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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4화 〉탐식마(貪食魔) (204/429)



〈 204화 〉탐식마(貪食魔)
“제가 오늘 눈을 떴을 때 희란 씨가 보관하고 있던 제 마력을 넘겨주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죠. 희란 씨, 혹시 ‘연결’로  보셨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희란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려 시선을 회피했다. 의식하고  행동은 아니었다.

“그게...그렇게 말씀하셔도 제대로 말씀 드릴 수 있는 게 없어서요...”

제 손을 내려다보며 꼼지락거리는 희란. ‘...이러는 거 보면 ‘링커’일리가 없는데 말이지. 그 인간이었으면 이런 자리에 있지도 않았겠지만.’ 류 현은 속마음과는 정반대로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채로 말했다.

“부담 가지실  없이 그냥 떠오르는 대로 말씀해주시는 걸로 족합니다. 저도  능력을 완전히 파악하진 못해서 이렇게 질문 드리는 거거든요.”
“그렇지만...”


희란이 옆을 힐끗거리자 류 현도 같이 시선으로  방향을 쫓았다.  끝에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혼이 빠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화련이 언제 기운을 되찾은 것인지 희란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현은 한 번 헛기침을 한 후에 화련에게 말했다.


“그렇게 빤히 쳐다보시니까 희란 씨가 부담되셔서 말을 못 하시는 거 아닙니까. 화련 씨.”
“제가  어쨌다고...아니지, 궁금하니까  그럴 수도 있죠! 희란이도 마스터도 여태 아무 말도 안하고   닫고 있고, 숨기려면 확실히 좀 숨기든가! 옆에서 보는 사람이  타들어가게 그렇게...”
“그래서 지금 이렇게 말씀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희란 씨는  행동에 그냥 발맞춰주신 것 뿐...”
“또 나만 나쁜 년이야.”

툴툴거리며 몸을 뒤로 빼는 화련의 반응에 희란은 쓰게 웃으며  번 심호흡을 하더니 입을 떼었다.

“그게 ‘연결’된 상태에서는 엄청나게 커다랗고,  찌그러졌고, 젤리 같이 생긴? 검은 물체처럼 보여요.”
“제가요?”
“아, 마스터가 그렇다는  아니라. 마스터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것들이요. 평소에는 퍼져있진 않고 안에 고정되어있는데 그러니까...”

희란이 허둥대며 허공에 손가락으로 뭔가를 그려내려는 듯하자, 어디서 구한 것인지 화련이 잽싸게 팬과 종이를 쥐어 주었다. 희란은 몇 번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자신없다는 표정으로 선을 몇 개 찍찍 긋더니, 더욱 자신이 없어진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종이를 찢거나 집어삼키지는 않고 류 현에게 넘겨주었다. 종이 위에는 타원형이라기보다도 터져나가고 있는 풍선 같은 형태와 그 중심에 검은 점이 그려져 있었다. 강조를 위한 것인지, 몇 번이고 덧칠된 중심부는 움푹 들어간 상태였다.  현이 그림을 대충 살피고 희란을 돌아보자,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로 모든 시선을 거부하고 있는 상태였다.


“희란 씨?”
“그, 그게 제가 할  있는 최선이에요. 그 이,이상은 어떻게 해보라고 하셔도 방법이...외곽부분으로 가면 선이나 면이 아니라 점에 가까워서 그래서...”
“아니, 그림이 이상하다는  아니라 이렇게 보기만 해선 알 수가 없어서 그럽니다. 외곽부분이라고 하신 것도 전혀 모르겠고요.”
“아...”

희란은 그제야 다른 이들의 표정을 살피고는 안도의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저 성격으로 스트라이커 훈련을 자청하다니...‘링커’랑은 다른 의미로 괴짜긴 하네.’

“그러니까...이건 정말 제 느낌일 뿐이라서...”

그렇게 말하고도 아직 불안한 지 희란은  현의 눈치를 살폈다. 류 현은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으로 힘을  해주었다.

“제가 다른 사람들이랑 많이 ‘연결’해 본 건 아니지만...플레이어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마력이 미치는 영역이 존재해요. 몸 주변  센티든, 아니면 위쪽으로 몇 미터든, 그것도 아니면 몸에 딱 붙어서 구분이 안 되든 간에 확고한 영역이 존재해요. 이런 식으로.”

희란은 기존에 그린 그림 옆에 조금 찌그러진 사각형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 중앙에는 웨인 이라는 이름을 적었다.

“이건 제가 저번에 웨인 크로이츠 씨랑 ‘연결’을 했을 때 파악한 영역이에요. 머리 부분이 넓으면서 조금 더 짙고, 팔다리부분은 얇은 대신 밀도가 엄청나요. 색깔로 표현하면 이렇게...팔다리 부분은 거의  안 보일 정도고, 머리 부분은 눈을 깜빡거리는 것처럼 조금 왔다 갔다 하는 성향이 좀 있죠. 다른 사람들도 그런 걸 보면 아마 이쪽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는  같아요. 팔다리 부분은 이렇게까지 꽉 틀어 막힌 경우는 거의 못 봐서...”
‘허, 이런 걸 파악하고 있었다고...? 무의식적으로 마력을 방출하는 거라 본인도 잘 모르는 걸?’


일단 본격적인 설명에 들어가자 태연한 얼굴로 펜을 움직이는 희란의 모습에 류 현은 어이가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희란은 스트라이커들이 어떻게든 파악하고 싶어 하는 무의식적인 버릇들을 단순히 ‘연결’ 한 번이면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건 그냥 파이프라인 수준이 아니라 혼자서 교관에서 사령부 역할까지 다 할 수 있는 수준이잖아.’


아마 당사자인 웨인이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어떤 대가를 지불하든 간에 제 버릇을 파악하려고 들 것이다. 최정점에 가까운 스트라이커들에게 그보다 확실한 성장방법은 없을 테니까.

‘협회에 들어갔으면 오히려 이 부분을 더 빨리 개화시켰으려나...?’ 오죽하면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그, 그런데 마스터는 좀 다르거든요. 아니...좀 많이요.”

 현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집중력이 흩어진 것인지, 희란이 다시금 제 말을 번복하는 등 허둥대기 시작했다. 류 현은 거기다대고 그게 많이 다른 겁니까 아닌 겁니까 하고 묻진 않았다.

스스로도 궁금했으니까. 희란이 ‘연결’로 그런 걸 보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고, 경지가 오르면 오를수록 알 수 없어지는 제 능력에 대한 단서가 되어 줄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거꾸로 인내심의 근거가 되어주었다.

“아까 말씀하신 외곽부분이요?”
“네! 맞아요. 특히  부분이 그렇고 중심부도 좀 다른데...”


희란은 말을 끊더니 다시금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류 현은 다독이는 말을 해주려다가 그녀의 눈빛이 방금 전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에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류 현은 말을 던져봤다.


“혹시 제가 불편해  거라고 생각하셔서 그런 거라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어차피 오늘 내일 중으로 다 말할 생각이었거든요. 제 능력에 대해서도요. 말한다고 하더라도 딱히 말할 거리도 없긴 하지만요.”
“아, 그럼.”
“예,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게 낫습니다.  스스로도 대강 파악하기는커녕, 더 모를 상황인지라.”
“만약을 대비한다고요? 그건 또 무슨 소리에요? 마스터 무슨 문제 있어요?”
“련아, 일단은 희란이 얘기부터 듣고  현 이야기도 들어보자. 이렇게 중간에 계속 태클 걸면 이야기 다 끝나기도 전에 쟤 뻗어버릴 걸.”


승하의 제지에 달려들려던 화련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면서 조용히 이번에는 다 듣고 말테니까 하는 소리가 들린 듯 했지만 류 현은 애써 못 들은 채 했다. 그 동안 혼자서 우물거리며 생각을 정리하던 희란이 종이를 뒤집더니 점을 찍어가며 말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제가 본 플레이어분들은 몸이랑 맞닿은 부분에 무의식적으로 마력으로 금을 그어놓은 것처럼 일정한 영역을 구축하곤 해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몸으로 멀어질수록 소모도 빠르고, 장악력도 약해지죠. 그런데 마스터는 그 영역 이외에도 개별적으로 이렇게 잉크를 흩뿌린 것처럼, 흩뿌려진 마력덩어리들이 점처럼 주변에 맴돌고 있어요. 일반적인 경우를 생각하면 엄청난 마력낭비죠. 아무리 정순한 마력도 몸을 떠나면 천천히 그 성질을 잃어버리거든요. 특이한 건 첫 번째로, 제가 봤을 때는 마스터와 아무런 연결도 되어있지 않은데 장악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고.”

희란은 갑자기 쥐고 있던 펜 꽁무니를 씹더니, 굉장히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느낌일 뿐인데...”
“괜찮습니다.  느낌이 필요한 거니까요.”


결심이 섰는지 고개를 끄덕끄덕하던 희란은 누가 끼어드는 게 무서운지 말 그대로 말을 쏟아냈다.

“그 떨어진 마력점들이 주변을 장악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에요. 마스터가 말씀하셨던 에너지 드레인이랑은 달라요. 제가 봤을 때는 마력이동은 없었거든요. 마력이동이 있었으면 에너지 드레인이랑 헷갈렸을 수도 있겠지만 이건 느낌도 완전히 다른데다가, 마력 이동 자체가 없어서...”

말을 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데 성공한 희란은 그 성공에 고무되어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를 필터링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내뱉었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하였지만.

“그러니까 물이 찬 커다란 양동이에 검은 물감을 떨어뜨리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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