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화 〉탐식마(貪食魔)
희란은 터져 나오려는 하품을 내리누르며 눈가를 비비적거렸다. 잠을 아주 못 잔 것은 아닌데, 두 달이 넘는 기간 동안 타지를 돌아다니면서 쌓인 피로를 풀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수면시간이었다. 별 생각 없이 잠들었으면 개운하기라도 했을 텐데, 공항에서 헤어지기 직전에 두 사람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는 것과 그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편히 잠들지도 못했었다.
옆에서 퀭한 눈을 하고 있는 화련보다야 훨씬 사정이 낫긴 했지만 말이다. 희란은 제 어깨에 기대서 거의 눈뜬 채로 자고 있는 화련에게 속닥거렸다.
“가서 아예 못 주무신 거에요?”
“너 오기 전에 한 시간 좀 안 되게 잠깐 눈 붙이긴 했어. 전에는 이래도 멀쩡했었는데 오늘은 유독 이러네.”
화련은 대꾸를 하면서도 눈을 뜨지 못했다. 희란은 그런 화련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원정 중간 중간에 쉬긴 했어도 두 달 넘게 바깥에서 생활했으니까 그럴 만도 해요. 언니도, 마스터도 좀 주무시고 모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건 걱정 안 해도 될 거야...아마.”
희란이 의문 어린 시선을 보냈으나, 화련은 그새 잠들었는지 말이 없었다. 그런 화련의 쪽잠도 얼마가지 못했는데,
벌컥- 휴게실 문이 열리면서 넷이나 되는 인원이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을 맞으러 나간 류 현을 필두로, 나승하, 백혜라, 웨인 크로이츠의 인기척이 느껴지자 늘어지려던 화련이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쓰읍...”
“피곤하시면 먼저 돌아가서 쉬셔도 된다고 말씀 드렸잖습니까.”
“똑같이 고생한 사람은 버티고 있는 데 그러는 건 좀 아니죠. 이야기 끝나고 나면 휴대폰이고 뭐고 다 끄고 잠만 잘 거니까 신경 안 쓰셔도 되요. 마음이 편해야 쉬는 것도 잘 쉬지.”
자리를 잡으며 화련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승하가 화련과 류 현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지울 수 없는 피로의 흔적이 역력했다.
“뭐야, 둘 다 아예 안 잔 거야? 가족들한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조금 오해해서 그런 것뿐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자리에서 할 얘기도 아니고요. 화련 씨 상태도 그렇고, 저도 빨리 쉬고 싶으니 간략하게 요점만 말씀 드리죠.”
모든 인원이 자리를 잡고 앉은 것을 확인한 류 현은 목을 몇 번 가다듬고는 말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전부 뉴스든 다른 루트로든 간에 이미 소식을 접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남극에서 도망친 8성 리치가 본 드래곤들이 도쿄에서 분탕질 치고 있다는 걸요.”
다섯 명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류 현은 계속했다.
“유럽 건 때문에 합류했던 인원들이 이리저리 찢겨나가긴 했습니다만, 팀을 소집할 때 말씀 드렸을 겁니다. 본 드래곤과 그에 관련된 괴수들을 소멸시키는 게 소집 목적이라고요. 의도치 않게 중간에 남극과 유럽에서 리치성을 공략하는 게 주가 되어버리긴 했습니다만...본 목적이었던 본 드래곤과 두 놈을 조종하는 듯한 8성 리치는 아직까지 건재합니다. 갑자기 도쿄에 나타나서 저 난리를 칠 정도로 말이죠.”
동의 같은 걸 구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희란은 끄덕거리며 마른 침을 삼켰다. ‘설마 바로 일본 직행을 말씀하시려는 걸까? 그치만 두 분은 아직 쉬지도 못하셨잖아. 언니도 이런 상태인데...내가 나서서 반대의견을 내야...’ 희란이 소심하게 손을 슬쩍 들어 올리려는 때,
“그래서 일본 원정은 일주일의 휴식기간을 가진 뒤에 출발하기로 결정 했습니다. 일주일은 휴식을 위한 최소한의 기간이고, 준비를 위해서 추가로 출발일이 더 늦춰질 수도 있습니다. 오늘 ‘터주’에서 사람을 불러서 정식으로 의사를 전달할 생각입니다. 한 한 시간 뒤쯤에 오겠군요. 기자회견까지 하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만 참석하면 될 테니 다른 분들은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
“예...?”
바람 빠지는 듯한 말소리를 낸 건 웨인이었다. 일본에 일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한국으로 날아온 그로서는 그리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일본으로 출발해서 저 빌어먹을 놈들 멱을 따버리겠다고 류 현이 불을 토하면 말릴 예정은 있었으나, 류 현이 이렇게 나올 경우에 대한 계산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상을 입은 사실마저 숨기고 무리하다가 그 지경까지 갔던 류 현이 아닌가? 그런 그가 의견 수렴이고 뭐고 없이 다짜고짜 일주일 간 휴식이라고 선언하다니?
“도쿄에 일어난 참사는 개인적으로 안타깝긴 합니다만...그렇다고 사지로 걸어들어 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중간 중간에 휴식을 취하긴 했어도, 입었던 부상정도를 생각하면 제대로 된 휴식도 아니었고요.”
류 현이 자신이 하려는 말을 대신 해주자 희란은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류 현의 내상을 인지한 이후부터, 류 현과의 ‘연결’을 통해서 흘러들어오는 마력의 흐름을 집중 관찰했던 희란은 집중하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든 미묘한 노이즈에 안 그래도 잔뜩 긴장하고 있는 상태였다. 비서 노릇을 적극적으로 수행한 것도 그래서였다. 그냥 뒀다간 류 현은 정말로 크게 탈 날 것 같이 보였으니까.
승하나 백혜라 또한 류 현의 결정에 불만은 없는지 주억거리기만 할 뿐, 별 다른 말은 없었다.
하지만 웨인 크로이츠는 그냥 그렇게 넘기기에 신경 쓰는 부분이 너무 많은 남자였다. 웨인은 고심하는 듯하다가, 짜내듯이 말을 내뱉었다.
“...많은 말들이 오갈 겁니다. 단순히 루머라고 넘기기 힘든 이야기들이 나올 거고, 대부분은 류 현님을 비난하는 종류일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류 현님이 이 원정대를 이끌고 있다고 알고 있고, 그건 사실이니까요.”
“욕이야 지금도 먹고 있는데 새삼스럽게. 기사 몇 개를 뒤적여 봤는데, 어린 동양놈이 유럽인들 죽어나가든 말든 미적거리면서 왔는데 무슨 보상금이냐는 소리가 제법 있더군요.”
류 현은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무덤덤하게 말하며 태블릿 피시를 웨인에게 내밀었다. 그의 말처럼 기사의 댓글란에는 원정대에 대해서 고마움을 표하는 이야기보다는, 미국까지 갔다가 미적거리며 검은 리치성 공략에 나선 원정대를, 특히 대장이라고 알려진 류 현을 욕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웨인은 떨떠름한 얼굴로 몇 개의 댓글을 읽다가, 태블릿 피시를 내려놓았다.
“이 정도는 약과라고 생각하시게 될 겁니다. 류 현님, 저는 휴식을 취하지 말자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류 현님 이름으로 그 사실을 공표하는 건...”
“압니다. 제가 굳이 안 끌어도 되는 어그로 끌면서 욕먹는 걸 우려하시는 거 아닙니까. 여태껏 욕먹는 역할은 계속 협회에 떠맡겼으니 우려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저도 그게 편해서 계속 그래왔었고 말입니다.”
“저는 그게...”
“그런데 더 이상은 그런 식으로 책임소재를 미룰 수가 없을 것 같아서요.”
“...무슨 말씀이신지?”
“욕먹는 기사랍시고 보여드리긴 했습니다만, 협회가 열심히 앞에서 대신 욕먹어준 덕에 생각보다 훨씬 욕을 덜 먹은 편이라는 건 저도 압니다. 저도 알고 그랬으니 당연한 일이죠. 거기에 대해서 감사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욕을 덜 먹는 것까지는 좋은데, 이렇게 되니 제 인지도가 늘어나질 않더군요. 그 부분이 조금 곤란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협회 쪽에 책임 떠넘기지 않기로 했습니다. 욕도 인지도가 있어야 먹는 것 아니겠습니까?”
“......”
웨인 크로이츠는 입을 꾹 다문 채 류 현의 표정을 살폈다. ‘대체 이건 무슨 의미일까?’
눈앞의 남자가 지벡 건터라면 웨인 크로이츠는 그럼 그렇지 하고, 겉으로는 웃으며 자리에서 스리슬쩍 빠져나왔을 것이다. 지벡 건터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또라이니까. 유명세를 위해서 마피아를 잡아다, 머리털을 태워 자기 이름을 남긴 후 인근 교도소 앞에 버려두고 가는 등 별 괴상한 짓을 일삼았던 과거가 있으니까.
하지만 류 현이 유명세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도무지 목적하는 바를 모를 이가 제 입으로 뭔가를 원한다고 말을 하니, 그 안에 들어있는 의미가 의심되는 것이다.
“혹여 휴식기간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하시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군요. 그럼 협회에 연락하는 걸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아, 예...”
웨인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리고 휙 하고 이주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
구마모토 현, 시모시마 섬. 원래라면 자가용이든 버스든 손쉽게 왕래할 수 있었던 그곳은 이제는 그 누구도 쉽사리 접근할 수 없는 죽음의 땅이 된 상태였다.
섬 주변을 장벽마냥 감싸고 있는 거대한 소용돌이와 그 안쪽에 펼쳐진 지역에 맞지 않는 빙설의 세상. 이젠 몽환적인 분위기를 내뿜는 도시를 뒤덮은 빙설에 그날의 악몽마저 얼어붙은 것처럼 사람형상의 얼음덩어리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
눈썰미가 좋은 자들은 그것이 단순한 얼음조각 같은 게 아니라고 눈치 챌 수도 있을지 모르나, 섬 안으로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은 없었다. 현재 섬의 지배자인 엘더 리치의 허가를 받지 않고선 말이다.
엘더 리치는 섬 중심부에 선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섬을 감싼 거대한 회오리바람 탓인지, 보이는 건 회색빛 하늘뿐이었지만 엘더 리치는 그에 대해 불만이 없어보였다. 주변을 감싼 냉기 때문에 얼어붙은 것처럼 느리게 휘도는 마나는, 거대한 톱니바퀴가 도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엘더 리치를 축으로 하는 거대한 뭔가가 천천히 섬을 장악해 들어갔다.
엘더 리치의 눈구멍에 어린 빛에 만족감 같은 것이 스며드는 듯했으나,
[흐아아-] 덜컥하고 엘더 리치의 고개가 한 쪽으로 돌아가며 모든 움직임이 멎었다. 엘더 리치가 서있는 공터 주변의 빌딩에 자리를 잡고 있던 본 드래곤들이 제 주인의 움직임을 따라, 대가리를 디밀었다.
[크르르르-][쉭-쉭-] 본 드래곤 두 마리가 투레질을 하는 것처럼 씩씩 거렸지만, 엘더 리치는 그 둘을 억누르며 품에서 제 눈구멍에 딱 들어맞을 것 같은 구슬을 꺼냈다. 커다란 진주알 같아 보이는 그것은, 그 외견과 달리 어마어마한 마력과 사기가 안에 몰아치고 있었는데 그 재료가 7성 리치였기 때문이었다. 남극에서 승하에게 꽤 큰 타격을 입고 도망쳤던 7성 리치는 제 창조주인 엘더 리치의 손에 의해서 아티펙트화 한 것이었다. 엘더 리치가 검은 리치성을 던져주고, 지배권의 대부분을 포기하면서까지 기량을 쏟아 부어 만들어낸 걸작.
섬 주변에 쳐둔 바람의 장벽이 뚫렸다. 자신의 일부가 된 구슬로부터 이상신호가 전해져왔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몇 번 험한 꼴을 당할 뻔 했던 엘더 리치는 작은 이상이라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이번에도 다음이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엘더 리치는 몇 초 지나지 않아서 맥 빠지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섬을 반쯤 자신의 손아귀에 넣는데 성공한 엘더 리치는 이 땅에 발을 딛은 침입자들의 수준을 대강 파악하는데 성공했고, 그래서 어깨를 늘어뜨렸다.
침입한 인간들은 완전히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작업을 중단할 정도로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다. 섣부르게 장담하는 건 별로 좋지 않은 태도이긴 하나, 체내에 보유한 마나를 볼 때 자신이 부리던 6성 리치 다섯 정도면 충분히 전멸시킬 수 있는 수준이었다. 자신의 스캔 시도조차 눈치 채지 못한 걸 보면, 더 볼 것도 없었다.
엘더 리치는 상대적으로 작은 본 드래곤 쪽, 타칼란에게 제 의사를 전달했다. 인간들이 500미터 내로 접근하면 쓸어버릴 것. 그게 다였다. 그 마저도 만일에 대비한 지시일 뿐이었다. 엘더 리치는 인간들이 이곳까지 도달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제길, 블러드 오러다. 앞으로 나가지마! 대열 지켜!”
[끄르르-][커허-] 듣기만 해도 속이 답답해지는 것 같은 가래 끓는 소리와 목구멍에서 중간에 바람이 새는 것 같은 소리가 파도치듯이 연속해서 터져 나왔다. 눈앞을 새카맣게 메운 시뻘건 구울들의 모습에, ‘인형사’라는 별칭으로 더욱 유명한 스사노오 클랜의 마스터 코소 미츠에는 혀를 찼다.
아무리 변해도 구울은 구울이니 뚫지 못할 건 없지만, 이 숫자는 클랜원들의 힘을 빼놓기에 충분해 보였다. 구울을 시뻘겋게 변화시킨, 파도처럼 출렁거리고 있는 붉은 기운이 문제였다.
붉은 기운에 노출된 구울은 내구도나 근력이 몇 갑절이 되는데, 저 붉은 기운에 아군이 노출될 경우 시간에 따라서 무기력증이나 구토감을 호소하는 등 치명적이진 않아도 충분히 성가신 디버프로 작용했다.
‘이래선 섬 중심부에 닿기도 전에 지쳐 쓰러지겠어.’
평소 같으면 붉은 기운 같은 변수 앞에서는 클랜원들을 뒤로 쭉 물리고, 자신이 이동로를 탐색하거나 혼자서 뚫어봤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시간 싸움이었으니까. 자신들과 함께 이 섬으로 들어온 자들과의 시간싸움!
그자들의 대장은 섬 중심부로 오지 말고 최대한 구울들의 이동을 지체시키거나, 소멸시켜달라고 했으나 그녀는 그 말에 순순히 따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 또한 한 단체의 장으로서 자존심이 있었다.
‘와 봤자 방해라고? 흥, 오만방자한 놈. 운이 좋게 시류에 올라탄 주제에!’
엘더 리치에게 그 남자에게 받은 평가보다 못한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 코소 미츠에는 두 팔을 날개처럼 펼쳤다. 그녀의 손끝에서 뻗어나간 마력들이 실을 이루고, 실들이 뭉쳐서 사람의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끝나고 나서 누가 빌게 되는 지 한 번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