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화 〉탐식마(貪食魔)
그로부터 나흘 후.
승하는 놀란 얼굴로 화련의 옆모습을 훔쳐봤다. 신문 기사에 완전히 몰입해 있는 화련은 그 시선에도 무반응으로 일관하였지만, 승하의 놀라움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얘 능력 사실 마인드 컨트롤 같은 거 아냐? 아니면 마인드 스캔? 아니, 이건 좀 어감이 구리네.’
주변에서 신문이 팔각거리던 말던 승하는 자신의 가설을 증명한답시고 화련이 안다면 반응을 안 보일 수 없는 생각들을 마구잡이로 떠올렸으나, 화련은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승하는 금방 포기하지 않고 끈덕지게 도전했다.
사흘 전에 화련이 말한 대로 어제부터 류 현이 세아와 화해했다는 걸 팍팍 티내는 얼굴로, 일을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없는 일을 찾아내기 시작했다고 해야겠지만.
두 남매는 더 이상 보는 사람이 숨 막힐 정도로 딱 붙어있지도 않았고, 붙어있더라도 개미 기어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하게 침묵으로 시간을 보내지도 않았다. 여유가 생긴 류 현은 웨인을 병원으로 슬쩍 불러들였고, 그 결과가 이 모임이었다.
류 현은 병원 내에 체류하고 있는 팀원을 호출했고, 류 현이 매직으로 표시해둔 부분을 열중해서 읽고 있는 것이다. 승하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텔레파시라도 보낼 기세로 화련에게 집중하고 있었지만,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승하가 아이디어 고갈에 허덕일 무렵, 화련도 신문을 손에서 놓았다.
사전에 맞춰둔 것처럼 다른 이들도 신문을 다 읽고는 내려놓았다. 화련은 그것들을 모두 거둬들이고, 곱게 접어서 침대 밑에 내려놓은 후에야 입을 떼었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마스터는 이 유전 폭발사고들이 괴수 소행이라고 보시는 거에요?”
“속단은 금물이라고 생각합니다만...제 개인적인 생각은 그렇습니다. 아니, 감이라고 해야겠죠.”
“감? 갑자기 왜 어울리지도 않게 감...읍.”
“끝까지 듣기라도 합시다. 네? 언니?”
입가는 웃고 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은 화련의 제지에 승하는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기사를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리비아와 알제리 두 나라 유전에서 이번 달만 해도 벌써 폭발사고가 열 한 번이나 터졌습니다. 어떻게 봐도 이상한 수치죠. 2차 ‘대소환’초기 때도 이렇진 않았으니까요.”
“그야 그렇지. 괴수가 떠도 근처에 있는 인간들 보고 눈 뒤집혀서 알아서 시간 끌다가 잡혀주곤 했었으니까. 유전을 터뜨려서 뭐에 쓰겠어? 괴수가 인간도 아니고.”
“예, 저도 처음 기사를 접했을 때는 단순 사고, 최악이라고 해봐야 위스프 같은 놈들의 소행일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괴수가 유전을 공격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이제까지의 괴수라면 말입니다.”
병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그랬다. 이전의, ‘대소환’의 상식을 따르는 괴수라면 유전에서 일하는 인간들을 보고 발광할 수는 있어도 이렇게 연쇄적으로 유전만 터뜨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대소환’이후 정립된 상식 안에서 노는 놈들은 말이다.
그들은 이미 괴수에 대한 상식을 벗어난 놈의 존재를 알고 있으며, 싸우기까지 했으니 그럴 리가 없다고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현실도피를 하고 있는 다고해서 남이 해결해줄만한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마스터는 이 사고들이...”
“확언할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제 감으로는 네임드 몹의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엘더리치나 본 드래곤은 확실하게 죽였으니, 또 다른 네임드 몹이 넘어온 거겠죠.”
화련은 그런 대답은 바라지 않았다는 것처럼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임드 몹.
류 현이 자신의 전생을 밝히면서 알게 된, 인류를 한 번 끝장낸 적이 있는 상식 밖의 괴물들.
단 한 번의, 세 마리 뿐인 예시였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 세 마리의 화력만으로 필리핀은 작은 도시하나가 날아갔고, 일본은 서울보다 약간 작은 섬 하나를 점령당했으니까.
거기에 엘더 리치와 본 드래곤들은 괴수들이 이전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행동까지 내보였다. 눈앞에 있는 인간의 도시를 공격하지 않고, 정보를 끌어 모았던 것이다.
사건이 마무리된 후, 류 현이 덧붙인 해설을 생각하면 머리는 엘더 리치였고 본 드래곤에게는 그만한 지능은 없는 것 같지만, 한 마리라도 그런 지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상식파괴였다.
‘뒤로 갈수록 지능이 높아지는 것 같다고 하셨으니까...이것보다 더 똑똑해진다고 가정하면...끔찍하네.’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플레이어가 괴수를 상대로 확실히 앞서있다고 할 만한 부분은 없다시피 하다.
단 하나, 괴수를 상대로 ‘공략’을 실행할 수 있는 사고능력이 플레이어들을 사냥꾼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것마저 괴수가 가지게 된다?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상황과 맞닥뜨리게 될 게 분명했다. 화련은 어느 새 팔뚝에 돋은 소름을 쓸어내리며 류 현을 바라봤다.
“문제는 본 드래곤, 엘더 리치의 선례를 볼 때 제가 기억하고 있는 순서와 다르게 다른 놈이 튀어나왔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죠. 제가 기억하고 있는 순서대로라면 ‘킹 헬라’라는 이름을 가진 데스 나이트가 다음 타자였습니다만...”
류 현은 팔뚝 밑에 괴어놓았던 신문을 톡톡 두드렸다.
“이 기사만 봐도 데스 나이트는 아닌 것 같거든요. 그쪽 정부가 거짓정보를 흘렸다고 보기에는...그쪽에 데스 나이트에 대한 정보가 있을 것 같지도 않고요.”
“엥? 뭘 보고?”
“탄화된 시신이 남아있으니까요. 네임드 데스 나이트였다면 시체가 남아있지 않았을 겁니다. 구울화 해서 시체군단에 끼었거나, 아니면 데스 나이트가 부리는 시체군단의 식량이 됐겠죠. 제가 봤었던 ‘킹 헬라’라는 놈은 그냥 걸어 다니기만 해도 주변의 시체를 구울로 만들었거든요. 전생보다 약한 놈이 나왔을 거 같지도 않고요.”
엘더 리치가 불러낸 데스 나이트 두 기는 공격력만큼은 준 네임드 몹이라고 할만 했다. 엘더 리치가 부리는 데스 나이트가 그 정도였을 진데, 네임드 몹인 데스 나이트가 이전 생의 ‘킹 헬라’보다 못할 것 같진 않았다.
‘대신 다른 특수능력을 달고 나왔을 수도 있지만...거기까진 예측한다고 머리를 굴린다고 뭐가 될 것도 아니고.’
추측을 하기에는 재료가 너무 적었다.
“다른 특수능력을 달고 나왔을 가능성도 없진 않습니다만, 추측거리가 너무 적군요. 협회에 부탁해도 정보가 제대로 들어올 것도 같지 않고요.”
“그건 그렇지. 다른 곳도 아니고 하필이면...”
“예, 좀 골치 아플 것 같군요.”
승하와 류 현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내저었다. 화련은 멀뚱멀뚱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툭 내뱉었다.
“칼리프 클랜이 협회랑 사이가 안 좋아요? 그런 얘기는 못 들어본 거 같은데.”
“사이가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맞아, 그런 거면 차라리 낫지. 좀 손해 보는 거래로 퉁치면 되니까. 걔넨 뭐라고 해야 하지...”
“영역의식이 너무 강하죠. 편집증적일 정도로.”
“맞아, 무슨 지들이 산짐승도 아니고 자기들 관할 넘어오려고 하면 죽일 것처럼 군다니까? 어 근데 넌 어떻게 알아?”
“전생에서 한 번 겪어봤으니까요. 그 후에 얼마 안 가서 칼리프 클랜이 공중분해 되는 바람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요.”
“영감이 죽기라도 한 거야? 걔네 성격상 그냥 흩어질 바에야 불이라도 지르고 보자 했을텐데.”
“...대체 뭘 겪으신 건지는 몰라도 그럴 상황이 아니었거든요.”
“어, 저기 두 분은 이해하신 거 같은데 전 설명이 좀 모자란 데요?”
“예를 들어서 말입니다. 퍼플 던전이 예멘 국경에서 터졌다고 치죠. 그럼 협회에서는 곧바로 중재에 들어가려고 하겠지요. 국경을 넘어서 괴수가 분탕질치기 시작하면 단순 피해액을 따지는 문제가 아니게 되니까요. 그런데 이 경우에는 예멘은 물론이고, 피해를 볼 수 있는 주변 국가들도 전부 협회의 개입을 거부할 겁니다. 정확히는 칼리프 클랜이 거부 의사를 표현하도록 종용하겠지요.”
화련의 얼굴에 벙찐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그녀는 목을 두어 번 가다듬고 물었다.
“그게 가능해요? 일개 클랜이?”
“일개 클랜이라고 생각하는 건 외부 시선이고 무슬림계열 플레이어들은 전부 스스로를 칼리프 클랜에 속해 있다고들 여기니까요. 클랜 마스터인 알 사디크를 신의 대행자 그러니까, 칼리프라고 여기는 이들도 꽤 되고요.”
“심지어 얘네는 돈도 엄청 많지. 왕가가 스폰서로 들어서 있는 건 이젠 둘째쳐도 될 정도로 히트 상품이 많으니까. 알 사디크 그 영감은 이미 칼리프 클랜 내에서는 왕이나 다름없어. 그렇게 칭해도 불만을 표할 인간도 거의 없고. 언제든 몸을 던질 극렬충성분자에, 당장 화기로 무장할 수 있는 자금력, 플레이어 인재풀까지. 괜히 협회가 칼리프 클랜을 경계하는 게 아니라니까. 그래봐야 경계정도 밖에 못하지만.”
“아무래도 동원력이 다르니까요. 협회가 확실하게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이라고 해봐야 협회 전속팀 뿐인데, 웨인 씨가 아무리 강해도 뒤를 받쳐줄 팀이 없으지 않습니까. 그래서 괜히 플레이어 전력으로는 협회를 능가하는 클랜과 충돌하기 보다는 영역을 존중해주기로 한 거죠.”
“말만 존중이고 관할을 뺏긴 거나 다름없지만 말이지. 서유럽이나 일본도 정도만 덜하지 비슷하고. 어떻게 자리보존 하고 있는지 신기할 정도라니까.”
“그렇게 견제 받으면서 이 정도까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게 대단한 일이죠.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서, 이 사고가 터진 곳은 칼리프 클랜의 관할입니다. 협회 간판은 물론이고 UN 이름빨도 안 먹힐 겁니다. 괴수가 일으킨 사건이라고 말하고 대화를 시도하면 더 심할 거고요. 이쪽 말을 믿어줄지도 의문이고요.”
모두가 소리 없이 침음을 삼켰다. ‘내전으로 쓸데없는 전력 소모가 없는 건 좋은데...다들 너무 멀쩡하니까 비집고 들어가긴 더 어려워졌군. 본 드래곤 때처럼 난리치면서 돌아다닐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생각해본 적 없는 문제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빨리 맞닥뜨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전력이 너무 멀쩡하면 날 거부할거고, 나한테 도움을 청할 정도로 난리가 나면 괴수 군단 억제력이 날아가고. 이것 참...’
“근데 우리도 문제가 아주 없는 건 아니잖아?”
“예?”
승하가 불쑥 내뱉은 말에 류 현은 상념에서 벗어나 멀뚱히 그녀를 바라봤다. 화련은 별다른 낌새가 느껴지지 않는 승하의 표정에서 뭘 읽은 것인지, 팔을 뻗어 그것을 저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승하의 말이 더 빨랐다.
“류 현 너 누나랑 아직 해결 못 봤잖아. 그러고 중동가게? 네가 어느 수준인지 다 알았다면서? 이제부턴 아주 실시간으로 우리 움직이는 거 파악할텐데.”
순간 병실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화련은 류 현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열심히 승하의 옆구리를 찔렀지만 그녀는 미동도 안했다. ‘미안하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등 떠밀어서 처리하고 가는 게 맞지.’
류 현은 그대로 고개를 떨어뜨리더니 뒷목을 주물럭거렸다. 승하는 곧바로 재촉하지 않고 몸을 뒤로 빼었다. 옆에서 화련이 아주 강렬한 시선을 보내는 게 느껴졌지만, 그녀는 그대로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음, 이번에는 좀 심하게 긁힐지도.’
그리고 승하는 한 시간 뒤에 후회했다.
***
화마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이, 높이, 저 높은 구름까지 닿을 것처럼 팔을 뻗었다. 그러나 구름까지 닿는 일은 없었다. 그보다는 옆으로 퍼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화마가 지평선 너머까지 달려 나갈 기세로 퍼져나갔다.
유전에 위에 들러붙은 불은 황혼을 되찾으려는 것처럼 어스름을 불사르고 있었다.
그런 장절하다고 해도 좋을 광경을 뒤로 한 채로, 불꽃으로 이루어진 봉제인형 같은 꼴을 한 요정들은 허공을 향해서 절을 하고 있었다.
숫자가 늘어난 것만 아니라, 트리폴리타니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성장을 이룬 요정들은 성장세와는 다르게 존재감은 그 때보다 더 희미해진 상태였다. 눈을 떼고 조금 위쪽 하늘을 보면 그 존재를 잊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그런 요정들의 머리 위쪽을 채우고 있던 어둠이 밀려나간 건 그야말로 부지불식간의 일이었다. 창을 여는 것처럼 어둠이 밀려나가더니 빛이 쏟아져 나왔다.
어둠을 밀어낸 건 하얀 태양 빛이 아니라 기이한 푸른빛이었다. 푸른빛은 오래가지 않아 꺼지듯이 사그라졌다.
[그냥 있으렴. 아, 이게 아닌가? 편히 있으렴?]
앞을 보기 힘들 정도로 쏟아지던 푸른빛이 사라지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키가 훤칠한 여자였다. 코앞에서 산 같은 불길이 일렁거리고 있음에도 하얗게 보이는, 이상할 정도로 하얀 여자가.
여자는 주변에 드리운 어둠을 불사르고 있는 유전을 빤히 바라보다가 손을 앞으로 슥 내밀었다. 그리곤 말했다.
[일단은...레햄.]
간간히 터져 나오는 작은 폭음에도 묻혀버릴 만한 나지막한 소리였지만, 일어난 현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유전을 집어삼킨 화마가, 여자의 손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작은 산만한 거대한 불은 불과 수십 여초 만에 여자의 손으로 전부 흡수되었다.
하얀 여자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 지 키득키득 웃더니, 지평선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용사님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