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화 〉탐식마(貪食魔)
승하는 눈을 감은 채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을 만끽했다. ‘예거즈’에서 한창 날뛸 때도 거의 해본 적 없는 일이라서 몰랐었는데, 중국에서 자유낙하를 한 번 해본 이후로 그녀는 이런 해방감에 매료된 상태였다. 화련이 자신을 띄워줄 때 걸어주는 비행형 버프인 부정형 반전 뭐시기 공간인지 뭔지를 경험하면서, 그 생각은 더욱 굳어진 상태였다.
그녀는 점점 거세어지는 바람을 느끼면서 이번 사태가 종료되면 화련에게 뭐라도 찔러주고 하루정도 한 없이 이러고 놀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감았던 눈을 떴다. 본 드래곤 두 마리 중 큰 쪽인 타쿨란의 이름이 거의 코앞 수준까지 가까워진 상태였다. 승하는 한가롭게 바람을 만끽하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마력을, 적의를 날카롭게 벼렸다.
그리고 칼끝 같이 벼려진 감각에 뭔가가 걸려들었다.
스칵! 화르륵! 검 끝에 느껴진 뭔가를 가르는 것 같은 감각이 잦아들기도 전에, 양옆에서 불꽃이 폭발했다. 하지만 승하의 주변으로 번져 들어오진 못했다. 화련이 몸 주변에 쳐놓은 비행용 버프 덕이었다. 승하는 그대로 본 드래곤 타쿨란의 등판에 착지하였다.
‘6번이랑 7번사이라고 했었지? 어디보자 넷, 다섯, 여섯...여기다.’
쉭! 카가각! 승하는 제 허리만한 폭을 가진, 혈조도 파이지 않은 대검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발판이 시원치 않아 체중을 제대로 실지 못했지만, 연골같이 생긴 것을 베어내기에는 충분했다.
[크륵?!] 승하의 베기에 무슨 느낌을 받았는지, 몸부림치며 날아오르려던 본 드래곤의 움직임이 덜컥 멎었다. 고통으로 인한 경직보다는, 동작 자체가 불가능해진 느낌이었다. 승하는 그렇게 확신했다.
“이런 거 보면 누가 괴물인지 모르겠다니까.”
승하는 픽 웃으며 대검을 앞으로 추슬렀다. 류 현이 취약 부위일거라고 짚어준 것이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반응으로 봐선 언데드 괴수가 아니었다면 일격에 절명까지는 아니어도, 꽤 큰 득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괴수의 스펙이 아무리 대단해도 지금처럼 신경계에 해당되는 부분을 절단해버리면 단단하고 커다란 샌드백이 될 뿐이니까. 생명이 있는 놈이라면 이렇게 목 뒤쪽에 대한 반응이 늦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크라악!] 하지만 자신이 언데드 몹이라고 외치는 것처럼 본 드래곤은 순식간에 회복하여 기성을 토해내었다. 류 현이 그 곳을 짚어줄 때도 큰 기대는 안 하는 게 나을 것이라고 했었다. ‘송곳’을 열 자루 넘게 꽂히고도 날아다니던 놈이니, 신경계를 대신 하는 부분을 절단 해봐야 잠깐 멈칫하는 게 전부일 거라고.
‘그래도 이 정도면 난이도가 확 내려가지.’
승하는 히죽 웃으며 입술을 핥았다. 닷새간의 훈련 기간 동안 역할을 분담 받고나서 꽤나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예상보다 훨씬 수월해질 것 같았다. 일정시간 내에 죽이는 것도 아니고, 물고 늘어지기 정도라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백혜라와 둘로도 충분했다.
‘그래도 처리할 수 있으면 처리하고 합류하는 게 낫겠지. 지중해에서 7성 리치 화력 생각하면...’
승하는 그리 생각하며 슬쩍 뒤를 돌아봤다. 이미 부옇게 먼지가 일어난 그곳에는 류 현과 엘더 리치라는 놈이 맞붙고 있을 것이다. ‘그래, 저런 괴물을 혼자 감당하게 하는 건 좀 아니지.’
콰르릉! 허공을 찢어발기는 듯한 천둥소리에 승하는 앞으로 끌어당겼던 대검을 내휘둘렀다.
‘이크, 웨인한테도 지게 생겼네.’
***
[흐아아아-] 뼈밖에 남지 않은 주제에 치아가 이상할 정도로 잘 붙어있는 엘더 리치의 벌어진 입 사이로 귀곡성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어떤 플레이어든 간에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 만한 귀곡성은, 공포감을 조장하기 보다는 당혹감이 느껴졌다. 류 현은 신경 쓰지 않고 몸을 앞으로 날렸다.
후웅! 화륵! 불꽃 채찍이 그의 등판을 스치고 지나가며 엄한 맨땅을 후려쳤다. 내려앉아 있던 서리마저 순식간에 증발시키는 열기에, 류 현은 등에 불이라도 붙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엘더 리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불꽃 채찍은 지중해에서 이미 본 것이고, 7성 리치가 쓰던 마법을 그 7성 리치를 만들었을 엘더 리치가 쓰는 건 별로 놀랄 일도 아니었다. 아주 신경 쓰이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마법이야 지가 가르쳤을 수도 있으니, 그놈들 껄 쓸 수 있다고 치더라도 놈의 반응이 이상한 건 확실하지. 범위가 좁긴 하지만 기상 조작 마법을 유지하면서, 침투까지 진행하고 있는 주제에 저렇게 화력을 쏟아내는 건 날 잡아가쇼 수준이잖아?’
엘더 리치가 자신의 표정을 읽을 여유가 있다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류 현은 미간만 살짝 찌푸린 채로 고민했다.
‘날 보고도 연결을 안 끊은 것도 이상하고.’
뻐기려는 생각은 없지만, 류 현은 한 번의 접촉으로 엘더 리치에게 경각심을 충분히 심어줬다고 여기고 있었다. 리치에게 있어서 라이프 배슬에 타격을 입는 것만큼 끔찍한 일은 없다.
인간에 대한 살의 때문에 눈이 돌아간 리치마저 그런 위기를 겪고 나면, 당분간은 몸을 사린다.
그런데 눈이 안 돌아간 정도가 아니라 정보 수집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머리가 좋은 놈이라면?
거짓말 좀 보태서 류 현의 목소리만 들어도 움찔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엘더 리치는 8성이라는 유일무이한 경지뿐만 아니라, 행동마저 리치의 범위를 벗어난 놈이었다.
류 현은 엘더 리치의 발부분과 등 쪽을 슬쩍 훔쳐봤다. 그곳에는 무지개 색을 띄고 있는 해파리 촉수 같은 것들이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발 부분에 있는 것들은 지면과 연결되어 끊임없이 뭔가를 옮기고 있는 것 같았고, 등 쪽의 것들도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았다.
류 현은 저것과 똑같은 건 아니었지만,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이전 생의 엘더 리치에게서 말이다. 해당 지역에 대한 마력적 장악. 류 현은 눈앞의 엘더 리치가 행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라고 확신했다. 겉보기에는 좀 많이 다르긴 했어도, 마력의 흐름이 그 때와 판박이었으니까.
류 현이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은 두 가지였다. 저것을 그냥 뒀다간 전생에 엘더 리치 한 마리에 일본이 날아간 대참사보다 더 끔찍한 꼴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과, 전투 중에 유지하고 있을만한 행위는 아니라는 것이다.
“아직 여유가 있나본데...그럼 바쁘게 해줘야겠지.”
류 현은 말을 마치자마자 목 줄기에 힘줄과 핏줄이 돋아오를 정도로 이를 악물고 힘을 끌어올렸다.
‘강림’. 류 현은 양날검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는 그것을 풀어놓았다.
틀어막아 두었던 둑문을 연 것처럼, 아랫배 쪽에서 마력들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솟구쳤다. 그와 함께 그가 마력과 함께 억눌러 두었던 충동도 같이 솟구쳤다. 그의 손이 잘게 떨렸다.
푸화악! 정수리 부근에서 피가 솟구치는 것처럼 검은 안개가 내뿜어져나왔다. 제 좋을 대로 흩어질 것 같던 검은 안개는 있지도 않은 바람이라도 만난 것인지, 세차게 류 현의 몸 주변을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후우...”
이윽고 검은 장막이 걷힌 후 모습을 드러낸 류 현은 이전과는 다르게 투구를 벗은 판금갑옷 기사마냥, 얼굴만 드러내고 나머지 부분은 검은 안개로 꽁꽁 싸맨 상태였다. 목 부근에 뭉쳐있는 검은 안개 때문에 어찌 보면 후드만 슬쩍 뒤로 넘긴 것 같기도 하였다.
후웅! 키이이! 푸카악! 엘더 리치는 그 동안 놀고 있지 않았다. 류 현은 시야가 확보되자마자, 덮쳐드는 불꽃 채찍과 파쇄 마법, 뭔지 모를 염동력 비슷한 무형의 물리력을 마주해야만 했다. 평소라면 뒤의 두 개는 눈으로 보지 못했을 테지만, 지금이라면 엘더 리치 주변으로 모이는 마력의 흐름까지 그려낼 수 있을 정도다.
류 현은 앞으로 내달렸다. 하나라도 제대로 얻어맞으면 중상을 피하기 힘든 세 개의 마법을 향해서, 마치 몸을 내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엘더 리치의 안구의 빛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섞여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엘더 리치는 당혹스러움을 넘어서 공포감을 느껴야만 했다.
끼이이이- 파창! 뻐어억! 슈욱- 가장 먼저 닿은 파쇄마법은 류 현의 항마력과 검은 안개의 2중 장벽을 다 뚫지 못하고 틈만 낸 채로 사그라졌다.
두 번째로 도달한 창 같은 형태의 물리력은 그 틈을 뚫는데 성공하였으나, 류 현은 무형의 창이 내놓은 옆구리의 자상을 무시하고 그대로 내달렸다. 단순히 자상이라고 하고 말 수준이 아니라 거의 야구공만큼 살점이 뜯겨져나가서 안의 장기가 보일 지경이었으나, 눈동자가 이미 빨간 빛에 잡아먹힌 류 현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류 현의 정수리에 도달한 불꽃 채찍은,
치이이이익! [크아아아아!] 류 현의 머리에 닿자마자 괴성을 내지르며 괴로움을 호소하는 엘더 리치의 손에 의해서 해제되었다. 불꽃 채찍을 휘두르던 팔을 감싸 쥐며 괴로워하던 엘더 리치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으나,
콰직! 뻐억! 류 현의 라이트 훅에 이은 플라이 니킥이 들어가는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신장이 류 현의 두 배에 달하는 엘더 리치의 몸이 벼락 맞은 썩은 고목마냥 터지며 뒤로 넘어갔다.
류 현은 그대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몸을 앞으로 날렸으나,
슈슉! 바람이 빠지는 소리와 함께 엘더 리치가 10미터 떨어진 곳에 쓰러지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 상태에서 연산을 한다고? 될 대로 되라고 대충 좌표 찍는 것도 불가능 할 텐데?’
언데드 최고위몹이라는 명패는 공짜로 얻은 게 아닌지 엘더 리치가 그 사이에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지만, 류 현은 거리를 좁히기 보다는 놈이 하는 짓을 지켜보았다.
‘남극에서는 더 밀어붙였는데도 바로 텔레포트는 안 했잖아. 화련 씨도 두들겨 맞거나 하는 상태에서 공간좌표 찍고 텔레포트 하는 건 자살행위라고 했었는데. 리치라서 라이프 배슬 빼면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한 건가? 아니지, 마력이 쏠려있는 쪽이 이동 중간에 끼여서 터질 확률이 높다고 했는데?’
‘그러고 보니까 저 새끼 반지 라인업도 좀 이상한 거 같은데. 전생의 엘더 리치는 파쇄마법에 반지를 할당하진 않았었지. 그렇다고 아까 그게 7성 리치 마법보다 센 것 같지도 않은데. 그리고 저 정신 사나운 건 또 뭐야?’
류 현은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엘더 리치 머리 위를 날아다니고 있는 구슬을 노려봤다. 엘더 리치가 회오리바람이 뚫렸을 때 들여다본 그 구슬이었다. 하지만 그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던 류 현은 보이는 대로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눈구멍에 들어가면 딱 맞을 것 같은 크기의 구슬은, 대충 봐도 무시하기 힘든 사기를 풀풀 날리고 있었다. 엘더 리치씩이나 되는 놈이 꾸미겠다고 저런 걸 꺼내놓을 리는 없을 테니, 답은 뻔했다.
‘아티펙트...겠지? 근데 반지 여덟 개에 왕관까지 있는 놈이 다른 거에 손댈 여유가 있을 수가 있나? 저번에 저런 거 못 본거 같은데...아 그렇게 치면 마법 결정도 마찬가지인가. 아닌가?’
류 현이 ‘강림’탓인지 평소보다 더 안 도는 머리를 쥐어짜봤지만 마땅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엘더 리치가 손가락을 자신에게 겨냥 할 때까지도 말이다.
구우웅- 후와앙!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녹색 구름에 터져 나오더니, 순식간에 류 현의 몸을 집어삼켰다. 녹색 구름이 닿은 부분은 콘크리트마저 치이익 거리는 소리를 내며 연기를 피워 올렸다.
독 안개 마법. 피로한 상태였다고는 하나, 지중해에서 류 현에게도 어느 정도 효과를 보았던 상성이라고 해도 좋을 마법이 펼쳐진 것이다. 엘더 리치는 일말의 기대감을 품고 그 안을 꿰뚫어 볼 것처럼 안광을 빛내었으나,
퍼엉! 독 구름을 뚫고 나온 류 현으로 인해서 그 빛은 곧바로 실망의 빛이 되었다. 아주 영향이 없는 건 아닌지, 약간 안색이 파랗게 변한 류 현이 달려들며 소리쳤다.
“너 이 새끼 부하들 마법 가져다 쓰는 거 였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