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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6화 〉탐식마(貪食魔) (206/429)



〈 206화 〉탐식마(貪食魔)

“류 현.”


여성치고는 허스키한 목소리가 목덜미를 잡아채는 기분이었다. 류 현은 뻣뻣한 동작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봐도 적응이 안 되는 연보랏빛  한 쌍이 그를 째려보고 있었다.


“아니...그게, 밖에 나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애써 변명을 해봐도 승하의 표정을 바뀌지 않았다. 류 현은 자신이 생각해도 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억울함을 느꼈다. 보통 때라면 류 현이 내상 입고  좋을 대로 돌아다니는 승하에게 잔소리 하는 건 그의 역할이었으니까.

“너 그 얘기 여기대고  번 더 해볼래?”

하지만 승하가 들이민 스마트 폰 앞에서  현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화면에는 화련의 번호가 떠올라 있었으니까. 통화 버튼을 누르면 3분이되기도 전에 화련이나 희란 중 하나가 달려올 것이다. 그녀들도 아직 퇴원을 못해서 이 병원에서 지내고 있으니 둘 다 올수도 있다. 아니, 아마 열에 여덟아홉 확률로  다 달려올 것이다.


 현은 승하가 겁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승하는 지난 일주일 간 자그마치 세 번이나 이 협박 아닌 협박을 실행에 옮겼었으니까. 두 번 경고는 없었다. 누가 검성 아니랄까봐 자르는 수준이 아주 단칼이었다.


제 아무리 류 현이라 해도 환자 둘이 뛰어와서 피를 토할 기세로 잔소리를 쏟아 붓는데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승하에게 환자 둘 데리고 뭐하는 짓이냐고 따져봐야 소용없었다. 승하는 그 말까지 녹음해서 그녀들에게 보냈으니까.

무슨 말을 해도 승하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고, 류 현은 의식을 차리고 일주일 째 승하의 눈치를 봐가며 요양생활 중이었다.

면회는 하루에 한 시간. 그마저도 나가는 건 안 되고, 성치 않은 몸으로 격무에 시달리고 있는 웨인이 병원으로 찾아와야할 정도였다. 평소에 그런 걸 크게 신경 써주는 편은 아니었지만 목숨 걸고 네임드 몹을 같이 눕힌 마당에, 아주 신경 쓰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웨인은  때마다 허허 웃으며 괜찮다고 몸조리에 신경 쓰라고 하긴 했지만,  현은 웨인에게 미안한  둘째치고서라도 거의 수감상태나 다름없는 상황을 유지할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이건 해도  너무하지 않습니까. 의사선생님도 슬슬 움직여도 괜찮다고...”
“괜찮을 수도 있겠군요. 라고 했지. 의사들이 장기를 보지, 마력을 봐?”
“끙...”

승하의 반박에 류 현도 침음을 삼킬  다른 대꾸는 하지 못했다. 그녀가 읊은 말들은 류 현도 같이 들었던 것들이니까.

거의 수감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는 이유가 그거였으니까.

마력 고갈.


의식을 되찾은 지 일주일이 되어가는 류 현을 아직까지 괴롭히고 있는 문제였다. 덕분에 마력을 움직이는 통로부분은 아직도 내상이 다 낫지 않은 상태.

외부로부터 마력을 끌어 모으자니 내상이 걸리고, 내상을 어떻게 해보려면 재생에 할당할 마력이 부족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여있다는 점이 류 현을  미치게 만들었다.


‘3차 ‘대소환’이 시작됐는데 일본에서 이러고 있어야 하다니...’


의식불명으로 일주일을 날린 것도 속이 쓰린 일인데, 회복을 위해서 추가로 일주일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음에도 회복은 더디기만 했다. 애를 태우면 회복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으니 웨인을 통해서 정보라도 어떻게 접해보려고 하면 면회제한이 발목을 잡았다.


빠른 회복을 위한 조치라는  알긴 했지만, 그렇다고 속이 타들어가지 않는  아니었다. 거기에, 아예 정신이 날아가서 며칠 뻗어 있은 적은 많아도 이렇게 멀쩡한 정신으로 자리에 뭉개고 있는 건 거의 경험해본 적 없는 상황이라는 것도 크게 한몫했다.

 현이 애꿎은 손톱을 짓씹고 있자, 승하는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침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승하는 뚱한 얼굴로  현을 빤히 바라보더니 불쑥 내뱉었다.

“어떡할 거야?”
“예?”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류 현은 곧바로 승하를 다그치진 않았다. 그녀는 곧잘 앞 뒷말을 다 자르고 툭 던지는 것처럼 말을 하곤 했으니까.


백혜라가  때마다 그걸로 잔소리를 퍼부어도 별로 바뀌지 않는 걸로 봐선 천성이다 싶어 류 현도 포기한 상태였다. 앞 뒷말을 아예 안하면 큰 문제가 되겠지만, 그렇지도 않았고 말이다.


승하는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며 머리를 헤집어대더니 결심이 섰는지, 류 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까 웨인이랑 그랬잖아. 기자들이 기사만 써내면 대응할 생각 없다고.”
“예에...그랬었죠. 무슨 문제 생겼습니까?”
“네가 자고 있는 동안 잠깐 그것들이 안에 들어왔었어.”
“어디까지요?”
“건물 안까지는 아니고 련이랑 희란이가 잠깐 바람 쐬러나가다가 마주쳤었지.”
“...좋은 소리는 못 들었겠군요.”
“너나 나였으면  험한 소리 들었을 걸. 들어보니까 걔네는 그냥  스태프로 알고 말  모양이던데. 걔네 둘은 가만히 있으면 플레이어로는  보이잖아?”
“그렇긴 한데...”

플레이어 입장에서 그보다 웃긴 소리는 없겠지만, 승하의 말대로 두 사람은 유독 정도가 심하긴 했다. 마법사 특유의 그냥 척 봐도 괴팍해 보이는 분위기를 풍기지도 않았고, 희란은 플레이어 여부를 따지기 이전에 성격자체가 접근하기 좋은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덕분에 더러운 꼴은  보긴 했다는데...그렇다고 웃어넘길 일은 또 아니잖아?  치들이 안으로 들어왔다는 건 정부 쪽에서도 슬쩍 눈감아줬다는 이야기랑 별 다를  없고.”
“일본 입장에서는 아니면 그게 더 문제겠죠. 괴수 잡으러 와준 원정대가 요양 중인 병원 보안도 유지 못한다는 소리인데...거참, 예상 못한  아닌데 어떻게 한 달을 못 채우네.  양반들.”
“뭐야, 예상보다 덤덤하네.”
“그야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니까요. 전생에서도 비슷한 일은 몇 번 겪었었고.”
“어? 너 그 때 원탑이라고 안 그랬어? 니가 화나서 너네 땅에 있는 괴수 안 잡아줘! 하면 어쩌려고?”


승하의 말에 이전 생을 떠올린 류 현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지금 돌이켜봐도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 나날들이었다. 자신이 한일이 아님에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민망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게...사람 욕심이라는   생각보다 훨씬 사람을 돌게 하더군요. 당장 내년 되기 전에 굶어죽을 사람이 백만이 훌쩍 넘는데, 대처할 생각은 안하고 가격을 쳐 줄 테니 화룡 가죽을 뱉어내라고들 하니...”

차마 끝까지 제 입으로 다 말하기 민망한  현이 허허하고 헛웃음으로 얼버무렸지만, 승하는 별로 놀라는 기색은 아니었다.


“안 놀라시네요.”
“비슷한 경험이 있었으니까. 그 때 지벡 건터를 처음 봤었던 걸로 기억하니까...북한 안정화 때였나? 이렇게 말하니까 한 십  전 이야기 하는 거 같네.”
“전 그보단 북한 안정화보다 지벡 건터 씨로 기억하는 게 더 놀라운데요. 그 때도 무슨 사고 친 겁니까?”
“어? 뭐...사고  거긴 한데. 우리 쪽은 아니고 자기네 일행한테 불을 질렀었지.”
“예?”
“네 표정 보니까 무슨 생각하는 지 알  같은데, 그렇게 심각한 일은 없었어. 그 때 UN이 평화유지군이니 뭐니 하면서 시끄러웠잖아? 지벡 건터가  때 플레이어  대표 비슷하게 참가했었거든. 자기 이미지 세탁도 겸해서 참가한 거니까. 바보가 아닌 이상 먼저 사고칠 생각은 없었겠지. 그런데 평화유지군 쪽에서 괴수 사체 지분이 어쩌니 하면서 지지부진해지니까. 협상자 대표였던 대령 머리카락을 좀 태운 것뿐이야.”

류 현은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그래, 이 인간 원래 이런 인간이었지.


동시에 당시 승하가 미성년이라, 미성년 플레이어에 대한 법안의 예시가  정도로 뜨거운 감자였다는 사실 또한 떠올랐다. 그녀가 이렇게 자란 건 어린 나이부터 미친놈들과 괴수에 너무 자주 노출된 탓일까.

‘절대 아니지.’


류 현은 무슨 문제 있냐는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기울이고 있는 승하를 보고 확신했다.

“...그게 사고 쳤다고 하는 거잖습니까.”
“응? 그 뒤에 별 문제  생기고 넘어갔었는데.  대령인가 하는 인간도  뒤로는 안 보였고.”
‘지벡 건터의 뒷배가 처리해준 거겠지. 꽤나 여기저기 발을 걸친 모양이던데...소문의 2할만 사실이어도 대령정도는 콧바람으로 날려버릴 수준일 테니까.’
“승하 씨가 그런 사고 치면 전 커버  쳐드립니다.”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벡이랑 나를 동급 취급해?”
“방금 그게 사고   아닌 거 같으면 동급인거죠.”
“너 진짜...”
“어찌됐거나 일본정부 쪽 약발이 떨어진  확인 했으니 해야할 일은 하나죠.”
“내 말 안 끝났...응? 뭐 어쩌게? 스사노오인지 뭔지랑 붙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 그쪽으로 진행되는 건지 모르겠는데 그럴 일은 없습니다. 우릴 도와주고 싶어서 몸살 났다는 아저씨한테 부탁하면 되겠죠.”
“엥?”

승하의 엥? 이 해소되는 데는 36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웨인을 통해서 류 현이 요청하자마자 미국 측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호위 병력을 파견해온 것이었다.  사이를 참지 못하고 병원 건물까지 비집고 들어온 기자들 덕택에 일은 더 수월하게 돌아갔다.


떡  김에 제사지낸다고,  현은 그대로 호위병력 일부에게 부탁해 본 드래곤과 엘더 리치의 잔해를 수습하여 바로 귀국길에 올랐다. 기자들과 두 번이나 마주쳐서 불쾌한 꼴을 본 화련과 희란도 크게 반대하진 못했다. 안 그래도 더딘 류 현의 회복을 기다렸다가는 정말로 병실이 기자들로 점거 당하는 꼴을 보게 될 것만 같았으니까.

그저 그대로 갔다가는 좋지 않은 꼴을 보게 될 거라는 식의 암시 비슷한 소리만 했을 뿐.

그마저도 돌아가서 누나의 상태를 확인하고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던 류 현 귀에는 달라붙지 못하고 금세 흘러나왔다.

사실 상태 확인이야 매일 전화로 하고 있고, 류 현 본인이 세아의 상태를 직접 찾아갈 상태도 아니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런 식으로 퉁쳐지는 게 아니니까.


그래서 평소와는 다르게 다급하게 움직였다. 평소라면 화련과 희란이 암시 비슷한 말을 할 때의 표정을 보고 뭔가를 느꼈을 테지만 딴 생각으로 가득한 류 현의 눈에는 그 또한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그 때 좀 더 캐물었어야 했다고 격렬하게 후회하는 중이었다.


“......”
“누나 그게...”


거의  것 같은 눈을 하고서  얼굴을 더듬고 있는 세아의 앞에서 류 현이 할 수 있는 건 뻣뻣하게 굳어있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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