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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화 〉탐식마(貪食魔) (200/429)



〈 200화 〉탐식마(貪食魔)

“왜 하필 지금이에요? 여태껏 숨긴 채로 잘 해오셨잖아요? 아, 비꼬는 거 아니니까 오해 안 하셨으면 해요.”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같은 정적이 내리깔렸다. 눈치 없이  현을 죽였다는 괴수에 관심을 보인 승하도,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간 것처럼 과할 정도로 눈치를 살피던 희란도 숨소리조차 죽인 채 류 현과 화련을 번갈아 봤다.

류 현의 표정은 평온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화련을 발언을 짐작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류 현의 얼굴에서 동요의 기색을 읽을  없었다.

그에 비해 발언의 주인인 화련은 마른 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어차피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했어. 이런 걸 희란이한테 시킬 수는 없잖아?’ 자신이 내뱉어 놓고 곧바로 후회하는 꼴이 스스로도 웃겼지만, 화련은 웃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기분 나빠할 여지가 넘쳤으니까. 아주 조금만조금만 비뚜름하게 접근해도 당장 병실을 박차고 나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류 현이 턱을 쓰다듬기 위해서 손을 들어 올렸을 때 화련이 눈에 띄게 몸을  것도 그 때문이었다.

류 현은 거뭇거뭇한 수준이 아니라 조금만 있으면 손에 잡힐 정도로 수염이 자란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골랐다. 다른 이들은 그것을 화를 삭이는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만,  현은 적당한 말을 고르기 위해서 고민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이윽고 류 현의 입이 열렸을 때, 모두가 시선으로 구멍을 낼 기세로 그의 입을 바라봤다.

“이해합니다. 여태껏 이 사실을 숨기고 팀을 운영한 것도 사실이고,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숨기지 못한 것도 사실이니까요.”
“저는 그게 나빴다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예, 정말로 의구심이 들어서 물어보신 거겠지요. 아니라면 이렇게 어렵게 물으실 필요도 없이 어떻게 이럴  있냐고만 하셔도 저는 딱히 할 말이 없으니까요. 화련 씨 입장에서는 이렇게 어렵게 갈 이유가 없다는 것도, 그런 의도가 없으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전 그렇게 몰아붙일 생각은 없어요. 전혀요.”


거듭 부정하는 화련을 보며  현은 웃음을 삼켰다. 뭔가 가슴한 구석이 간질간질한 것이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기분이었다. ‘솔직히 욕 한 바가지 퍼부어도 딱히 할 말 없는데.’

 현이 회귀 사실을 숨긴 것이 큰 죄 같은 건 아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논리에 딱딱 맞춰서 움직이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그도 알았다. 서로 등을 맡기는 동료관계에 있어서 비밀은 있어서 좋을 게 없고, 있다면 아주 모르게 완벽하게 숨기는 게 제일인 법.

하지만  현은  자신도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거짓말과 뭔가를 숨기는 데 파멸적으로 재능이 없었고, 팀을 운영하면서 류 현은 점점 더 사실을 밝히는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하고 넘어가주는 모습과 점점 알던 것과 다른 형태로 다가오는 미래가 그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결국 류 현은 사실을 밝힐 시기를 가늠했고, 본 드래곤 대책반을 꾸리면서 내건 공약은 하루 이틀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현은 네임드 몹이라는 ‘대소환’의 틀에서 벗어난 괴물의 존재야 말로 자신만이 기억하고 있는 일들의 증거로 삼을 수 있다고 여겼다.

‘...같이 목숨 걸어줄 사람들한테 숨길만한 대단한 비밀도 아니니까.’ 가장 큰 이유라면 이것이겠지만.


“왜 지금이냐...지금 말고는 증명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까도 말씀 드렸다시피, 제가 알고 있는 미래의 일들은 별 쓸모가 없어진 상태입니다. 포션 레시피나, 아티펙트가 출토되는 던전 위치 같은 것들에 대한 정보는 여전합니다만, 누가 죽고, 누가 뜨고, 어떤 괴수가 나타나고 하는 것들은 벌써 제가 아는 미래와 달라진 상태거든요.”
“혹시 포션 레시피 예시 같은  없나요? 아, 의심하는 게 아니라...”
“당연히 말씀드릴 생각이었습니다.  분께 알려드린 건...송장목 진액 해독 레시피가 있겠군요. 원래라면 이 때쯤에 발견되는 레시피였습니다. 배포도 협회에서 주도적으로 한 게 아니라, 레시피 개발자 중 한 명이 폭로한 거였죠. 제 기준으로 전생에서는요.”

땅위에서 괴상한 비린내와 싸우며 송장목에서 피 같은 진액을 뽑아낸 경험을 떠올린 화련은 아, 하고 소리를 내었다. 그 옆에서는 희란이 립싱크를 하는 것처럼 화련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해독한 진액만 얻어먹은 승하는 고개만 갸웃했다.


‘맞아, 그 때 협회 데이터베이스에 별다른 정보도 없었지. 마스터가 해독 레시피를 넘기고 나서 갱신 엄청 됐었지. 살살이 풀은 아예 협회 데이터베이스에 없었고. 살살이 풀을 협회에 넘길 때 웨인 크로이츠의 반응을 봐선 비공식 데이터베이스에도 등록  되어 있었던  확실해.’

협회의 데이터베이스에 제대로 기록도 되어있지 않았던 희귀괴수의 해독 레시피를 어떻게 알았나 싶었는데, 이런 뒷이야기가 있었을 줄이야.

“서해란 씨와 거래한 마나 포션 레시피도 제가 넘길 것도 없이, 태양 그룹에서 나중에 자체적으로 개발하는 레시피  하나였습니다. 살살이 꽃은 레시피라고  것도 없지만, 그 던전에 그것들이 자란다는 사실 자체가 미래에서 얻은 정보였죠.”


류 현은 미래라는 부분에서 입안이 영 꺼끌한 기분이 들었지만, 다른 적당한 표현이 떠오르질 않으니 별 수 없었다. ‘이미 많이 바뀌었잖아. 미래라고 말한다고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고.’ 류 현은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말을 이었다.

“사실 제 목적은 살살이 풀 보다는 그 안에 들어앉아 있던  드래곤들이었지만요. 살살이 풀이 군락지가 그렇게 번성해 있을 줄은 저도 몰랐었습니다. 거길 털었던 ‘예거즈’에서 남긴 기록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었거든요. 아마 털어먹을 만큼 털어먹고  싹 씻은 거겠죠.”
“살살이 풀이 아니라, 샌 드래곤이 목적이었다구요?”

이런 상황에서 그런 거짓말을 할 리가 없지만 화련은 고개가 절로 기울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본 살살이 풀의 효능은 이걸 왜 협회에 나눠줬나 싶을 정도로 말이 안 되었다.  으깬 살살이 풀에 송장목 진액 같은  섞어서 살이 떨어져나간 부위에 붙이면 그대로 하나가 되는 것처럼 살이 돋아났다. 체력 소비 같은 건 거의 없는 수준이었고, 인위적으로 신체부위를 복구할 때 드는 위화감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적었다.

“예, 본 드래곤을 상대할 ‘송곳’을 만들려고 그 던전을 선점한 거였습니다. 샌 드래곤 사체를 그렇게 많이, 꾸준하게 얻을  있는 던전이 국내에서 거기 말고는 없거든요.”
“‘송곳’ 그거 꼭 샌 드래곤이어야 했어? 다른 괜찮은 소재도 많잖아.  드래곤이 특별히 내구성이 좋은 놈도 아닌데.”
“그거야 본 드래곤이 샌 드래곤을 기반으로 만든 놈이라서 그랬습니다. 전생의 ‘예거즈’ 전투 기록에 그렇게 나와 있었거든요.   놈들이 동시에 두  나왔을 때는 이거 헛짓거리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지만요.”
“‘예거즈’...?”

류 현의 입에서 ‘예거즈’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움찔하던 승하는 이번에는 그냥 넘기지 못하고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러고도 류 현의 눈치를 살폈지만, 류 현은 숨길 생각은 없었다. 전생 이야기를 하다보면 ‘예거즈’와 승하의 관계가 어떻게 끝났는지도 말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입을 연 것이니까.


“첫 번째 네임드 몹이었던 본 드래곤 타쿨란은 ‘예거즈’에서 사냥했었습니다.   저는 던전에 틀어박혀 있느라, 놈이 소멸되기 직전에 화면으로나 놈을 구경했었죠. 그 ‘예거즈’의 기록에 타쿨란에 대한 정보가 이것저것 적혀있었는데, 놈의 골격구조가 샌 드래곤을 덩치만 키운 수준이라더군요. 경추나 두개골은 자연 상태보다 더 두껍다는 기록도 있긴 했습니다만, 샌 드래곤 뼈로 만든 장비를 못 밀어냈다는 기록이 더 결정적이었죠.”
“어, 음...류 현. 물어보면 련이가 화낼지도 모르지만 내가 진짜 물어보고 싶은  딱 하나 있거든?”


승하가 말을 꺼내자마자 화련이 눈을 흘겼지만, 승하는 그것을 애써 외면하며 말을 이었다. 그녀는 류 현이 ‘예거즈’라는 이름을 꺼낼 때부터 외면하기 힘든 불길함을 느끼고 있었다.  현이 말하는 ‘예거즈’에는 마치 승하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했다.  현이 말하는 현생에서처럼 그를 따라서 ‘예거즈’를 나온 것일까? 아니면 나와서 다른 팀에 몸을 담근 것일까?

‘...그런 게 아니야.’ 그녀의 직감이 가정들을 모두 부정했다.  직감으로 답을 찍어볼 수도 있었지만 승하는 그것조차 꺼려졌다. 정말로 생각하기 싫은 결론에 도달할 것만 같았다.

답을 내어줄 수 있는 이를 앞에 두고, 혼자서 망상의 나래를 펼치는  자신답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생각과는 반대로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뭘 물어보시고 싶으신 건지...알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전하게 돼서 유감입니다만,   승하 씨는 ‘예거즈’에 없었습니다. 정확히는 그 시기에...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승하에게 눈을 흘기며 한 마디 내쏘려던 화련은 거짓말처럼 눈가를 누그러뜨리고, 승하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승하의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승하는 표정이 지워진 얼굴로 재차 물었다.


“던전에서?”
“아닙니다.”
“그럼 베니 에벌린 같은 놈들한테 당하기라도 한 거야?”
“...아니요.”
“그럼?”


류 현은 터져 나오는 한 숨을 참지 못하고  내쉬었다. 그 한 숨에 화련과 희란이 어깨를 떨었다. 그녀들은 승하의 표정을 계속 살폈지만, 승하는 표정 없는 얼굴을 고수하고 있을 뿐이었다.

“제가 기억하는 전생에서 승하 씨는, 검성은. ‘예거즈’와 ‘산군’, ‘터주’ 외의 유력길드 연합에 주살 당했었습니다. ‘예거즈’가 검성을 중독 시켰고, 연합이 차륜전을 펼쳐서 천천히 말려죽인 뒤에 ‘예거즈’가 마무리를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류 현은 자신의 죄를 고백한 사람의 기분을 십분 이해할 것 같은 기분 속에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고개를 들어 승하의 얼굴을 보니, 표정 없는  얼굴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운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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