 함께 다시 한 번 검기를 벼려내려던 그 때.
“뭐야?”
승하를 덮치려들던 불길이 실 끊긴 인형처럼 허물어졌다. 승하는 불의 정령들의 존재를 느끼진 못했지만, 직감적으로 그것들이 사라졌음을 눈치 채었다.
“사라졌어. 대체 어디로?”
“그놈들이 갔다고?”
승하는 기쁨보다는 불길함을 느꼈다. 자신이 조금 무리한 탓에 작은 내상을 얻긴 했지만, 이렇게 물러날만한 소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목적은 사라졌다는 류 현이었을 것이다.
“네...근처에 걸리는 건...”
“젠장. 일 다 봤다고 내뺐군.”
승하는 신경질적으로 칼집에 칼을 꽂아 넣고는, 넋이 나간 화련의 어깨를 툭쳤다.
“일단 가 보자. 흔적이 남아있을 수도 있으니까.”
‘악룡인지 뭔지도 잡았다면서 설마 벌써 당한 건 아니지? 어떻게든 쫓아갈 테니까. 제발 버티고 있어. 류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