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96화 〉탐식마(貪食魔) (196/429)



〈 196화 〉탐식마(貪食魔)

으직- 뿌지직- 까드득-

모두가 얼어붙은 채 말을 꺼낼 엄두도 못 내고 있을 동안, 뼈가 뭉개지고 깨져나가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얼음벽을 세워서  드래곤의 브레스에 대응하던 백혜라, 본 드래곤 아가리에 삼켜지기 직전에 굴러서 위기를 모면한 웨인도, 화련이 이미 한 소리 듣고 멈춰선 걸 보고도 달려오던 승하도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으직-까드득- 뼈를 씹는 소리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붙잡혔던 엘더 리치의 남은 몸뚱이가 도로 위로 무너져 내렸다.

화련은 얼이 빠진 채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겨우 혼자 정신을 수습했다.

‘...대체 뭘 한 거지? 왜 사람이 갑자기...’


바꿔치기 된 것처럼 저렇게 바뀐 거야? 의혹을 구체화 하는 것조차 꺼려졌다. 생각을 하고나면,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런 화련의 귓가에 킥킥 웃는 소리가 울렸다. 화련만이 들은 게 아니었는지, 멍하니 굳어있던 모두가 반응했다.

웃음소리는 음산하지도, 그리 크지도 않았다.  현이 그렇게 웃은 적은 없지만, 아마도 평소 때의 류 현이 웃어도 이것과 크게 차이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마스터...?”


화련은 제 귀에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지만, 어떻게 그것을 들은 것인지 류 현이 그녀를 돌아봤다. 화련은 흠칫하고 손을 뻗어 방어를 하려다가, 자신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자기가 내뻗은 손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런 화련을 올려다보고 있던 류 현이  미소 지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 전체가 웃는 그런 미소였다. 화련은 하마터면 마법이 풀려서 추락할 뻔 했다.

씩 웃고 있는 류 현의 얼굴에서는 어떠한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흰자위와 검은 눈동자가 서로 색을 바꿔 입은 것은 꽤나 위화감이 들게 하는 모습이었으나,  외에는 류 현  자체였다.

‘당연하지, 저건 마스터라고. 마스터가 맞는데...’


화련은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미친년처럼 머리를 헤집고 싶은 기분이었다. 웃고 있는 류 현의 모습은 너무나 잘 어울리고 자연스러웠지만, 그래서  켕겼다.  현은 저런 식으로 웃지 않으니까.

‘...세아 언니 앞에서나 저 비슷하게 웃을까.’


맨날 우거지상을 하고 다니는 건 아니지만, 류 현은 잘 웃는 편도 아니었다. 웃더라도 입가만 웃거나, 눈이 웃어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웃는 게 아닌 경우가 다반사였다. 어딘가 메마른 것 같은 미소는 자주 지었어도, 저런 식으로 웃은 적은 없었다. 있다면 류세아의 앞에서나 그러겠지. 그러고 보니 류세아가 저 비슷한 식으로 웃는 것 같기도 했다.


화련은 저 미소에서 억지로라도 이상점을 찾아내기 위해 애썼다. 지금의 류 현에게서는 자신도 뭐라고 설명 못할 위화감 빼고는 이상점이라고는 없었으니까. 눈동자와 흰자위 색이 뒤바뀌는 건 사냥 도중에 몇 번 있었던 일이고, 몸 윤곽을 감싸는 것처럼 돌고 있는 저 검은 무언가는 검은 안개의 불길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화련은 류 현의 몸 윤곽을 타고 흐르고 있는 검은 것에서 어떠한 낌새도 느낄  없었다. 심지어 마력이 움직이는 것 같지도 않았다. 말이  되는 일이었다. 마력과 던전을 빼놓은 자연 상태에서는 저런 현상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거니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서 더욱 불안하고, 소름 끼쳤다.


‘‘강림’이란 것 때문인가...? 아니야, 전에 수련 할 때나 전투 시에 썼을 때 저렇진 않았잖아. 오히려...’


 무시무시했었지. 화련은 제 생각을 중간에 끊어버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앞뒤가 맞지 않았으니까.

‘강림’을 사용하는 류 현의 기세는 그야말로 괴수에 버금갈 정도다. 검은 안개와 몸을 내버리는  같은 싸움법을 보고 있으면, 그라는  알면서도 흠칫흠칫 할 정도다. 눈이 돌아가는 정도가 심해지면 승하 말고는 접근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그 승하마저 나중에 조금만 이상한 기미가 보였으면 출수부터 했을 거라고 고백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의 류 현은 그런  전혀 없었다. 기세만 보면 평범한 걸 넘어서, 깔끔하기까지 했다. 방금 전에 철갑옷 기사를 한 주먹에 때려죽이고, 엘더 리치를 씹어 삼킨 걸 보면 분명히 평소 상태는 아니었다. 평소에도 그럴 수 있다면 저렇게 중상을 넘어서, 치명상 수준까지 입을 일도 없었을 테니까.

‘왜 재생을 안 하지?’

압도적인 괴력으로 철갑기사 둘과 엘더 리치를 고꾸라뜨린 류 현의 떨어져나간 오른팔과, 내장이 쏟아지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로 푹 파인 허리는 누가 봐도 치명상이었다. 어떻게 봐도 가장 먼저 수습해야할 상처인데,  상처를 수습할 능력이 있는  현은 웃고만 있을 뿐 수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설마 아까 그거에 몰빵...’


화련이 남극에서의 경험을 떠올리곤 류 현 퍼짐설을 제기하려던  때였다. 미소를 띈 채로 화련을 돌아보고 있던 류 현이 슬쩍 무릎을 굽히더니,


슉! 덥썩! [크르아아아!] 다음 순간, 텔레포트라도 한 것 마냥  드래곤 타쿨란의 머리통 위에 서있는 게 아닌가? 본 드래곤이 뒤늦게 반응하며 몸을 뒤채려고 했으나,


슈르륵- 콰직! 퍼걱! 류 현이 하나뿐인 손을 허공으로 내뻗자, 몸 주변에서 돌고 있던 검은 것들이 나뭇가지마냥 허공으로 뻗쳐나가다가 급선회하여 본 드래곤의 몸뚱이를 꿰기 시작했다. 청뢰의 벽력도 ‘송곳’을 박아 넣고 나서야 제대로 타격이 받았던 단단하기 그지없는 그 몸뚱이가, 거짓말처럼 퍽퍽 뚫리고 뭉개져나갔다.


본 드래곤의 고통의 찬 몸부림은 아무짝에 쓸모없는 짓이었다.  현은 그 몸부림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왼손을 꿈틀거리며  드래곤의 몸통을 벌집으로 만들어갔다.


그리고  드래곤의 정수리가 꿰뚫렸을 때, 검은 것과  드래곤의 움직임이 동시에 멎었다. 화련과 팀원들은 본 드래곤의 머리통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난 것 같다는 느낌마저 받았다.

정지상태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본 드래곤의 몸뚱이를 수십 번에 걸쳐서 꿰고, 방향을 꺾어서 다시 꿰길 반복한 검은 것이 류 현의 왼손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순식간에 류 현의  배는  것 같은 타원형을 이룬 검은 것은 중앙이 벌어지더니,


콰직! 멈춰선 본 드래곤의 대가리를 씹어 삼켰다. 그것과 동시에 허공에 못 박힌 것처럼 멈춰있던 본 드래곤 타쿨란의 몸뚱이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크아아아!] 팀원들과 마찬가지로 굳어있던, 남은 본 드래곤 타칼란이 발작하듯이 기성을 토한 것도 그 순간이었다. 타칼란은 자신의 머리께에서 귀찮게 굴던 승하가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후우우- 푸화아악! 오늘만 네 번째로 내뿜는 프로스트 브레스를 토해내었다. 굳어있던 백혜라가 움직인 것도 거의 그와 동시였다. 그녀는 두 주먹을 아스팔트 도로 위에 있는 힘껏 내리쳤다.


쿠웅! 쩌저적!


허공에서 얼음이 맺히고, 풍압만으로 차체를 찌그러뜨리는 프로스트 브레스는 앞선 세 번처럼 별다른 소득을 보지 못했다. 백혜라의 주먹을 기점으로 솟아오른 얼음의 벽은 당장이라도 깨져나갈 것처럼 휘청거렸지만, 무너지거나 깨지지 않았다. 백혜라의 두 팔을 감싼 문신 같은 것들이 하얀 빛을 발했다. 당찬 기세와는 달리 그녀의 입가에는 핏물이 새어나왔다가 증발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젠장, 이게 무슨 기습 아닌 기습이야...!’


백혜라는 시야가 어지러운 와중에도 주변을 살폈지만, 가장 가깝고 가까이 있어야할 승하는  현에게 달려가다가 멈춰선 상태라 다른 이들과 거리상으로 크게 차이 나지도 않았다. 거리를 가늠해  백혜라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녀 혼자서 버티기에는 이전까지 소모된 체력과 정신력이 너무 컸다. 기습 아닌 기습에 당한 터라 전투 내내 조금씩 쌓인 내상까지 확 터진 상태.

백혜라가 중상을 감수하고 굴러서 자리를 피하려던 때였다.

슉! 콰직! 본 드래곤 타쿨란의 머리통을 집어삼킨 류 현이, 다시금 텔레포트라도 한 마냥 타칼란의 등판에 올라섰다. 류 현은 타칼란의 등판에 착지하자마자 왼손을 쫙 펼쳤고, 그 왼손을 모사하는 것처럼 검은 것들이 다섯 갈래의 갈퀴가 되었다. 하나하나가 거의 5미터에 달하는 갈퀴!


쉭! 서걱! 류 현이 그것을 장난감처럼 휘둘렀다. 결과는 더 장난같았다. 승하가  번이고 혼신의 검격을 때려 넣어서 베어도 꾸역꾸역 달라붙던 본 드래곤의 대가리가 두부처럼 썰려나갔다. 백혜라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비현실적이라는 말조차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언니는 대체 무슨 친구를 사귄 거야...?’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드래곤의 대가리를 썰어버린 갈퀴가 넓게 퍼지더니,


슈룩! 슥- 그대로 썬 본 드래곤 대가리 뼈를 집어삼켜버렸다. 아무도  광경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보고도 꿈을 꾸고 있다고들 생각하였으니까.

류 현이 소리를 내며 바닥에 착지했을 때, 그들은 꿈에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이 꿈속 일이라고 여긴 일은 사라지지 않았고, 류 현의 몸 주변에는 검은 뭔가가 흐르고 있지만 다른 이들은 가슴에 얹어진 뭔가가 내려간 느낌이었다. 그제야  현의 몸에  상처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승하는 주변을 휘돌아보고는 류 현에게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웨인은 쳐 박혀있던 건물 잔해들을 해치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화련은 그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는 방금  망설였던 것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이 거의 전속력으로 류 현을 향해서 날아갔다. 주변을 전혀 경계하지 않은 건 그 탓이었다.

“억?!”

화련은 옆구리를 후려치는 것 같은 충격에 옆을 바라봤지만, 보이는  검은 군화뿐이었다. 한 번 우당탕 구른 후에 화련은 핑핑 도는 머리를 진정시키고 나서야, 끼어든 이의 정체를 보게 되었다.  전에 이미 직감은 하고 있었다.

“희란아?  대체 왜...”
“지금...가면 안 돼요.”
“뭐?  저거 안 보여 마스터가...”
“그러니까 안 된다고요!”

팀을 이룬 이례로 희란이 고함 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고함친 희란은 어디가 어떻게 된 것인지, 코와 눈에서 핏물을 뚝뚝 쏟아내고 있었다.


화련이 생각지 못한 곳에서 들어온 공격에 벙 쪄있는 동안, 희란이 예견했던 일이 벌어졌다.


꿀렁- 꾸르륵- 쿨롱- 처음에는 아주 작은 변화였다. 류 현의 몸 윤곽을 타고 흐르던 검은 것이 어깨에서 주먹만큼 부풀었다가 다시 꺼졌다. 다음은 골반, 그 다음은 발이었다. 주먹만큼 부풀어 오르던 것이 머리통만 해지고, 머리통에서 허리보다 더 굵어졌을 때,

퍼엉! 부풀어 올랐던 검은 것이 폭발했다. 주변에 잔해를 흩뿌리며 더럽히는 그런 폭발은 아니었다. 터져 나오는 내용물이 숨이 막힐 정도로 농후한 마력 덩어리였으니까! 화련은 상황을 이해할 정신은 없었지만, 저것이 좋지 못한 징후라는 것은 바로 알아차렸다. 자신을 찍어 누르다시피 하고 있는 희란의 중얼거림이 그것을 확신으로 만들어주었다.

“견뎌야 해요...제발...견뎌요.”
“희란아...?”

류 현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마력의 폭발은 점점 커져갔다. 다 무너져가는 주변 건물들을 완전히 내려앉힐 정도로 격렬하게! 승하가 화련과 희란을 향해서 뭐라고 소리쳤지만, 이미 폭발음 때문에 사람 목소리가 전달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윽고,


콰콰콰! 마지막 빛을 발하는 것처럼 20미터 높이까지 부풀어 올랐던 검은 것이 폭발하며, 빛이 모두를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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