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화 〉탐식마(貪食魔)
눈을 떠보니 낯선 천장이었다. 류 현은 눈알만 데룩데룩 굴려서 옆을 봤다.
승하가 보기만 해도 푸근해지는 햇볕아래에서 팔짱을 끼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누가 허락해준 것인지는 몰라도, 그녀의 팔 사이에는 검이 기대어져 있었다. 류 현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새삼스럽게 눈길을 빼앗겼다 라는 건 아니었다. 아직도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은 감각에 다음 행동을 취하기가 어려웠을 뿐. 류 현은 팔도, 다리도 떨어져 나간 상태에서 망망대해에 던져진 것 같은 감각 속에서 겨우겨우 자신을 추슬렀다.
‘어디지? 병원? 얼마나 지났지?’
감각의 혼란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나자, 생각의 혼란이 그를 덮쳐들었다. 그것을 정리하기도 전에, 류 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방금 전까지 별 무리 없이 시야를 밝혀주던 햇살이, 병원 특유의 냄새가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뒤집어 놓았다.
평소에 흘려듣고는 하는 백색소음이 하나하나 박자까지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여느 때와 다름없는 햇살이 눈을 찌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코끝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질 않는 병원 냄새 때문에 지난 생의 악몽까지 떠오를 지경이었다.
‘크으...’
정신을 잃기 전에 무엇이 잘 못 되었던 것일까. 왜 꼼짝도 할 수 없지? 범람하는 것처럼 덮쳐드는 감각의 파도 속에서도 류 현은 끊임없이 자문했다. 감각의 파도에 휩쓸려 나가지 않기 위해서.
그러는 동안 신음소리가 새어나가기라도 한 것인지, 순조롭게 꾸벅꾸벅 졸고 있던 승하의 목이 뻣뻣해지는가 싶더니, 그녀의 눈이 뜨였다. 성별을 가리지 않고 보는 이로 하여금, 흠칫하게 만드는 요사스러운 연보랏빛 눈이 류 현을 향했다.
“응...?”
잠에서 막 깨어서 그런 것인지, 승하는 류 현과 눈이 마주치고도 바로 상황을 파악하진 못하였다. 몇 번이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는 뭔가가 팟하고 떠올랐는지, 품에 끼고 있던 검까지 내팽개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앉아있던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뒹굴었다. 그녀는 귀신이라도 본 사람 마냥 사정없이 동공지진을 선 보였다.
“류, 류...”
“예, 접니다.”
류 현은 자신이 말을 내뱉고도 혀가 이토록 매끄럽게 돌아간다는 사실에 놀랐다. 정신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것일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괴롭히던 감각의 파도가 거짓말처럼 잦아든 것도 괴이쩍은 기분에 한 몫 보태었다.
“너, 너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아니지? 간호사를...!”
“제가 의사는 아니지만 제 몸 상태는 파악하고 있으니까. 괜히 소란 안 피우셔도 됩니다.”
거짓말이었다. 평소라면 모를까, 류 현은 지금 목 아래를 꼼짝할 수도 없었다. 마력을 움직이는 것은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상태. 아주 처음 겪어보는 일도 아니기에, 류 현은 마력을 움직여서 상태를 살피는 건 빨라도 내일이라고 결론 내렸다.
아직 상황에 따라오지 못한 승하는 캐물어 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떨떠름하게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하지만 계속 정신이 빠져있을 리는 없기에, 류 현은 승하가 이상한 점을 찾아내기 전에 질문을 퍼붓기로 했다.
“제가 몇 일만에 깨어난 겁니까? 다른 분들은요? 사냥은 성공한 겁니까?”
“자, 잠깐만. 네가 이거저거 다 궁금한 건 알겠는데, 나 생각 좀 정리하자.”
어지간히 당황한 것인지, 승하는 말까지 더듬어 가며 손을 내저었다. 넘어진 의자를 다시 세우고 그 위에 철푸덕 앉은 그녀는 멀쩡한 머리를 헤집으면서 뭐라고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디...사냥 당일이 일주일 전이니까. 너도 일주일 만에 정신 차린 거야. 그 때 난리 났던 거 생각하면...어휴. 지금 다른 애들은 병원 안이나 제공받은 숙소에서 쉬고 있어. 련이랑 희란이가 어찌나 극성맞게 굴던 지, 진짜, 내가 어떻게 걔네 침대에 밀어 넣었는지 알면...”
당황하면 말이 많아지는 성격인 걸까, 승하는 류 현이 묻지 않은 세부사정까지 주절거리다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류 현은 왜 그러냐는 눈빛을 보냈지만, 승하는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한 것인지 다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곤 류 현이 누워있는 침대로 올라왔다. 꼼짝할 수 없는 상태인 류 현은 승하가 하는 짓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런 방해 없이 류 현의 위에 올라탄 승하가 얼굴을 확 디밀었다. 그냥 멀찍이 떨어진 채로 마주해도 부담될 법한 연보랏빛 눈이 그와 똑바로 마주 보았다.
“기억 안 나?”
“다짜고짜 기억 안 나냐고 하셔도...”
“사냥 성공 했냐며. 어떻게 된 건지 기억 안 나는 거 아냐?”
“...예.”
안 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에 가깝지만. 류 현은 뒷말을 삼켰다. 해결 안 될 문제를 가지고 주변에 걱정 끼치는 취미는 없었다.
승하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류 현은 그것을 다림질해서 펴 버리고 싶다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승하가 불쑥 내뱉었다.
“그럼 그 때 웃고 한 건 대체 뭐야?”
“...제가 웃었다고요?”
“어, 나 너 그렇게 웃는 거 처음 봤는데. 기세도 그렇고, 바로 날뛰는 게 아니라 실실 웃길래 마력에 좀 취한 것 아닌가 했었는데 기억 안 난다고?”
“전혀요.”
승하와 똑같이 미간을 찌푸린 채로 머릿속을 뒤져봤지만, 나오는 건 없었다. 그의 기억은 ‘강림’에 대한 구속을 풀어헤치는 것을 기점으로 끊겨있었다. 정말 최소한의 제한을 남겨두긴 했지만, 의식이 날아갈 걸 전제로 깔아두고 한 짓이니 기억이 아예 없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었다.
“...얘를 지금 애들한테 보여도 될라나 모르겠네.”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던 승하가 그리 말하자 류 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분들한테 무슨 일 있었습니까?”
“일이라기보다도 이걸 뭐라고 해야 되나...네가 그 이상한 폭발 일으키고 나서부터 둘 다 제정신이...”
“폭발이요?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아니, 말 좀 자르지 말고. 지금 나도 피곤해서 머리가 잘 안 도는 상태거든? 중간에 흐름 끊기면 하던 말도 기억 못한다고.”
“예...”
그럼 피곤한 사람이 왜 여기서 이러고 계십니까. 류 현은 그런 물음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오는 것 같았지만 말로 내뱉진 않았다. ‘강림’을 한계 목전까지 풀어헤치고 나서 무슨 사고를 친 것 같은데, 그걸 수습하느라 피곤에 절어있는 사람을 긁을 정도로 생각이 없진 않았다.
승하가 언급한 그 폭발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에 정신이 팔린 탓도 있었다.
‘폭발? 이전엔 그런 거 없었지 않나? 목격자는 없지만 전생에서는 ‘강림’켜고 정신줄 놔도 그 비슷한 흔적조차 나온 적이 없었어. 이번 생에서는 이전보단 진전이 꽤 있긴 하지만...대체 뭐가 어떻게 바뀌었기에...승하 표정 보면 눈 뒤집어져서 주변 다 때려 부수고 그런 건 아닌 거 같긴 한데...’
머릿속을 부젓가락으로 휘휘 저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몸도 성하지 않은데 생각까지 복잡해지니, 짜증을 넘어서 누운 채로 멀미라도 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승하의 목소리는 정확하게 캐치해내었지만.
“하여튼, 다시 돌아가서. 내가 폭발 일으키고 뻗은 지 일주일 정도 지났는데 병원 퇴원할 정도로 회복된 건 웨인이랑 나뿐이야. 혜라는 내상이 크게 터져서 앞으로 최소 이 주는 꼼짝 못할 판이고, 걔 둘은 계속 돌아다녀서 아물었던 것도 터지고 있고.”
정말 피곤해서 머리가 안 도는 건 사실인지, 지극히 불친절한 설명이었다. 류 현은 가장 알고 싶었던 일에 대한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팀원들에게 생각지 못한 이상이 생겼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순간까지는 그녀들은 별 달리 부상당할 만한 일이 없었다. 마력 운용을 장시간 한 탓에 자잘한 내상정도야 생길 수야 있겠지만, 그 정도는 며칠 먹고 자기만 해도 나을 수 있다.
벌떡 일어나고 싶었지만 몸이 따라주질 않자, 류 현은 눈에라도 힘을 주었다.
“두 분이 부상당하셨습니까? 얼마나 큰 데요?”
“...진짜로 기억 못 하는 모양이네. 희란이랑 련이 둘 다 그 폭발 억누른다고 내상 제대로 터졌어. 둘 다 아직 능력도 제대로 발휘 못 하는 상태고.”
“......”
“아니, 그렇게 세상 다 잃은 것 같은 표정을 지을 정도는 아니거든. 내상이 꽤 크게 터진 건 맞는데, 걔네가 자꾸 돌아다녀서 안 낫고 있는 거니까. 오늘부터 회복에만 전념하면 혜라가 회복할 때쯤이면 다 나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진짜 내가 걔네 쫓아다니면서 방에 밀어 넣고 한 거 생각하면...”
“그런 표정 지은 적 없습니다.”
“아니긴, 하여간 팀장이나 팀원이나 아주 서로...”
“흰소리 그만하시고, 두 분 상태는 어떤지 대충 알 거 같으니 그 폭발 얘기나 해주시죠.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진짜 본 드래곤이랑 엘더 리치 잡긴 한 겁니까?”
히죽히죽 웃으며 류 현을 놀려먹으려던 승하는 그의 물음에 표정을 굳혔다. 아주 잠깐 뿐이었지만, 류 현은 거기서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보는 듯한 시선을 느꼈다.
‘지중해에서처럼 리치 대가리라도 씹고 히죽히죽 쪼개기라도 한 건가.’
자신이 생각해도 웃긴 추측이었지만,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정말로 그랬을 가능성이 크니까. 승하의 반응으로 봐선 그런 일도 아주 없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가 없었다.
“글쎄...내가 설명해주고 싶어도 제대로 된 설명은 안 될 거라. 그 둘한테 듣는 게 제일 확실한데. 아까도 말했지만 련이랑 희란이 상태가...”
“그런 거라면 기다려야겠네요. 그럼 괴수들 잡고 나서 사후처리 얘기는 해주실 수 있습니까?”
“그거야 못 해줄 건 없는데 너 검진부터 받아봐야 하는 거 아냐? 일주일 동안 정신 못 차렸었다니까?”
“그래도 상관은 없는데...그랬다가 그 두 분이 달려 올 거 같아서요.”
“아...맞다, 그렇겠네. 음, 그럼 이것까지만 이야기하고 내가 슬쩍 아무 의사나 불러와야겠다.”
하지만 이런 배려도 무색하게 화련과 희란은 그로부터 5분 후에 류 현의 병실로 들이닥쳐서 승하가 지난 일주일간 치러왔던 전쟁이 어떤 것인지 눈앞에서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