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화 〉탐식마(貪食魔)
“니 주특기가 도망이라는 걸 알았는데 대비를 안 했겠냐!”
엘더 리치를 덮치기 위해서 앞으로 몸을 내던진 순간, 류 현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뒤틀었다. 동작 중에 진행 방향을 급격히 틀어버리는 행위는 치명적인 틈이 될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의 감이 옳았음은 곧바로 드러났다.
푸홧! “끄윽...”
검격은 소리조차 없었다. 허리께에서 피분수를 내뿜어내며 두 어 바퀴 옆으로 구른 류 현은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몇 번이나 땅을 헛짚었다. 괴물 같은 재생능력을 가진 그도 신경계가 당하면 별 수가 없었다. 거기에 허리를 양단할 뻔했다가 실패한 검격의 주인이 가진 마력 또한, 살아있는 존재에게는 상극이라고 할 만한 그런 성질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더했다.
절그럭- 절그럭- 거의 바닥에 엎드린 채로 류 현은 엘더 리치의 그림자 속에서 자신을 공격한 존재를 올려다보았다. 판금부츠가 바닥을 딛는 소리, 판금갑옷 관절부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시대를 초월한 것처럼 온몸을 판금갑옷으로 감싼 죽음의 기사가 둘. 류 현은 말을 듣지 않는 턱을 꽉 다물었다.
“데...스 나이트.”
‘이 새끼들이 대체 왜...?’
언데드임을 과시하는 것처럼 사기와 끈적끈적한 특유의 마력을 흩뿌리고 서 있는 죽음의 기사들은, 류 현에게 재생할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달려들었다.
쉬잉! 후웅! 카가각! “젠...장!”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풀스윙을 날려대는 통에 류 현이 할 수 있는 건, 잘 붙지 않는 허리의 검상을 감싸 쥐고 뒤로 뛰는 것뿐이었다. 멀쩡한 상태라도 틈을 찾기 어려운 연계였다.
대검의 검신만 해도 2미터가 훌쩍 넘어 거의 3미터에 달하는 공성병기에 가까운 스케일을 가진 대검은 그 자체만으로도 무시무시했지만, 검신 전체에 씌워진 사기가 가득한 마력으로 인해서 산 자의 악몽이 되었다. 허리가 끊어져도, 일체의 방해가 없다는 전제하에 5분이면 수습 가능한 류 현의 재생력마저 억누를 정도로!
‘데스 나이트는 일반 몹으로 나타난 적이 없는데 이 새끼들은 왜 지금 나타난 거야? 그것도 두 마리씩이나.’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데스 나이트 두 마리의 연계는 훌륭했지만, 그가 기억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데스 나이트의 검술 수준은 아니라는 것. ‘...그랬으면 첫 일격에 두 토막 났겠지.’
위안삼기도 어려운 사실이지만, 류 현은 그것에 집중했다. 데스 나이트 둘이 합쳐도 그가 보았던 네임드 몹 데스 나이트보다는 훨씬 못하다는 사실에.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저 둘이 풀려서 난장 치면 답도 안 나온다.’
그렇다곤 해도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네임드 몹에는 못 미쳐도, 둘이 합쳐서 준 네임드 몹 수준은 되었으니까. 공격력만 놓고 따지면 그 이상이었다.
류 현은 고개를 돌리진 않았지만, 저 뒤편에서 본 드래곤 둘을 상대로 물고 늘어지고 있을 팀원들을 떠올렸다. ‘그 쪽도 오래는 못 버텨. 화력을 한 쪽에 집중했으면 본 드래곤 한 놈은 잡았겠지만...둘은 무리지. 두 마리 다는 타격 안 입고는 무리야.’
애초에 류 현은 동료들이 본 드래곤을 물고 늘어지는 동안, 극상성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이 엘더 리치를 정리하고 중간에 끼어드는 것을 전제로 계획을 짰다. 류 현은 본 드래곤 두 마리를 상대하는 건 영원히 타오르는 성을 공략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여겼고, 전생에서 ‘예거즈’가 본 드래곤의 공략했을 때 양상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성이 발을 구르고, 날고, 브레스까지 뿜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 끔찍함을 꾸며줄 뿐이다.
본 드래곤을 상대하는 입장에서 가장 큰 재난은 괴수를 상대로 이리저리 빼는 것도 아니고, 정면으로 지구전을 펼쳐야한다는 사실 그 자체다. 놈의 몸에 둘러져 있는 괴수 쉴드나 항마력은 스트라이커들의 체력 소모 속도를 급증시키고, 거대하고 뼈뿐인 몸뚱이는 대형 괴수 사냥법의 정석인 돌려 깎기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원거리에서 마법을 퍼붓는 것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브레스의 존재는 스트라이커의 소모를 강요한다. 류 현이 이렇게 극단적인 소수 정예를 고집한 건 그 때문이었다. 어중간하게 많은 마법사는 브레스의 타겟이 될 뿐이고, 어중간하게 많은 스트라이커는 서로 방해가 되기 딱 좋다. 아주 사람을 갈아 넣는 게 아니라면, 방해가 될 것이 매우 뻔했기에 류 현은 일본 정부 측의 지원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호주와 남극, 그리고 지중해에서 쌓아온 정보를 바탕으로 이들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지중해에 검은 리치성이 나타났을 때, 엘더 리치가 숨기고 있는 패는 더 없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지중해에 떠 있는 검은 리치성의 존재를 확인한 순간, 놈이 돌을 던진 것과 다름없다고 여겼다.
‘패를 다 턴 것도 아닌데 지레 짐작하다가 이 꼴이라니, 어디 가서 불평도 못하겠군.’
그리고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허리께에서 올라오는 통증이 류 현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부글거리며 재생력이 작용하고 있긴 했으나, 재생속도가 영 시원찮았다. 꾸역꾸역 스며 나오고 있는 피는 새카맣게 죽어있어, 물감을 푼 것처럼 검었다.
‘후유증으로 고생 좀 하겠군.’
후웅! 퍼억! 류 현은 자신의 생각을 자르고 들어오는 데스 나이트의 검 끝을 고개를 젖혀서 피했지만, 연달아 들어오는 발차기는 피하지 못했다. 호되게 바닥에 한 번 구른 류 현은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쉭! 스칵!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또 다른 데스 나이트의 대검이 류 현의 오른팔을 가르며 치고 들어왔다. 아니, 오른팔은 물론이고 폐까지 찢을 기세로 치고 들어온 것을, 아물고 있는 허리가 다시 벌어질 정도로 격하게 몸을 뒤튼 탓에 오른 팔에 그쳤다고 해야 할 것이다.
회심의 일격이 오른팔을 끊는 데 그친 데스 나이트는 재차 대검을 휘두르려고 하였으나,
푸화악! 잘린 류 현의 오른팔에서 검은 안개가 폭발하면서 뒤로 몸을 빼야만 했다. 류 현은 그 틈에 몸을 비척비척 일으켰다.
“마스터!”
그 새 흙먼지나 독 안개가 걷힌 것인지 화련의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다 좋은데 저런 식으로 집중력을 잃어버리곤 한단 말이지. 저러면 다른 사람들까지 산통깨지잖아.’
류 현의 예상이 옳다고 말하는 것처럼 뒤이어 쿵하는 충돌음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 들어봐도 본 드래곤이 쳐박힌 소리는 아니었다. 류 현은 돌아보지 않아도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승하가 저렇게 깔끔하게 맞아줄 리는 없으니, 웨인 씨 쪽이겠군. 몸이 단단한 편은 아니었으니까...더 물고 늘어지는 건 무리겠군. 하...깔끔하게 마무리 하긴 글렀네.’
웃을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눈앞에 벼르고 있는 데스 나이트 듀오와 그 둘 뒤에 도사리고 있는 엘더 리치의 존재에도, 류 현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자력으로 뭣 좀 해보려고 해도 더럽게 안 도와주네. 아니, 본 드래곤 두 마리로 모자라서 엘더 리치까지 떴을 때 이미 그러긴 텄는데 내가 고집 부린 건가? 아무리 네임드 몹이 아니라지만 데스 나이트까지 뜨다니 좀 봐달라고. 무슨 이지 모드에서 헬모드로 건너뛰는 것도 아니고.’
체념한 듯한 뇌까림과는 대조적으로, 류 현의 몸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검은 안개는 기세가 확 죽었던 것이 들끓는 것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그와 함께 급격히 쪼그라들었던 류 현의 감지범위 또한 다시 확장되었다.
‘...제대로 풀어헤치는 게 대체 몇 년 만이지. 승하 덕에 억제만 계속 해 와서 어느 정도일지 감도 안 잡히네. 후...반동은 줄어들었기를...’
그 변화에 엘더 리치가 몸을 움츠렸고, 데스 나이트들은 사나운 기세를 더욱 날카롭게 벼렸다. 류 현은 뒤편에서 날아들고 있는 인영을 향해서 소리쳤다.
“오지 마!”
반쯤 정신이 나가서 포지션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날아오던 화련이 허공에서 덜컥 멈췄다. 그녀는 이럴 줄은 몰랐다는 표정으로 류 현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류 현은 돌아보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오시면 저도 어떻게 될지 장담 못합니다. 자기 위치를 고수해 주십시오.”
류 현의 말소리는 크진 않았지만, 이상할 정도로 귀에 잘 꽂혔다. 화련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반박하려다가 그 다음 순간, 류 현의 몸에서 뭔가 솟아나오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뒤로 몸을 뺐다.
‘저게...대체 뭐야?’
후우우우! 그것은 검었지만, 검은 안개가 아니었다. 검은색을 띈 마력도 아니었다. 그저 검고 검은 것. 화련은 그것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 이외에는 어떻게 말해야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화련과 같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자들이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류 현의 키만큼 솟아올랐던 검은 무언가가, 모래성이 허물어지듯이 내려앉았다. 아니, 내려앉은 것이 아니라 류 현의 몸 주변으로 집약된 것이었다. 그것은 천천히 류 현의 몸 윤곽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화련은 그것에서 검은 안개에서 느낀 것과 같은 불길함이 느껴지지 않다는 점이 더욱 소름끼쳤다. 눈으로 보고는 있었으나, 저것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뻐엉! 까창! 류 현의 왼쪽 어깨가 꿈틀거린다 싶더니, 눈을 한 번 깜빡이고 나자 앞을 향해서 내뻗기를 끝낸 상태였다. 류 현이 뭘 타겟으로 잡고 있었는지는, 왼쪽에 서있던 데스 나이트가 무너지면서 알 수 있게 되었다.
가슴 부분이 류 현의 주먹의 네 배는 되는 구멍이 뚫린 데스 나이트는, 그 겉모습에 어울리는 검고 푸르스름한 피를 철철 쏟아내다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화련은 제 주먹을 들여다보느라 얼굴을 돌린 류 현의 옆모습을 보고 제 시력을 의심했다.
‘이런 상황에서 웃고 있다고...?’
류 현은 웃고 있었다.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 모를, 척 봐도 강해보이는 판금 갑옷 기사 둘과 엘더 리치를 눈앞에 둔 채로 오른팔이 떨어져 나가고, 허리가 거의 반 정도 패인 상태의 류 현은 웃고 있었다. 방금 하나가 쓰러지긴 했으나, 웃을 상황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그의 눈은 이미 흰자위와 검은 눈동자가 서로 뒤바뀐 상태여서 더욱 이질적으로 보였다.
전투 중에 감정표현을 억제하는 걸 꽤 강조하는 편인 그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노골적인 웃음이었다.
‘아니...아니야. 저건 마스터가 아니라...’
푸화악! 쩌엉! 화련이 고개를 내저으며 자신의 추측을 부정하는 생각을 부정하는, 혼란에 빠져있을 때 엘더 리치는 그녀보다 훨씬 이성적으로 움직였다. 류 현의 머리통에 냉기마법을 조준한 엘더 리치는, 마법이 발동되기도 전에 격리장을 펼쳤다. 격리장에 끼인 상대가 움직이면 공간에 끼여서 몸이 잘려나가는 수법으로, 멧돼지처럼 달려드는 놈들에게 아주 제격인 수법이었다.
하지만,
투드득- 파창! 끼기긱! 카앙! 류 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였다. 머리를 뒤덮은 냉기덩어리는 왼손으로 뜯어내었고, 왼쪽 가슴을 가로질러서 오른쪽 골반까지 이르는 범위의 격리장은 손을 쓰지도 않고 그냥 몸을 뒤트는 것으로 깨버렸다. 아무런 느낌이 없는 건 아닌지, 류 현은 가슴께를 몇 번 긁적거렸다.
엘더 리치는 당황하는 것보다 데스 나이트를 돌격시킴과 동시에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세 가지 마법을 이용한 다중 공명을 일으킬 작정이었다. 구우웅! 류 현이 궁금해 했던 엘더 리치가 꽁꽁 숨겨온 자신의 마법 반지들이 불을 내뿜었다.
콰직! 뿌지직! 짜자악! 데스 나이트는 일합조차 버티지 못했다.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류 현의 손아귀에 한 팔이 잡혀, 그대로 반으로 찢겼다. 데스 나이트 정도 되는 언데드에게는 치명상까지는 안 되는 타격이었으나, 데스 나이트는 그대로 일어서지 못하고 천천히 재가 되었다. 류 현은 그 재를 차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류 현을 겨냥한 엘더 리치의 손가락이 뒤로 젖혀진 건 그 때였다.
빠드득! 빠드득! 구오오! 콰르르! 아스팔트로 뒤덮인 땅이 거짓말처럼 뒤엎어지며 일어났다. 그리고 그 안에서 뼈밖에 남지 않은 팔들이 솟아나왔다. 그 팔들 중 몇몇은 손아귀에 검은 불꽃을, 또 어떤 것은 데스 나이트가 쥐고 있던 검과 동일한 검을, 어떤 것은 붉은 녹이 잔뜩 슨 정을 쥐고 있었다.
검은 불꽃을 쥐고 있는 손이, 검은 불꽃을 던지는 것으로 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을 든 것은 그것을 찌르고, 대검을 쥔 손은 데스 나이트에 버금갈 속도로 그것을 휘둘렀다. 벽을 이룬 땅은 그것으로 만족할 생각이 없는지, 류 현을 덮쳐들었다.
사령술과 저주, 지옥 불꽃을 뒤섞은 일명 통곡의 벽! 저 벽에 매달린 팔 하나하나가 데스 나이트에 필적하는 완력을 가지고 있으며, 손에 닿는 즉시 몸이 썩어 허물어지는 물리적 저주와 그것을 몇 번이고 빠르게 반복 재생하는 정신적 저주가 적을 집어삼킬 것이다. 지옥 불꽃은 본 드래곤의 프로스트 브레스 마저 한 수 접고 들어 가야하는 엘더 리치 공격 마법의 최고봉!
벽이 문제없이 일어나고, 류 현을 덮쳐드는 것까지 확인한 엘더 리치는 승리를 확신하진 않았지만, 여유를 되찾고 아직 재가 되지 않은 데스 나이트를 돌보기 시작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런 괴물에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전위가 필요하다. 단 몇 초만이라도 벌어줄 고기방패가.
그러나,
쿠웅! 쿠웅! 콰르르! 단 두 번의 주먹질로 통곡의 벽을 파훼한 류 현 앞에서 엘더 리치가 다시 일으킨 데스 나이트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공간을 뛰어넘는 것처럼 순식간에 10미터 거리를 좁힌 류 현은 데스 나이트를 손날로 가볍게 두 동강을 내고는,
쩌억- 콰직! 엘더 리치의 대가리를 그대로 씹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