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화 〉탐식마(貪食魔)
승하는 보기에는 무표정했지만, 가면 같은 무표정 뒤에 숨기고 있는 위태로움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로 여력이 없는 상태이기도 했다. 승하는 평소에 저런 표정을 잘 짓지도 않았기에, 더욱 그랬다.
‘이 정도 반응은 예상 했지만...보고 있기 좀 그렇네.’
전생에서 승하가 ‘예거즈’가 주도하는 연합에게 주살 당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건, 회귀 사실을 밝히면서 같이 밝히기로 결심한 일들 중 하나였다.
굳이 신경 써서 숨기지 않아도 대충 넘겨버릴 수 있는 사실이긴 했지만, 류 현은 밝히는 게 훨씬 이득이라고 여겼고 결심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차라리 나한테 욕을 하지.’ 그랬음에도 지금의 승하의 표정을 보고 나니, 후회가 드는 건 별 수 없었다.
“하하...그래. 그랬었구나.”
승하의 입에서 메마른 웃음과 함께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흘러가버릴 것 같은 시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완전히 무표정한 것도, 찡그린 것도 아닌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제 얼굴을 더듬었다. 뻣뻣하게 굳은 입가가 만져지자 자신의 상태가 현실로 다가왔다. ‘류 현이 본 미래에서는 정말로 실행했었구나. 더 실망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아프네. 하하...’
“표정들이 왜 그래? 지금은 나 살아 있잖아? 왜 그렇게...”
승하는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취한 것 마냥 혀가 헛도는 것이 더 말했다가는 이상한 소리를 할 것 같았다.
“승하 씨.”
“어? 나 괜찮다니까 계속...”
“한 시간 정도 쉬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일어나자마자 이렇게 말을 많이 하니 꽤 피곤하고, 원래 승하 씨 이야기까지 하고 쉬려고 했습니다. 세 분께서 생각 정리할 시간도 드려야하니까요.”
“새, 생각 정리할 필요 없다니까? 그냥 계속해도...”
“기세로 밀어붙여서 사기 쳤다는 인상을 남기기 싫어서 그럽니다. 제가 세 분 입장이었어도 동료가 무게 잔뜩 잡고 증거랍시고 이런 저런 일 거론하면, 한 번 의심해보기 전에 기세에 등 떠밀려서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것 같으니까요. 한 시간 있다가 여기로 다시 모여주시면 되겠습니다.”
류 현은 그리 말하고 더 말할 건 없다는 듯, 일으킨 몸을 다시 누이고. 돌아누워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다. 남극의 겨울에 맨몸으로 자도 멀쩡한 몸뚱이에 별 필요 없는 행동이었지만, 세 여자에게는 아주 효과가 좋았다.
승하는 류 현에게 몇 마디 더 말을 붙여보려다가 침묵에 등 떠밀려 병실을 나섰고, 화련은 돌아누운 류 현의 등을 빤히 쳐다보다가 희란을 데리고 문밖으로 향했다. 그녀들의 기척이 복도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류 현은 똑바로 누웠다.
‘그런 얼굴 보려고 말해준 건 아닌데 거 참...’
여러모로 입맛이 썼다.
두 시간 후.
류 현이 공지했던 한 시간 동안의 휴식이 거의 끝날 때쯤, 승하가 휴식시간을 한 시간 더 연장해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문자를 받고서 무슨 일인가 싶어 전화를 걸어봤지만, 승하는 받지 않았고 가부만 물어오기에 류 현은 그러라고 대꾸했다. 화련과 희란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고 나서 류 현은 하릴 없이 휴대폰이나 만지작거렸다. 침대에 대충 걸터앉아 있는 모습은, 그가 무슨 일을 하고 병원에 온 것인지 아는 자들이라면 기겁할 위태로운 모습이었지만 류 현은 자꾸 감기려는 눈을 비비적거리며 버티는 중이었다.
‘끙, 시간 한 번 더럽게 안 가는군. 웨인한테 전화 해 볼 수도 없고.’
웨인에게 연락해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지라도 듣고 싶었지만, 아직 그녀들과의 이야기도 정리 안 된 상황에서 사람을 더 끌어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에 웨인을 부르면 이 짧은 휴식도 끝이 날 테니까.
‘음...괜히 시간 더 준 건가?’
시간이 추가로 제공한 한 시간 중 10분이 채 지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는 류 현은 스리슬쩍 고개를 드는 후회에 고개를 내저었다.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내 준 시간이었다.
‘저럴만해. 충격 먹을 만도 하지. 나랑 처음 만났을 때를 기준으로 잡아도 승하를 건드릴만한 놈이 손에 꼽을 정도인데, 국내에서라면 그 시점에서는 아예 없다고 해도 무방해. 독이 든 거라고 생각도 안하고 뭘 넙죽 받아먹지 않았으면 도망이라도 쳤겠지. 그렇게 사이가 틀어지고도 ‘예거즈’에서 무슨 수작질 할 거라고 의심도 안할 정도였다는 건데...’
필요성 문제를 다 제쳐두고, 그렇게 하고 싶었다는 마음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는 건 스스로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승하한테 그 얘기 한 것만으로도 못 할 짓 한 거지.’
나름 그녀 본인을 위한 생각에 기반 했다고는 하나, 저렇게까지 침울해하는 승하를 보고나니 못할 짓을 했다는 생각만 들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어. 차라리 지금 겪어두는 게 낫다.’ 스스로 생각해도 좀 구차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으나, 류 현은 애써 그 생각을 위안 삼았다. 아주 틀린 얘기도 아니었으니까.
‘예거즈’를 나오긴 했으나, 그녀는 아직 요주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현 ‘예거즈’의 마스터 구정아와 미묘한 관계 때문에 언제든 타겟이 될 수도 있는 상태였다. 머리가 제대로 달려 있는 인간이라면 포텐셜이 거듭 폭발하고 있는 지금의 승하에게 허튼 수작을 부리는 바보짓은 하지 않겠지만, 어디 전생의 승하가 약해서 노려졌을까? 류 현은 권력을 가진 자가 더 가지기 위해서, 아직 나지도 않은 흠집조차 없애기 위해서 미친 짓을 일삼는 모습을 숱하게 봐왔다. 전생에서 검성의 죽음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진짜로 3차 ‘대소환’이 시작됐으니, 다른 때를 찾아보려고 해도 시간이 안 났을 거야. 솔직히 지금이라도 당장...’
후우, 류 현의 튀어나오려는 한탄을 한숨으로 내뱉어버리고는, 손을 깍지 껴 베개 삼아 벌렁 드러누웠다.
‘젠장, 그래도 전생이랑 똑같은 시점에 시작할 줄 알았더니.’
전생보다 2년보다 더 훨씬 빠르게 네임드 몹이 나타났을 때, 류 현은 자신이 돌아봐도 그것을 받아들이기 싫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과 함께 더 어처구니없는 기대감도 품었었다. 아주 잠깐이긴 하나, 3차 ‘대소환’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고 네임드 몹만 나타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전생과 달리 너무나도 꼬였으니까. 꼬이고 꼬인 사건들이 혹시 3차 ‘대소환’이라는 거대한 물길을 틀어놓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근거 없는 망상을 품었었다. 정말 잠깐이었지만. 그런 망상에 젖어있기에는 류 현이 마주한 현실이 녹록치 않았다.
‘정말로 망상이지. 망령이 든 거였어.’
X던전이라는 상상도 못했던 변수 등장과 함께 네임드 몹 마저 순서를 무시한 건 물론이고, 두 종류가 동시에 나타났을 때 류 현은 3차 ‘대소환’ 자체에도 뭔가 큰 변화가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우려를 거두기 힘들게 되었다. 이전처럼 행복한 망상은 아니었다. 전생의 최고위 던전이었던 화이트 던전을 상회하는 X던전의 출현과 칼리프 드 오르시아의 경고, 어떻게 봐도 전생의 것들보다 수준이 높은 네임드 몹들. 긍정적으로 생각할 요소라고는 요만큼도 없었다.
류 현은 그저 3차 ‘대소환’이 전생과 같은 시기에 터져주기만을 바랐다. 인류가 던전을 정복했니 어쩌니 하면서 최저한의 경계심도 없이 평화에 찌들어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어찌됐거나 플레이어들은 시간이 갈수록 강해지니까. 베니 에벌린 같은 말종들이 존재하니 싹수가 있는 플레이어들이 죽어나가기도 하겠지만, 그런 것까지야 류 현이 신경 쓸 수야 없는 노릇.
하지만 본 드래곤과 엘더 리치를 박살내고, 정신을 차린 그를 기다린 건 3차 ‘대소환’의 초기단계로 밖에 안 보이는 사건들이었다.
유예기간을 무시한 그린 이하의 던전들의 개방.
‘그래도 당장 반 년 정도는 별 문제 없을 거야.’
전생에도 그랬었다. 인류가 안방문 뒤에 돌아가고 있는 폭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정도로, 평화에 찌들긴 했으나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아프리카 대륙 같이 특수한 환경을 가진 경우가 아닌 곳들은 3차 ‘대소환’ 초기는 큰 문제없이 버텨내었다.
각국마다 내부적으로는 민심이 술렁거리고, 주식차트가 파형을 그리는 등 소란이 없진 않았으나, 류 현의 시각에서는 아주 평온하게 수습한 편이었다. 이미 괴수들만으로 돌아가는 생태계가 구축되었다는 소리가 나오곤 했던 아프리카 대륙은 정말 괴수들의 본진이 되었지만.
‘퍼플 급까지 열리기 시작하면 힘들어지겠지...그쯤 되면 수로 밀어붙여서 해결 볼만한 괴수가 적어. 그 얘긴 반 년 안에 독 내성을 기르는 작업은 대충 끝내 놔야한다는 거지. ‘예거즈’ 멍청이들이 승하한테 갈아 넣을 인원이 고스란히 살았으니 한국이야 전보다는 낫기야하겠지만...그 인원을 그대로 데리고 있으니 독립하겠다고 지랄하는 게 더 심해질 수도 있어.’
모든 상황을 컨트롤 할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지만, 눈뜨고 포위당하지 않기 위해서 고려해봐야 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전 생과 달리 원한을 산일은 없지만, 이전 생이라고 해서 정말 원수져서 그렇게 공격당했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류 현은 정말 원수진 상대는 아예 씨를 말려버리는 쪽이었으니까.
‘...진짜 이런 건 나한테 안 맞아. 차라리 그대로 기세로 밀어붙여서 믿게 만들고 같이 고민해달라고 할 걸 그랬나?’ 오죽하면 화련과 희란에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준 게 후회가 될 지경이었다. 근거 없는 믿음일지 모르나, 류 현은 그녀들이 생각을 정리하고 온다고 해서 팀을 나가거나 하진 않을 거라고 은연중에 확신하고 있는 상태였다.
생각할 시간을 준 건 그렇게 기세로 밀어붙이는 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신뢰를 유지하기 힘든 방식이라고, 동료를 대하는 방식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러다가 싫다고 하면 머리 깨지는 거지. 멍청이.’
쉴 새 없이 자신을 향한 불평이 터져 나왔지만 류 현은 휴대폰 화면에 끼적끼적 메모를 해두는 중이었다.
똑똑- 병실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류 현이 대꾸했다.
“들어오시죠.”
병실문이 밀려나며 세 여자가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화련과 희란은 졸린지 눈을 연신 비비적거리고 있었고, 승하는 뭘 한 것인지 땀에 흠뻑 젖은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