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90화 〉탐식마(貪食魔) (190/429)



〈 190화 〉탐식마(貪食魔)

류 현이 세아에게 미완성 엘릭서를 가져다 준 건, 엘더 리치와 본 드래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분탕치기 직전인 거의 세 달 전 일이었다.

아무리 관리를 거듭해도 점점 약해져 가는 세아의 몸 상태를 보고 류 현이 결단을 내린 것이다. 복용할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권은 세아에게 넘겨주긴 했지만, 그렇지 않아도 동생에게 짐이 되고 있다는 자책감을 가지고 있던 세아에게 결정권은 있으나 마나였다.

자신의 몸 상태가 계속해서 나빠지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세아였고, 그녀는 약의 출처 따위는 따지지 않고 엘릭서-06이라고 강 찬이 임시로 이름붙인 신약을 계속 복용해왔다. 류 현이 그 신약이라는 것을 어떻게 검증했는지는 전혀 모른 채로.


류 현은 세아에게 미완성이지만 엘릭서를 내밀기 전에 수차례 임상실험을 반복했었다. 실험 대상은 세아와 같은 증상을 앓고 있거나, 다른 병을 앓고 있지만 시한부 판정을 받고 이제 지연치료조차 기력문제로 받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문제될 소지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류 현은 강행했다. 이전 생에서 영웅이었던 적은 있었어도, 한 번도 선인이었던 적은 없었던 그였다. 실행하는  있어서 별 다른 죄책감도 없었다.

류 현에게 있어서 이전 생에서 이미 닳고 닳은 죄책감이 주는 통증보다는, 나날이 말라가는 세아의 모습에서 느끼는 절망감이 훨씬 거대했다. 류 현은 일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임상실험을 반복했다.


강 찬이 새로운 버전의 엘릭서를 내놓을 때마다 자신이 복용해보는 등, 유독성에 대한 최소한의 검증은 거치긴 했지만 욕먹을 만한 짓이라는  변함이 없었다.  현은 목숨을 거는 실험에 응하는 대가로 최소 10억이라는 보상금과 함께 이후 생활을 지원해준다는 조건을 달고 피실험자들을 유혹했고, 거의 스무 명에 달하는 인원을 피실험자로 확보할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선  명이고 천 명이고, 시험해보고 싶었지만 엘릭서의 재료와 드는 시간이 문제였다. 세아의 몸은 기다려주지 않고 말라갔으니까.

실험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모두가 완쾌된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 병의 진전을 늦추는 효과를 보였고 결과가 좋은 경우는 복용시킨 지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완쾌한 경우까지 있었다. 이 케이스가 세아에게 엘릭서를 내밀게 되는데 망설임을 덜어주었다.

실험대상이 되었던 30대 여성은 세아와 비슷한 경로로 같은 병을 앓고 있었고, 실명까지 가진 않았으나 그 외의 영양 상태나 치료의욕 저하 등 다른 부분에서는 세아보다 더 심각한 상태였다.  여성이 퇴원하던  류 현은 전에 없을 정도로 환호했지만, 바로 세아에게 엘릭서를 내밀진 않았다. 효과 증명을 위해서는  많은 결과가 필요하다고 여겼고, 목표로 했던  년이 지나고 나자 류 현은 더 생각하기 어려워졌다.


화련이 세아의 방에 마력이 진입하지 못하게 방해장을 설치해 준 후, 세아의  안에 더 이상의 마력이 쌓이지 않았지만 병세는 점점 진행되었던 것이다. 잠깐 복용을 중단했다가 다시 복용을 시작한 송장목 진액으로도 체력이 떨어지는 것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점점 침대에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지는 세아의 모습에서 이전 생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린 류 현의 인내심도 빠르게 소모되어갔다.

결국 류 현은 세아에게 결정권 아닌 결정권을 넘겨줬고, 세아는 엘릭서 복용을 시작했다. 정말 조바심이 날 정도로 조심스럽게 말이다. 속이 좋지 않다고 하면 그 날을 기점으로 사흘은 복용을 중단했다. 복용 때마다 류 현이 세아의 손을 잡고 마력양을 체크했으며, 강 찬에게 들어간 재료의 양 차이 같은 걸 물어 기록해두기도 했다.

그렇게  달여, 들인 정성에 비해 반색할 만한 결과는 아니었지만, 떨어졌던 세아의 체력이 돌아오고 병세가 조금은 지연되는 듯한 효과를 보자 류 현은 강 찬을 더욱 열심히 밀어줬다. 그러면서도 세아의 상태를 살피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간병인들을 다시 들이는 데 정성을 쏟은 것도  때문이었다.


세아의 성격을 누구보다  아는 그였으니, 세아가 병세를 숨기거나 속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간병인들에게 거듭 당부했었다. 작은 것 하나라도 뭔가 이상하면 연락하라고.

그리고 검은 리치성 공략을 끝낸 류 현에게 간병인 중 하나가 연락해온 것이다. 세아가 눈이 보이는 듯한 소리를 하더니, 정작 의사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며, 자신들이 말 상대를 하다가 넌지시 물어도 완강하게 입을 다문다고 말이다.

한국으로 날아오면서 류 현은 온갖 가정을 다 해보았다. 대부분이 부정적인 쪽이었고, 병원에 다다를 때쯤에는 류 현은 누가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폭발할 지경이었다.


“...그게 보인다고? 어떻게...?”

그런데 그런 류 현을 기다린 건, 얼이 빠질 정도로 황당한 대답이었다. 화련이 쳐놓은 방해장이 보인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세아. 류 현은 이 기내에서  상상 중에서 이런 경우는 결단코 존재하지 않았다.

“어떻게 라고 해도...그냥 보이는 데.”
“아, 아니 어떤 형태로 보이는 건데?”
“응? 비슷한  본 적이 없어서 표현하기 어려운 데...모기장에 전류 같은 게 흐르는 거 같은 느낌?”


‘진짜 보이는 거네.’ 류 현은 세아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두 눈을 덮었다. 맥이 풀려서 그런 지 갑자기 어지러운 느낌이었다. ‘맞아, 나 리치성 부수고 나서 거의  잤었지.’ 그제야 자신이 학대한 몸의 상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7성 리치를 거의 통째로 씹어 삼켜서 마력 소모 같은 건 없다시피 하였지만, 전투로 인한 피로도는 그대로였다. 그 상태로 잠을 거의  자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귀국하자마자 병원으로 왔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의 끈이 풀리니, 머리만 갖다대면  수 있을  같았다.


‘그래도 지금은 안 돼.’
“누나, 잠깐 확인할 게 있어서 그런데 한   이리로 줘 볼래?”
“응, 자. 저번처럼 심호흡 하면 되니?”
“그냥 편하게 있으면 되는데, 그래주면 좋고.”

세아와 두 손을 마주 잡은  현은, 입원한 뒤로 처음 보는 세아의 진짜 웃는 얼굴을 보고 픽 웃고는 눈을 감았다. 자신의 중심까지 침잠해 들어간 류 현은, 그곳에서 천천히 자신의 영역을 세아의 안쪽으로 확장 시켜 뻗어 들어갔다. 검은 안개와는 다른, 보다 투명하지만 탐욕스러운 기운이 그의 의지에 응해서 움직였다.  현은 그 기운 안에 있는 탐욕을 억누르라 식은땀을 흘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운을 갈무리했다. 2분이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이었건만, 류 현의 등허리는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세아가 그것을 눈치  것인지  현의 등 쪽을 보려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지만, 맞잡은  손을 떼어놓진 않았다.

‘이게 대체...왜 마력들이 갈무리  있는 거지?’


류 현은 뇌정지라는 단어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정말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으니까.


그가 살핀 세아의 몸  쪽에 유리 파편처럼 흩어져있던 마력들은, 정말 거짓말처럼 그녀의 가슴께에 몰려있었다. 가슴께에 몰린 마력에도 손을 뻗쳐봤던  현은, 자신의 마력에 저항하려는 듯한 움직임에 두  놀랐고 그러자마자 마력을 거둬들였다. 놀란 정신으로는 도저히 세아를 상처 입히지 않고 살필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저번에 봤을 때만 해도 이런 징조는 없었어. 완쾌한 그 여자만 봐도 마력이 모여든  아니고, 밖으로 빠져나갔었지.  누나 몸에 있던 마력이 모인 거지...그것도 저렇게 깔끔하게.’

마치 각성한 플레이어처럼 말이다. 류 현은 자신에게 같은 질문을 계속 던져봤지만 그런다고 답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아니, 스스로 내놓은 정답을 거부하고 있으니 어떤 추측도 쓸모없었다. 류 현은 격렬한 자기부정에 휩싸인 채, 생각하는 것조차 관두고 싶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현이 멍하니 맞잡은 두 손을 바라보고만 있자 세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현아? 왜 그래?”
“어? 아, 조금 놀라서. 저번이랑 비교해서 확 좋아진 거 같네.”


류 현은 경련하려는  꼬리를 억눌렀다. 세아의  상태가 훨씬 나아진 것은 사실이었기에,  현은 세아가 눈치 채기 힘들 정도로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었다. 세아 또한 이런 시야에 적응이 덜 되었기에 그 작은 부자연스러움은 눈치 채지 못했다. 그저 동생이 보증한 호전 소식에 기뻐할 뿐.

“그치? 보이기 시작한 다음부터 운동하는 것도 덜 힘들더라. 그 신약이라는 거 무지 비싼 거지?”
“그런 걱정은 마시고  챙겨 드시기나 하시죠. 누나 동생 생각보다 훨씬 잘 버니까. 담당선생님한테도 말 안  거 보면 약도 제대로 안 먹는 거 아냐?”

 현의 말에 세아가 볼을 작게 부풀렸다. 자신이 건강할 때 류 현을 애 취급하면서 싸고돈 그녀는, 반대로 아이 돌보듯이 나오는 동생의 태도가 영 불만이었다. 신경 써주는 건 기쁘지만, 방향성이라는 게 있지 않는가.

“내가 무슨 여섯 살짜리 애니? 들어보니까 신약이라는 거 밖에서 만든 게 아니라, 던전 안에서 나온 걸로 만든 거라면서? 그런 걸로 효과 보고 있다는  알면 너한테 안 좋을까봐 그래서 너한테 먼저 말하고, 생각해보려고 한 거였어. 말해도 되는 거였니?”
“그런 사람이 거의  달 가까이 숨겨? 내가 자리를 오래 비우면 담당선생님한테라도 말을 했어야지. 그리고 내가 그런 걸 말씀 안 했을까봐? 이미 알아.”
“어? 근데 왜 그건 안 물어보셨지?”
“괜히 캐묻다가 병원 주인 누나한테 찍히면 쫓겨날 까봐 그랬나 보지.”

“현이 네가 병원 주인이라고?”라며 엉뚱한 곳에서 놀라는 세아를 바라보는 류 현의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했다.

‘누나랑 그 여자랑 무슨 차이가 있길래 그 여자는 마력이 배출 됐는데, 누나는 각성한 거지?’

다른 가능성을 억지로 짜내면서 거듭 부정하려고 애써 봤지만, 변하지 않는 세아의 각성이라는 사실 앞에서 류 현은 생각을 달리해야만 했다.

***


“먼저 와 계셨군요.”
“아, 왔어요?”

병원 출입이 통제되고, 당직자들 이외에는 모두 퇴근하거나 잠이든 밤이었다. 류 현은 보호자 휴게실에 한  앞서 도착해 있던 화련을 발견하고는 말을 건넸다. 대답하는 화련은 왠지 모르게 맥이 풀린 듯한 얼굴이었다. 어찌 보면 졸린 듯한 그런 얼굴.

“피곤해 보이시는   안 주무시고...오자마자 바로 이리로 오셨잖습니까. 아님 낮에 주무셨습니까?”
“그건 마스터도 마찬가지잖아요. 낮에 자긴...놀라서 그런  잠도 안 오더라고요. 이제  놀란 가슴 풀리는 거 같네요. 흐아암...”

 현이 본 것이 틀리지 않았는지, 화련은 입을 가리고 작게 하품했다. 눈가를 쓱쓱 비비는 모양새가  현과 비슷한 상황 같았다. 류 현도 풀어졌다가, 다시 뻣뻣해졌던 긴장의 끈이 슬슬 풀어져서 곧바로 잘 수 있을 것 같은 상태였다.


“혹시 이모 분께서...”
“이모는 괜찮으세요. 나눠주신 약이 잘 들어서 그런  같더라고요. 핏덩어리를 토하고 오히려 상태가 좋아지셨는데, 이쪽에서 놀라서 핏덩어리 토한 것까지만 전달하고 상황이 진정되니까 그 이야기 하는 건 깜빡한 거였어요. 내가 있었어도 그랬을 거 같아서 뭐라고 하기도 그래서 다음부터는 주의해달라고 하고 말았죠. 보니까, 안에 들어찬 마력도 조금이지만 줄어든 거 같았고. 혹시 내일, 아니 언제라도 시간 나시면...”

임상실험 대상 이외에 화련의 이모에게도 엘릭서를 나눠주는 중이었다. 화련은 류 현의 거듭된 경고에 고민하는가 싶더니, 당사자와 이야기를 몇 번 나누고는 미완성 엘릭서를 복용시키는 중이었다. 그녀의 이모는 세아보다 훨씬 상태가 좋지 않아, 이런 방식이 아니라면 병세를 지연시키는 것조차 어려운 상태였다.


화련이 흐린 뒷말을 읽어낸 류 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허락했다.


“예, 봐드려야죠. 내일 깨시면 바로. 큰일이 아니라니 다행입니다.”
“마스터 덕분이죠. 솔직히 이젠 지연치료도 거의 기대 안하고 있었는데...어떻게 갚아야할지 모르겠네요.”


화련은 그렇게 말하며 코가 시큰거리는  콧마루를 만지작거렸다.  현은 괜히 머쓱해져서 뒷머리만 긁적거렸다.


“언니는 어떠세요? 혹시 악화되신  아니죠?”
“아, 예. 그런 건 아닙니다. 아닌데...”
“...?”
“뭘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감이 안 잡히네요.”


류 현이 선뜻 입을 떼지 못하고 있자 화련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재촉하진 않았다. 류 현은 까칠해진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다가 말했다.

“대충 정리했다고 생각 했었는데 생각보다 입이 잘  떨어지네요. 조금만 기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안 될 것도 없죠. 마침 여기 티비도 있고.”

화련은 그리 말하곤 리모콘을 찾아서 티비를 켰다.  현은 그 모습을 보면서 자조했다. ‘뭐 그리 어려운 말이라고. 아직도 현실부정 중이냐?’


현실을 인정하고, 직시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남에게 말하자니 말문이 턱 막혔다. 말해버리면 그게 사실로 굳어져버릴 것만 같아서, 그래서 말하기 싫었다. 이런다고 변하는 게 없다는  알면서도 말이다.


“오, 마침 뉴스 하네.”
‘말한다고 큰 일 나는 일도 아니고, 오버하지말자.’

류 현이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를 결심을 하고 입을 떼려던 때였다.


“어...저기, 마스터. 잠깐, 이것  보실래요?”
“...?”

멍하니 굳어있는 화련이 손짓하는 대로 옆으로 다가가서 티비를 본  현은 그녀와 똑같은 상태가 되었다.

티비 화면에는 류 현의 입장에서는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엘더 리치와 놈이 부리는 두 마리의 본 드래곤이 도시를 말 그대로 갈아버리고 있는 광경이 몇 초가량 나오다가, 잠깐 검은 화면을 거친 후에 다시 뉴스데스크를 비추었다.


 현은 뉴스 캐스터가 도쿄라고 말하는 것까지만 듣고, 제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꺼내서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화련 또한 류 현의 휴대폰을 보기 시작한 지, 십여 초. 그의 휴대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웨인 크로이츠.  현은 휴대폰 화면에 출력 되고 있는 여섯 글자에  숨을 푹 내쉬려다가, 고개를 내젓고는 휴대폰으로 손을 뻗쳤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조금 헐떡이는 것 같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류 현은 불쾌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예, 류 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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