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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9화 〉탐식마(貪食魔) (219/429)



〈 219화 〉탐식마(貪食魔)
“근데 우리가 그 쪽을 먼저 발견할 수가 없으면 말짱 황이잖아. 오히려 다시 기습 안 당한다는 보장도 없고. ‘업화의 아이들’ 쪽도 비슷한 상태라면서? 어느 한쪽이라도  보이면 모르겠는데...”

‘마녀’를 상대하기 위한 대책을 논의하던 와중 승하가 툭 내뱉은 말은 나머지 세 사람을 멈칫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두 시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이 대책회의도 승하가 지적한 부분에 대해서 이미 해결됐다는 전제하에서나 의미 있는 것이었으니까.


‘마녀’는 시각이나, 후각, 혹은 마력적 기척으로는 접근을 알 수 없는 괴물이다. 팀원 중에서도 ‘마녀’가 공격하기 전에 알아볼 수 있는  화련 정도뿐이고, 그녀마저 ‘마녀’가 공격할  있을 정도로 접근해오지 않으면 감지가 불가능하다.


사실상 ‘마녀’를 상대로 선공을 날리는 건 불가능한 상황.

아니, 오늘처럼 습격당해서 전력이 감소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이 화련 혼자뿐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게 말입니다.”

말을 하고자 마음을 먹었음에도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계속 숨길 수도 없고, 숨겨서도 될 일이 아니야.’  현은 자신을 독하게 다그쳤다.


“화련 씨 말고도 감지가 가능한 사람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건 또 뭔소리야. 우리 말고는 ‘마녀’를 본 인간도 없잖아. 너도 못 본다고 했고.  전생의 동료라도 돼?”

승하의 물음에 류 현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현의 태도에서 뭔가를 읽어낸 것인지 화련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군데요?”
“저희 누나가   있더군요. 여러분이 몰려있던 곳에도 그래서  문제 없이 도착한 겁니다.”
“에엥?”
“...”
“어...하, 하지만 세아 언니는...”
“예, 전에는 이러지 않았었죠. 플레이어로 각성하지도 않았었고요.”

승하는  현의 눈치를 살피다가 아무도 입을 뗄 기미가 보이지 않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 그러니까. 류 현네 누나가 각성한 거야? 그리고 능력이 뭔지는 몰라도 ‘마녀’를  수 있는 거고?”
“...예.”

류 현이 떨떠름하게 긍정하자 화련은 다른 이들의 눈치를 살폈다.


희란은 이 상황을 바로 받아들일 수 없는지 벙찐 얼굴이었고, 승하는 미간을 찌푸리곤 있었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  알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마지막으로 류 현은,


‘대체  밝힌 거야. 그냥 대충 묻어가도 욕할 사람은 없는데.’

그대로 돌이 되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나라도 결사반대를...’


“그래서?”
“예?”
“너 설마 볼 수 있으니까 작전에 투입해야겠습니다. 이런 소리 하려는  아니지?”
“...”


하지만 승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승하는 불쾌감을 숨기지도 않았다.

“아무리 궁해도 그건 아니지. 협회에서 아직 검사도 안 받아봤을  아냐? 안전 교육 같은 건 아예 구경도 못했을 거고. 그럼 그냥 민간인이지.”
“아니...”
“너 설마 우리가 민간인 팀에 껴 넣자고 할 줄 알았어? 아님 나중에 알고 말 나올까봐?”
“그런  아니고...”

팔짱을  채 조곤조곤하게 밀어붙여오는 승하에게 류 현은 대꾸조차 거의 못하고 밀리기만 했다. 승하는 말로만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거리를 좁혀 왔다. 류 현은 그만 다가오라는 제지도 못한 채 어물어물 부정의 말만 되뇌었다.

거의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후에서야 승하는 멈춰 섰다. 그녀는 호기롭게 콧김을 훅  번 뿜고는 물러섰다.

“거기다가 그냥 민간인이 아니잖아. 네 가족이잖아. 그것도 전생에는...”

‘죽었다면서.’ 승하는 해서는 안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한 번 휘휘 젓더니 말을 이었다.


“아무튼, 아무리 궁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가족 끌어들이자고는  해. 솔직하게 말해서 경험도 없는 민간인 끌어들여서 좋은 꼴 본 적도 없고.”

그리 말하고는 승하는  쪽에 위치한 냉장고로 휘적휘적 걸어가더니, 냉장고 문을 열고 캔 맥주를 하나 집어 들었다. 회의 끝나기 전에는 냉장고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엄포를 놓긴 했지만 류 현은 뜯어말리지 못했다.

단숨에 캔 맥주를 비운 승하는 다시  현의 앞에 철푸덕 앉더니 단언했다.

“류 현, 네 누나를 보호하는 데 나서 줄 수는 있지만. 네 누나를 강제로 팀에 넣으라고 강요 할 일은 절대로 없어. 알겠어?”

세아의 기세에 밀려서 류 현은 고개만 끄덕거렸다.


***


[이상하네. 이럴 리가 없는데.]


하얀 여자는, 아니 ‘마녀’는 자신과 비슷한 키의 거한을 의자 삼아 앉은 채로 불길을 구경하고 있었다. ‘마녀’의 한 숨에 방안을 노닐던 불의 정령들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마녀’는 손을 내저었다. ‘마녀’의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자 불의 정령들은 하던 일을 재개했다.


불의 정령들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칼리프 클랜의 대금고로 향할 예정이었던 아티펙트들이 녹아내렸다. 정령들의 불길은 아티펙트의 가격을 가리지 않고 전부 녹여내었다. 공이 열 개가 붙는 물건이든, 여덟 개가 붙는 물건이든 모두 공평하게 녹아내렸다.


한 시간 전, ‘마녀’가 정령들을 이끌고 습격한 이 곳은 칼리프 클랜 제다 지부였다. 항구 도시에 위치한 지부라, 외국에서 사들여온 아티펙트들이 이송을 기다리는 창고의 성격이 더 강한 곳.

그래서 상주하는 경계 병력의 질도 훨씬 높은 편이었으나, ‘마녀’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속사정이었다.

[이렇게 균형이 안 맞는 게 가능한 걸까?][용사 후보는 둘씩이나 되는데, 평균 기예 수준이 이렇게 떨어진다니.]
이 제다 지부가 오늘 처음 습격한 곳은 아니었다. ‘마녀’는 이 곳을 덮치기 전에 정령들을 이끌고 이미 기백을 헤아리는 플레이어들을 살해한 상태였다. [기예는 떨어지지만 힘의 크기는 하나같이 기예에 맞지 않게 컸지.]

플레이어들을 그냥 죽이진 않았다. 정령들에게 사지가 불타서 꼼짝도 못하는 이들에게서 ‘마녀’는 마력을 뽑아내었다. 그들이 말라비틀어져 숨이 끊어질 때까지.

[자기 기예에 휘둘리는 자들도 한 둘이 아니었고.]

가지고 노는 것처럼 플레이어가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뒀다가 지치고 나서 잡아 죽이기도 했다. ‘마녀’에게는 어떠한 공격도 닿지 않았으니까.


[그런 것치고는 공간 마법을 쓰는 마법사가 있었지. 공간 마법에 도달할 정도로 마법이 발달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큰 상처를 입거나 마력 소모가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마녀’는 화련의 기습을 아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공간으로 짓쳐들어올 때를 지금도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녀’가 후퇴를 결심하고 이곳까지 날아와서 플레이어들을 잡아 죽이고 있는 건, 그 일격이 굉장히 크게 작용했었다. ‘마녀’가 정보의 부재를 신경 쓰게 만든 것이다.

[이 물건들도 마력다루는 수준을 생각하면 가당찮은 물건이고. 이해를 할 수가 없네. 어떻게 이럴까.]

‘마녀’는 자신이 깔고 앉은 거한이 두르고 있던 망토를 뜯어내듯이 벗겨서 이리저린 비춰보고는 정령들에게 넘겨주었다. 어지간한 방화복 보다 내연성이 부여되어 있는 망토는 순식간에 불티로 화했다.


[그러고 보면 이 아이들은 제대로 된 마법사 하나 대동하지 않고 게이트에 막 들어갔었지. 그것과 관계있는 걸까?]

‘마녀’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두둥실 몸을 띄웠다. 그녀는 그대로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모습으로 정령들을 불러 모았다. 3층짜리 사무실을 불태우고 있던 불덩어리들이 ‘마녀’ 앞에 도열했다.


[이번에는 게이트로 가보자꾸나.]

행선지를 정한 ‘마녀’는 정령들을 한  둘러보고는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우르스.]

슈슉! 그 한마디와 함께 ‘마녀’와 불의 정령들은 건물 안에서 사라졌다.


***


-예? 입국하지 말라는 말씀이십니까?-
“예, 당장은 입국하지 마시고. 플레이어가 당한 사고들을 좀 모아주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괴수가...-
“지금으로서는 화력을  늘려도 별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도 화력이 딱히 모자라진 않고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지금 팀의 규모를 늘리면 오히려 마이너스로 작용할 가능성이 더 높아서요. 단순히 머릿수나 화력으로 밀어붙일 상대도 아니니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다른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힘드시겠지만 칼리프 클랜 소속의 플레이어가 관계된 사건을 최우선 순위로 모아주셨으면 합니다. 놈이 처음 출현한 곳이 그 주변인  같거든요. 확실한 건 아니지만 멀리 도망갔다면 그 쪽으로 갔을 겁니다. 아무래도 며칠 간 분탕질 친 곳이 더 익숙할 테니까요.”
-예, 그렇게 하지요. 그럼 무운을 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현은 길게 한 숨을 푸욱 내쉬었다.

‘대체 어디로  거야?’

습격으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마녀’가 잠잠한 동안,  현은 그 동안 놀란 세아를 달래고, 백혜라에게 대강 거짓말을 섞은 상황 설명을 끝마치고 ‘마녀’의  습격을 대비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흘 전의 습격이 신기루였던 것처럼.

당연히 그의 팀은 임시 거처에서 무기한 대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곳이 아니면 화련도 습격당하기 직전에야 ‘마녀’의 존재를 느낄  있으니까.

‘대체  하려는 거야? 설마 엘더 리치처럼 섬 하나를 통째로 삼키려고 작업 중인 건가?’

그렇다면 차라리 다행스러울 것이다. ‘마녀’의 가장 끔찍한 점인 기동성과 은밀함을 스스로 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 일 테니까.

‘‘마녀’가 그러는  나도 못 봤으니까. 섬 하나를 먹고 뭘 할지 확신은 금물이지만...그래도 장소를 아는 쪽이 훨씬 낫지.’


다들 별 말은 안하고 있지만, 긴장감을 유지하며 지내는 것에 꽤나 피로를 느끼고 있는 게 느껴졌다. 화련의 경우에는 사흘만  지나면 노이로제라도 올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젠장, 선빵 때려주길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니 이게 무슨 경우야. 패턴 꼬이는 김에 ‘마녀’말고 다른 놈이 나올 것이지.  초반 네임드 몹은 안나오고...’

 현이 부질없는 불평을 투덜거리기 시작하려는 때였다.

부우웅! 그의 휴대폰이 알 라시드라는 글자를 출력하며 몸을 떨었다.

“이 인간이 지금 왜...”

잠깐 동안 화면을 노려보던  현은 전화를 받기로 했다.


“예,  현입니다. 알 라시드씨 무슨 일로...”
-형씨, 당장 여기로 와줄 수 있어?-


다짜고짜 여기로 와달라니 이 무슨 행패란 말인가. 류 현의 표정이 팍 썩어 들어갔다. 하지만 뒤이은 말은 류 현의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것이었다.


-네임드 몹! 그놈들이 온 던전을 다 헤집고 있어. 젠장, 실종 처리된 놈들까지 합치면 사흘 사이에 죽은 놈들이 거의 오백은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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