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화 〉탐식마(貪食魔)
화련은 평소라면 절대 짓지 않았을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작은 입이 파리가 들어가도 모를 정도로 떡 벌려졌다. 승하나 희란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뭘 어떻게 잡았다고요?”
“그러니까, 첫 시도에서는...”
류 현은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처음부터 친절하게 설명해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화련은 그 친절에 폭발했다.
“아니, 마스터 진짜 제정신이에요! 그 때는 언니도 계셨다면서요?”
류 현은 다시금 자신의 의도를 설명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화련의 서슬 퍼런 기세에 입을 도로 다물었다. 저 작은 몸에서 어디서 그런 기운이 솟아나는 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가 서 있고, 자신이 앉아있긴 하지만 이렇게 압도되는 기분을 느낄 줄은 몰랐다.
“아무리 재생력이 깡패여도 그렇지! 마스터가 목숨이 아홉 개 되요? 진짜 전생에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에요!”
집 전체를 장악해뒀기에 화련은 있는 대로 소리를 꽥꽥 질렀다. 방음은 회의 시작 전부터 조치해 두었고, 누가 방 근처로 다가오면 곧바로 알 수 있으니 만에 하나라도 이 대화가 세어나갈 일은 없다.
“저도 나름대로 고심해서...”
“그게 고심한 거면 다른 경우는 안 봐도 훤하네요. 마스터 혼자서 단독 작전 벌일 생각은 꿈에서도 하지 마세요.”
화련은 더 대꾸하면 물어뜯기라도 할 것 같은 기세였다. 으르렁 거리는 화련을 피해서 다른 이들에게 구원 요청을 보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
“나도 그런 걸 보고 작전이라고는 안 해. 그 때야 네가 외로운 처지였었으니까 아주 이해 못할 건 아니지만...음, 그건 좀 아닌 거 같아.”
“맞아요. 너, 너무 위험해요. 좀 돌아가더라도 안전한 방법을 찾는 게...”
“그리고 세아 언니도 털고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으셨잖아요. 그런데 그런 자살 특공을 한 번 더 하겠다고요?”
화련의 덧붙이는 말은 여러 가지로 류 현의 가슴을 뜨끔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고분고분하게 그녀들의 뜻을 따라줄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방법이 달리 없습니다. 저 말고는 접근하는 것 자체가 자살행위에요.”
“그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핑계...”
“잠깐만, 련아. 일단 뭐라는 지 들어는 보자.”
다시 일어서려는 화련을 제지하며 승하는 턱짓으로 류 현을 재촉했다.
“제가 겪어본 바로는 ‘마녀’는 에너지 드레인을 사용합니다. 근접했을 때 나오는 패턴이라, 지금은 어떨지 확신은 못하겠습니다만 아마도 그 능력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에, 에너지 드레인이요?”
희란이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에너지 드레인이 어떤 능력인가. 류 현의 간판 기술이다. 제 몸집보다 열 배, 스무 배는 더 큰 괴수들이 악착같이 달라붙은 류 현의 에너지 드레인에 말라죽어갔고 희란은 그 모습을 수없이 많이 지켜봤었다.
괴수의 쉴드고, 총알마저 튕겨내는 겉가죽도 전부 뚫어버리는 그 능력을 괴수가 가지고 있다니, 이보다 더 끔찍한 소식이 있을까?
“어, 니가 쓰는 그거?”
“완전히 똑같지는 않고요. 좀 많이 달랐는데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할지...”
“설마 너처럼 이상한 연기 흩뿌리고 그러는 건 아니지? 그럼 진짜 답 없는데.”
“이상한 연기라니...아뇨. 접촉한 대상으로만 쓸 수 있는 것 같았습니다. 문제는...”
“딜도 거의 안 들어가는 녀석이 그런 능력까지 가지고 있다는 거지. 진짜 스트라이커들 다 나가 죽으라는 소리잖아?”
“그런 괴물 상대로 그런 자살 특공을 했다고요? 그리고 이번에 또 그렇게 하겠다는 거에요? 적 능력도 뻔히 알면서?”
화련이 재차 터질 기세가 보이자 승하가 희란에게 손짓을 했다. 희란은 헤헤 웃으며 화련을 끌어당겼다. 화련은 희란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련이 너 못 듣고 있겠으면 나가서 머리라도 좀 식혀. 이러다가 하루 종일 안 끝나겠다. 뭘 들어놔야 다른 대책을 짜든 말든 할 거 아냐?”
화련은 부루퉁한 얼굴이 되었지만 반발하진 않았다. 류 현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승하는 화련이 나갈 생각이 없어보이자 소리 없이 한 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원래 쟤가 해야 하는 건데...팔자에도 없는 참모 노릇 하게 생겼네.’
“네 말대로라면 진짜 답이 안 보이긴 하는데, 그렇다고 그런 방식을 채택할 순 없어. 그건 말 그대로 도박이잖아. 직접 해봤으니 류 현 네가 제일 잘 알 거 아냐? 거기다가 이번에는 잡아야 하는 게 한 마리도 아니고.”
“그게 제일 큰 문제죠. 네 분이서 목격한 바에 따르면 ‘업화의 아이들’도 엘더 리치에게 굴복한 본 드래곤 마냥 지시를 받는다는 소리인데...솔직히 제가 두 명 있어도 그 둘을 동시에 감당할 자신은 없습니다.”
“‘업화의 아이들’인지 뭔지 하는 불덩어리들 목숨이 여러 개라는 건 대체 무슨 소리야? 진짜 여러 번 죽여야 하는 거야?”
“그건 아닌데, 불덩어리가 여러 개로 나뉘어 있는 건 보셨습니까?”
“어, 네가 오기 직전에 ‘마녀’가 도망칠 때 봤었어. 추가 병력까지 왔나 하고 다 죽었구나 싶었는데, 불덩어리들 오자마자 도망가더라고. 운이 좋았지. 엄청나게.”
류 현이 생각하기에도 ‘마녀’가 순순히 퇴각한 건 천운이었다. 화련의 기습이 성공하지 않았다면, ‘마녀’에게 리스크를 계산할 지능이 남아있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보기에는 인간 여자 같지만, ‘마녀’는 단독으로 칼리프 클랜의 수뇌부를 박살낸 괴수니까.
“예, 천운이라고 해도 될 정도죠. 솔직히 그 정도로 도망간 게 놀라울 정도죠.”
“용사 어쩌고 하던 건 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너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
류 현은 속내와 정 반대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짚이는 구석이 아주 없진 않았다. ‘칼리프 드 오르시아...그 여자가 관계된 건가?’
그 외에는 용사거린 인간은 본 적이 없었다. 인간인지 조차 의심스러운 존재이긴 했지만.
‘그런 거면 왜 직접 그 여자를 안 찾아가고 여기서 난리인 거야?’
스스로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온갖 요소들이 스트레스를 주는 판국에 그런 고민까지 자청해서 떠안을 생각은 없었다. ‘이러든 저러든 잡아야하는 괴수다. 내버려두면 또 전생에서 했던 짓을 할 수도 있어. 그 전에 우리부터 치우려고 들테고.’
류 현은 그 생각을 구석으로 밀어두기로 했다. 어차피 고민해봐야 칼리프 드 오르시아를 만날 방법도 모르고, 가능할 지도 의문이지만 괴수랑 타협할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다시 돌아가서. ‘업화의 아이들’은 제가 겪어본 바로는 여섯이서 한 개체인 좀 특이한 괴수입니다. 여섯으로 나뉘어서 독립적인 활동이 가능한데, 나뉘어있을 때는 소멸시켜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골치 아픈 특성이 있지요.”
“여섯? 우리가 본 건 열은 넘은 거 같은데?”
“예, 이번에는 숫자가 좀 다른 것 같더군요. 저를 습격한 놈은 아홉은 넘었으니 말입니다.”
“진짜 좋은 소식이라곤 없네.”“하하..”
“나눠져 있을 때는 소멸시켜도 소용없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한 번에 여섯 마리 전부 쳐야한다는 뜻이에요. 아님, 뭉쳐 놔야한다는 뜻이에요?”
“둘 다입니다.”
“네?”
“뭔 소리야 그게?”
류 현은 말 대신 종이와 펜을 가져와서 큰 동그라미를 하나 그렸다. 그리고 그 주변에 작은 동그라미 여섯 개를 그렸다. 그는 작은 동그라미 하나를 짚었다.
“이게 분열한 ‘업화의 아이들’ 한 개체입니다. 보통 때는 이렇게 독립해서 돌아다니다가 소멸될 정도로 커다란 타격을 입으면...”
류 현은 선을 찍찍 그어 커다란 동그라미와 작은 동그라미를 이어놓았다.
“독립된 상태가 풀리고 다른 개체들에게 그 개체가 가진 에너지가 할당됩니다. ‘업화의 아이들’이라는 커다란 우물로 돌아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일정시간이 지나면 소멸한 개체가 다시 분열해서 여섯 마리로 되돌아갑니다.”
“미친, 그게 말이 돼...? 어떻게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직 던전들이 본격적으로 터지지 않아서 분류가 안 생겼습니다만...전생에서는 정령류라고 환수종 옆에 다른 분류를 만들어놨었습니다. 핵이 파손되면 천천히 무너지는 골렘같은 무생물 괴수랑 다르게 이놈들은 핵에 손상을 입어도 천천히 회복해서 복수하곤 했었거든요. 분열하는 경우도 굉장히 드물지만 네임드 몹 이외에도 존재 했었고요. 화력이나 재생력면에서는 이놈들이랑은 비교도 안 되긴 했지만요.”
“...둘 다라는 건 무슨 의미죠?”
조금 전보다는 가라앉은 화련의 목소리였다. 류 현은 모든 작은 동그라미와 큰 동그라미를 선으로 이어놓고는 말했다.
“이놈들을 잡으려면 분열한 여섯 전부를 소멸시킨 후에, 합쳐진 놈을 다시 잡아야합니다. 문제는 이놈들이 그 상태가 약점인 걸 아는지 분열된 개체수가 세 마리 이하가 되면, 재분열하는 속도가 확 빨라진다는 거죠. 두 마리까지 밀어붙인 적이 있는데, 하나 처리하고 남은 하나를 처리하려고 하니까 그 새 분열해 있더군요. 힘의 총량까지 줄여가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둘 다라고...”
“예, 모든 개체를 한 지역에 모아놓고 동시에 없애버리는 게 아니면 답이 안 나오는 놈들이라.”
“...설마 이놈들도 칼질이나 마법 안 먹히는 건 아니지? 말하는 거 보니까 더럽게 안 죽는 게 특성 같은데.”
“저항이 상당하긴 해도 ‘마녀’처럼 평소에 완전 무시 수준은 아닙니다. 그런데 화력이 문제죠. 아마 유전 사고가 그놈들 짓일 겁니다. 그놈들이 가진 화력도 몰아서 한 번에 잡아야 하는 이유 중 하나죠. 그놈들이 눈 뒤집혀서 도시에 불을 지르고 다니면...그야말로 불지옥이 될 겁니다. 선결 과제는 놈들을 터질게 많은 도시로부터 떼놓는 것.”
“진짜 난이도 널뛰기 장난 없네...”
승하는 제 뒷머리를 헤집으며 투덜거렸다. 뒤이어 화련은 한 숨을 푹 내쉬었고, 희란은 머리를 헤집거나 한숨을 쉬진 않았지만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의욕이 꺾일 만도 하지.’
류 현 스스로도 현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욕지거리부터 떠오를 지경이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문제가 있다면 류 현이 이들을 다독거려서 그 괴물들을 잡아야 하는 입장이라는 거였다.
‘젠장, 이런 건 젬병인데.’
류 현이 피로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닦달하며 말을 짜내려는 때였다.
“에휴, 별 수 없지.”
“그러게요. 내가 어쩌다가 이런 대장을 만나서...”
“?”
“뭘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 걱정 마. 못 잡겠다고 너만 두고 도망은 안 갈 테니까. 우리 도망가 버리면 너 또 그 작전 같지도 않은 작전 실행할 거 아냐?”
“맞아요. 혹시나 그 말도 안 되는 자살 특공 다시 시도할 생각만 해봐요. 언니한테 전부...”“언니...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안 돼. 안 이러면 각만 보이면 그렇게 들이박을 게 뻔 하다니까.”
다른 의미로 불타오르기 시작한 세 여자를 바라보며 류 현은 헛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