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16화 〉탐식마(貪食魔) (216/429)



〈 216화 〉탐식마(貪食魔)

“너 대체 뭐한 거야?”


승하는 그리 물으며 화련의 행색을 살폈다. 화련은 꽤나 험악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산발로 뻗쳐있었고, 탄 부분마저 보였다. 입고 있는 옷도 비슷한 꼴이었는데, 상체는 거의 타지 않은 것에 비해서 하의는 끝단이 타서 말려 올라간 상태였다.


어떻게 봐도 오는 와중에 일을 당한 게 분명해보였다.


“보고도 몰라요? 뭘 멍 때리고 있어요. 이리로 와요!”

화련의 말에 승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하얀 여자 쪽을 돌아봤지만, 이미 하얀 여자는 모습을 감춘 뒤였다. 승하는 혜라와 희란을 거의 잡아끌다시피 하며 화련에게 다가섰다.

“진짜 어떻게 한 거야?”

화련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하지만 대답을 아예 안할 생각은 아니었는지,  번 우물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저 여자 주변의 공간이 이상하게 뒤틀려 있었어요.  공간에  발을 반만 걸친 상태? 내가 그걸 밀어버린 거고요. 저 여자한테 칼이고 뭐고 안 먹혔죠?”


승하는 앞의 말은 도통 알아들을  없었지만, 뒤엣말은 그녀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화련의 말대로 혜라의 마법이고, 자신의 검기고 먹히질 않았으니까.

“어? 어떻게 알았어?”
“쉽게 말하자면 연속해서 계속 텔레포트 하고 있는 거랑 비슷한 상태에요. 문제는 우리가 그걸 막을 수도, 따라갈 수도 없다는 거죠.”
“넌 방금 걷어찼잖아?”
“그거야 저쪽에서 나를 인지 못했으니까 이쪽으로 밀어낼 수 있었던 거고요. 또 하려면 준비가 필요해요. 지금은 마력도 거의 다 썼고. 희란아?”
“아 자, 잠깐만요.”
“쳇, 내가 멍청하게 기회를 날린 거였네.”
“가슴에 구멍 뚫릴 뻔 했으면서 그런 소리가 나와요?”
“네가 구해줬으니 된 거지.”

방금 전까지 몰려있던 걸 홀랑 까먹기라도 한 듯, 태평하게 대꾸하는 승하였다. 화련은 눈을 흘기면서도 손을 내저어서 주변 경계에 힘썼다. 팔을 휘젓는 화련은 꽤 버벅 거렸다.  번에 너무 많은 마력과 집중력을 소모해서 머리가 핑  지경이었다. 희란이 ‘링크’로 마력을 쏟아부어주고 있지만 소모된 집중력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체 저게 뭐야? 위상 차원에 끼여 있는 건가? 그래선 물리력을 행사하는  말이 안 되는데?’


기세 좋게  소리 치긴 했지만, 화련 본인도 허공에 떠있는 저 하얀 여자가 무슨 상태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단순히 투명화 되서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 공간에 상이 맺힐 정도로  시간 존재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화련조차 집중하지 않으면 하얀 여자의 존재를 놓쳐버릴 정도니까.


승하가 눈치 좋게 화련이 노려보고 있는 방향을 같이 경계하곤 있지만, 제 아무리 검성이라도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적을 완벽하게 마크하는 건 불가능했다.

‘저걸 괴수라고 부를 수가 있나...거의 신의 영역이잖아.’


저 상태를 완벽하게 이해하진 못하나 화련은 저것이 물리법칙을  먹이는 수준이 아니라, 초월했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괴수가 맞긴 한 건가? 네임드 몹도 아닌데 저런 짓을 한다고?’

네임드 몹도 아니면서 이런 짓을 하는 녀석이 있다면 끔찍한 수준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하얀 여자를 걷어차면서 힐끔 봤을 때 머리 위에 이름은 떠있지 않았었다. ‘마스터한테 네임드 몹 목록이라도  들어둘 걸.’


당시에는 회귀니 뭐니 너무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라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바빴었다. 귀국한 뒤에는 류 현과 류세아의 짧지만 임펙트 있었던 냉전 때문에 정신이 없었고. 거기에 류 현이   3차 ‘대소환’은 자신이 겪었던 것과는 좀 많이 다르다는 말도 꽤 크게 작용했었다.

‘이 멤버로는 너무 상성이  좋아. 내가 끌어내려도 붙잡아둘 사람이 없어. 승하 언니가 공격력은  충당하더라도...’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화련은 머리를 바쁘게 굴렸지만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은 명안은 나오질 않았다. 적의 능력이 강력한 걸 넘어서 차원을 달리 하는 수준인 것도 머리가 아픈데 상성마저 좋지 않았다.

자신이 끌어내릴 수 있다곤 해도 아주 잠깐이다. 승하의 검도 타이밍에 맞출 수 있을까 말까인 찰나. 나머지는 전부 마법사 계열이라고 봐야하는 구성으로는 타이밍 맞추기란 요원할 터.

‘후퇴가 답이야. 그런데 위상차원을 들락거리는 저걸 따돌릴 수 있을까? 아까 그것들도 처리 못했는데...’


한 번의 기습 후 쫓아오는 기색도 없고,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서 기세가 더 꺾일까봐 말하진 않았지만 화련이 오는 길에 당한 습격을 감행한 놈들도 괴물이긴 마찬가지였다. 하얀 여자와 달리 그 쪽은 정말 공격하는 기척조차 못 느끼고 허를 찔렸었으니까.

‘이쪽에도 저런 괴물이 있을 줄은...’


“마스터가...와요!”


뜬금없지만 희란의 말에 화련이 화색이 된 건 그래서였다. 저 괴수라고 칭하기도 힘든 뭔가를 대적할만한 능력을 가진 그가 온다는 소식!


“어디? 어디인데?”
“저, 저쪽 방향에서 점점 다가오고 있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지? 왜 마스터의 마력이 저렇게 날뛰고 있는 거야?’

희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쳐드는 불길한 예감에 입을 닫아버렸다.

***

후륵! 화르륵! 등가죽이 익어버릴 것 같은 열기가 등을 떠밀 듯이 쫓아왔다. 류 현은 넓적다리 근육이 끊어지든 말든 있는 힘껏 발을 굴렀다. 실제로 그가 땅을 디딜 때마다 넓적다리에서 재생을 알리는 김이 풀풀 올라왔다.

“9시 방향, 대각선으로!”


품안에서 말이 나오기 무섭게  현은 앞으로 두 바퀴 구르며 쏟아지는 용암을 피해내었다. 이번에도 그의 마력 감지에 걸리는 것보다 빨랐다. 류 현은 세아의 다음 지시에 따라서 방향을 확 꺾어 전방에 일어난 불의 벽을 피하면서도, 머리를 바쁘게 굴리는 중이었다.

‘이게...누나가 각성한 능력인건가? 마력이 쌓일 때부터 이상하다 싶긴 했지만...전생에서는 이런 거 없었는데? 대체 어디서 조건이 충족돼서...아니, 그 이전에 막 각성한 사람이 이래도 돼?’


누군가 류 현의 생각을 보고 있다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인 후 야유를 보냈을 테지만,  현은 그런 부분을 생각할 여유가 없는 상태였다.


“바로 머리 위쪽! 엄청 많아.”

하지만 복잡한 머릿속 상태와 달리 류 현의 몸은 세아의 말을 착실하게 따랐다.


후왁! 그의 몸 주변에 머무르고 있던 검은 안개가 솟구쳐 우산이 되었다. 그 직후 불로 된 불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검은 안개로 된 우산은 무너지지 않았으나, 보통 불이 아닌지라 네 다섯 발이 그것을 뚫고 들어왔다.

‘화력 끝내주네. 대체 몇 마리가 몰려온 거야? 이 정도면 여섯  몰려온 건가?’

류 현은 별 기대 없이 물었다.

“혹시  마리가 있는지도 보여?”
“뒤쪽에 셋, 우리 앞서고 있는 게 넷, 그리고...오른쪽으로!”

류 현은 지체 없이 오른쪽으로 몸을 던졌다. 푸홧! 지뢰가 터지는 것 마냥 흙이 솟구치며 불꽃이 튀었다. 보기에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불꽃이었지만, 류 현은 불티라도 튈 새라 그대로 대 여섯 바퀴 구른 다음에 벌떡 일어서서 다시 달렸다.


“방금 공격한 밑에 둘.  아홉.”
“아홉?”
‘여섯이 아니고 아홉?’


기억과는 명백하게 달랐다. 정령류 네임드 몹인 ‘업화의 아이들’은 여섯 개체가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괴수다. 감지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특성까지  해져서 수많은 플레이어들을 고혼으로 만든 괴수.


개별 활동을 하는 동안은 화력적으로 네임드  평균보다 약간 못 미치지만, 모든 개체가 모이면 그런 약점 아닌 약점마저 사라지는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깨지는 괴수.

‘아홉이라고? 젠장, 꼴 보니까 화력도 더 오른 거 같은데. 방금 그게 두 마리짜리 공격이면...씨발.’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괜히 물어봤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그 놈들이 움직이는 게 보인다고?”
“응, 반짝반짝 빛나고 있어서...현이 넌 정말  보이니?”
‘보이면  고생도 안하지!’

하지만 세아가 이렇게 묻는 것도 이해 못할 건 아니었다. 세아도 자신처럼 능력을 인지 못한 ‘각성’을 이루었다면, 그럴 만도 했다. ‘젠장, 이거 기뻐해야하는 거야? 아님 슬퍼해야하는 거야?’


하지만 적은  현이 고민할 틈도 주지 않았다.


“정면, 막으면 안 돼!”

후르르! 화르륵 치이이! 류 현이 옆으로 뛰기 위해서 브레이크를 걸고 무릎을 굽히자, 시뻘건 말뚝 같은 것이 허공에서 뿅하고 나타났다.

류 현은 저것이 쇳덩이가 달궈진 것이 아니라 마력의 불꽃을 극한으로 응축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보고는, 세아의 말처럼 피하기를 포기하고 옆으로 뛰었다.


그러나,

치이익! 화르르! 주변의 습기와 대기를 마구잡이로 불사르며 말뚝이 그를 쫓았다. “하단 7시 방향, 커!” 그 와중에도 다른 후속 공격이 줄을 이었다. 류 현은 구르고, 말뚝을 뛰어넘고, 화염의 벽을 찢어발겼다.


‘젠장, 진짜 끝도 없네!’

이대로는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누나 앞에서 쓰긴 싫었는데...’

다섯 번째 말뚝의 습격을 피해낸  현은 회피 동작을 그만두고 똑바로 섰다. 세아의 외침에도 회피할 기색을 보이지 않던  현은,

“후우-”

심호흡을    후에.


뻐벙! 주먹질  번으로 덮쳐드는 화염의 파도와 말뚝을 흩어놓았다. 그가 흩뿌린 검은 안개가 재처럼 휘날렸다. 류 현의 흰자위에도 같은 검은 색이 일렁거렸다.

“쯧.”


 현은 자신을 집어삼킬 것처럼 안에서 일렁거리는 검은 것을 억눌렀다. 어찌된 것이 경지가 오르면 오를수록 제어에는 더 애를 먹고 있다. 엘더 리치를 집어삼키고, ‘강림’수준의 파워를 잠깐 끌어다 쓸수 있게  것은 좋은데 삐끗하면 ‘강림’상태에 돌입할 것 같았다.

‘대체 이런 걸 어떻게 억누르지 않고 쓰라는 거야? 칼리프 그 여자...’


“현아...”

세아는 그런 류 현을 슬쩍 올려다보고는 눈을 꼭 감았다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쓸데없는 생각이야. 현이는 현이야.  동생이라고.’


상념을 떨쳐낸 세아는 눈으로 주변을 슥 돌아보았다. 계속 보고 있으면 눈이 멀어버릴  같은 밝기를 가진 정령들은 방금 전의 공격에 놀란 것인지, 멀찍이 떨어진 상태였다. 동생도 그것을 어떻게 아는 지 호흡을 가다듬으며, 북돋았던 불길한 기운을 억누르고 있었다.

세아는  더 ‘시야’를 멀리까지 뻗쳐보았다. 이런 것이 가능하다는  오늘 처음 알았지만, 그 이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산 너머를 볼 수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련이랑 승하 씨가 있어.”
“어? 둘이 붙어 있다고?”
“응, 그  말고도 희란 씨랑 또  명이 있는데...모르겠어. 처음 보는 사람이야.”
‘백혜라겠지. 그런데 넷이 붙어있다고?’
“그리고...”
“그리고?”
“커다란 여자 같은 것도 있어. 같은 일행은 아닌 거 같은데...모르겠어. 이런 건 처음 봐. 자꾸 지지직거려서...”
‘설마...?’

 현은 생각하길 그만 두고 몸을 내쏘듯 앞으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쓸데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도하는 것을 그만두진 못했다.


‘제발 ‘마녀’는 아니어라. 제발 버티고 있어라.’


***


화련은 자신이 노려보고 있어도 반응하기 어렵다는 걸 모르진 않았지만, 하얀 여자를 노려보면서 천천히 술식을 짜 올리고 있었다. 텔레포트 용 좌표 고정식을 있는 대로 뒤틀어서 실패한 마법을 계속해서 돌리고, 더하기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두 번 먹힐까?’ 의심이 들면 그걸로 텄다는 지론을 가진 그녀였지만, 오늘만큼은 그 지론을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적이 그렇게 쿨하게 포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10초만  10초 정도면 좌표를 이쪽으로 고정 시킬 수 있으면 승하 언니가 어떻게든  방 먹여. 그럼 도망치는 것도 훨씬 쉬워질 거야.’

희란이 류 현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알려주긴 했지만 화련은 퇴각 이외의 다른 선택지는 지워버린 상태였다. 저런 해괴한 능력을 가진 괴물과 이렇게 준비도 안  상태로 치고받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류 현이 합류한다면  안전하게 퇴각할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뿐.

“언니, 내가 진입하고 하나, 둘에 치는 거에요. 알겠죠? 하나, 둘이...어?”
“뭐야? 왜 그래?”


화련은 대꾸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하얀 여자 위에 공간이 꿈틀거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공간이 열리며 웬 불덩이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보았다. 불덩어리들은 여러 덩어리로 나누어지더니, 하얀 여자를 감싸는 것처럼 호위를 서기 시작했다.


‘아까 그놈들이잖아.’

화련은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서 기분이었다. 하얀 여자만 해도 감당이 안 되는데 저놈들까지 합류하다니! 마력감지가 먹통이라서 확신은 할 수 없지만, 그 때보다 기세도  늘어난 것 같았다.

 때였다.

[그쪽이 용사 같다고? 이쪽도 용사가 아닌  같진 않은데...어쩔  없지. 일단 물러나야겠구나. 생각지도 않은 공간마법에 한 대 얻어맞기도 했고. 돌아가자.]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생각할  없었으나, 그녀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소리가 하얀 여자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하얀 여자를 보지 못해서 화련의 따라서 시선을 보내고 있는 세 여자도 모두 귀를 의심했다.

“뭐? 말을 해?”
“설마 인간이야...?”
“그럴 리가...”

하지만 하얀 여자는 네 여자가 의문을 풀 기회를 주지 않았다.


[우르스.]

슈슉! 나지막하게 주문을 읊은 하얀 여자는 불덩이들과 함께 사라졌다. 화련은 하얀 여자의 목적지를 읽으려고 애썼지만, 아무것도 읽어낼  없었다.


“대체 뭐야...”


긴장이 풀리자 화련은 손에 움켜쥐고 있던 마법을 흘어 놓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미 엉망이었던 바지가 지직 소리를 내며 더 엉망이 되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상태가 아니었다.


“승하 씨!”

머리를 움켜쥐려면 화련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현이 검은 포대기 같은 걸로 싸맨 뭔가를 한 팔에 안고 달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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