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화 〉탐식마(貪食魔)
덮쳐드는 불길은 흩뿌려진 물보다는 기괴하게 굴곡진 손가락 같았다. 열기로 이루어진 손가락이 덮쳐들기 직전,
후왁! 류 현의 몸에서 피가 터져 나오는 것처럼 검은 안개가 쏟아져 나왔다.
검은 안개는 평소와는 달리 류 현의 몸 주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방진을 이루는 것처럼 퍼져나가서 방패가 되었다.
세아를 품으로 확 끌어들인 류 현은 검은 안개로 이루어진 돔에 구멍이 나는 것을 보고 이를 갈았다. ‘젠장, 직접 왔군!’ 바늘이나 통과할까 싶은 구멍은 순식간에 동전 크기로 벌어졌다. 구멍 사이로 후끈한 열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세아를 신경 써서 ‘탐욕’을 최대한 억눌러놨다지만 류 현의 경지를 생각하면, 보통 불에 뚫릴 방어가 아니었다.
거의 고체화할 정도의 농도를 가진 검은 안개다. 그것을 이토록 쉽게 뚫는다면 답은 뻔했다. 네임드 몹! 습격을 감행한 것은 네임드 몹이 분명했다.
류 현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습격자의 정체도 추측했다.
‘정령...그것도 ‘업화의 아이들’이야. 화룡이라면 이렇게 근접할 때까지 모를 수가 없지.’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류 현은 한동안 희란을 통해서 질질 세어나가기만 하던 마력을 오랜만에 맹렬하게 휘돌렸다. 그에 맞춰 불 앞의 비닐봉투마냥 구멍이 뚫린 검은 안개의 벽이 들끓었다.
뻐엉! 검은 안개의 벽이 폭발하며 사방으로 검은 증기 같은 것을 흩뿌렸다. 병원에 나있는 통풍구나 잡다한 구멍을 비집고 증기가 병원을 감싸자, 병원을 집어삼킨 불이 거짓말처럼 꺼졌다.
“혀, 현아 이게 대체 무슨...”
“괴수야. 아무래도 표적은 나 인거 같고. 누나, 힘들어도 절대 고개 내밀지 말고 바짝 숙이고 있어.”
갑작스럽게 덮쳐들던 불길이 사라지자 여유가 생겼는지 세아가 물었지만, 류 현에게도 느긋하게 대꾸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괴수에게 습격당한 것도, 세아가 이 자리에 있는 것도 그렇고 그에게 뭣하나 좋은 요소가 없었으니까.
‘승하한테 가야하나?’
그냥 1:1로만 붙어도 꽤 큰 부상을 감내해야하는 상대인데, 세아를 끼고 싸우는 건 싸움 자체가 성립할 리가 없다. 머리통 반이 날아가도 재생되는 동안 좀 멍청해졌다가 마는 자신과 다르게 세아는 잘 못 튄 불티 하나에도 목숨이 위태로울 테니까.
도주를 택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류 현의 능력은 어디까지나 방어가 아니라 공격 특화였다. 세아같이 일반인이나 별 다를 것 없는 이를 지키는 건 화련이나 희란이 훨씬 나을 것이다.
‘차라리 던전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다가...씨발, 뭔 개 같은 소리야.’
상상해본 적도 없는 상황에 등 떠밀리자 어처구니없는 가정마저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누나는 아직 플레이어 교육을 안 받았어. 아무것도 모른다고 멍청아. 그리고 싸우다가 그놈들이 던전으로 튀면 어쩔 건데?’
처음 겪어보는 상황. 그것에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생각을 가다듬을 수가 없었다.
사지가 전부 찢기고, 하반신이 날아가고, 머리통 절반이 날아간 위기들로부터 생존한 류 현조차 이런 상황은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거기에 앞서 겪은 위기들은 대부분 자신의 몸만 빼내면 되었었다.
‘...승하한테 가는 게 맞아. 어느 쪽이 맡든 누나를 떼놓고 생각하자.’
결심이 서자 어딘가가 걸린 것처럼 돌아가지 않던 머리가 그래도 도는 느낌이었다. 혼란에서 빠져나온 류 현은 방금 전까지 들리지 않던 세아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현아! 저기 위!”
“뭐?”
류 현은 세아가 가리키는 방향을 돌아보기도 전에 몸을 창문을 향해서 날렸다. 뒤가 일그러져 보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열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판단은,
퍼엉! 챙강! 빠지직! 그가 창문을 빠져나오기 무섭게 쏟아져 나오는 맑은 불꽃의 존재로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류 현은 기함하며 검은 안개로 세아를 감쌌다.
검은 안개를 조형하면서 동시에 ‘탐욕’도 억누르느라 뒷덜미가 뻐근해질 지경이었지만, 세아를 감싸 안은 팔뚝에서 지글거리는 소리가 나는 판국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씨발, 이 화력이면 전부 다 몰려온 건가?’ 복사된 열기만으로도 이 몸뚱이에 영향을 주려면 그것 밖에 없었다. 엘더 리치가 그랬듯, ‘업화의 아이들’도 전생보다 강해져서 나타났을 수도 있지만, 류 현은 지금 상황에서 그런 가정까지 해볼 여유는 없었다.
지면에 발이 닿자마자 류 현은 한 바퀴 구른 후에, 몸을 내던지는 것처럼 앞으로 내달렸다. 무른 땅이 퍽퍽 파이며 흙먼지가 일어났다.
순식간에 병원 부지를 빠져나온 류 현은, 오른쪽으로 홱 꺾더니 더욱더 가속했다. 화련과 희란에게 그토록 강조하는 도주 시 후방경계는 개나 준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필이면 감지도 안 되는 새끼들이 기습까지 해오다니.’
습격해온 적이 코앞에 있어도 감지해내는 게 거의 불가능한 정령류 네임드 몹이었다. 공격 직전까지는 공격 방향 가늠은 고사하고 적의 위치도 알아채기 힘든 상대. 만전 상태라면 좀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세아를 끼고 있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도주뿐이었다.
“현아 머리 위쪽!”
그 때였다. 포대기로 감싼 갓난아기처럼 류 현에게 안겨있던 세아가 소리쳤다. 그 소리를 인지함과 동시에 류 현은 거의 반사적으로 뒤로 뛰었다. 아니, 뛴 다기보다도 굴렀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류 현조차 왜 그렇게 했는지 알 수 없었으나,
화르륵! 타다닥! 허공에서 쏟아진 쇳물 같은 것이 쏟아져 나오면서 옳은 판단이었음이 다시금 증명되었다. 류 현은 지체 없이 쇳물 무더기를 뛰어넘어서 다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세아를 들여다보며 묻는 것도 잊지 않았다.
“누나, 대체 뭘 어떻게 한 거야?”
세아는 그렇게 묻는 류 현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두 눈을 끔벅거리다가 되물었다.
“저게 안 보이니?”
***
화련은 예정에도 없었던 야간 비행을 감행하는 중이었다. 누군가가 봤다면 기함하며 경찰에 신고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새벽 3시에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볼 이는 거의 없었다. 혹여 있었어도 야근에 절어서 헛것을 본 것이라고 치부하고 말았다.
아무런 방해도 없이 서울의 하늘을 독점하고 있지만 화련의 표정을 좋지 못했다. 단순히 좋지 못한 것을 넘어서, 어금니를 사려 문 것이 겉으로도 보일 정도로 힘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그녀의 지면에 감지망을 펼쳐놓고도 안심을 못하겠는지, 눈에 불을 켜고 아래를 훑어보는 중이었다.
화련이 계획에도 없던 야간 비행을 하게 만든 것은 한 통의 전화였다. 다급한 목소리로 습격 사실을 알려온 희란의 전화.
옷은 대충 꿰어 입고, 장비를 갖추고 뛰쳐나오면서 화련은 류 현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류 현에게도 연락이 닿질 않았다. 원정을 다녀오고서 다음날 새벽에도 전화는 재깍재깍 받던 그였기에 그 사실에 당혹하긴 했지만, 화련은 일단 희란이 도망가고 있는 승하의 집으로 향했다.
‘괜찮아. 그 사람이 당할 리가 없잖아. 휴대폰을 다른 곳에 두고 까먹은 거겠지.’
스스로를 그렇게 달래보지만 좀처럼 가슴에 들어앉은 불길한 예감이 사라지질 않았다.
화련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꺼림칙한 예감을 떨어뜨리려는 것처럼 박차를 가하려던 순간이었다.
퍼엉! 그녀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허공에서 화염이 터져 나왔다. 화련이 두 팔로 얼굴을 감싸는 순간 화염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
“후우, 후우.”
승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사방을 돌아봤다. 밤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서울이 아니라 조금 외진 동네였다면 아마 하늘에 별이 그득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맑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승하는 짜증을 느꼈다. 맑은 밤은 아무런 도움도 되질 않았다. 적이 보이지 않았다.
감지를 위해서 마력을 흩뿌려도, 적의를 찾아 주변을 더듬어 보아도 아무것도 느껴지질 않았다.
‘대체 뭐 이런 게 다 있지?’
승하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두 여자를 힐끗 돌아보았다. 흙먼지투성이인 희란은 긴장감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얼굴이었고, 백혜라는 잔뜩 냉기를 돋운 상태였지만 평소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었다.
한 마리의 괴수가 십 분 만에 이룬 위업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께 마냥 한밤중에 집으로 들이닥친 희란이 습격 받았다고 했을 때만 해도 승하는 대수롭게 생각지 않았었다.
위스프 같은 놈들이거나 생성되자마자 터진 퍼플급 이상의 던전에서 나온 미확인 괴수에게 공격당했다고 생각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큰일이었지만, 승하는 대충 썰어버리면 해결될 일이라고 여겼다. 기껏해야 희란이 있으니까 복부는 건드리지 말자고 생각한 정도였다.
하지만 희란이 도착하고 5분여 후에 도착한 적은 대충 썰어버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쪽은 상대를 포착하지도 못했는데, 저쪽에서는 마법을 펑펑 날려 왔으니까. 심지어 일부러 틈을 보여서 다가오게 만든 후, 지근거리에서 마법을 내쏠 때 잠깐 보인 팔을 향해서 ‘검은 선’을 내쏘았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본 드래곤을 상대로도 먹히던 그 검기가 말이다.
공격력이 모자라서 막힌 그런 게 아니었다. 마치 신기루를 베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말도 안 되지. 그게 신기루면 저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세 여자의 뒤편에는 승하와 백혜라의 집이었던 시멘트 무더기가 있었다. 승하가 접근을 유도하고 베기를 시도했을 때 내쏜 마법이 만들어낸 참상.
‘대체 어떻게 되먹은 거지. 설마 실체화 했다가 허상이 됐다가 할 수 있는 건가? 그럼 진짜 답 안 나오는데. 류 현이면 모를까.’
생각과는 정 반대로 승하는 집중력을 더욱 끌어올렸다. 검 끝에 아지랑이가 보일 정도로 마력과 적의를 끌어올렸다. ‘이런 건 만화에서나 보는 걸로 족한데.’
그런 승하의 노력이 허망하게 그녀들의 뒤쪽의 하늘에 파문이 일더니 손 하나가 쑥 튀어나왔다. 그 검지 끝에는 태양빛을 가둬놓은 것 같은 빛이 맺혀있었다. 손이 존재하지 않는 방아쇠를 당기려던 순간.
“어딜!”
터엉! 내리꽂히듯이 날아든 화련이 손이 튀어나온 것보다 30센티 위쪽 허공을 걷어찼다. 정말로 뭔가를 걷어찬 것인지 화련은 뒤로 휙 밀려나며 착지했고,
털썩-
화련이 걷어찬 곳 주변 허공이 열리며 손의 주인인 하얀 여자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하얀 여자는 이런 상황은 예상치 못했다는 듯 주저앉은 채로 화련을 돌아봤다.
마찬가지로 승하도 넋이 나간 얼굴로 물었다.
“너 대체 뭐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