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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화 〉탐식마(貪食魔) (202/429)



〈 202화 〉탐식마(貪食魔)

승하는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조금 거친 숨을 가다듬으며 방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뒤로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 희란과 류 현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화련이 뒤따랐다.  현은 승하가 침대 옆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칼 좀 휘두르고 왔어. 잡생각 정리  하려고.”

 말에 류 현은 승하의 허리춤을 살폈지만 검은 없었다. 승하는 류 현의 시선을 눈치채고 너스레를 떨었다.


“걱정 마, 병실에 칼 차고 들어올 정도로 멘탈 나간 건 아니니까. 그랬어도 쟤가 길길이 날뛰면서  뺏어 갔겠지만.”
“왜 날 걸고 넘어져요?”

화련이 곧바로 반발하고 나섰지만, 평소처럼 날카로운 목소리는 아니었다. 화련의 반응에 승하도 빙글빙글 웃고 있었으나 평소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웃음이 눈에 자꾸만 밟혔다. 류 현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정 힘드시면 차라리 내일로...”
“아니, 괜찮아. 그렇게 길게 생각할 만한 문제도 아니고.”
‘...충분히 길게 생각할만한 문제잖아.’

승하의 대꾸에 기껏 내렸던 결정에 의구심이 생길 지경이었다. 전생의 ‘예거즈’ 이야기는 이후에 따로 했어야 했던 걸까? 이미 엎질러진  앞에서  현이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자신의 설득 작업에 있어서 좋지 않게 작용할 걸 뻔히 알면서도, 하루정도 시간을 더 줘야겠다는 결심을 하는 정도였다.


“끝까지 믿어보려고 한  잘 안 됐다는 건 알았으니까.”
“......”
“이렇게 말하는 것도 웃긴 일이지. 나 잡겠다고 여기저기 손까지 벌렸다는 거  알고서도 제대로 경계조차 안하고 있었으니까. ‘예거즈’를 나온 건...경계보다는 그 꼴을 옆에서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승하 씨 전...”
“알아, 내가 ‘예거즈’한테서 완전히 등 돌리길 원했으면 이런 식으로 미적지근하게 말해주지도 않았을 거라는 거. 잘난 척 하는 것 같아서 좀 그렇지만, 걔네가  바로 칠  있을 리가 없잖아? 얘기하기 곤란한 일들이 꽤 있었을 거 같은데.”

류 현은 차마 대꾸하지 못하고 뒷머리만 긁적거렸다. 당시의  현은 제 앞가림과 세아의 병세 악화에 정신을 반쯤 빠진 상태로 사느라, 언론보도 같은 건 신경 쓸 여력이 없었지만 이후에 들려왔던 이야기들과 어쩌다 손에 들어온 자료만 봐도 깔끔한 죽음이 아니었던 건 분명했다.

당사자가 사라지는 죽음에 그런 것을 따지는 것이 우습기는 하지만, 당사자와 그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입장이 되고 나니 전혀 웃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몰랐었는데, 네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알겠더라고. 아, 내가 ‘예거즈’ 아니, 정아한테 미련이 남아있었구나 하고. 다른 길드로 떠난 사람들 빼면 걔가 마지막 초창기 멤버니까. 다들 정아를 ‘예거즈’ 창립 멤버로는 인정  해주는 분위기이긴 하지만 나한텐 그렇게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고.”


승하의 시선이  현을 떠나 천장을 향했다. 잠시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던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너 만나고 나서 맘 고쳐먹고 ‘예거즈’를 나오긴 했지만...미련을 다 접진 못했나봐. 네가 ‘예거즈’에서 날 죽였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더라. 협회랑 웨인한테서 그렇게 언질을 받았는데도...그렇게 되고 나니까 확실히 알겠더라고. 아마 ‘예거즈’에 남았든, 지금처럼 나왔든 네가 말 안 해줬으면 정아가 작정하고 달려들었을 때 맥없이 당해줬을 가능성이 크겠지.”
‘그건 전혀 아니었는데.’

전생의 구정아에게 직접 물어볼 길은 없지만, 아마 전생의 구정아는 검성을 친 것을 후회했을 테니까. 전생의 검성은 ‘예거즈’를 필두로 한 상위 길드 연합의 공격에 덤벼든 실력자 대부분을 쳐 죽이는 것으로 응했다. 중독된 상태라고는 믿기지 않는 무위였다.


그 사건 이후 한국의 상위 플레이어 수준이 못해도  단계 이상 떨어졌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검성 주살을 주도한 ‘예거즈’의 구정아가 그 때 입은 상처 때문에  달을 넘기지 못하고 죽은 것은 덤에 불과했다. 구정아 본인에게는 아니었겠지만.

‘...그 땐 아마 백혜라 씨 때문에 눈이 돌아간 거겠지. 이전에 다른 사고가 터진 게 아니라면 백혜라 씨가 옆에 붙어있었을 거고, 스트라이커랑 마법사 조합을 정면에서 상대하려는 바보가 아니면 마법사부터 치우는 게 정석이니까.’
“...자꾸 말이 이상하게 새네. 아무튼, 네가 말해준 의도를 오해할 일은 없으니까 걱정 말라고. 대놓고 경계하는 건 좀 힘들겠지만...아, 그래도 전처럼 넋 놓고 있지는 않을 거야. 어디까지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압니다. 저도 승하 씨가 ‘예거즈’를 대놓고 경계하는 기색을 내비치면 곤란하기도 하고요. 제가 최대한 승하 씨가 ‘예거즈’와 접촉하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승하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류 현의 뒤통수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누가 들으면 네가 내 매니저 같은 건 줄 알겠다. 이렇게까지 하면 우울해 있을 수도 없잖아. 알고 그러는 건지, 그냥 타고난 건지...하긴, 류 현네 누나 이야기만 들어봐도 이상할  없긴 하네.’ 류 현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가슴 위에 얹혀 있는 돌을 치우고 다른 마음의 빚을 올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전의 돌처럼 무겁진 않았지만, 뭔가 간질간질한 것이 편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런 눈으로 내 눈치 살필  없잖아. 내가 아니었으면 ‘예거즈’ 신경  필요도 없었을 텐데. 면목 없어 하는 역할까지 뺏어가면 난 뭘하라고?’

평소라면 멀쩡한 척이라도 하면서 웃어 넘겼겠지만, 거기까지 여유가 생긴 건 아니었다. 승하는 겨우 입술을 달싹여서 짧은 말을 내뱉었다.


“미안.”
“이런 걸로 미안할 게 뭐가 있습니까. 승하 씨가 잘 못한 것도 아니고.”
‘문제라면 ‘예거즈’를 못 밀어버리는 상황인  문제인거지.’

마음 같아선 문제의 여지를 남겨놓고 싶지 않았지만, 3차 ‘대소환’이 시작된 마당에 그런 짓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 ‘구정아만 파내서 일이 해결된다면  볼만 하겠지만...연합 결성 직전까지 갔는데 그렇게 될 리가 없지.’

어영부영 ‘산군’에 남아있게 된 서해란을 통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들어봐도 그다지 긍정적인 요소는 없었다. 승하가 ‘예거즈’라는 우산 밖으로 스스로 걸어 나간 덕에 마음을 놓은 이는 소수. 오히려 협회라는 더  우산 밑으로 들어간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는 이가 더 많다고 했다. ‘윗대가리만이라도 갈아버릴 수 있으면 한결 나을 것 같지만...그게 마음처럼 됐으면 전생에 진작 했지.’

류 현이라는 유망주를 넘어서 최강을 다툴만한 괴물의 등장과 네임드 몹, 블랙 던전 같은 연이은 대형사건 때문에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아서 그렇지, ‘예거즈’나 ‘터주’는 승하의 행보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것이다.


류 현이 지금 이 타이밍에 이야기를 꺼낸 것도 이 부분이 꽤나 작용한 것이다. 네임드 몹을 상대하기 시작하면 던전을 드나들 때처럼, 습격은커녕 감시조차 힘든 상태를 유지할 수 없을 테니까. 던전을 입장하는 순간부터 안고 가는 외부 세계와의 단절이라는 패널티는 플레이어들을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주기도 한다.


본격적으로 네임드 몹들을 잡기 시작하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현실세계에서 틈을 보이게  터. 류 현은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면서도 네임드 몹 사냥 직후 노출될 수밖에 없는 틈을 생각했다.


‘머리통이 달린 놈들이면 네임드 몹 잡고 뻗은 우리를 공격할 리가 없지만, 미친놈들은 어디에나 있으니...’


거기에 개인적인 감정 같은 게 섞여들면 예측이 무의미해진다. ‘그래도 협회가 있으니 정말 어지간해서는 들이받지는 않겠지.’ 류 현이 승하에게 기대하는 건 정말 최소한 수준의 경계심이었다.  정도만 가지고 있어도 지금의 승하는 중독돼서 칼침 맞는 일은 피할 수 있을 테니까.


‘지금 수준이면 그냥 둬도 혼자서 연합이고 뭐고 다 갈아 마실 것 같다만...그건 그거대로 곤란하지. 3차 ‘대소환’이 시작됐으니 싫어도 괴수랑 싸워줄 귀중한 자원들인데.’

그 생각을 하고 있자니 머리가 다시 아파왔다. 류 현의 상념을  것은 승하의 목소리였다.


“근데.”
“예. 말씀하시죠.”
“그럼 그 전생에서 너랑 나랑  번  거야? 그래서 그 때 그렇게 반응한 거고?”
“...예?”


언제 기운을 차린 것인지 히죽히죽 웃으며 승하가 물어왔다. 류 현은 의문과 황당함을 동시에 느꼈다. ‘충격이 너무 커서 잘 못 알아들은 건가? 내가 한 말 어디가 그렇게 해석할 건덕지가...’ 류 현이 품었던 의문에 대한 대답은 곧바로 튀어나왔다. 승하의 입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마스터, 저는요? 처음 저 찾아왔을 때, 제 능력 알고 있었던 거 이전에 만나서 그런 거 맞죠?”
“저, 저도...”


출발 신호를 들은 달리기 선수마냥 달려드는 화련과 희란을  손으로 저지하면서 류 현은 승하에게 눈을 흘기며 속으로만 그녀를 씹었다. ‘아니 기껏 위로 해줬더니 이러깁니까?’


승하는  현의 마음을 읽진 못했지만 그의 속내를 대강 짐작하고 히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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