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화 〉탐식마(貪食魔)
류 현은 반쯤 넋이 나갔음에도 세 쌍의 시선이 자신에게 고정되어있다는 사실이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그것을 티낼 정도로 동요하진 않았다. 그녀들이 자신을 똑바로 마주보고 있지 못하다는 것도 꽤 크게 한 몫 거들었다. 아무리 류 현이라도 그런 말을 던져놓고, 세 명의 시선과 마주하면서 아무렇지 않아 하는 건 무리였다.
마구 동공지진을 일으키고 있는 세 여자는 시선은 류 현을 향해 있었지만, 그저 방향만 향해 있을 뿐 방금 전 같이 따끔따끔한 느낌은 없었다. 류 현은 셋 중에 희란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희란은 나머지 둘과 마찬가지로 꽤 혼란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정말로 ‘연결’ 때문에 감으로 그렇게 행동한 건가 보네. 다행...이라고 해야겠지.’
희란의 반응은 혹시나 하고 여러 가능성을 고려했던 류 현의 불안감을 종식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연결’로 대체 뭘 엿 본거지? 전생에서 ‘링커’는 별 다른 말이 없었는데?’
가지고 있었던 가정 중 하나가 확실한 사실로 밝혀지자, 그것대로 다시 골머리가 아파오긴 했으나 류 현은 그것을 옆으로 미뤄두고 화련과 승하의 얼굴을 곁눈질하기 시작했다. 희란이 어떻게 그런 대처를 했고, 어디까지 봤는지는 나중에 물어도 늦지 않았다.
넋이 빠져있던 화련이 제 머리를 몇 번 헤집더니, 갑자기 들숨을 토해내는 것처럼 내쉬었다. 놀란 희란이 등을 쓸어주려고 했으나 화련이 손을 내저었다.
“눈 뜨자마자 이런 소리 하실 줄 몰랐네. 혹시 사람 놀란 표정 보는 게 취미인 뭐 그런 거에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지금이 아니면 곤란해서 그렇지요.”
눈을 흘기는 화련의 눈에는 평소와는 달리 별 힘이 없어보였다. 눈가에 내려앉은 다크써클 때문에 날카로운 느낌보다는 측은함이 느껴졌다. 정말로 힘이 풀린 것인지, 화련은 옆에 자리하고 있던 희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진짜 모르겠다.” 화련이 그리 중얼거리는 동안 생각을 끝낸 승하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네가 이런 일을 겪어봤다고? 그 아까...”
“예, 3차 ‘대소환’이요.”
“정말로?”
“예.”
“...진짜? 거짓말 하는 거 아니지?”
“제가 왜 그런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좀 더 그럴 듯한 걸로 했겠죠.”
아니, 너 거짓말 엄청 못하잖아. 그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승하는 그것을 한숨과 함께 집어삼켰다. 큰 결심을 하고 말을 내뱉은 게 분명해 보이는데, 그런 식으로 초치는 건 아니다 싶었다.
“어, 음. 이렇게 물어보면 기분 나빠할 거 같은데, 정말 확실히 해야 하는 거니까...너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는 거 맞지? 막 방금 깨서 정신이 없다거나...”
류 현은 승하의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피식 웃었다. 정말로 그렇다면 제정신인 아닌 자신이 어떻게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알겠는가. 승하가 이렇게 놀라는 것도 크게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류 현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예, 세 분께서 듣기에는 제가 미래에서 왔다고 말하는 걸로 들리셨겠죠.”
“...아니야?”
“정확히 말하자면 좀 다릅니다. 미래에서 건너온 건 기억뿐이거든요. 미래라고 지칭하기도 조금 그렇고, 거기다가 전 한 번 죽었으니까요. 뭐 기억 자체도 이제와선 큰 의미가 없어졌지만요.”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류 현은 승하의 물음에 바로 대꾸하는 대신 거의 드러누워 있던 몸을 상반신만 일으켰다. 그 모습에 희란이 어찌할 줄 모르며 손을 뻗었다가, 류 현의 제지에 내뻗는 걸 멈추었다. 등을 기대고 앉은 류 현은 승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까 보여주셨던 그 영상 좀 다시 틀어주시겠습니까?”
“어? 어어. 잠깐만.”
승하는 보기 드물게 매우 허둥대며 몇 번이고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휴대폰 화면을 두드리다가 갑자기 손이 미끌어지거나 하는 모습은 꽤나 우스꽝스러웠지만, 류 현은 잠자코 기다렸다. 승하는 몇 번 실패한 끝에 류 현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화면에는 에펠탑 위에 내려앉은 와이번이 홰를 치는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류 현은 영상에는 눈길을 주지 않고, 화면을 두드리며 말했다.
“이렇게 괴수들이 유예기간도 무시하고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건 제가 한 번 이미 겪었던 일입니다. 하위 던전이 유예기간 없이 괴수를 쏟아내는 현상을 확인한 후에 사람들이 3차 ‘대소환’이라고 이름을 붙였죠. 그러니까, 제 기준으로는 전생에서 말입니다.”
전생이라는 말에 세 여자의 미간이 다시금 동시에 꿈틀거렸다. 앞에서 언급한 이야기에서 충분히 유추해낼 수 있는 사실이긴 했으나, 직접 입으로 듣는 건 또 다른 느낌이었다. 거리감의 실체를 두 눈으로 확인한 그런 느낌이라고 승하는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번에 사냥한 네임드 몹들은, 제가 기억하는 전생에서는 3차 ‘대소환’이 꽤 진행된 이후에 나타났다는 겁니다.”
“응?”
“말씀 드린 그대로입니다. 제가 전생에서 3차 ‘대소환’을 한 번 겪기는 했는데, 지금의 상황과는 많이 다릅니다. 제 기준에서는 이번 생의 3차 ‘대소환’이 굉장히 이상하다고 해야겠군요. 일이 벌어지는 순서도, 네임드 몹의 질도, 숫자도 차이가 크거든요.”
“자, 잠깐만요. 마스터. 잠깐만...숨 좀 돌리자고요. 그러니까...한 번 죽었다고요?”
희란에게 기댄 상태로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던 화련이 손을 내저으며 끼어들어 왔다. 그녀는 무서운 것이라도 본 것처럼 조금 질린 얼굴이었다. 딱 붙어있는 희란 또한 별로 다르진 않았다. 류 현은 최대한 무덤덤한 표정을 가장하며 대꾸했다.
“예, 한 번 제가 상대한 마지막 네임드 몹을 사냥하고 놈의 독에 당해서 거의 다 죽은 상태나 다름없었으니, 죽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죽었을 거라고 생각한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에요?”
“정신을 놓자마자 월세 방으로 돌아와 있었거든요. 제 입장에서는 10년 전으로 돌아온 거였고, 이렇게 말하자니 좀 웃긴데 전 제 죽음을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까요.”
“시, 십년이요?”
평소에는 반만 뜨인 채로 어찌 보면 졸려 보이고, 어찌 보면 소심함을 표현하는 것 같은 희란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희란의 그런 반응을 보고 류 현은 조금 엉뚱한 생각을 품었다. ‘내가 삼십대 아저씨라는 것 때문에 놀란 걸까.’
20대 끄트머리에 아지다하카와 싸운 끝에 죽고 회귀한 후, 햇수로 5년째이니 30대 중반을 코앞에 둔 아저씨라는 말도 영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도 30대 중반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말이다. ‘차라리 배나온 30대가 나을지도.’
“어, 좀 더 자세히 얘기해주면 안 될까? 내 입장에서는 뭔가 말이 뒤죽박죽 섞여서 나오는 것 같은데...”
“당연히 그래야죠. 이야기를 좀 앞으로 되돌리죠. 제가 기억하는 전생에서의 사망 시점은 2045년 12월 말입니다. 지금 기준으로는 5년 후 미래군요. 전 그 때 29살이었고, 한 달만 더 살아있었으면 30살이 되었을 겁니다. 마지막 싸움을 끝내고, 정신을 잃고 눈을 떴을 때 2035년이었죠. 아마 백퍼센트 죽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부상도 심각했고, 마력은 바닥에, 중독은 한계까지 된 상태라서 답이 없는 상태였으니까요. 그놈 독이 워낙 지독해서 시체도 안 남았겠죠.”
“돌아온 날짜는 정확히는 2035년 10월 9일이었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29살에서 19살 시절로 되돌아온 거죠. 여기까지는 이해가십니까?”
류 현이 승하를 돌아봤지만, 승하는 그 때까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턱 건강을 걱정하게 만들 정도로 입을 쩍 벌리고, 류 현이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보다 못한 화련이 슬쩍 입을 닫아주었지만, 입으로 빠져나간 넋은 돌아오지 않는지 여전히 넋 나간 얼굴이었다. 화련은 승하의 옆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내젖고는 대신 대꾸했다.
“이해했어요. 마스터가 2045년까지 겪은 미래인이다 이거죠?”
“제 입장에서는 좀 애매한 표현이긴 합니다만, 그렇게 이해하시면 될 것 같군요.”
“그리고 괴수랑 싸우다가...”
화련은 갑자기 말문이 막힌 사람처럼 입술을 꼼질거릴 뿐 말을 잇지 못했다.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해야 하는 곤란한 입장에 놓인 사람처럼 류 현의 눈치만 살폈다. 그 뒷말을 유추하는 것이 어렵진 않았기에 류 현은 그녀의 입술의 역할을 대신해 주었다.
“예, 죽었었습니다. 이건 거의 백프로 확신합니다.”
“눈을 뜨니까, 월세 방이었고요. 마스터 입장에서는 10년 전으로 돌아온 상태로?”
“정확합니다.”
“대체 무슨 괴물이랑 붙었길래?”
류 현은 불쑥 끼어들어온 승하를 마주보며 슬쩍 신호를 보냈다. 승하가 볼 수 있도록 슬쩍 화련에게 시선을 던지는 정도로 말이다. ‘이 상황에서 꼭 그 얘기를 지금 해야겠습니까?’
하지만 흥분 상태의 승하의 눈에는 그런 노력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재차 류 현을 닦달하려던 승하는 화련의 작은 손에 얼굴이 죽 밀려나갔다.
“이 중독자가 진짜. 치고받는 이야기 하고 싶으면 좀 나중에 해요. 나중에!”
“련이 넌 궁금하지도 않아? 쟤가 5년이나 더 수련 쌓고 강해졌는데 못 이긴 괴물이 있다잖아.”
“안 궁금해요! 안 궁금해! 다 언니처럼 싸움에 환장해서 플레이어 하는 줄 알아요?”
“야, 나도 싸움에 환장한 정도는 아니거든? 그냥 수련하려면 그쪽이 효율이 좋으니까...”
승하가 억울하다는 듯이 변명 비슷한 걸 늘어놓기는 했지만, 류 현이 듣기에도 별 쓸모없는 변명이었다. 화련의 말처럼 싸움에 환장해서 그런다는 소리를 들어도 별로 억울할 것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
“일단 진정들 좀 하시죠. 승하 씨, 실망시켜드려서 죄송하지만 전생의 저랑 현생의 저는 플레이어 활동기간으로 따지면 별 차이 안 납니다. 그 때는 각성도 훨씬 늦게 했고, 본격적인 활동도 한참 있다가 시작해서, 전생의 전성기보다 지금의 제가 더 나을 겁니다. 저도 이래저래 준비를 좀 했으니까요.”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네.”
뭐가 다행이라는 것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류 현은 이해한 채 하며 고개를 몇 번 끄덕여줬다. 그리고 승하에게 눈총을 보내고 있는 화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왠지 모르게 옆에 있던 희란이 움찔하고 반응했지만,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기다리고 있던 화련이 입을 열었기에 희란에게 질문할 일도 없었다.
“음...기분 나쁘게 들으실 수도 있는 말인데, 꼭 짚고 넘어가고 싶어서....”
“그럴 일은 없다고 확신은 못하겠지만 최대한 열린 마음으로 듣겠습니다. 말씀하시죠.”
“왜 하필 지금이에요? 여태껏 숨긴 채로 잘 해오셨잖아요? 아, 비꼬는 거 아니니까 오해 안 하셨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