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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2화 〉탐식마(貪食魔) (212/429)



〈 212화 〉탐식마(貪食魔)

“예? 칼리프 클랜에서 중재요청 말입니까?”
“그렇네. 어지간하면 자네를 방해 안하려고 했네만...직접보고 호흡을 맞춰본 자네를 빼고는 판단하기가 어려워서 말이네. 미안하게 되었네.”
“아닙니다. 제가 도움이 될 일이 있으니 다행인거죠. 안 불러주셨으면 서운할 뻔 했습니다.”


웨인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앞에 놓인 찻잔에 손을 뻗었다. 클라우드 윈스턴은 그에 맞춰 자신도 찻잔의 홍차를 반쯤 비우고는 말했다.


“자네라면 나보다 더 잘 알겠지만, 덮어놓고 거부하거나 수락할 만한 일은 아닐세. 거부하면 저 치들은 그걸 핑계로 온갖 억지를 부리면서 강행할 테고, 수락하면 허락을 맡았다고 막무가내로 나갈 테니 말일세. 그 친구가 협회 소속이 아니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말이야.”
“예, 문제는 가이드라인을 확실해 해야 하는 건데, 류 현님이 협회 소속이 아니다 보니..”
“우리가 적극적으로 나서기가 힘든 게 사실이지. 잘 못 하면 그 친구랑도 틀어질 수도 있으니 말일세. 칼리프 클랜 측도 모르진 않을 텐데, 어지간히 밑 보이기 싫은 모양이야.”


‘내 생각에는 알 라시드가 입김을 넣은  같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근거는 없었지만 웨인은 그리 생각했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막가파 중의 막가파인 칼리프 클랜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중재를 요청을 해온  그 때문 일거라고.


그렇지 않으면 칼리프 클랜 수뇌부의 성격상, 조사 고문이든 뭐든 외부인을 끌어들이는데 협회에 손을 벌릴 리가 없는 것이다. 대형 클랜 중에서도 병적으로 영역에 집착하는 게 칼리프 클랜이니까.


‘그 힘은...직접 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지. 영상 노출이라고 해봐야 지중해에서 검은 성 잡을 때가 전부 일거고...그래도 남극에서 본 것만으로 그렇게 높이 평가할 줄은 몰랐는데.’

“현 시점에서 류 현님을 주목하고 있는 눈도 적지 않으니, 그걸 의식하는 것도 꽤 크겠지요. 류 현님이 어느 단체에 속하지 않은 것도 있고요.”


하지만 튀어나간 말은 전혀 달랐다. 웨인은 자신의 감으로 찍은 사실로 공사다망한 눈앞의 노인을 혼란스럽게  생각이 없었다. ‘당장 나도 그 때 본 그게 뭔지 모르니까.’


결정적으로 류 현이 마지막에 보여준 모습이 무엇이었는지 웨인 스스로도 감을 잡지 못한 상태였다. ‘마력을 기반으로 한 단순한 능력 발동 같은  아니었어. 그건 마치...아니야. 섣부르게 판단하진 말자.’

“그런 친구가 어느 한 곳에 힘을 실어주지 않는다는 게 다행스러운 일이긴 하네만...일이 이렇게 돌아가니 곤혹스럽기 그지없군. 웨인, 자네가 보기에는 어떻던가? 그 친구가 협상 테이블에 앉을 것 같은가?”

클라우드 윈스턴의 질문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2차 ‘대소환’ 초기, 칼리프 클랜은  부유함보다는 클랜 전체가 개차반이라는 걸로 유명했었다. 류 현의 곁에 있는 검성은 그 개차반스러움을 체험한 이들 중 하나고 말이다.


대외적으로 클랜이 안정된 이후에도 칼리프 클랜에서는 이미지 개선보다는, 영역 확보에 미친개 같은 행보를 보였으니  현이 협상 테이블에 앉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클랜에 소속된 자와 합을 맞추는 것과, 그 클랜의 본거지로 들어가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니까.


“제 생각에는 어지간히 나쁜 조건이 아니면 수락하실 것 같습니다.”
“음? 협상 테이블에 앉고 말고가 아니고 말인가?”
“예, 칼리프 클랜이 내놓은 추측이 전부라고는 생각하진 않습니다만...그 분이라면 아마 속는 셈치고 현장을 보고 싶어 하실 것 같군요. 제가 보기에도 괴수 짓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니 말입니다.”
“만에 하나 괴수짓이 맞다면...”
“예, 그 때가 정말 큰일이 되겠지요. 괴수 처리는 물론이고,  현님과 칼리프 클랜이 여러모로 .”

클라우드 윈스턴이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 동안, 웨인은 속으로 자신의 중동행을 결정지었다. 평소 같으면 월권이라고  발 앞서 결론을 내려놓는 행위 자체를 꺼렸겠지만, 웨인의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 때 봤던 ‘검은 것’, 그건 기존 괴수들을 상대하기 위한...플레이어들의 능력 같은 힘이 아니야. 마력을 기반으로   아닌 게 분명해 보였으니까. 그게 네임드 몹을 상대하기 위한 새로운 칼인지 아닌지, 확인해야한다.’



***


“허탕이군요.”

지난 나흘간의 조사 강행군을 류 현이 한마디로 축약해 보였다. 웨인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눈은 철수 준비 중인 조사단을 지휘하고 있는 알 라시드에게 고정한 채로 말이다.


“알 라시드씨 입장이 좀 곤란해지겠군요. 첫날부터 그랬던 걸 보면 조사도 억지로 강행한  같은데 말입니다.”
“예, 아마도 그럴 것 같습니다.”


무의식중에 건성으로 대꾸하면서도 웨인의 머리는 바쁘게 돌아가는 중이었다. 류 현의 말처럼 사흘간의 조사는 허탕이긴 했으나, 조사단이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것이 웨인의 추론을 더 강고하게 뒷받침해주고 있었으니까.

‘괴수 짓이야. 그것도 엘더 리치 바로 아랫급이거나, 동급의 네임드 몹 짓이 분명하다.’

현장에는 범인의 행동을 추론해볼만한 흔적이 아무것도 남아있질 않았다. 그런 대규모 폭발이 일어났으니 멀리 튕겨져 나간 시설 파편 같은 게 남아있을 법 하건만, 천 단위 인원을 동원한 수색에도 건진 것이 없었다.


‘이렇게 만들 수 있는  마력으로 피운 불꽃뿐이지.  보 양보해서 천운 덕에 이렇게 깔끔하게 타버렸더라도 카심 알 필리스티니가 그 꼴이 될 리가 없어. 기존 플레이어 중에서 이런 화력을 다룰  있는 자는...없다.’


단정 짓는 것은 좋지 않은 버릇이지만 웨인은 확신했다. 유전 시설이 전소될 정도로 커다란 화재 사고가 터졌는데 사고 현장 주변은 깔끔하고,  현장에 0.01퍼센트 안에 족히 드는 플레이어를 한 순간에 절명시키는 화력을 가진 이가 동시에 나타날 확률은 0에 수렴한다고 해도 좋으니까.


차라리 두 가지를 모두 행한 괴수가 있는 편이 더 말이 되었다. 이전이라면 이런 생각자체를 스스로 부정했겠지만, 그는 이미 네임드 몹이라는 상식 밖의 괴물을 본 뒤였다. 거기에 지난 나흘간  현의 반응을 보고 웨인은 확실히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이건 괴수의 소행이 분명하다고 말이다.


‘표본이 적긴 하지만...네임드 몹은 어느 정도 사고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맞아. 인간을 보고 바로 미쳐 날뛰지 않을 자제력이 있으니 이번 사고도 설명이 가능하고. 문제는...유전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공격했느냐는 건데, 정말이라면 끔찍하군.’


아라비아 반도 내에 있는 유전들은 사실상 가동 중단 상태였다. 사고를 당한 곳은 맨땅에서 다시 시설을 올려야 할 판이고, 아직 사고를 당하지 않은 곳도 가동률이 시원찮았다. 그 와중에 흉수가 누구인지는 가늠조차 못하고 있는 판이니, 사고 소식이 다 발표되지 않았음에도 불안만으로도 유가가 요동칠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카심 알 필리스티니가 당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처참한 몰골로 발견되지 않았다면 아무리 칼리프 클랜이라도 외부인을 이렇게 조사 고문으로 끌어들이진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첫날부터 조사단에 속한 정부 쪽 인사들이 대놓고  현과 웨인의 합류에 의구심을 표했었다.


‘다행인건 알 라시드도 그쪽으로 확신하고 있는  같다는 정도인가. 하지만 추적할 단서가 너무 없어. 아무리 알 라시드라도 이렇게 허탕만 치는데 계속 버틸 수는 없을 거고. 다들 다른 곳에 정신 팔려있기도 하고.’

나흘 만에 조사단 철수 결정이 떨어진 것만 봐도 그랬다. 칼리프 클랜이나, 리비아 정부 모두가 사태의 경중보다 외부인이 조사단에 속했다는 사실을 더 신경 쓰고 있다는 증거였다. 웨인은 자재를 트럭에 싣고 있는 조사단원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껏 조사단을 꾸려놓고는 이런 식으로 해산이라니...’


한탄을 금치 못하는 웨인과는 대조적으로,


‘아무래도 정령계열 같은데...벌써 ‘업화의 아이들’이 튀어나온 건가? 그런 거 치고는 너무 얌전한데. 아니면 화룡?’


류 현은 네임드 몹의 정체를 추측해보는 중이었다. ‘벌써 그놈들 나오면 골치 아픈데...제발 정령계열만 아니어라. 감지도  되는 놈들이 여기서 분탕치고 다니면 감당도 안 된다고.’


“이봐! 차 출발한다고!”


류 현이 골머리를 썩히는 지  수가 없는  라시드는 차에 반쯤 몸을 실은 채로 두 남자를 불러들였다. 두 사람이 차로 다가오는 것을 확인한  라시드는 시트에 몸을 내맡기며 옆자리에 자리한 남자를 슥 돌아봤다.


“영감, 왜 그래? 표정이 영 별로인데.”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알 사디크의 얼굴은 말과는 달리 딱딱하게 굳은 채였다. 알 사디크는 자신의 생각을 누가 읽기라도 할 수 있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기억  구석에 새겨놓았다.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놈이군. 포섭이 힘들어지면 어쩌면...’


***


한국행 보잉 787의 화물칸은 드물게도 텅 빈 상태였다. 탑승 인원조차 두 손보다 좀 더 많은 정도였으니, 사치스러운 비행중이라고 할만 했다.

그런 사치스러운 비행 중인 여객기 화물칸에,


화르륵! 허공에서 별안간 불꽃이 튀더니 덩치를 불려나갔다. 허공에 둥둥 뜬 채로 말이다.

도깨비 불 마냥 허공에서 타오르던 불은 남자 머리통만큼 덩치를 불리더니, 꾸물꾸물하고 촉수 같은 것을 사방으로 뻗쳤다.

그러기를 5분여, 불덩어리는 봉제인형 같은 꼴이 되었다. 예전에 트리폴리타니아의 유전을 불바다로 만들었던 불로 이루어진 정령 같은 꼴이 말이다.

불의 정령은 화물칸을 한 번 돌아보더니, 배를 잡고 뒹굴었다. 성대가 있었다면 아마도 꺄르륵거리며 자지러지는 모습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정말로 불의 정령은 순수하게 기뻤다.

[마녀]의 지시를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기뻐했다.

[마녀]가 찾고 있는 용사 후보가 이 날틀에  인간 중 가장 특이한 마력향을 풍기던 놈일 테니까. [마녀]에게 인간의 소재지를 알려주면 분명히 기뻐하며 칭찬해 줄 테니까.

그런 빛나는 미래를 그려보며 불의 정령은 불씨로 되돌아갔다. 비행이 너무 길지 않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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