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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3화 〉탐식마(貪食魔) (203/429)



〈 203화 〉탐식마(貪食魔)

승하를 노려봐 봐야 그녀들이 물러날 것 같지도 않았기에 류 현은 시선을 돌렸다. 왠지 모르게 열기마저  채로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두 여자를 향해서.

“따로  얘기를 하면  길어질 것 같은데 좀 진행하고 나서 자연스럽게 하는 편이...”
“길어도 되니까! 어차피 해야 하는 이야기라면서요?”

화련의 옆에 딱 붙어있는 희란까지 가세해서 고개를 끄덕여대니 뺄 수도 없었다.

“이미 끝난 일에 왜 그리 열을 올리시는 지.”
“끝난 일 얘기 꺼낸 건 마스터거든요? 만났다,  만났다만 이야기만 해주면 되는 걸 왜 그렇게 끌어요?”
“...화련 씨랑은 만난 적 있습니다. 그렇게  기간은 아니어도 제 팀에 몸 담그신 적도 있고요. 희란 씨는...좀 애매합니다.”
“애, 애매하다뇨?”
“희란 씨인  같은 동료가 팀에 있긴 했는데...그 동료 이름도 정확하게 모르고, 얼굴도 모릅니다. 그 친구가 독에 심하게 당해서 얼굴은 물론이고, 목소리도 들어보질 못했죠.”
“엥? 너 그런 인간을 동료랍시고 데리고 다녔었던 거야?”
“그거야 지금이랑 상황이 많이 달랐으니까요.”


 현은 승하에게 대충 대꾸한 후,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을 들은 희란과 화련을 돌아봤다. 화련은 거의 턱까지 내려올 것 같던 다크서클의 자리를 조금이나마 돌아온 혈색이 밀어내고 있었다. 그에 반해 희란은 어딘가 조금 축 쳐진 느낌이 들었다. 퀭해 보이는 안색 때문에 아파 보이기까지 했다.


“팀을 결성한 것도 죽기   전쯤이었습니다. 사실 팀이라기보다도 협조 인원을 모은 것에 가까웠죠. 호흡을 맞춰본다던가, 과거 행적을 따질 것도 없이 두 가지 조건만 충족하면 바로 영입했으니까요.”
“네가 잡다가 같이 죽었다는 그 괴물 잡으려고? 그 조건은  뭐야?”
“예,  괴물을 잡으려고 협조자들을 모았죠. 조건도 간단했습니다. 제가 세운 실력 기준을 통과할 것, 아지다하카를 잡는데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있을 것.”
“...제가 그 팀에 들어갔었다고요?”
“예.”

묻는 화련의 목소리는 떨림은 없었으나, 의아함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그녀는 류 현이 목숨 걸고 달려들어서 겨우 서로 죽이는 결말을 맞이한 괴물의 강함을 상상하는 것도, 자신이 그 괴물을 잡겠다고 목숨 걸고 매달리는 것도 상상이 가질 않았다. 동시에 그렇게 된 이유를 듣는 것이 꺼려졌다.

“대체 왜...”


입에서 나온 말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흘린 것이었다.  현이 자신의 눈치를 한  살피자 화련은 흠칫했으나, 그가 쏟아내는 말을 막진 못했다.


“아지다하카의 공습 때 이모님이 돌아가셔서...그래서 합류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 언니!”


류 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련의 허리가 휘청거렸다. 희란이 기겁하며 그녀의 등을 받쳐주었지만, 화련에겐 큰 위안이 되진 못했다. 화련은 더듬더듬 류 현에게 물었다.


“저...정말이에요? 내가...그랬다고요?”
“예. 팀의 동료들 대부분 그런 사연을 가지고 합류했었습니다. 제가 희란 씨라고 추측하고 있는, 이름 대신 ‘링커’라고 불린 친구도 그랬고요. 다들 가족이나 가족과 다름없는 동료를 잃은 일을 동기로 용잡이 팀에 합류했었죠. 그리고 저를 제외한 팀원 전원이 독에 당해서 시한부 인생 상태였고요. 별다른 위안은  되시겠지만...”
“이해...했어요. 목숨 걸만 했네요. 시한부 인생이었다는 것도 사실이면 어차피 날아갈 목숨 . 그런 일에 쓰는 게 저답긴 하네요. 근데 뭐 때문에 그 지경까지 갔던 거에요? 팀 구성원들 상태 들어보니까 원정대가 아니고 병동에 밀어 넣어야 하는 상태였던  같은데. 협회는? EU나 UN은 대체 뭐했데요?”
“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이야기가 길어질 거라고 말씀 드린 이유가 그겁니다. 제가 겪은 전생은...미래는 말이 안 될 정도로 일이 꼬여서, 여러분이 기억하시는 국가나 연합개념이 거의 사라진 상태였거든요.”
“그렇게 개막장이었다고?”


류 현은 승하의 필터링 없는 표현에 저도 모르게 개막장 하고 중얼거렸지만, 가까스로 두 여자를 향해서 내뱉는 실수는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승하의 말처럼 개막장이라는 말 이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전생의 광경들을 떠올리고는 쓴웃음을 짓는 건 피할  없었지만.

“이제부터 지겹게 강조 드리게  테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3차 ‘대소환’은 정말 초입단계입니다. 전생과 지금의 3차 ‘대소환’의 진행속도가 같을지는 모르나, 여태껏 일어난 일들을 보면 덜하진 않을 겁니다. 지금이야  국가들이 알아서 대처하고 있지만 퍼플이상의 던전들이 열리기 시작하면...”


류 현은 자세한 설명을 첨부하진 않았지만, 세 여자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던전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시원찮은 보급을 등에 업고 괴수에게 더 유리한 환경 속에서 싸우는 건, 기존의 어떤 사투를 표현하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유쾌하지 못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싸우는 것이 더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위 괴수나 어지간한 육체파 괴수들은 화기 지원이 있는 현실에서 잡는 것이  수월하겠지만, 리치나 샌 드래곤같이 고유의 특수능력을 가진 괴수들은 현실로 나오면 그 끔찍함이 배가 된다.

리치의 구울이나 스켈레톤 생산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용종 괴수는 날아오르기 전에 저지하지 못하면 다음날 연쇄 항공기 추락 사고를 일으킬 수 있는 날아다니는 재앙  자체다. 와이번 정도라면 모를까, 샌 드래곤도 급수가 올라가 덩치가 커지고, 피어 범위가 커지기 시작하면 전투기로 잡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그렇다고 활개 치기 시작한 놈의 쉴드를 화기로 깎아내는 건 고된 것을 넘어서 위험한 일이다. 놈은 마하를 가볍게 찍는 전투기 보다는 느리지만, 전투기와는 비교도 안 되는 단단한 몸과 인간이 감지되면 눈이 뒤집히는 본능을 가지고 있으니까.

‘블랙급이 열리기 시작하면...감당할 수 있다는 소리조차 안 나올 거지만.’


던전 분류상 그저 한 단계 위일 뿐인 블랙급에 웅크리고 있을 놈들은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끔찍하다. ‘지룡. 그놈이 기어 다니기 시작하면 6성 리치가 귀엽게 보일 테지.’


 현은 그런 끔찍한 놈들을 수 십,  백을 상대해 보았고, 그놈들에게 인류가 세운 문명이 우스울 정도로 쉽게 갈려나가는 것 또한 어쩔  없이 지켜봐야만 했다. 그의 몸은 하나였고, 하루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 또한 지구 전체를 기준으로 놓고 봤을 때 정말 짧았으니까.

지룡의 용틀임  번에 60층이 넘는 고층 건물들이 수수깡마냥 부러지고, 무너져나갔다. 블랙 라미아가 둥지를 틀면서 저도 모르게 흘려보낸 독기  방울은 상수원의 물을 독극물로 바꿔놓았고, 7성 리치의 손짓 한 번에 겨울에 토네이도가 일어섰다. 샌 드래곤의 상위 종인 쐐기룡은 인류의 하늘을 틀어막았다. 어떤 전투기도, 비행능력을 가진 플레이어도 놈들로부터 제공권을 찾아오진 못했다.

류 현이 알고 있는 미래란 그런 것이었다. 사람들이 어떻게든 탈출구를 모색하여도 그것을 압도하는 괴수들의 강함 앞에서 희망들이 하나  무너져나가는 광경. 사람들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인내하고 타협하며 연명을 했으나, 아지다하카라는 전력을 유지하고 있는 인류도 감당할  있을까 싶은 괴물의 등장 앞에서 희망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짜부러졌다.

그런 미래를  리가 없는 승하는 제 턱을 매만지며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내뱉었다.


“근데 그거 감안해도 좀 이상한데. 당장 명동에 퍼플급 하나 터지면 지옥이 되긴 하겠지만, 그게 나라가 망할 타격은 아니잖아? 아프리카랑 붙어있는 중동이나 그 근처의 유럽은 좀 심각하긴 하겠지만 협회가 그 지경까지 그냥 방치할 것 같진 않은데. 토벌은 못해도 방어선 구축정도는 가능하지 않나?”
“협회는...”
“협회는?”
“3차 ‘대소환’초기에 괴멸됐었습니다. 정황상 던전이 그 건물에 생성되자마자 터져서 수뇌부가 날아간 것 같습니다만...생존자도 cctv자료도 남아있질 않았으니 정확히 알 방도가 없어서 앞뒤 정황을 보고 대충 그럴 거라고 추측할 뿐이죠.”
“미친...그게 말이 돼? 그딴 말도 안 되는 우연이...”
“웨인 씨는 사실상 무적자 신세가 된 다음에 런던교 앞에서 괴수군단을 틀어막다가 죽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류 현이 재빨리 덧붙인 말에 승하는 입을 반개한 채로 허,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걔 성격에 곱게 죽긴 글렀다고 평소에 생각하긴 했는데 진짜로 그렇게 됐었네.”
“젊은 영웅의 죽음이라고 여기저기서 떠들긴 했습니다만...”
“결국엔 네가 총대 매고 병자들 모아서 아지다하카인지 뭔지 족치러 갔다며? 그럼 완전 삽질한 거지. 생목숨 버려서 살려놨더니 플레이어 놈들은 네 이야기 대로면 제 밥그릇만 찾았을 거고, 일반 시민들은 버텼어?  버텼지? 그 지경까지 갔으면 도리 운운하는 인간들부터 갈려나갔을 거 같은데.”
“10억. 아무리 많아도 10억 이하 일거라더군요. 미국에서 슬쩍 찔러준 정보에 따르면 5억도 많이 친 거라고 하긴 했습니다만.”
“완전 헛짓한 거네. 차라리 걔가 냅다 튀고 네 팀에 들어갔으면 그게 더 의미 있는 일이었겠다.”


류 현은 굳이 대꾸하지 않고 쓰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승하도 그것에  불만이 없는지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거의 얼싸안은 상태인 화련과 희란을 슥 봤다. 화련은 충격이 덜 가신 것인지, 멍한 상태였다. ‘얘도 가족 관련이면 은근히 유리멘탈이란 말이지.’


승하는 속으로 한 숨을 삼키며 그녀들의 질문을 대신 해주기로 했다.


“그래서 희란이가 애매하다는 건 무슨 의미야? 이름도, 목소리도 모르면 같은 사람인 줄 어떻게 알아? 말하는  보니까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거 같은데.”
“일단 능력이 비슷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다 터놓을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어서 능력이 비슷한 것도 그냥 제 느낌뿐입니다만...”
“쟤 능력이 좀 많이 특이하긴 한데 비슷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주 없을 거라는 보장은 없잖아? 나만해도 비슷한 능력 가진 인간이 이 나라에만 한 트럭은 나올 텐데.”
“저도 그래서 그냥 잊고 지냈었는데...지내다 보니까  켕기는 게 있어서요.”
“켕기는 거?”


류 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희란에게 시선을 돌렸다. 화련의 등을 쓸어주면서도 둘의 대화를 주시하고 있던 희란은 화들짝 놀랐지만 시선을 피하진 않았다. 류 현은 강압적으로 보이지 않게 애쓰며 물었다.


“제가 오늘 눈을 떴을 때 희란 씨가 보관하고 있던 제 마력을 넘겨주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죠. 희란 씨, 혹시 ‘연결’로  보셨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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