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화 〉탐식마(貪食魔)
“흐음...생각보다 일이 더 꼬일 수도 있겠는걸.”
화련은 그렇게 말하며 기지개를 켜는 승하를 바라보며 어처구니없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이 문제는 저렇게 간단하게 요약이 될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비슷한 처지인 류 현에게 좀 과하게 감정이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누구든 간에 승하처럼 반응하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정도는 있었다.
왠지 모르게 화가 나기까지 했다. 이유를 묻는다면 대충 얼버무리고 말테지만, 화가 난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화련은 최대한 화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얼굴에는 숨기기 힘들 정도로 티가났지만.
“아니 지금 내 얘기 제대로 다 듣긴 한 거에요?”
“제대로 이해했냐고 묻는 거면 글쎄, 아마 평생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
“...?”
“난 가족들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으니까. 뭐라고 해야 하나...몇몇 사건들은 기억나는데 그 때 느꼈던 감정이 내 것 같지가 않다고 해야 하나? 설명해줘도 아마 못 알아들을 거야. 나도 이 느낌을 정확하게 정의 내려놓은 건 아니라서.”
화련의 표정이 더욱 엉망으로 변했다. 승하는 손을 내저으며 픽 웃었다. 방금 전까지 화낼 기세였으면서 자기 이야기를 한 번 들었다고 저렇게 변한단 말인가.
‘얘도 플레이어 계속하는 게 용하다니까 진짜. 이모도 거의 다 나은 거 같더만.’
반응하는 걸 보니 장난칠 기분조차 들질 알았다. 승하는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에서 털고 일어났다.
“내가 여기 죽치고 있어도 별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으니까. 난 혜라한테 가볼게. 무슨 일 있는 것 같아도 부르고.”
휘적휘적 문으로 나가는 승하를 붙잡는 소리는 없었다.
승하는 문을 나서자마자 제 머리를 마구 헤집어대었다. 생각 같아서는 주저앉아서 소리라도 시원하게 내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화련이 놀라서 뛰어오는 그림이 그려지기에 그러진 못했지만.
‘미쳤지, 무슨 자랑거리라고 그 얘기를 한 거야? 련이 표정도 완전 죄지은 것 같은 얼굴이었잖아. 나승하, 너 대체 왜 이래?’
스스로에게 윽박질러 봐도 시원하게 결론 나는 건 없었다. 정말로 별 생각 없이 툭 튀어나간 말이었으니까.
화련의 반응과는 달리 승하에게 있어서 가족과의 제대로 된 기억이 없다는 건 역린도 뭣도 아니었다. 몇 번인가 입맛이 썼던 적은 있었어도, 그것 때문에 괴로워한 적은 없었다. 가족들에 대한 애정이나, 그리움도 같이 사라졌으니까.
애초에 그런 애착이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주변에서는 대게 그런 것 같으니, 그렇구나 할 뿐. 안개가 뿌옇게 드리운 것 같은 기억의 단편 속에서 보이곤 하는 부모님보다는, 예거즈 창립 멤버들이 더 가족같이 느껴졌다. 이 또한 자신이 가족에 대한 기억이 모호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승하는 제 생각을 털어내는 것처럼 고개를 내젖고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복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에 오른 승하가 도달한 곳은 2층계 낮은 5층의 한 병실 앞에 도달했다. 503호 백혜라 라고 이름이 박혀있는 문패를 확인한 승하는 노크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소리도 내지 않고.
병실 안은 꽤 넓었다. 원래 개인실로 쓰는 병실이 아니었는지, 개인실 치고는 너무 넓었고 그 때문에 어수선한 분위기마저 느껴졌다.
류 현이 이 병원을 협회 도움으로 사들이다시피 한 후, 개인 요양 공간으로 뜯어고치면서 생긴 폐해 중 하나였다. 병원 수익에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으니, 급하면 4인실을 개인실로 써버리는 짓도 서슴지 않고 저질렀다.
백혜라는 그런 어수선한 병실 분위기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듯, 책에 몰두해 있는 상태였다. 승하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침대로 다가갔다.
혜라는 승하가 바로 뒤까지 접근할 때까지 반응하지 않았다. 어지간히 독서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인지, 그녀가 승하를 발견한 건 승하가 책을 슬쩍 빼낸 뒤였다.
“대체 뭘 보고 있었길래 사람 온 줄도 몰라? 아무리 날파리가 엥기기 힘든 곳이라지만...이거 대체 무슨 소리야? 외계어 연구 같은 건가?”
책을 슬쩍 훑어본 승하는 곧바로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 대충 본 것이긴 했지만 각 잡고 본다한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
“언니도 보면 알잖아요? 던전 내부의 생태계 상태를 볼 때 이계의 존재도 반추할 수 있다는...알았어요. 그만할 테니까 책이나 이리 줘요.”
자신의 설명에 승하의 표정이 썩어 들어가자, 혜라는 말을 멈추고 손을 내밀었다. 승하는 순순히 책을 넘겨주고는 침대에 대충 걸터앉았다.
“아- 네 그 이상한 책까지 봤더니 머리 아퍼.”
흐느적거리며 반쯤 드러눕는 승하를 보며 혜라가 한숨과 함께 물었다.
“또 저쪽에 무슨 일 있어요?”
“일이 있다기 보다는...생길 예정인거 같아.”
“무슨 말이 그래요?”
“류 현이 자기 누나한테 엄청 깨질 건 확실한데, 그 뒤는 모르겠어. 련이가 죽상 쓰고 있는 거 보니까 무슨 일 터질 예정인가 본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가족이 오래 앓아누운 경험은커녕, 어디 같이 놀러간 기억도 없는데.”
혜라는 입을 열려다가 뭔가를 떠올렸는지, 다시 닫고는 5분 가량 우물거렸다. 작은 얼굴에 딱 맞는 작은 입술이 몇 번이고 열릴 것처럼 꿈틀거리다가 겨우 말을 내뱉었다.
“언니...”
“그런 얼굴할 거 없어. 너한테 징징거리러 온 거니까.”
승하는 음울한 표정이 된 혜라의 상체를 두 팔로 끌어당기며 히히 웃었다. 혜라는 그 얼굴을 마주보다가 픽 웃으며 승하가 당기는 대로 앞으로 넘어갔다.
두 여자는 서로 반대로 누운 채로 말없이 한참을 시시덕거렸다. 승하는 혜라의 손장난질에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올리며 다시금 히죽 웃었다. 혜라는 참 적응 안 되는 얼굴이라고 생각하며 승하의 말을 기다렸다.
혜라의 짐작대로 승하는 할 말을 고르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아주 드물게도 말이다.
“혜라야.”
“네엡.”
“내가 이런 말하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넌 나한테 친동생이나 다름없어 알지?”
“모르면 지금까지 이러고 있지도 않죠. 언니 같으면 언니 같은 사고뭉치 옆에 그냥 붙어있겠어요?”
평소와 달리 장난스러운 대꾸에 승하도 깔깔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와중에 승하는 혜라의 눈치를 슬쩍 살피더니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 팀에서 나갈 생각 없니?”
“...”
혜라는 승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장난기라고는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거의 허리에 이를 정도로 기른 회색빛 머리카락이 출렁거렸다. 긴 머리칼이 타고 흐르는 허리께 라인이 그녀에겐 낯설었다.
승하는 그 모습을 보고 여동생 같은 아이가 어느새 성인이 되었음을 실감했다. 정말 새삼스럽게도 말이다.
‘나 힘들다고 너무 오래 방치했구나...’
승하가 기묘한 낯설음에 빠져있는 동안 혜라는 그녀의 표정에서 회한 같은 것을 읽어낼 수 있었다. 혜라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투가 조금 모나게 나간 것은 그 때문이었다.
“위험하니까?”
“응, 이번 일본 원정 때 너도 느꼈겠지만 네임드 몹들은 그냥 좀 더 강한 수준이 아니라...”
“차원이 달랐죠. 하는 짓은 괴수라고 불러도 될까 싶을 정도로 달랐었고.”
“맞아. 인간을 눈앞에 두고도 간보는 괴수가 있다고 반년 전쯤에 말했으면 아무도 안 믿을 텐데 지금은 부정할 수도 없지. 이번이 처음이긴 해도 반례가 생겼으니까.”
“다른 거면 모를까. 던전에 대한 일인데 한 번이라도 반례가 생기면 안심하긴 힘들죠.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 언니는 그 정도 수준으로 생각하는 게 아닌 거 같고...앞으로 저런 괴수가 계속 나타날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렇지. 그리고 아마 이 팀은 계속 그런 놈들을 상대하게 될 거야. 먼저 나서서 붙지 않아도 비슷한 놈을 잡은 적 있는 우리부터 찾을 테니까. 그러니까...”
“더 깊게 엮이기 전에 나가라?”
“그게 좋을 거 같아서.”
“...이제 와서 발 뺀다고 안전해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도 직접 상대하는 거랑은...”
“당연히 다르겠죠. 그건 나도 알아요. 그런데 이거 좀 볼래요?”
혜라는 승하가 보고서 어지럽다고 한 책을 펼쳐들었다. 승하는 보는 시늉을 했지만 책을 읽진 않았고, 혜라도 승하의 눈동자 움직임을 보고 그것을 알았지만 닦달하진 않았다.
“언니도 강찬성 박사님 기억하죠? 키 크고 깡말랐고, 완전 까만 뿔테 안경 낀 그분.”
승하는 어렵지 않게 혜라가 설명한 외견을 가진 남자를 떠올릴 수 있었다. 강찬성. 분명히 기억에 있는 이름이었다.
꽤 오래 전, 그러니까 승하가 한창 주가를 올리며 동시에 미성년자의 플레이어 활동에 대한 화두가 된 시절.
‘예거즈’는 지금과 달리 던전과 괴수로 돈을 벌 생각보다는, 그것들을 없애기 위해서 골몰하고 있었고 강찬성은 그 와중에 연결된 인연이었다. 한창 연구비 부족에 허덕이던 그가 ‘예거즈’ 수뇌부에게 소개한 것은 던전 침공설이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던전 내부에서 목격되곤 하는 비정상적인 생태계와 게이트로 유입되는 마나의 존재를 바탕으로 던전을 단순히 이상현상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지적 존재의 침공방식으로 해석하는 가설이었다.
이런 일에 큰 관심이 없었던 승하도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강찬성은 꽤 훌륭한 이야기꾼이었다.
“기억이야 하지. 근데 네가 그 아저씨를 기억한다고? 와...”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요. 이 책의 내용도 그 때 박사님이 했던 이야기랑 비슷한 맥락이에요. 물론 세부내용은 좀 많이 다르죠. 달리 유적도 많이 발견됐고, 마법수준도 훨씬 올라서 던전 게이트가 어떤 수준의 마법인지 알게 됐으니까.”
“...그래서?”
“이런 저런 이야기 다 쳐내고, 결론은 간단해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작업’이 일정 궤도에 오르면 던전은 기존의 틀을 벗어버릴 것이고, 괴수도 비슷한 행동을 보일 거라는 거죠. 반 년 정도만 전이었으면 이런 얘기는...”
“미치광이 취급받았지. 아니면 강찬성 그 아저씨처럼 과하게 떠들다가 사라지거나. 반년? 아니, 세 달 정도만 전이었어도 미치광이 취급 받았을 걸. 우리가 X던전 공략하고 나서 반응들 봤잖니?”
“그랬겠죠. 불안에 떠는 게 옳다는 건 아니지만...너무들 느슨했었으니까.”
승하는 다른 말 대신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가 보기에 그건 그냥 느슨한 수준이 아니었다.
“다시 돌아가서, 그 세 달 전의 상식은 지금 시점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어요. 인간을 눈앞에 두고 계산을 할 수 있는 괴수, 포화 기간 없이 생성과 동시에 터지는 던전, 포화 기간이 아예 표시 안 되는 상위 던전까지 그 때는 상상도 못한 일들이 전부 벌어졌으니까. 내일은? 본 드래곤 병대를 거느린 엘더 리치가 안 뜬다는 보장이 있어요? 그것들을 피할 수 있는 벙커 같은 건? 없죠. 안전지대 같은 건 없어요.”
“그야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도 직접 싸우는 거랑은...”
“당연히 직접 싸우는 게 위험하겠죠. 보통은.”
“...?”
“류 현 오빠가 뭔가 알고 있는 거죠?”
승하는 잠깐이지만 눈에 당황이 어렸다. 그녀는 혜라에게 눈짓으로 물으려다가 고개를 내젖고는 자신도 몸을 일으켜 바로 앉았다. 그녀는 한 숨 대신 픽 웃으며 물었다.
“...얘기가 길어질 거 같네. 일단 저녁부터 먹고 계속하자. 병원밥은...좀 아니고, 나가서 먹기도 좀 그렇고 저녁 뭐 시켜줄까?”
“군만두! 치킨! 의사 선생님이 얼마나 까탈스럽게 구는지...”
“알았어. 알았어. 선생님 잔소리는 내가 커버 쳐 줄 테니까.”
***
일주일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