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화 〉탐식마(貪食魔)
“야, 너 안 움직여진다는 소리는 안 했잖아!”
“어디 손 봐요, 손 좀!”
“어, 언니 지금 못 움직이신다니까 일단은 진정 좀...”
류 현은 세 명이 떠드는 것으로 시장바닥이 재현가능하다는 것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며, 제 손을 붙들고 있는 희란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평소와는 달리 착 가라앉은 눈을 하고 있었는데, 눈 밑에 내려앉은 다크써클이 내려앉아 언뜻 보면 퀭해보였다. 승하의 말대로 지난 일주일간 몸조리는커녕, 꽤나 무리를 한 모양이었다.
류 현이 뭐라고 말하려고 입을 뗐을 때, 희란이 그것을 틀어막는 것처럼 말했다.
“일단 돌려드릴게요.”
“예...?”
류 현이 제대로 캐묻기도 전에 맞잡은 손을 통해서 희란의 대답이 밀려들어왔다.
‘이걸 왜...?’
류 현은 가슴을 틀어막고 있던 것이 뻥 뚫리는 것 같은 해방감 속에서 희란을 바라봤지만, 희란은 꽤 힘에 부치는 지 식은땀을 쏟아내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옆에 수선떨고 있던 화련이 희란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바짝 붙어왔다.
“어? 얘가 왜 이래? 희란아? 너 또 안에 터졌어?”
“아, 아니에요. 잠깐 현기증이...”
“어떻게...제 마력을 가지고 계신 겁니까?”
당황한 탓에 류 현은 말을 전혀 거르지 못했다. 대충 얼버무리려던 희란은 얼굴이 더 질려서 화련의 눈치를 살폈고, 화련은 류 현에게 무슨 뜻이냐는 시선을 보내다가 희란을 돌아봤다. 희란은 그 눈빛을 받고는 쪼그라들었다.
“마스터, 방금 그거 무슨 소리에요? 희란아? 희란아? 언니 얼굴 좀 볼래?”
“그...그게...”
“저한테 물으셔도 전 그냥 건네받은 거라...어?”
류 현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저으려다가, 정말로 내저어진 손을 보고 멈칫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꼼짝도 안하던 팔이 거짓말처럼 움직이는 것이다.
“뭐야...너 움직일 수 있네?”
“아니, 저도 어떻게 된 건지...”
승하가 맥이 풀리는 표정으로 류 현의 팔을 흔들었다. 류 현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그에 응했으나, 그 역시도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아까 그게 마력 문제 때문에 꼼짝도 못한 거였나? 그럼 희란 씨는 어떻게 안 거지?’
“희란아!”
“네? 네?”
“너 뭔가 알고 있지? 그치?”
류 현보다 빠르게 짐작을 끝낸 화련은 희란을 붙들고 짤짤 흔들었지만, 희란은 더욱더 쪼그라들며 모기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 그냥 감으로...”
“감?”
화련은 입을 벌렸다가 꾹 다물었다가, 다시 반쯤 열었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그 때도 그랬으니까 지금이라고 말해 줄 리가 없긴 하네.’
화련은 밀려드는 마력과 함께 빛이 덮쳐들 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류 현이 갑자기 미친 것처럼 엘더 리치와 본 드래곤을 말 그대로 ‘씹어 삼키고’, 마력폭발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기현상을 일으켰을 때를.
가장 먼저 반응한 건 희란이었다. 희란은 화련을 덮쳐누르고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류 현과의 ‘연결’을 통해서 마력을 미친 듯이 주변으로 흩뿌려대었다.
그러자 정말 거짓말처럼 마력과 함께 터져나오던 충격파의 기세가 확 죽었다. 희란에게서 해방되었던 화련은 류 현을 중심으로 터져 나오는 충격파를 억누르는데 온 힘을 쏟아 부었고, 다시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눈을 뜬 당일에 희란도 마침 깨어있어, 대체 그 때 왜 그랬냐고 질문을 퍼부었지만 희란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랬다는 모호한 대답뿐이었다. 진득하게 물고 늘어지려고 해도 몸 상태가 따라주질 않았고, 연달아 류 현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는 소식이 들어왔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상태가 상당히 안 좋아 보이긴 했지만, 뻗어 있다가 일어나 보면 당연하다는 듯이 혼자서 뒤처리나 다른 일을 보고 있었던 류 현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상황은 희란에게 품었던 의문조차 잊어버리게 하기 충분했다. 남극에서도 경험하긴 했으나, 그 때와 차원이 다른 불안감이 그녀의 어깨를 짓눌러 왔다.
그 때문에 화련은 정신을 차리고 엿새간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고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등, 휴식기임에도 거의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
그런 류 현이 정신을 차리고, 깨어나고서 잠깐이지만 움직이지 못했던 것이 해소되었으니 기뻐할 만 하긴 했지만 그냥 넘어가기에는 켕기는 것이 너무 많았다. ‘그 때 견뎌야한다고 중얼거린 것도 그렇고...얘 대체 얼마나 알고 있는 거지?’
화련은 그 동안 대충 구겨서 억눌러둔 의구심이 터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캐묻기가 뭐해서 알면서 묻지 않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티가 나는 일이 터지고 나니 의구심을 더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어떻게 봐도, 희란은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근데 어떻게?’
문제는 운을 떼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일단 감사인사부터 드리는 게 우선일 것 같군요. 감사드립니다. 희란 씨 아니었으면 꽤 고생했을 것 같은데...”
“아, 아뇨. 원래 마스터한테 나눠받았던 거니까요.”
‘그걸 필터로 안 거르고 품고 있었다는 게 놀랍다는 거지만.’
류 현은 의구심을 희란을 위해서 집어삼켰다. 희란이 어떻게 그 상황에서 예측을 하고 자신의 마력을 거르지도 않고 그대로 보관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지금 그 마력을 돌려줄 때라고 확신했는지 그도 궁금했지만 옆의 살벌한 시선을 느끼곤 궁금증을 접었다.
‘지금까지 나한테도 별 말 없는 게 좀 신경 쓰이지만...지금까지 침묵을 지켜줬는데 바로 이거 저거 떠들고 다니진 않겠지.’
‘저렇게 궁금해 하면서 용케 여태 별 소란이 없었단 말이지.’
류 현은 희란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화련의 옆얼굴을 한 번 힐끔 보고는 헛웃음 지었다. 정말 용케 참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련의 표정을 봐선 그녀는 당장이라도 희란을 붙들고 짤짤 흔들며 아는 걸 불라고 닦달할 것 같은 기세였다. 희란과 마찬가지로 퀭한 눈 때문에 그러다가 얼마 안 가 지쳐 드러누울 것 같았지만, 희란도 비슷한 상태였으니까.
‘어차피 이건 내가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야.’
아직 복잡한 심사가 정리되진 않았지만, 류 현은 마음을 굳혔다. ‘강림’을 폭주시키고 정신을 잃기 전, 그보다 훨씬 전에 결심을 마쳤었기에 마음을 정리하는 건 쉬웠다.
“저...”
“아, 맞다. 류 현 내가 아직 이거 안 보여줬었지. 잠깐만.”
운을 떼려던 류 현은 승하가 수선 떨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걸 왜 방금 일어난 환자한테 보여줘요! 이 여자가 진짜!”
“아니, 어차피 웨인이 얘 깨어난 거 알면 알 게 될 거잖아? 그게 아니면 일본 애들이 와서 바짓가랑이 물고 늘어질 텐데, 차라리 좀 편한 상태에서...”
“방금 전까지 못 움직였던 거 벌써 까먹었어요? 누구 과로사 시킬 일 있어요?”
승하에게 의구심 가득한 시선을 보내던 화련은 승하가 뭐하는 것인지 슬쩍 고개를 들이밀며 확인하자마자 그녀를 쪼기 시작했다. 영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은 하는지, 대꾸하는 승하의 기세가 영 시원찮았다.
“대체 뭔데 그러십니까? 일단 한 번 보기나 하죠.”
이미 말이 나온 마당에 안 된다고 하긴 힘들었는지, 화련은 뭐라고 말리진 않고 승하를 죽어라 째려보기만 했다. 승하는 화련을 눈치를 보며 류 현에게 휴대폰을 건네었다. 휴대폰에는 휴대폰으로 촬영한 것 같은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영상 속에는 사람들이 미친 듯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비명은 예사요, 울음소리도 간간히 들려왔지만 류 현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촬영자가 무슨 정신으로 그랬는지는 몰라도, 멈춰선 채로 찍고 있는 에펠탑 위에는 잔뜩 흥분한 와이번이 홰를 치며 사냥감을 고르는 모습이 들어왔다. 영상은 그 상태로 5초가량 더 나오다가 멈췄다.
“...이거 언제 찍힌 겁니까?”
“한 닷새쯤 됐나? 장소는 보면 알겠지만 프랑스 파리. 에펠탑에 와이번이 내려앉았다고 난리 나고, 때려잡는 과정까지 보도돼서 아주 난리판이었지. 이거 말고도 중국 상하이, 영국 더블린, 미국 샌디에고랑 한국에 파주. 너무 많아서 다 기억도 못하겠다. 와이번에서 라가 챔피언급 괴수들이 동시에 한두 마리도 아니고 수십 마리가 떠서 다 비상소집 상태야. 그 아랫급들도 엄청 쏟아지긴 했는데, 그것들은 개인화기 수준으로도 어떻게든 되는 수준이니까. 우리한테도 형식적으로는 비상소집이라고 연락이 오긴 했는데, 미치지 않고서야 진지하게 부를 리가 없지.”
“......”
류 현이 휴대폰을 돌려주고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빠지자, 화련은 승하에게 쏘던 눈총을 아예 대놓고 쏟아 붓기 시작했다. 그에 승하는 두 손을 들어 보이며 항복을 선언했지만, 화련은 그냥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그녀의 눈에서 글자를 읽어낼 수 있을 정도였다.
왜 환자 앞에서 그런 일 얘기를 꺼내요?
승하도 말을 꺼내놓고 아차 싶었기에 그냥 찌그러지는 쪽을 택했다. 화련이 쏘아붙이기 위해서 입을 열었을 때, 류 현이 불쑥 말했다.
“던전 레이더 확인은 해 봤답니까? 아마 기존에 걸리던 던전들이 갑자기 열렸을 것 같은데, 높아봐야 그린 던전이었을테니 기록이 없진 않을 텐데...”
류 현의 말에 모두가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류 현이 말한 내용은 웨인이 사흘 전에 말해준 그 내용이었다. 아직까지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국가 수뇌부나 협회 인사들이나 알고 있는 사실.
그린 이하의 던전들이 유예 기간조차 무시하고 마구잡이로 열리고 있다!
던전 레이더에 잡히는 반응으로 수 십, 수 백 차례 확인한 사실이었다. 막 생성된 옐로우 던전이 갑자기 괴수를 쏟아내고, 유예 기간이 한 달 가까이 남은 그린 던전이 와이번을 토해내었다. 던전이 무너지면서 내뿜는 파장은 던전 레이더에도 아주 선명하게 잡혀서, 현실에서 눈을 돌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류 현의 팀에게 비상소집 소식이 닿은 것도 이런 상황 때문이었다. 보통 상황이었다면 비상소집이 있었다는 사실도 웨인에게 들었으리라.
대중들이 알게 된다면 2차 ‘대소환’은 비할 바가 아닌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1차 ‘대소환’ 이후, 여태껏 지켜진 법칙이 예고도 없이 무너진 것이니까.
“어?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혹시 련이 니가 말해줬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좀! 마스터 방금 일어난 거 벌써 까먹었어요?”
“아니, 그게 아니면 얘가 그걸 어떻게 알아...? 류 현 너 방금 깬 거 맞아?”
류 현은 입안에서 혀를 한 번 굴렸다. 결심은 꽤 오래전에 한 것 같은데, 이상하게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어설픈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할 때보다 더.
“방금 깬 것 맞고, 제가 모를 수가 없는 일이니까 알고 있는 겁니다.”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얘 더 재워야 하는 거 아냐?”
“자기가 먼저 말 꺼내놓고 그런 소리 하면 안 찔려요?”
“에이씨, 내가 이럴 줄 알고 그랬나. 나도 좀 정신이 없어서 그랬지.”
“말이나 못 하면...”
“저...마스터가 아직 하실 말 있으신 거 같은데.”
류 현은 어수선한 분위기가 가라앉자 희란에게 슬쩍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흠흠 목을 몇 번 가다듬었다.
“다시 돌아가서, 제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상현상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 저한테는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저한테는 한 번 겪었던 일이니까요.”
류 현을 제외한 모두의 표정이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미묘하게 뒤틀렸다. 셋 중에서 그래도 가장 얼굴에 동요가 나타난 승하가 더듬더듬 물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한 번 이런 현상을 겪었습니다. 정확히는 3차 ‘대소환’이라고 해야겠군요.”
이번에는 모두가 표정 관리에 실패했는지, 입을 반쯤 벌리고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