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1화 〉탐식마(貪食魔)
“그렇게 본다고 뭐가 나와? 그냥 속편하게 그 친구 불러서 물어보는 게 낫다니까?”
“알 라시드, 너한테 다른 건 바라지도 않을 테니 그 입 좀 다물고 있으면 안 되겠나? 칼리프께서 자리하고 계신다. 의견을 내라고 하진 않을테니 최소한 예의를 갖춰라.”
“아니 이건 그런 게...”
찌릿하고 시선이 확 쏠리는 느낌이 왔다. 알 라시드는 궁시렁거리며 몸을 뒤로 눕혔다. 푹신한 의자가 그의 몸을 안정적으로 받아줬지만 알 라시드의 기분에는 전혀 도움이 되질 않았다.
“부검 결과는 어찌 나왔다던가?”
“사진을 보고도 모르겠어? 부검으로 뭐가 나올 상태가 아니라고.”
“카심 정도 되는 녀석을 이렇게 만들 정도의 화력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
“말이 안 되지. 그보다 더 말이 안 되는 건 카심의 시체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탄화됐다는 거고. 단순 방화로는 그렇게까지 탄화가 안 된다고.”
“아니, 그러니까 더 흉수를 찾기 쉬워야 하는 것 아닌가? 그 정도 능력을 가진 놈들이 많을 것 같진 않은데.”
“끝까지 들어 이 친구야. 문제는 그럴 능력이 있는 놈이라도 그렇게 할 이유가 없다는 거야. 아까도 말했지만 카심정도 되는 플레이어를 그 꼴로 만들려면 단순히 화장터 화력만으로는 부족해. 피부는 태워도 근육이나 뼈는 마력 때문에 못 태울 테니까. 따라서 플레이어 짓이라는 건데, 그 정도 화력이라도 가진 놈도 굉장히 드물지. 그리고 그렇게 할 이유가 없다는 것도 문제고.”
“무슨 말이야?”
“이득이 없잖나. 카심을 그렇게 태운다고 그 쪽에서 얻을 이득이 없어. 경고나, 겁을 주려는 거라면 범인을 특정할 수 있는 증거를 남기거나 자기들 짓이라고 발표라도 할텐데 그런 것도 없지.”
“그냥 단순하게 우리 전력을 깎아먹으려고 한 거라면?”
“그럼 더 말이 안 되지 않나. 습격자가 있다는 걸 알리는 것 자체가 스스로 마이너스인데. 차라리 던전 입구에서 죽치고 있는 쪽이 나아. 카심을 이런 꼴로 만들 정도면 어지간한 수준이 아니라는 의미니, 아마 두 세 팀이 당하기 전까지는 손도 못쓸 테고.”
눈을 감아도 짐승의 영역마저 넘어선 그의 감각은 원하지 않는 정보까지 모두 잡아내었다. 알 라시드를 힐끔 한 번 보고는 수군거리는 소리마저 말이다.
‘이게 뭔 시답잖은 뻘 짓이야. 시간낭비라고, 시간낭비.’
회의의 화두는 닷새 전, 유전 경계 파견을 나갔다가 고혼이 되어버린 카심 알 필리스티니였다.
문제는 이번이 이 주제로 다섯 번째 열리는 회의였다는 것과, 범인을 추론할 추가 단서는 하나도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는 거였다. 그야말로 탁상공론의 전형이라고 불러도 좋을 틀에 박힌 대책회의.
그의 주군인 자파르 알 사디크가 자리한 회의임에도 의욕이 일지 않을 정도였다. 알 라시드는 그대로 귀도 닫아걸고는 자신의 생각 속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라시드.”
알 라시드를 일깨운 건 마람 압둘아지드의 목소리였다. 알 라시드는 슬쩍 눈을 떴다가, 눈을 찌르는 전등빛에 눈을 찌푸렸다. 그대로 눈을 감은 채로 그는 말했다.
“벌써 끝났어? 영감들 하는 거 보면 온종일 나불댈 거 같던데.”
“벌써 가 아니다. 알 라시드, 세 시간이 지났어. 자는 것 같지는 않던데 명상이라도 한 건가? 그런 거면 말을 해줬으면 퇴실 시켜줬을 텐데. 네게 그 정도 자유는 보장해 줄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는 그가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이의 것이었다. 자파르 빈 무함마드 알 사디크. 칼리프 클랜의 정점에 있는, 칼리프의 현실이라고 불리는 자. 바로, 그가 모시는 주군 말이다.
알 라시드는 뜨이지 않으려는 눈을 억지로 뜨고 대꾸했다.
“그런 건 아니고...좀 생각할 게 있어서...요. 이번 일에 대해서요.”
“흠, 그런가? 뭐 그건 조금 있다가 듣기로 하고, 일단은 목부터 축이지.”
그대로 알 라시드의 맞은편에 앉은 알 사디크는 손가락을 튕겨서 하인들을 불러들였다. 그들은 재빠르게 방안에 남은 네 명에게 각각 다른 차를 내어주고는 방밖으로 향했다.
찻잔을 두 번 기울인 후 알 사디크가 말했다.
“딱히 정리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알 라시드, 생각해봤다는 건 그 한국 플레이어 팀을 말하는 건가?”
“정확히는 류 현이라는 친구에 대해서였는데. 그 친구가 이끄는 팀도 굉장하긴 하지만, 화력 이상의 뭔가를 기대하기는 어려워보였거든. 플레이어 경력을 전부 합쳐도 나보다 짧은 인간들인데 다른 걸 기대하는 게 이상하지만.”
“알 라시드, 칼리프께 예를 갖춰라.”
알 라시드는 말과 함께 목덜미 근처로 들이밀어진 적의의 발원지를 돌아봤다. 알 사디크의 오른편에 앉아있는 구릿빛 피부의 대머리 사내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흐마드 알 핫산. 칼리프 클랜 내에서도 과격파의 거두이자, 클랜 내 세력 서열의 2위를 꿰차고 있는 사내.
미식축구의 라인맨을 연상케 하는 거구와는 다르게, 마법사인 그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알 사디크의 추종자였다. 그 때문에 알 라시드와는 사이가 좋지 못한 이였다. 어디까지나 핫산의 일방통행인 불쾌감이었지만 말이다.
핫산에게 있어서 칼리프 그 자체인 알 사디크를 옆집 영감 대하듯이 하는 알 라시드는 실력은 몰라도, 그 정신머리는 개조의 대상이었지만 차마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관계가 호전될 가능성은 지극히 낮았다.
유일하게 중재를 할 수 있는 알 사디크는 이대로 중립파와 과격파가 으르렁거리길 바라고 있었으니까.
“핫산, 나는 괜찮으니 그냥 내버려두게. 이제 와서 존대를 듣는다 한들, 오히려 어색할 것 같군. 그것보단 알 라시드, 계속 하게.”
“X던전 보고 때도 말했었지만, 그 류 현이라는 친구는 우리랑 다른 정보 루트를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해.”
“하지만 조사결과 배후는커녕 연계하고 있는 조직도 없어 보였다만.”
“에이, 꼭 정보를 그런 식으로 얻으라는 법은 없잖아? 듣자하니 마탑이랑 거래하는 플레이어 중에서 그런 계통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들었는데.”
“있지. 마탑에서도 상당히 탐을 내서 계속 스카웃 제의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만...아무래도 어려운 모양이더군.”
“나 같아도 마탑 놈들이랑은 일 안하지. 마법사가 아니면 단물만 쭉 빨리고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그럼 너는 류 현이라는 자가 그 쪽 계통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하지만 전투력도 상당했고, 어떤 능력인지는 몰라도 그 자의 능력으로 추측되는 기현상도 포착됐다고 들었는데. 알 라시드. 자네 또한 증언하지 않았나.”
“그게 말이지. 꼭 능력이 하나라는 법이 있나?”
선뜻 대꾸하는 이가 없자, 알 라시드는 세 명을 한 번 슥 둘러보고 말했다.
“물론 나도 한 반 년 전에 이런 소리를 들었으면, 그 소리 한 놈을 조용히 영감님 앞에서 치우라고 했을 거야.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속편하게 단정 짓고 살 때가 아니잖아? 예외가 너무 많이 생겼어.”
“으음, 확실히.”
알 사디크를 뒤따르는 것처럼 다른 두 명도 작은 신음을 흘렸다. 근래에 그들이 원정을 못 가고 있는 이유가 알 라시드가 지적한 그 예외들 때문이었다.
아직까지 카이로를 외부 세계와 격리시키고 있는 벽은 무너질 기미가 안 보이고, 생성되자마자 괴수를 쏟아내는 던전들이 속출하며, 기존의 던전 레이더망에 잡히지 않는 던전까지 생겨났다.
새로운 등급의 던전은 블랙던전이라고 불리며 각국에서 나름대로 레이더 망 편입에 애를 쓰고 있다지만, 앞의 두 가지는 확실한 대처법이 없는 게 사실이었다.
예전 같으면 그래도 원정을 감행해볼 수 있겠으나, 알 라시드와 마람 압둘아지드가 잠깐이나마 합류했었던 네임드 몹 원정 이후 칼리프 클랜은 노선을 전환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플레이어가 클랜의 핵심이라지만, 클랜 본부를 통째로 날리는 건 물론이고 스폰서가 있는 왕궁까지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괴물이 튀어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무시하긴 힘들었다.
“허나 그렇다고 한들, 그 자가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해줄 거라는 보장이 없지 않나. 협력관계에 있는 협회에 부랴부랴 대응한다고 나서는 걸 보면 가능성은 더더욱 낮아 보이는데.”
“그 계통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다 알라는 법은 없잖아. 우리가 속사정을 다 알지도 못하니, 확신하는 것도 좀 아니고. 거기다가 내가 기대하는 부분은 다른 부분이거든.”
“모른다면 더더욱 불러서 내부 사정을 알려줘서는 안 되는 일이지! 알 라시드, 쓸데없는 소리로 칼리피의 심중을 어지럽힐 셈이냐.”
으르렁 거리는 알 핫산의 앞에서는 맹수조차 기를 못펼 지경이었으나, 알 라시드는 심드렁했다. 이전이면 모를까 지금의 그에게 핫산의 적의는 모기 소리보다 조금 더 귀찮은 수준이었다.
“에이, 자꾸 중간에 끊기니까 말이 이상해지잖아. 전에도 말했지만, 내 생각에 이번 사건은 사람 짓은 아니야. 사람 같지 않은 플레이어 짓은 더더욱 아니고. 카심 정도 되는 녀석이 방어흔적도 못 남길 정도로 한 순간에 당할 정도면 다른 건 생각하기...”
“그건 사후 손상이 심해서 아예 남지 않았을 가능성이...”
“이봐, 아저씨. 방금 전에 내가 말 끊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알 라시드는 그 이상 참지 않았다. 그는 핫산을 노려봄과 동시에 그를 위협했다. 살기라는 보이지 않는 무형의 칼날로!
그리고 그 위협에 노출된 아흐마드 알 핫산은 한 순간이나마, 공기 중에서 질식하는 감각이 어떤 것 인지 느꼈다. 사람의 손가락에 천천히 압사하는 개미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핫산은 알 라시드의 살의가 거두어짐과 함께 안도감과 함께 분노를 느꼈다.
순간이나마 압도되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핫산에게는 목숨만큼이나 중요한 자존심이 뭉개진 것이었으니까. 그의 신이나 다름없는 알 사디크의 앞에서!
핫산이 두르고 있던 망토가 펄럭거리며 그가 걸치고 있던 수많은 장신구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자식이!”
“그만, 핫산. 그만하게. 알 라시드, 무례를 사과하도록.”
“내가 또 욱했네. 미안합니다. 아저씨, 요새 하도 찔러대는 곳이 많아서 과민반응 했네요.”
핫산 입장에서는 전혀 만족스럽지 않은 사과였으나, 그는 자리에 앉는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의 중재만 봐도 알 사디크가 알 라시드의 편을 든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알 사디크가 그냥 팔짱만 끼고 있는 다면, 얼마전 깨달음을 얻고 칼리프 클랜 최강자로 등극했다는 소문 아닌 소문이 돌고 있는 알 라시드를 그가 당해낼 도리가 없는 것이다. 같은 클랜원이니 생사결까지 가진 않겠지만, 먼저 건 싸움에서 박살나는 건 방금 전의 모욕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존심에 큰 상처로 남을 테니까. 핫산은 속으로만 이를 갈아붙였다.
흥분을 가라앉히느라 씨근덕거리던 핫산이 진정된 것 같자, 알 사디크는 눈짓으로 알 라시드를 재촉했다.
“흠흠, 다시 돌아가서. 내 생각에는 이건 괴수짓이야. 그냥 괴수가 아니라, 저번처럼 이름 표 달고 나온 놈이거나 혹은 그놈이 달고 다니는 직속 부하 같은 놈이겠지. 아니면 카심을 이 꼴로 만들긴 어렵겠지. 블랙 던전이 코앞에서 터졌어도 이렇게는 안 당했을 테니까.”
“나흘 전 회의에서 했던 말이군. 그게 류 현이란 자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라시드.”
“그렇지. 내가 봤을 때는 그 친구는 플레이어로서 뭔가를 이루는 데는 별 관심이 없어보였거든. X던전 때는 좀 긴가민가했는데, 남극 갔을 때는 딱 필이 오더라고. 이 인간은 괴수 때려잡는 데만 관심이 있구나! 하고.”
알 사디크는 수염으로 뒤덮인 턱을 쓰다듬으며, 여태껏 아무 말 않고 앉아있었던 마람 압둘아지드를 바라봤다. 마람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동의를 표해왔다.
“라시드가 말하는 게 전부라고 생각은 안하지만, 제가 보기에도 남극에서의 그 자는 그렇게 행동했었습니다. 플레이어로서의 의무감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단 말이지. 그럼 그 집착을 이용해서 정보를 빼내보자는 겐가?”
“혹여 그 친구가 읽어낼 수 있는 정보가 단편적이어서 모른다 하더라도, 우리가 손해 볼 건 없잖아? 오히려 그 친구 능력이 어떤 건지, 어느 정도 수준인지 가늠할 기회라고 생각하는데? 여기 와서 깽판 칠 것도 아니고.”
“범인이 괴수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생각하지도 않는가 보군. 알 라시드, 그런 빈약한 추론으로는 장로회의 반발만 살 수도 있어. 설마 장로회를 상대로 아까처럼 무례하게 굴 생각은 아니겠지? 그렇지 않아도 장로회 내부에서 근신 겸해서 너를 내 옆에 묶어두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모르진 않을 텐데.”
알 사디크는 자신도 내키지 않는다는 듯 떨떠름한 얼굴 말했다. 하지만 떨떠름한 얼굴의 알사디크와 달리 알 라시드는 태연자약했다.
“전담 호위가 근신 대신이면 나쁘진 않은데? 내가 손해 볼 건 없겠네. 장로회 영감들 보고 모여 달라고 연락부터 해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