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화 〉탐식마(貪食魔)
오희란은 밤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집 앞의 공원 벤치에 앉아서.
집이 코앞임에도 그녀가 이렇게 늦장을 부리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서였다. 희란은 자신의 변화에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스스로를 이해하는 기묘한 상태에 빠져있었다.
엘더 리치 원정 이전에는 화련과 거의 동거하다시피 붙어서 지냈었다. 류 현에게 배분받은 원정 수익금으로 마련한 집보다 화련의 집에서 더 오래 지냈으니 말다한 셈이었다. 그 짧다고도 하기 힘들지만, 길다고 하기는 더더욱 어려운 기간 동안의 경험이 그녀의 귀가를 막아서고 있는 것이다.
뭐든지 혼자하면서 살아온 희란은 이제 아무도 없는 집으로 들어가기가 부담스러웠다.
‘힘든 건 아니지만...’
들어가려면 못 들어갈 것도 없지만, 오늘따라 더 들어가기가 싫었다.
‘낮에 두 사람을 봐서 그런 걸까?’
요 일주일간, 희란은 승하와 백혜라의 대련을 도와주고 있었다. 백혜라에게 ‘링크’로 류 현의 마력을 전달해주는 식으로. 류 현은 이미 이전에 개인훈련을 하든 뭐든 마력을 끌어다 쓸 일 있으면 알아서 하라고 했었고, 대련얘기까지 해놓았으니 백혜라는 거리낌 없이 마법을 난사했다. 대련장소를 던전 안으로 바꿀 정도로 말이다.
희란에게도 능력을 다루는 연습할 기회였기에 그녀는 기꺼이 시간을 내주었지만, 오늘은 그냥 쉴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틱탁거리긴 해도 사이좋게 집으로 향하던 그 모습이 아직도 아른 거렸으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거야.’
희란을 고개를 내저어 그 생각을 털어내려고 했지만, 쉽진 않았다. 화련의 이모가 류세아에 이어서 엘릭서의 효과로 통원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되자, 스스로 눈치 보여서 자신을 집으로 돌아온 이후로 자꾸만 이런 쪽으로만 생각이 기울곤 했다.
‘화련 언니는 같이 지내자고 했었어. 스스로 나온 거잖아. 이러면 안 되지.’
자신을 다잡기 위해서 뺨을 찰싹 두드린 후 희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때였다.
“?!”
콰릉!
등허리에 스치는 불길한 기운을 인지하자마자, 희란은 자신도 놀랄 정도로 빠르게 청뢰를 발동시켰다. 24시간 그녀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는 푸른 반지는 한밤중인 것은 개의치 않고 푸른 번개를 하늘로 내쏘았다. 희란의 뒤통수 방향을 향해서!
“어?”
한밤중의 날벼락 때문에 가까운 거리에서 괴상한 비명들이 터져 나왔지만, 희란의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방금 전에 분명히 뒤쪽에서...’
엘더 리치와의 싸움에서나 느꼈던 불길한 마력을 느꼈다. 피부가 오그라드는 것 같고, 눈을 돌려버리고 싶은 도무지 착각할 수 없는 기괴한 느낌의 마력이!
‘뭐지? 방금 전에 분명히...’
주변을 살펴봐야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 점이 희란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차라리 플레이어든 괴수든 뭔가 재차 덤벼오거나, 시체가 남았다면 놀랐을지는 몰라도 이런 기분을 느끼진 않았을 것이다.
화려한 데뷔 이후, 류 현은 잊을만하면 희란과 화련에게 습격당할 수도 있음을 인지시켰으니까. 괴수가 아닌 플레이어 대상이지만 말이다. 희란은 자신의 폭발적인 성장이 습격당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는 것을 여전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류 현의 당부를 잊지는 않았다.
하지만 류 현의 교육 내용에도 이런 상황은 들어가 있지 않았다.
‘뭔가 있어. 거리는 모르겠지만...아직 사라지지 않았어. 날 보고 있어.’
희란의 손이 잘게 떨렸다.
‘감지에는...안 잡혀.’
마력을 흩뿌리는 수준으로 감지 영역을 넓혀봤지만, 잡히는 건 없었다. 그렇다고 뒷덜미를 움켜쥐는 것 같은 감각이 사라지지도 않았다.
‘뭐든 간에...나 혼자서는 못 당해.’
아직 적의 기분 나쁜 마력 외에는 어떤 것도 확인하지 못했지만 희란은 확신했다. 반사적으로 청뢰를 흩뿌렸음에도 별 반응이 없는 적. 틈틈이 습격 대비 훈련을 했다지만, 희란은 혼자서 적을 상대하는 데는 자신이 없었다.
류 현의 훈련 내용도 어디까지나 그녀보다 급이 낮은 플레이어들이 화기로 무장하고 덤빌 때를 상정한 것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희란의 빠른 판단에 도움을 주었다. 류 현은 교육 말미에 매번 거듭 당부했었다.
“포위됐거나, 도주가 불가능한 상황일 때만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외출할 때 최소한의 방어 장비를 몸에서 떼지 마시고, 상대 화력이 소총 수준이면 던전으로 도망가지 마시고 저나 승하씨 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두 분 레벨이면 제압할만한 놈이 거의 없긴 하지만, 장담할 수는 없죠. 플레이어간의 싸움은 너무 변수가 많으니까요. 굳이 대인전이 특기인 놈을 상대해줄 필요가 없습니다.”
발이 묶인 상황이 아니라면 승하나 자신 중 한 명에게 달려올 것!
‘다행이...대련 때문에 장비는 다 차고 있어. 도망가면서 버티는 건 어떻게든 될 거야. 더 가까운 쪽이...아냐, 병원으로는 못 가. 승하 언니 쪽으로...’
멀리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다가왔다. 경찰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나, 몸을 훑는 것 같은 시선이 일순간 흐트러졌다.
‘지금...!’
다음 순간 희란은 쏜살이 되었다. 배후를 노출 할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으나, 그런 부분을 다 고려할 정도로 그녀는 차분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녀는 가까워지고 있는 사이렌 소리를 떼놓으려는 것처럼 내달렸다.
그리고,
파즈즉! 희란이 방금 전까지 서있던 곳에서 불과 1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허공에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금세 사람 하나가 내려섰다. 트리폴리타니아에 모습을 드러내었던 하얀 여자였다. 여자의 오른 손에는 계속해서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청뢰가 쏟아내었던 푸른 번개가.
하얀 여자는 제 손에서 날뛰고 있는 스파크를 들여다보다가 툭 내뱉었다.
[벌써 이런 걸 손에 넣었을 줄은. 하긴, 뭐든 마음대로 되진 않는 법이지.]
하얀 여자는 손을 툭 털어서 그것을 털어내었다. 항상 곁에 보이던 불의 정령들은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하얀 여자는 계속해서 멀어지고 있는 희란이 향하는 방향을 바라봤다. 그 방향에는 그녀의 목적지가 있기도 했다.
[그 여자에게 가는 걸까. 마침 잘 됐네. 어느 쪽이 진짜 용사인지 확인해보고 싶었는데.]
하연 여자는 그 말을 남기고 스르르 허공에 녹아들었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 마냥.
***
류 현은 손에 쥐고 있던 종이 뭉치를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내팽개쳤다. 당직자 외에는 병원에 있는 모두 잠든 새벽. 류 현은 자진해서 밤을 하얗게 태우는 중이었다.
세아가 눈 대신 다른 것으로 ‘보기’ 시작한 것 때문에 류 현은 병원 내에 개인 집무실을 차려놓은 상태였다. 세아의 몸이 회복되긴 했지만 다른 문제가 터졌으니, 큰 기대는 되지 않더라도 무슨 문제가 터졌을 때 대처하기 빠른 곳에 머무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지금 류 현은 그 선택이 멍청한 짓이었다고 자신에게 욕을 퍼붓는 중이었다. 전생에는 안 했던 짓이라지만, 휴식처와 일터를 합쳐놓은 게 이렇게 끔찍할 줄은 몰랐다.
‘젠장, 그냥 팀 사무실로 다시 출퇴근 할까. 어느 쪽이든 집중이 안 되잖아.’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도무지 풀리지 않는 문제 때문이었지만.
‘대체 왜 갑자기 유전 테러를 멈춘 거지? 인간을 잡아 죽이는 것도, 생활 기반을 무너뜨리는 쪽도 충족이 안 됐을 텐데? 뭐가 변했길래 이렇게 갑자기...’
그를 괴롭히고 있는 문제는 리비아를 들쑤셔진 벌집 꼴로 만들어놓은 유전 폭발 사고였다. 일주일 전 마지막 사고를 끝으로, 유전과 그 주변을 지키는 인간이 싸그리 불타는 사건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칼리프 클랜이나 리비아 정부 측에서는 이유를 따지기 전에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류 현은 그렇게 속편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이미 그 사고들이 직, 간접적으로 네임드 몹의 소행이라고 결론 내린 상태였으니까.
그 정도 되는 괴수가 갑자기 인간을 해치는 짓을 그만두는 건 더 큰 학살을 위한 준비에 들어갈 때뿐이었다. 현생에서 첫 번째 네임드 몹으로 나타난 엘더 리치가 시모시마섬에서 그랬던 것처럼.
‘젠장, 뭐가 튀어나왔는지 알아야 추측도 해보지. 리비아 정부에서 지랄하든 말든 그냥 확실한 증거를 찾을 때까지 뭉개고 있어야 했어.’
후회한 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지금 와서 재조사를 외쳐봐야 상대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것이다. 책상에 펼쳐놓은 기사들만 봐도 그들이 이번 일을 희생양 하나 만들어서 대충 덮으려고 한다는 의도가 보일 정도였으니까.
다시 조사를 해야 한다고 부르짖는다? 류 현의 입국자체를 거부할 가능성이 컸다.
‘당장 모든 던전이 터지지 않은 건 호재지만...이래선 마냥 호재라고 할 수도 없군. 당장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놈들이라곤 협회나, 미국정도인가.’
원인은 알 수 없으나, 네임드 몹이 나타났음에도 괴수를 쏟아내는 게이트로 돌변하는 던전은 굉장히 적었다. 갑자기 집안에서 던전이 터지는 재난을 겪은 이들에게는 터무니없는 소리겠지만, 각국 정부에서는 사태가 벌어진지 몇 달이 지난 지금은 심드렁해진 상태였다.
곤란한 변화이긴 하나, 퍼플 던전이 등장했을 때처럼 인류의 위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놈들이 정신 차릴 때까지 네임드 몹이 분탕치는 걸 내버려 둘 수도 없고.’
지중해에 검은 리치성이 등장했을 때, 본 드래곤들이 도쿄를 뒤집어엎을 때만해도 이렇진 않았었다. 하지만 류 현이 엘더 리치와 본 드래곤들을 잡고 불과 두 달이 조금 안 되서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행태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멍청이들. 그게 끝이 아니라고. 생성되자마자 던전도, 네임드 몹도.’
류 현은 책상 위의 종이들을 옆으로 밀쳐놓고 의자에 몸을 눕히다시피 했다. 종이에서 눈을 돌려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것이, 오늘은 일을 더 하긴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경 쓰이는 일이 몇 가지 있어서 억지로 서류 더미를 붙들고 있었던 것인데, 오히려 두통만 얻었다. ‘그래, 플레이어가 횡사하거나 실종되는 게 한 두건도 아니고...’
류 현이 처음에 내팽개친 종이다발은 일주일 사이에 실종되거나 시체로 발견된 플레이어들에 대한 기사들이었다. 갑자기 서울에서 활동하는 플레이어들의 실종과 사망 소식이 늘어나서 혹시나 하고 들여다 본 것이었는데, 시체들이 너무 멀쩡한 것이 리비아 건수와는 별 연관성이 없어 보였다.
리비아에서 사건을 일으킨 괴수가 무엇이었든 간에 플레이어를 이렇게 곱게 보내줄 것 같진 않았다. 판단력을 유지하고 있든 아니든 괴수는 괴수니까.
“에휴, 뻘 짓 그만하고 잠이나 자자.”
류 현은 진저리를 치며 방을 나섰다. 세아가 자는 모습을 확인하려고 그녀가 지내는 병실로 향하던 류 현은 복도를 서성이고 있는 세아와 마주치게 되었다.
“누나? 왜 안 자고...어디 불편해서 그래?”
“아, 현아. 그게 아니라 아까부터...”
“응?”
세아는 뭐가 켕기는 지 선뜻 말하지 못하고 몇 번이고 우물거렸다. 류 현은 괜찮다고 말해주는 대신 슥 다가서서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의 행동에 마침내 결심이 섰는지, 세아는 배관이 지나고 있을 천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천장에 계속 빨간 게 돌아다니...”“어디 저기?”
그 순간,
퍼엉! 화르륵! 콰광!
병원을 집어삼키는 커다란 불길이 일어나며 폭음이 그들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