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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3화 〉탐식마(貪食魔) (213/429)



〈 213화 〉탐식마(貪食魔)
“후우, 후우...”


코를 타고 땀방울들이 똑똑 하고 보도블럭을 때렸다. 류세아는 보도블럭 위에 검은 점이 퍼져나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눈앞에 불쑥 내밀어진 손을 보았다.


“오늘은 이쯤 할까?”
“으응...하아...”

세아가 손을 맞잡자 류 현은 팔을 가볍게 끌어당겨서 그녀를 벤치로 인도했다. 병원 근처 땅을 닥치는 대로 사들인 덕에 덤으로 딸려온 공원은 두 사람 빼고는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 땅을 매입 할 때는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은 그 때의 결정에 만족하는 중이었다.

류 현은 ‘가방’을 조작해서 음료수 캔 하나를 꺼내서 세아에게 건넸다. 세아는 캔을 단숨에 들이키더니 그대로 굳어버린 것처럼 고개를 하늘로 향한 채로 멈췄다.

“갔던 일은 잘 안 된 거니?”
“응?”


말 그대로 불쑥 튀어나온 물음에 류 현은 잠깐 동안 세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재활 중에 튀어나올만한 말은 아니었으니까.

“리비아 말이야.”
“아, 그거...글쎄...잘 안 됐다고 하기도 애매하고, 잘됐다고 하기도 애매해서.”

시력저하와 함께 색을 잃어갔던 세아의 하얀 눈이 류 현을 빤히 쳐다봤다. 류 현은 잘못한 것도 없음에도 가슴이 뜨끔 하는 기분이었다.

세아가 원래의 시력대신 다른 방식으로 ‘보기’시작한 이후로, 가끔 이럴 때가 있었다. 그저 빤히 쳐다보는 것뿐인데도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누이를 속였던 일 때문에 주눅 드는 그런 감각은 아니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기묘한 감각에  현은 닥치는 대로 비슷한 것들을 떠올려 봤지만, 그나마 비슷하다고 떠올린 것들도 터무니없을 정도로 달랐다.


‘시선으로 저주 거는 것도 이런 느낌은...아니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미친놈아.’

내심 신경 쓰였지만 눈앞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는 세아 때문에 류 현은 의문을 접어야 했다.

“가 보니까 텃세가 생각보다 심하더라고. 그렇다고 대놓고 면박주거나 그런 건 아닌데,  심하게 비협조적이더라. 그거 때문에 별 건 못 건졌어.”
“그랬구나.”

말을 내뱉고 조심스럽게 세아의 반응을 살피는 류 현과 달리, 세아는  감정 동요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두 남매는  현이 플레이어 활동하는 것에 대해서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로, 제자리만 빙빙 돌고 있었다.


세아는 류 현에 대한 기사를 찾아보면서 보지 않는 채하고,  현은 그것을 못 본채 하는 식으로 말이다. 칼리프 클랜의 요청 때문에 리비아로 떠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세아는  하러 가는지 굳이 묻지 않고 몸조심 하라는 말로 배웅했고,  현도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아마도 류 현이 출국한 이후에 국제 기사란을 열심히 뒤적거렸을 것이다.


오히려 조사단에 못 따라간 승하와 화련이 더 난리였다. 그녀들의 우려와는 전혀 다르게 정말 싱겁게 조사단은 해산했지만 말이다.


‘있는 동안  군데  터졌으면 추측하기 수월했겠지만...다 지난 일이지.’


칼리프 클랜이나 리비아 정부 입장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이겠지만, 류 현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정령 종류든, 화룡이든 이대로 활개 치게 내버려두면 유전이 문제가 아니지. 칼리프 클랜이 전생보다 더 빨리 무너질 수도 있어. 거기가 무너지면...아프리카 봉쇄는  건너가는 거지.’

지금이야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유전을 대상으로 유격전을 벌이고 있지만, 본격적으로 분탕질치기 시작하면 칼리프 클랜의 전력 반을 갈아 넣어야 할 테니까. 류 현이 흉수로 짐작하고 있는 괴수인 화룡이나 정령 중 하나일 경우에는 말이다.

 마저도 알 라시드의 성장을 감안해서 낸 견적이었다. 알 라시드가 지난 남극 원정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류 현은 개인 자격으로 리비아에 체류했을 것이다. 칼리프 클랜과 부딪히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칼리프 클랜이 상대하기에는 차라리 화룡이 나을 거야. 전생보다 더 강한 놈이 나올 거 같지만...정령 종류면  괴물 커플 아니면 대항할 방법이 없을 테니까. 사실 그놈들은 누가가도 비슷하겠지만...’


“현아?”
“어? 어어...”
“어디  좋아? 아니면 아직 피곤한 거니? 그러니까 오늘은 나 혼자...”
“아냐, 아냐. 잠깐 생각하느라. 가서도 별 거 하지도 않았는데 왜 피곤하겠어. 자, 들어가자.”


류 현은 짐짓 쾌활하게 움직이며 세아를 잡아끌었다.

***


오희란은 두 손에는 푸른빛이 감도는 반지, 청뢰를   채로 눈은 난간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간 아래는 뿌연 김이 팔을 흔드는 것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체육관 아래쪽을  채운  때문에 도무지 뭔가를 볼 상황이 아니었지만, 류 현에게서 나와서 자신을 거쳐서, 혜라에게로 빠져나가고 있는 마력을 통해서 어떤 광경이 펼쳐지고 있을지 추측정도는 가능했다.


‘퇴원하자마자 대련이라니, 무리하는 거 아닐까.’

화련을 통한 혜라의 부탁을 들어주긴 했지만, 퇴원하자마자 대련하겠다고 나서는 혜라를 도와주고 있는  잘한 짓인지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그보다 더 이해가 안 가는 건 대련상대로 나선 승하였지만.

그리고 나승하는,


파창! 바닥에서 갑자기 솟구친 얼음송곳을 백 덤블링으로 피한 후,  뒤에 있던 벽에 발이 닿자마자 그것이 자연스럽다는 듯이 벽 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추적하는 것처럼,

쩌적! 파캉! 허공에서 얼음이 쩍쩍 얼어붙더니 바닥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원인은 빙결 마법 연사! 하지만 마법을 시전한 마법사의 모습은 안개마냥 허옇게 드리운 김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이 또한 마력으로 일어난 현상이기 때문에 플레이어의 시력으로도 꿰뚫어보기는 요원했다.

승하는 오른 손에 쥔 칼은 잊어버린 것처럼 계속해서 내달렸다. 체육관 벽을 반쯤 돌았을 때쯤, 승하는 슬쩍 한  무릎을 굽히더니 제 몸을 화살처럼 쏘아내었다.


“스읍-”


중력의 존재를 잊은 것처럼 곧게 날아가던 승하는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자 짧은 심호흡과 함께,


키이익! 스칵! 검으로 검은선을 내쏘아냈다. 이전보다 날카로움도, 깃든 살의도 형편없는 수준이었지만 그녀를 감싸고 있는 빙결마법을 깨뜨리기에는 충분했다. 빙결마법을 깨뜨리고 나자, 검은 검기는 힘없이 사그라들었다.

그럼에도 반동이 영 없는 건 아니었는지 허연 김의 장막 너머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승하는 그대로 아무 방해도 없이 김이 짙게 드리운 체육관 중앙까지 도달하여,

후웅! 마법사의 얼굴을 코앞에 두고 멈춰 세웠다. 검풍 때문에 김이 흩어지자 확연하게 모습을 드러낸 그녀가  검에는 날이라고  부분이 없었다. 둔기는  수 있지만, 검이라고는 불리기 어려운 모양새.

“아직 다  나은 거 아냐? 슬쩍 휘두른 건데...”


날 없는 검을 갈무리하며 손을 내뻗는 승하를 노려보며 백혜라는 궁시렁 거렸다.


“그게 무슨 살살 한 거에요? 진짜 없는 내상도 생기겠네. 날 없는  쓰는 게 무슨 소용이야?  시커먼 걸 쓰면.”


백혜라는 바로 승하의 손을 잡지 못하고 조금 콜록거린 후에야 손을 잡고 일어섰다.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휘청거리자 승하가 재빠르게 어깨를 겨드랑이 사이에 밀어 넣고 부축했다.


“아니 그게, 순간적으로 남극에서 리치 상대할 때가 떠올라서. 미안.”
“됐어요. 언니한테 다시는 부탁  할 거니까. 차라리 희란 언니한테 부탁하는 게 낫지.”
“걔 아마 울 텐데.”
“그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에요?”

‘걔도 은근히 힘으로 밀어붙이는 쪽이라서 아마 넌 부상당하고, 희란이 걔는  거라고.’ 입에 올려봐야 좋을 게 없었기에 승하는 고개를 내젓는 것으로 대충 얼버무렸다.

 때였다.


“?”

승하는 갑자기 뒤통수에 뜨거운, 뜨겁다 못해 데일 것 같은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하지만 뒤쪽에는 혜라가 잔뜩 만들어 놓은 성에와 고드름들만 매달려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승하는 재차 확인하는 기분으로 혜라의 반응을 살폈지만, 혜라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지 아직도 자신에게 뭐라고 궁시렁 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착각한 건가? 아무리 그래도 그런 시선을...’

승하는 마지막으로 다가오고 있는 희란의 표정도 살폈으나, 희란의 얼굴에는 부축 받고 있는 혜라에 대한 걱정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몸 푼다고 너무 던전을 들락거리긴 했지. 당분간은 제대로 쉬어야겠다.’

승하는 어색하게 웃으며 호들갑을 떠는 희란을 달래서 체육관을 나섰다.

탕하고 문이 닫히자,


화르륵! 허공에서 불꽃이 튀더니, 삽시간에  현이 타고 귀국했던 보잉 787의 화물칸에서 모습을 드러낸 불의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령은 아직 냉기로 가득 찬 공간이 마음에 들지 않은 지 신경질적으로 불티를 튀겼다.


잠깐 졸아버리는 바람에 ‘용사 후보’를 놓쳐, 근처에 돌아다니는 인간 중에서 가장 강해보이는 이를 쫓아왔다가 이런 불편한 상황에 놓이게 된 불의 정령은,  짧은 팔을 휘둘러서 체육관 안의 냉기와 김을 단숨에 증발시켜버렸다.

그리고는 체육관 중앙에 내려앉아, 또 다른 ‘자신’에게 정보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이 곳에 용사 후보가 하나 더 있다고.’

한편, 거의 일 만 키로 미터 떨어진 트리폴리에서는.


하얀 여자는 자신 앞에서 재롱을 부리던 불의 정령 중 하나가 갑자기 뻣뻣하게 굳어지자, 그 녀석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경직은 길지 않았다. 일만 키로 미터에 달하는 거리의 장벽이 무색하게, 정보 교환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다른 ‘자신’에게서 정보를 전송받은 불의 정령은, 하얀 여자의 어깨 위로 훌쩍 뛰어오르더니 무어라 속닥거렸다. 하얀 여자의 눈매가 기분 좋은 호선을 그렸다.

하얀 여자는 입을 가리고 킥킥 웃더니, 팔을 뻗어 재롱을 부리고 있던 불의 정령들을 그러모았다.

[불은 충분히 모았니?]


그 물음에 팔 안의 불의 정령들이 뭐든 다 태울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불을 뿜어내었다. 하얀 여자는 그것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불이 닿은 피부는 붉어지기는커녕, 새하얀 그대로였다. 입고 있는 하얀색 일색의 옷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여기 불은 별로 깨끗하지 않으니까, 아껴 쓰렴?]

두 팔을 번쩍 들어 보이며 응하는 불의 정령들을 흐뭇한 얼굴로 내려다보던 하얀 여자는, 고개를 돌려 지평선을 바라보다가 불쑥 내뱉었다.


[그리 멀진 않구나. 바로 출발해도 되겠는 걸, 우르스.]


나지막하게 내뱉은 주문과 함께, 하얀여자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품에 끌어안고 있던 정령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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