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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화 〉탐식마(貪食魔) (197/429)



〈 197화 〉탐식마(貪食魔)

눈을 떠보니 낯선 천장이었다. 류 현은 눈알만 데룩데룩 굴려서 옆을 봤다.

승하가 보기만 해도 푸근해지는 햇볕아래에서 팔짱을 끼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누가 허락해준 것인지는 몰라도, 그녀의 팔 사이에는 검이 기대어져 있었다. 류 현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새삼스럽게 눈길을 빼앗겼다 라는 건 아니었다. 아직도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은 감각에 다음 행동을 취하기가 어려웠을 뿐.  현은 팔도, 다리도 떨어져 나간 상태에서 망망대해에 던져진 것 같은 감각 속에서 겨우겨우 자신을 추슬렀다.

‘어디지? 병원? 얼마나 지났지?’


감각의 혼란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나자, 생각의 혼란이 그를 덮쳐들었다. 그것을 정리하기도 전에, 류 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방금 전까지  무리 없이 시야를 밝혀주던 햇살이, 병원 특유의 냄새가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뒤집어 놓았다.


평소에 흘려듣고는 하는 백색소음이 하나하나 박자까지 잡을  있을 정도로, 여느 때와 다름없는 햇살이 눈을 찌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코끝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질 않는 병원 냄새 때문에 지난 생의 악몽까지 떠오를 지경이었다.


‘크으...’


정신을 잃기 전에 무엇이 잘 못 되었던 것일까. 왜 꼼짝도 할  없지? 범람하는 것처럼 덮쳐드는 감각의 파도 속에서도  현은 끊임없이 자문했다. 감각의 파도에 휩쓸려 나가지 않기 위해서.


그러는 동안 신음소리가 새어나가기라도 한 것인지, 순조롭게 꾸벅꾸벅 졸고 있던 승하의 목이 뻣뻣해지는가 싶더니, 그녀의 눈이 뜨였다. 성별을 가리지 않고 보는 이로 하여금, 흠칫하게 만드는 요사스러운 연보랏빛 눈이 류 현을 향했다.


“응...?”


잠에서 막 깨어서 그런 것인지, 승하는 류 현과 눈이 마주치고도 바로 상황을 파악하진 못하였다. 몇 번이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는 뭔가가 팟하고 떠올랐는지, 품에 끼고 있던 검까지 내팽개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앉아있던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뒹굴었다. 그녀는 귀신이라도 본 사람 마냥 사정없이 동공지진을  보였다.


“류, 류...”
“예, 접니다.”


류 현은 자신이 말을 내뱉고도 혀가 이토록 매끄럽게 돌아간다는 사실에 놀랐다. 정신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것일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괴롭히던 감각의 파도가 거짓말처럼 잦아든 것도 괴이쩍은 기분에 한 몫 보태었다.

“너, 너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아니지? 간호사를...!”
“제가 의사는 아니지만 제  상태는 파악하고 있으니까. 괜히 소란 안 피우셔도 됩니다.”

거짓말이었다. 평소라면 모를까, 류 현은 지금  아래를 꼼짝할 수도 없었다. 마력을 움직이는 것은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상태. 아주 처음 겪어보는 일도 아니기에, 류 현은 마력을 움직여서 상태를 살피는  빨라도 내일이라고 결론 내렸다.

아직 상황에 따라오지 못한 승하는 캐물어 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떨떠름하게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하지만 계속 정신이 빠져있을 리는 없기에,  현은 승하가 이상한 점을 찾아내기 전에 질문을 퍼붓기로 했다.


“제가 몇 일만에 깨어난 겁니까? 다른 분들은요? 사냥은 성공한 겁니까?”
“자, 잠깐만. 네가 이거저거 다 궁금한 건 알겠는데, 나 생각 좀 정리하자.”


어지간히 당황한 것인지, 승하는 말까지 더듬어 가며 손을 내저었다. 넘어진 의자를 다시 세우고 그 위에 철푸덕 앉은 그녀는 멀쩡한 머리를 헤집으면서 뭐라고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디...사냥 당일이 일주일 전이니까. 너도 일주일 만에 정신 차린 거야. 그 때 난리 났던 거 생각하면...어휴. 지금 다른 애들은 병원 안이나 제공받은 숙소에서 쉬고 있어. 련이랑 희란이가 어찌나 극성맞게 굴던 지, 진짜, 내가 어떻게 걔네 침대에 밀어 넣었는지 알면...”

당황하면 말이 많아지는 성격인 걸까, 승하는 류 현이 묻지 않은 세부사정까지 주절거리다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류 현은 왜 그러냐는 눈빛을 보냈지만, 승하는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한 것인지 다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곤 류 현이 누워있는 침대로 올라왔다. 꼼짝할 수 없는 상태인 류 현은 승하가 하는 짓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런 방해 없이 류 현의 위에 올라탄 승하가 얼굴을 확 디밀었다. 그냥 멀찍이 떨어진 채로 마주해도 부담될 법한 연보랏빛 눈이 그와 똑바로 마주 보았다.


“기억 안 나?”
“다짜고짜 기억 안 나냐고 하셔도...”
“사냥 성공 했냐며. 어떻게 된 건지 기억 안 나는 거 아냐?”
“...예.”


안 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에 가깝지만. 류 현은 뒷말을 삼켰다. 해결 안 될 문제를 가지고 주변에 걱정 끼치는 취미는 없었다.


승하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류 현은 그것을 다림질해서 펴 버리고 싶다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승하가 불쑥 내뱉었다.


“그럼 그 때 웃고 한 건 대체 뭐야?”
“...제가 웃었다고요?”
“어, 나 너 그렇게 웃는 거 처음 봤는데. 기세도 그렇고, 바로 날뛰는 게 아니라 실실 웃길래 마력에  취한 것 아닌가 했었는데 기억 안 난다고?”
“전혀요.”


승하와 똑같이 미간을 찌푸린 채로 머릿속을 뒤져봤지만, 나오는 건 없었다. 그의 기억은 ‘강림’에 대한 구속을 풀어헤치는 것을 기점으로 끊겨있었다. 정말 최소한의 제한을 남겨두긴 했지만, 의식이 날아갈 걸 전제로 깔아두고 한 짓이니 기억이 아예 없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었다.


“...얘를 지금 애들한테 보여도 될라나 모르겠네.”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던 승하가 그리 말하자 류 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분들한테 무슨 일 있었습니까?”
“일이라기보다도 이걸 뭐라고 해야 되나...네가 그 이상한 폭발 일으키고 나서부터 둘 다 제정신이...”
“폭발이요?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아니,  좀 자르지 말고. 지금 나도 피곤해서 머리가 잘 안 도는 상태거든? 중간에 흐름 끊기면 하던 말도 기억 못한다고.”
“예...”

그럼 피곤한 사람이 왜 여기서 이러고 계십니까.  현은 그런 물음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오는 것 같았지만 말로 내뱉진 않았다. ‘강림’을 한계 목전까지 풀어헤치고 나서 무슨 사고를 친 것 같은데, 그걸 수습하느라 피곤에 절어있는 사람을 긁을 정도로 생각이 없진 않았다.


승하가 언급한 그 폭발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에 정신이 팔린 탓도 있었다.


‘폭발? 이전엔 그런 거 없었지 않나? 목격자는 없지만 전생에서는 ‘강림’켜고 정신줄 놔도  비슷한 흔적조차 나온 적이 없었어. 이번 생에서는 이전보단 진전이  있긴 하지만...대체 뭐가 어떻게 바뀌었기에...승하 표정 보면 눈 뒤집어져서 주변 다 때려 부수고 그런 건 아닌 거 같긴 한데...’

머릿속을 부젓가락으로 휘휘 저어지는  같은 기분이었다. 몸도 성하지 않은데 생각까지 복잡해지니, 짜증을 넘어서 누운 채로 멀미라도 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승하의 목소리는 정확하게 캐치해내었지만.

“하여튼, 다시 돌아가서. 내가 폭발 일으키고 뻗은 지 일주일 정도 지났는데 병원 퇴원할 정도로 회복된 건 웨인이랑 나뿐이야. 혜라는 내상이 크게 터져서 앞으로 최소 이 주는 꼼짝 못할 판이고,  둘은 계속 돌아다녀서 아물었던 것도 터지고 있고.”


정말 피곤해서 머리가  도는 건 사실인지, 지극히 불친절한 설명이었다. 류 현은 가장 알고 싶었던 일에 대한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팀원들에게 생각지 못한 이상이 생겼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순간까지는 그녀들은 별 달리 부상당할 만한 일이 없었다. 마력 운용을 장시간  탓에 자잘한 내상정도야 생길 수야 있겠지만, 그 정도는 며칠 먹고 자기만 해도 나을 수 있다.


벌떡 일어나고 싶었지만 몸이 따라주질 않자, 류 현은 눈에라도 힘을 주었다.

“두 분이 부상당하셨습니까? 얼마나 큰 데요?”
“...진짜로 기억 못 하는 모양이네. 희란이랑 련이  다 그 폭발 억누른다고 내상 제대로 터졌어.   아직 능력도 제대로 발휘 못 하는 상태고.”
“......”
“아니, 그렇게 세상 다 잃은 것 같은 표정을 지을 정도는 아니거든. 내상이 꽤 크게 터진 건 맞는데, 걔네가 자꾸 돌아다녀서  낫고 있는 거니까. 오늘부터 회복에만 전념하면 혜라가 회복할 때쯤이면 다 나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진짜 내가 걔네 쫓아다니면서 방에 밀어 넣고 한 거 생각하면...”
“그런 표정 지은  없습니다.”
“아니긴, 하여간 팀장이나 팀원이나 아주 서로...”
“흰소리 그만하시고, 두 분 상태는 어떤지 대충 알 거 같으니 그 폭발 얘기나 해주시죠.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진짜 본 드래곤이랑 엘더 리치 잡긴 한 겁니까?”

히죽히죽 웃으며  현을 놀려먹으려던 승하는 그의 물음에 표정을 굳혔다. 아주 잠깐 뿐이었지만, 류 현은 거기서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보는 듯한 시선을 느꼈다.


‘지중해에서처럼 리치 대가리라도 씹고 히죽히죽 쪼개기라도 한 건가.’

자신이 생각해도 웃긴 추측이었지만,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정말로 그랬을 가능성이 크니까. 승하의 반응으로 봐선 그런 일도 아주 없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가 없었다.


“글쎄...내가 설명해주고 싶어도 제대로  설명은 안 될 거라. 그 둘한테 듣는  제일 확실한데. 아까도 말했지만 련이랑 희란이 상태가...”
“그런 거라면 기다려야겠네요. 그럼 괴수들 잡고 나서 사후처리 얘기는 해주실  있습니까?”
“그거야 못 해줄 건 없는데 너 검진부터 받아봐야 하는  아냐? 일주일 동안 정신  차렸었다니까?”
“그래도 상관은 없는데...그랬다가 그 두 분이 달려 올 거 같아서요.”
“아...맞다, 그렇겠네. 음, 그럼 이것까지만 이야기하고 내가 슬쩍 아무 의사나 불러와야겠다.”

하지만 이런 배려도 무색하게 화련과 희란은 그로부터 5분 후에 류 현의 병실로 들이닥쳐서 승하가 지난 일주일간 치러왔던 전쟁이 어떤 것인지 눈앞에서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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