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화 〉탐식마(貪食魔)
일주일 후.
승하는 문이 닫힐 때까지 숨을 참았다가 문이 닫히는 감각이 손에 걸리자 한숨과 같은 날숨을 내뱉었다.
“후우우.”
그러고도 뭔가 켕기는 지 문 너머의 기색을 살피기까지 했다. 승하가 문에서 떨어져나오자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화련이 물었다.
“무슨 안 좋은 소리라도 들었어요? 세아 언니 성격상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그런 소리 들었다고 하면 믿을 생각은 있고?”
“당연히 거짓말이겠죠. 세아 언니가 어떤 사람인데.”
승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화련은 끄덕도 안했다. 승하는 뭐라고 투덜거려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오늘이 첫 만남이지만, 세아가 그녀에게 준 인상은 두 번 세 번 본다고 해서 바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런 쪽으로는 나름 자신이 있는 승하였기에 반박하기 더 어려웠다.
그녀의 감은 야망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었던 구정아를 첫 만남에서 집어낼 정도였으니까.
‘나야 그렇다치고...얘는 대체 뭘 보고 그렇게 맹신하는 거야?’
정작 입 밖으로 튀어나간 말은 생각과 전혀 다른 말이었다. 그것보다 훨씬 궁금한 게 있었으니까.
“근데 저 묘한 분위기는 대체 뭐야? 내가 잘 알진 못해도 저건 오랜만에 만난 남매 분위기는 아닌데?”
“...나라고 뭐든 알겠어요?”
“표정은 그게 아닌데?”
“이건 제 삼자가 이러쿵저러쿵 할만한...”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으면 이러고 있지도 않았을 거잖아? 내가 류 현네 누나 만나고 나서 어떻게 나올지 몰랐을 거 같지도 않고.”
준비한 변명이 모두 반박 당하자 화련은 눈을 흘겼다. 여유만만한 표정의 승하에게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녀의 머릿속은 친구가 불러서 가족을 소개 받는, 난생 처음 경험해본 상황에 대한 궁금증으로 가득했으니까. 불러낸 친구의 표정이 앓고 있던 가족이 증세가 호전된 이의 표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상했으니까.
환자 본인이야 처음 만나본 것이니 승하가 표정만 보고 판단하긴 힘들지만, 류 현이 풍기고 있는 분위기는 그렇게 누이를 걱정하던 남동생 치고는 좀 이상했다. 그것도 전생에서 누이의 죽음을 목격한 탓에, 집착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누이의 신변에 대해서 신경쓰는 그가 맞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
“나만 좋자고 이러는 거 아니라는 거 알잖아?”
“진짜...말이나 못하면.”
“에이, 그러지 말고. 응?”
저보다 머리하나는 더 큰 동성이 매달리는 걸 좋아하는 취미는 없었기에, 화련은 혀를 짧게 찬 후 입을 열었다.
“세아 언니나 마스터나 서로 고집 부리는 있는 거에요. 전에도 말했었지만 세아 언니는 이번에 처음으로 마스터가 뭘 하고 다니는지 알게 됐죠. 동생이 그저 그런 던전 털어서 병원비를 대주고 있는 게 아니라, 세계구급 플레이어로 열심히 뛰고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 아마 뜯어말리고 싶어 하고 있을 거에요. 마스터는 세아 언니가 뭘 요구할지 뻔히 알고 있는데도 모르는 척하는 그런 상황일거고요. 속인 게 들켰으니 할 말도 딱히 없을 거고요. 지금은 말해봤자 거짓말 때문에 다 까먹힐 거고.”
“부모님이 두 분 다 괴수한테 당했다고 했었지?”
“맞아요. 아마 그게 세아 언니가 저렇게 반응하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일거에요. 뭐, 그런 트라우마가 없어도 누군들 가족이 괴물 근처에 가겠다는 걸 좋아하겠어요. 마스터는 돈이 부족해서 은퇴 못하는 상황도 아닌데.”
화련은 쉬지 않고 말을 쏟아낸 게 조금 버거웠는지, 어깨를 늘어뜨리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승하는 작은 어깨가 오르내리는 것을 바라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근데 대판 붙은 후 같지는 않던데. 시력이 회복된 건 아니지만 어떻게든 보인다면서? 그 사이에 싸웠으면 못 저러고 있을 거 같은데.”
“세아 언니도 속 편하게 동생 나무랄 상황은 아니니까 그렇죠. 그 언니 성격상 자기가 앓아누워서 마스터가 그런 곳까지 뛰어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걸요. 아니,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야. 병원 옮기기 전부터 그런 기미도 보였었고. 아무튼, 둘 다 켕기는 게 있어서 먼저 말을 못 꺼내고 있는 상황이다 이거죠.”
“그래서 저 둘이 대판 붙고 류 현 멘탈 터질까봐 이러고 있는 거고?”
“...안 덧붙여도 되는 사족은 왜 붙여요? 괜히 말해줬나 봐.”
“어찌됐거나 좀 곤란하게 됐네. 부상 때문이긴 해도 류 현이 쉬는 동안 전에 못 물어본 거 이거저거 물어볼 생각이었는데...당분간은 가까이 안 가는 게 좋을 거 아냐. 들어보니까 내가 누구인지 아는 눈치던데.”
“어떻게 그런 눈치는 잘 보나 몰라. 근데 그럴 필요 없을 거에요. 언니 부른 것만 봐도 마스터도 슬슬 얘기 꺼낼 생각이었을 거니까.”
“응? 둘 다 서로 간보고 있는 거라면서?”
“누가 간 보고 있데요? 설사 언니 말대로라도 곧 말하게 될 거에요. 그런 부분까지 신경 써서 서로 설득하려고 들 정도로 아끼는 가족이니까. 티는 안 내도 저런 상태 유지하고 있는 거 자체가 서로 힘들어 하고 있을 걸요. 길어봤자 사흘? 언니도 혜라가 위험한 곳에 따라가겠다고 하면 그럴 거 아니에요?”
백혜라의 화술에 나흘 전, 완전히 넘어간 승하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
트리폴리타니아 지역 남부의 한 유전.
황혼마저 자취를 감추고, 어둠이 깔리려고 하고 있었지만 유전 주변 분위기는 삼엄하기 그지없었다.
요 삼 주간 연달아 터진 유전폭발사고는, 이웃해있는 알제리에서 터진 것까지 합하면 두 자릿수에 도달할 정도로 발생빈도가 이상하리만치 잦았다. 도무지 근무자 태도 불량이나, 단순 불운으로 치부할 수 없을 정도.
누군가의 입에서 테러라는 말이 나왔을 때 아무도 비웃지 않고, 일반 무장병 외에 플레이어들을 고용해 파견하는 등 경계를 단단히 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젠 국내뿐만 아니라, 강 건너 불구경하던 유럽에서조차 테러라는 추측에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그럼에도 폭발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유전에 플레이어들을 배치하기 시작한 지 벌써 열흘이 넘었음에도 폭발사고는 계속 일어났다. 언뜻 보면 빈도가 줄어들어서 플레이어 배치가 효과를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고가 터지는 유전의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사실은 빈도수의 감소는 아무런 위안이 되질 않았다.
카심 알 필리스티니 또한 그랬다. 그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우려를 하고 있었다. 이대로 폭발사고가 규모만 계속 불리고 자신의 근무지에서 터지지 않을 경우, 그는 파견지에서 기약 없이 경계 근무만 서야할 판이었으니까.
‘아무리 유전이 중요하다지만 성전 준비를 게을리 하다니!’
카심 알 필리스티니는 독실한 무슬림이었다. 팔레스타인에서 쫓기다시피 나와 리비아에 자리 잡은 부친의 종교적 인도와 그가 가진 플레이어로서의 재능은 칼리프 클랜에 들어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카심 알 필리스티니는 칼리프 클랜 내에서도 아주 강력한 강경파로 자리 잡은 상태였다. 그가 살아있는 칼리프로 받들어 모시는, 칼리프 클랜의 수장인 자파르 알 사디크마저 그에게 은밀하게 눈을 붙일 정도로 그는 그 정도로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막가파였다.
자파르 알 사디크가 분란의 씨앗이 되기 충분한 카심 알 필리스티니를 내버려두고 있는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그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마람 압둘아지드급은 아니어도, 장래에 이전의 알 라시드 정도로 클 거라는 예상이 과하지 않을 정도로 포텐이 넘치는 유망주였다.
이미 헌팅 레벨이 160대에 도달했으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뿐이라고 할 만 했다.
이 잠재력 넘치는 유망주는 자금줄 문제 때문에 유전 경계를 서게 된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투덜거리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이 유전 경계 병력의 실질적인 대장이었지만, 카심에게 다가오는 이는 없었다.
지평선을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허리에 찬칼이나 총 중 하나를 빼들 것처럼 살기를 풀풀 풍기고 있는 그에게 말을 걸 정도로 담이 큰 자는 경계 병력 중에는 없었다.
그런 카심의 머리 위, 2미터 정도 떨어진 허공에서 갑자기 불꽃이 피어올랐다. 어떤 마력적 움직임도, 전조도 없었다. 허공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은 흐느적거리면서도 형태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남자 주먹보다 조금 큰 타원형이었던 것이, 작은 동그라미가 불거져 나왔다. 만들다만 눈사람 같은 모양새를 갖추게 된 불덩어리는 멈추지 변형을 반복하더니, 이내 아이를 본 따 만든 봉제 인형 같은 꼴이 되었다. 불길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존재감이 아니었다면 요정이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타오르기만 하던 불덩어리가 살아있는 것마냥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주변을 살피던 불로 이루어진 꼬마 요정은 발밑의 유전을 발견하더니 만세를 불렀다. 소리는 없었다.
꼬마 요정은 그대로 유전으로 직진하지 않고, 발아래에 돌아다니고 있던 인간들에게로 날아들었다. 첫 번째 방문 대상은 그 중에서 가장 강한 카심이었다.
“돌아가서 확실하게 굴...끄륵?!”
꼬마 요정의 공격방법은 매우 단순했다. 어깨에 내려앉아도 자신을 인지하지 못하는 카심의 귓가에 훅하고 숨을 불어넣으니 고기 타는 냄새와 함께 카심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가 가진 항마력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꼬마 요정의 알 바는 아니었다.
고꾸라진 카심의 코에서 핏물과 진물 같은 것이 흘러나왔지만 꼬마 요정은 돌아보지 않고 미련 없이 날아올랐다.
잠시 후, 땅이 내지르는 비명 같은 폭음과 함께 거대한 불꽃이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