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92화 〉탐식마(貪食魔) (192/429)



〈 192화 〉탐식마(貪食魔)
스칵! 콰직! 오른팔을 휘두르면 날카로운 소리가 구울을 양단했고, 왼팔을 휘두르면 묵직한 소리가 구울을 으깨놓았다. ‘인형사’ 코소 미츠에는 마력으로 잦은 실을 휘두르며 앞의 인형들을 움직였다.

제각기 워해머와 태도를 쥐고 있는 인형들은, 그녀의 손짓에 따라 파도처럼 몰려드는 빨간 구울들을 으깨고 갈라내었다. 여리여리한 모양새와는 전혀 딴판으로 그녀가 조종하는 인형들은 발군의 활약을 선보이는 중이었다. 그 주인인 미츠에의 표정은 전혀 밝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대로 진행하는 게 맞나?’


[커허-][그루룩!] 지치지도 않고 몰려드는 구울들을 베어내고, 으깨는 걸 반복하길   차례. 코소 미츠에는 체력적이나, 마력적으로 부족함을 느끼진 않았지만 정신적 피로감이 몰려드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손을 휘두르는 건 쉬지 않았지만.

아니, 멈출 수 없었다. 쐐기꼴 진형을 이루고 구울의 파도에 뛰어들었으니 대책 없이 멈췄다가는 뒤따르는 동료들이 순식간에 시체의 산에 파묻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더라도 갖춘 무장의 질이 있으니 바로 당하거나 하진 않겠지만, 그 무게에 부상은 피할 수 없을 터.


‘생각보다 훨씬 많고, 단단해. 이정도면 거의 블루 던전급이라고. 대체 어떻게 되먹은 구울이야? 아무리 블러드 오러 때문에 디버프가 들어온다지만...’


그녀와 팀이 생각한 것보다 구울들의 질이 훨씬 높았다. 하나하나는 그리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블루 던전에서 나오는 잡몹 수준이  천 마리가 몰려있으니 실력 이전에 정신적으로 위축되는  어찌할 길이 없었다.


베거나 으깨버릴  인형을 통해서 들어오는 반발을 볼 때, 구울들의 능력치가 내구도에 몰려있는  같아서 더 했다. 살점으로 만들어진 살아있는 벽을 두들기는 느낌이었다.

거기다가 팔과 다리를 무겁게 하는 블러드 오러까지, 도무지 일점돌파가 가능할 것 같지가 않았다. 대장인 자신이 이런데, 자신보다 부족한 이들은 어떠할 것인가. 코소 미츠에는 입술을 짓씹었다.

‘10분 동안 100미터는 나아갔나? 젠장, 저 빌딩까지 닿으려면  시간은 걸리겠군. 그 남자는 이럴 걸 알고 그런 소릴 한 건가?’

오죽하면 돌파 결정을 내리게 만든 그 건방진 남자의 말대로 따를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정도였다. 쐐기진은 이미 돌파력을 잃고 멈춰 섰고, 어느 부분은 꾸역꾸역 밀려들어오는 구울의 무게에 밀려서 움푹 들어간 모양새였다.

전투에 돌입한 지 30분가량이 지난데다가, 돌파를 시도하다가 막힌 꼴이니 피로감을 두  세 배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 더욱이, 괴수를 고유의 쉴드가 야금야금 항마력을 깎아먹는 것이 피로감을 더 했다. 스트라이커 위주로 데리고 오지 않았다면, 진작 진이 무너졌을 것이다. 오기로, 악으로 버티는 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지만.

‘...달랑 여섯 가지고 8성 리치를 잡겠다고?’ 구울만 해도 감당이  되는데? 그런 뒷말을 삼킨 코소 미츠에는 이를 빠득 갈았다.

‘...피해가 나선 안 돼. 스사노오 클랜이 무너지면 상위 던전 억제력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아.’


정, 재계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스사노오 클랜을 구축하는데 지대한 도움을 주었던 부친이 거듭된 당부가 귓가에 맴돌았다. 전력 보존이 최우선이다. 공명심 같은  접어두어라.

X던전 원정이 실패한 이후, 그녀의 조국은 상위 플레이어 전력을 복구는커녕 현상 유지에 급급한 상태였다. 연달아 블랙 던전이라는 새로운 최상위 던전이 등장하면서, 일이 더 골치 아프게 되었다. X던전 건으로 인한 한 상위 플레이어 전력 공백 때문에, 불편한 관계인 협회에 도움을 청해야하는 상황에서 또 다른 변수가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불운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스사노오 클랜을 필두로 플레이어 전력을 쥐어짜내어 블랙 던전 공략이라는 금자탑을 쌓자마자, 본 드래곤 두 마리와 8성 리치라는 전무후무한 괴물들이 도쿄를 쑥대밭으로 만든 것이다.

환율이 치솟은 건 말할 것도 없고, 여론도 같이 요동쳤다. 실수  번으로 상위 플레이어 전력을 말아먹고 총리도 같이 갈아치운 상황에서 일본 정부가 할  있는 건 협회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뿐이었다.

이전에 있었던 불편한 일들은 전부 잊은 듯한 일본 정부의 절박한 도움 요청에 돌아온 대답은 개인의 기자회견이었다. 류 현이라는 이름을 가진, 일본이 파견을 요청하려고 했던 본 드래곤 대책반의 대장인 그 남자는 아주 무덤덤하게 팀이 정비기간에 들어갔다고 선언했다. 일주일이 지나기 전에는 그 어떠한 움직임도 없을 거라고 그렇게 선언했다. 다른 이들이 듣기에는 불난 집을 앞에 둔 소방관의 파업선언이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비난 여론이 빗발쳤다. 일본뿐만 아니라,  드래곤이나 엘더 리치로 인해서 이미 피해를 입었던 국가나 피해를 입지 않은 국가의 시민들이 그를 부도덕함을 공격했다.


하지만 류 현은  기자회견 뒤로 어떠한 의사표명도 하지 않은 채, 말했던 그대로 휴식에 들어갔다. 일주일 간 어떤 접촉도 불가능했다. 한국 정부가 대화창구랍시고 내세운, 류 현 전담 관계자는 며칠 시달리더니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나왔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끙끙 앓던 일본 정부는 일주일 째 되는 날 추가타를 얻어맞았다.


류 현이 전담 관계자-문민호-를 통해서, 연계 훈련 때문에 적어도 닷새는 더 있어야 출동이 가능하다는 말을 전해온 것이다.

그 소식에 일본 정부 관계자들은 머리를 쥐어뜯었지만, 이 말을 폭로하거나 압력을 가하진 못했다.  드래곤과 8성 리치가 도쿄를 벗어나서 날아오르자마자 공군력을 쏟아 부었음에도, 필리핀 때 보다 못한 결과를 얻은 후였기 때문이었다. 일본 공군의 공격에 화가 났는지, 본 드래곤들이 구마모토 현까지 날아가는 동안  곳의 시를 겨울왕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거기다가 지중해에 항모 전단을 가라앉힌 검은 리치성의 선례 또한  후였다. 플레이어 투입 말고는 답이 안 나오는 괴물을 상대로, 거의 유일하게 대처가 가능한 팀의 대장을 자극하는 건 정치적 신념 문제가 아니라, 지능의 문제니까.

우파는 우파대로, 좌파는 좌파대로 내부 단속을 철저히 했다. 일본 정치계가 드물게 같은 생각과 목소리를 내는 동안 괴수들은 괴수대로 움직였다.


기세등등하게 구마모토 현까지 날아간 괴수 듀오는 시모시마 섬에 뭐에 꽂힌 것인지, 시모시마 섬의 살아 움직이는 인간들을 잡아 죽이기 시작했다.  때 이루어진 대피령에 거주 중인 시민의 2/3 이상이 목숨을 보존했지만, 모두가 그런 행운을 누릴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내의 살아있는 인간 숫자가 0이 될 때쯤, 시모시마 섬에는 역사에 없었던 거대한 회오리바람에 휩싸였다. 괴수가 일으킨 게 분명한 자연재해 아닌 자연재해에, 인류가 쌓아올린 것들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그것이 벌써 열흘도 더  일이다. 본 드래곤과 8성 리치가 열도에 상륙한지 이주 째 되던 날, 류 현이 원정대를 이끌고 일본에 입국하였다. 일본 정부 관계자들은 기뻐하면서도,  기쁨을 얼굴로 표출하지 않기 위해서 무던히 애를 쓴 직후, 다시금 표정관리에 애를 써야만 했다.  현이 유럽에서와는 달리, 대놓고 일본 측 플레이어 전력 필요 없다고 잘라 말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상위 플레이어 전력을 날려먹은 일본 입장에서는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르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가서 싸우는 것도 아니니 정부 관계자들은 어떻게든 공을 세울만한 기회를 원했다. 심각한 피해를 입긴 했어도, 잘만 하면 새로운 흐름을 주도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까.

당장 유럽만 해도 검은 리치성 공략이후 배분율을 봤을 때 유럽 측 인원이 거의 들러리 수준이었다는 건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정도인데, 얻어간 과실은 그에 걸맞은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배분 받아간 열 개도 되지 않는 라이프 배슬 파편이, 검은 리치성으로 인해서 입었던 손실을 메우고도 남는다는 소리가 공공연하게 나올 정도였다. 욕심이 나지 않을 리가 없다.

류 현이 출발을 이틀 뒤로 잡고 억지로 팀에 밀어 넣으면 돌아가 버리겠다는 식으로 나오지만 않았다면, 어떻게든 달래서 밀어 넣어보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막말로 시모시마 섬이 회오리바람에 먹히긴 했어도, 시모시마 섬은 더 죽어나갈 사람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류 현은 완강하기 그지없었고, 그가 내놓은 타협점이라고는 미끼역할 정도였다. 그것도 자신이 검은 리치성을 공략할 때처럼 고위 리치의 시선을 잡아끄는 미끼가 아니라, 구울 정도의 잡몹을 몰아가는 미끼.

한나라를 대표하는 클랜이 맡기에는 보잘 것 없는 역할임은 분명했다. ‘인형사’ 코소 미츠에는 부친의 끈덕진 설득 끝에, 참가할 것을 약속하고 그 자신이 다른 클랜원들을 설득해야 했고 지금에 이른 것이다.


‘쓸데없이 자존심 세울 때가 아니야...이런 잔챙이들에게 부상당하는 게 훨씬 큰 손해야. 젠장.’
“뒤로 물러난다! 양익은 현 위치를 고수하고, 선두가 양익을 감싸면서 빠진다.”


여기저기서 대꾸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미츠에는 먼 곳을 바라보며 이를 빠득 갈았다.

‘빌어먹을.’

같은 시각 류 현은,


[크르르르-][캬르락!] 불만을 토로하는 것처럼 캭캭 거리고 있는 본 드래곤들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본 드래곤들이 자리 잡은 5층이 조금 넘어 보이는 맨션보다 훨씬 높은 빌딩 옥상 난간에 매달려서,  현은 본 드래곤과 엘더 리치가 실랑이를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키는 대로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구울을 잘 때려잡지도 못하고. 대체 저 인간들 왜 데리고  거에요?”


뒤쪽에서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류 현은 화련을 돌아보았다. 화련은 류 현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하얀 빛이 어린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말을 계속 해나갔다. 마치  현을 보고 있는 것처럼.

“그래도 물러나는 속도 보니까 그래도 꼴에 일본 최강이라고 할 만하긴 한  같네요.”
“부상당한 사람은 없습니까?”
“...그런 것까지는 알 정도는 아니에요. 좀 멀찍이 떨어져있으면 모르겠는데, 붙어있으면 그냥 큰 덩어리로 느껴지거든요. 아, 다 물러났다. 처음부터 말한 대로 했으면 힘  빼고 좀 좋아?”
“뭐 그 사람들이 큰일을 해줄 거라고 생각은  했으니 큰 상관은 없습니다. 뻘 짓을 해준 덕택에 본 드래곤 어그로도  끌린 것 같고요.”

 현이 말하기 무섭게 본 드래곤 중 작은 쪽인 타칼란이 천천히 날개짓을 시작했다. 엘더 리치는 더 이상 억누르기 힘들다고 판단한 것인지, 본 드래곤이 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웨인이 난간 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의 허리춤에는 류 현이 호주에서 사용했던 ‘송곳’이 두 자루 매달려있었다. 그 때의 것을 개량한 것이었지만 겉보기에는 별 다른 차이는 없었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몸조심하시길.”


웨인은 류 현의 말에  웃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난간을 밟고 훌쩍 밑으로 뛰어내렸다. 추락하는 그의 발밑에는 마침 본 드래곤 타칼란이 천천히 고도를 끌어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타닷- 부으으! 콰지직!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웨인은 타칼란의 등판에 착지하자마자, 검신 부분이 시뻘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마력을 한껏 머금은 ‘송곳’을 망설임 없이 본 드래곤의 등뼈에 박아 넣었다.

[크아아아!] 본 드래곤이 기성을 터뜨린  웨인이 두 번째 ‘송곳’을 삽질하듯이 쑤셔 넣은 뒤였다. 웨인은 그것에 그치지 않고, ‘가방’을 조작해서  번째,  번째 ‘송곳’을 꺼냈다. 류 현이  세계적으로 욕을 먹어가면서 추가로 버틴 닷새 동안의 성과가 본 드래곤의 뼈대에 연달아 쑤셔 박혔다.


‘내가 해놓고  소리는 아니지만 진짜 황당하군. 단순하고, 실행자의 기량을 크게 요구하는 방식이지만...처음 상대해보는 괴수를 상대로, 한 번도 맞붙어보지 않고 이 정도 공략법을 내놓는  가능한가?’

고작 닷새 동안  현이 요구한 수준까지 ‘송곳’을 다루는 건, 승하도 훈련 도중에 볼멘소리를 내뱉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송곳’의 내구도 한계 바로 밑까지 마력을 밀어 넣고, 부러지지 않게  드래곤의 몸뚱이에 칼침을 넣으라니 말이 쉽지 다른 스트라이커들이 들었다면 미친놈 취급했을 만한 미션이었다. 시일을 맞추지 못해서 류 현이 추가로 욕을 얻어먹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닷새 만에 그 경지에 도달한 웨인은 다른 부분에서 놀라고 있었다. 이미 한 번 검증을 거쳤다고는 하나, 정말 이렇게 ‘송곳’이 본 드래곤의 몸뚱이에 꽂혀서 고정되어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류 현에게 따라붙는 논란도 함께 떠올랐다.

‘...정보의 출처를 따질 시기는 이미 지났어. 찾아내더라도 어떻게 할  없는 지경까지 왔다. 정보적 우위를 빼고 생각해도 이제 그와 견줄  있는  검성 정도뿐이야. 그가 계속 영웅으로 남아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나...’

콰지직! 웨인 크로이츠는 세 번째 ‘송곳’을 박아 넣고는, 빌딩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세 명의 인영을 올려다보며 그런 생각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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