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화 〉탐식마(貪食魔)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어.’
뿌드득- 이를 갈아붙이는 소리에, 우거지상을 쓰고 생각에 빠져 있던 화련마저 그를 돌아볼 정도였다. 하지만 화련은 류 현에게 말을 걸지 않고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유를 알고 있어서 위로의 말 같은 걸 전하기가 더 어려웠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 위로를 건네는 것이 듣는 입장에서 얼마나 맥 빠지고, 허망한 것인지 그녀도 알고 있었으니까. 자신도 비슷한 이유로 같은 차에 오른 것이니, 위로를 건네 봐야 모양새만 우스울 뿐이었다.
‘빌어먹을 엘더 리치 새끼. 그놈만 아니었으면 이렇게 오래 떠나 있을 이유도 없었는데...’
자신의 생각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은 류 현도 화련의 시선을 못 느낀 건 아니었다. 류 현은 어금니를 괴롭히는 걸 관두고 속으로만 이를 갈아붙였다. 화련도 자신과 같은 이유로 쉬지도 못하고 입국하자마자 병원으로 향하고 있으니, 세상 고민 다 끌어안은 것처럼 구는 게 좋게 보일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것과는 별개로 류 현의 표정은 실시간으로 썩어 들어갔지만.
‘누나도, 누나야. 왜 그런 걸 나한테 숨기려고 해? 나 말고 챙겨 줄 사람이 누가 있다고? 이번 일도 내가 사람 새로 안 구했으면...젠장, 이런 생각은 하지 말자. 성질부린다고 뭐가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제일 힘든 건 누나야.’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헤집은 류 현은, 심호흡을 시도하여 흥분을 가라앉히고자 했지만 쉽진 않았다. 어떻게 해도 검은 리치성 함락 직후에 접한 소식이 머릿속에서 떨어져 나가질 않았다.
소식을 전해온 건 병원 측이 아니라 류 현이 새로 고용한 간병인들이었다. 류 현은 몇 차례 세아의 병원을 옮긴 후에, 협회에서 운영하는 병원에 대거 투자를 하면서 병원을 사들이다시피 하였지만 그것만으로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안전문제야 자신이 24시간 붙어있지 않는 이상 불안함을 안고 가야한다고 쳐도,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세아가 자잘한 일까지 생판 남을 도움을 생활을 편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지금 세아에게 붙여둔 총 여섯 명의 간병인들은 고심 끝에 데려온 이들이었다. 몇몇은 가족과의 생활 때문에 높은 급여에도 제안을 거절하려고 했지만, 류 현은 집까지 구해주며 그들을 세아에게 붙였다. 나중에는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다른 간병인들에게도 모두 집을 구해주었다.
간병인들은 손이 크다 못해 좀 헤픈 것 같은 고용주의 씀씀이에 얼마나 까탈스럽게 굴 것인가 하고 긴장했지만, 류 현은 딱 두 가지만 그들에게 요구했다. 정말 가족같이 대하는 것은 어렵더라도 세아를 잘 부탁한다는 말과 그녀의 신변상 자잘한 변화라도 간과하지 말고 자신에게 알려줄 것을.
류 현이 세아에 대한 소식을 전해들은 건 그 때문이었다. 의사에게는 내색하지 않는 세아의 변화를 포착한 간병인들이 포착해서 그에게 알린 것이다. 소식을 전해 받은 류 현은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고 평소처럼 행동할 것을 주문하면서, 타들어가는 속을 안고 협상장에 참석해야만 했다.
검은 리치성을 함락시켰을 시에 받을 보수나 공략 중에 부상을 당했을 때 받을 보상금 같은 것은 정해놓았지만, 거기서 나온 전리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리치는 동급 괴수들에 비해서 돈이 안 되는 괴수로 유명한 놈이었으니까.
리치 몸 안에 있는 마법 결정이나 반지는 남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그 외에는 모두 소멸하는 것이다. 그 남은 반지나 결정마저 리치가 품고 있던 사기 때문에 손대기 힘든 경우가 많은 터라, 리치는 사냥 난이도에 비해서 정말 돈이 안 되는 괴수로 유명했다. 언데드 괴수치고 그렇지 않은 놈이 더 드물지만 말이다.
리치가 지은 성이 현실세계에서 발견된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남극에서 얼음성이 연기처럼 흩어지는 것으로 전리품을 챙기긴 글렀다는 게 유럽연합의 결론이었다.
혹여 리치가 돈 안 되는 괴수임을 지적하며 전리품 값까지 계산해달라고 할 까봐 언급하지 않았던 것인데, 잡고 보니 검은 리치성 안에 있던 라이프 배슬들이 리치가 사멸되고도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물론 리치들을 사멸시키기 위해서 라이프 배슬을 부수긴 했다. 윗부분만 날아간 것도 있고, 완전히 박살난 것, 두 쪽 난 것 등 성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으며 안에 들어차 있던 내용물도 증발한 상태.
하지만 남은 껍데기만으로도 가치는 차고 넘쳤다. 전리품에 대해서 아무 말도 안하는 것으로 추가 수고비 지출을 막으려던, 유럽 연합측이 눈이 돌아갈 정도로 말이다. 저것을 어찌 활용할 지는 현 시점에서 그들도 알지 못했지만, 보유하는 것만으로도 흐름을 주도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류 현이 어찌 보면 여태껏 개발 못한 게 이상할 정도로 간단한 마나 포션 레시피 하나로 빌딩을 몇 채 올리고 남는 수익을 얻는 것만 봐도, 선점의 중요성은 두 말할 것도 없었다.
당연히 전리품 배분 때문에 설전이 벌어졌고, 검은 리치성 공략이 가장 큰 기여자 중 한 명인 류 현은 협상장에서 발을 뺄 수가 없었다.
공략 직후, 세아의 소식을 들은 류 현은 막무가내로 귀국을 시도하려고 했지만, 화련과 희란, 그리고 승하가 뜯어말리는 통에 그러질 못했다. 화련이 귓속말로 한 말이 결정적이었다. “이렇게 까지 해놓고 마무리 잘 못해서 쌓아올린 이미지 망칠 거에요?” 류 현이 멍한 표정으로 화련을 돌아봤지만 화련은 그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승하에게 말해 류 현의 팔을 잡아끌어 협상장에 앉혀놓았다. 그러고선 자신도 이곳에 있기 싫다는 티를 팍팍 내며 내내 우거지상을 하고 있었지만.
어영부영 협상장에서 시간만 보낸 류 현은, 웨인이 세운 공에 대해서 증언해주거나 팀원들의 배분을 챙겨주는 것으로 자기 역할을 끝내고 바로 귀국길에 올랐다.
유럽 연합 측 인사들은 류 현의 쿨하다 못해 이해하기 힘든 행보에 어이없어 하였지만, 7성 리치의 라이프 배슬을 통째로 집어삼킨 류 현으로서는 나머지 부산물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머지 것들을 다 합쳐도 마력양으로는 이길지언정, 질적으로는 비교도 할 수 없었으니까. 평소라면 그래도 몇 개 챙겨보려고 머리라도 굴려볼테지만, 도저히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화련이 설득하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 앉지도 않았을 것이다. 류 현은 웨인의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협회가 제공한 전용기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한국에 발을 들인 것이 불과 2시간 전 일이다. 피로 해소는커녕, 나흘 전 전투의 긴장조차 다 풀리지 않은 상태였지만 류 현은 차머리를 병원으로 향하게 했다. 운전기사가 태양그룹에서 보낸 자라던가, 리치성 돌입 직전에 희란의 상태를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류 현의 머릿속에는 간병인 중 우두머리 격의 여자가 한 말이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뿌드득- 류 현이 참지 못하고 재차 이를 갈아붙일 때쯤이었다. 차가 멈춰서더니,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운전기사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류 현은 운전기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문을 벌컥 열고 나섰다.
그대로 병원 안으로 뛰어들려던 류 현은 뒤에서 쫓아오던 화련을 슥 돌아봤다. 그녀 또한 이모의 상태 악화 소식 때문에 입국하자마자 병원으로 직행한 것이었다. 화련은 류 현의 마음이라도 읽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서로 볼일 보고 점심쯤에 봬요.”
“예, 그럼.”
류 현은 건물 바닥에 발자국을 남길 것처럼 쏜살같이 5층으로 향했다. 류 현 때문에 넘어진 사람이 없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무슨 기록이라도 세울 것처럼 병원복도를 내달리던 류 현은 한 병실 앞에서 덜컥 멈춰 섰다. 504호. 그 아래의 명패에는 류세아 라는 이름이 덩그러니 적혀있었다.
류 현은 이제야 숨이 찬 듯, 심호흡을 두어 번 하더니 병실문을 두드렸다. 대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세아의 목소리가 아니라, 근무 중인 간병인의 목소리 같았지만 류 현은 바로 문을 열지 못했다. 대꾸한 간병인이 이상함을 느낄 때쯤, 류 현은 문을 열었다.
간병인이 놀라며 퍼뜩 인사해왔지만, 류 현의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류 현은 자신이 뭐라고 하는 지도 모른 채 그들을 물렸다. “잠깐, 둘이서 할 말이 있는데 자리 좀 피해주시지 않겠습니까?” 간병인 두 명이 후다닥 밖으로 나가자, 류 현은 천천히 침대 자리를 향해서 다가갔다.
“현아.”
자신의 부르는 소리에 류 현은 우뚝 멈춰섰다. 다가가서 확인을 해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겁이 났다. 혹여 감당할 수 없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찌될지 겁이 났다.
“왜 그러고 있어. 와서 앉지.”
“어? 아, 담당 선생님 얼굴 뵙고 오는 걸 깜빡한 거 같아서. 나갈 때 뵙고 가야겠다 싶어서.”
침대 옆의 의자에 앉긴 했지만 해야 할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전보다 조금 더 마른 것 같은 세아의 옆얼굴을 보며, 가슴이 짠해졌다.
“갔던 일은 잘 된 거니? 손 좀 줘볼래?”
“잘...됐지. 응, 잘됐어. 중간에 좀 꼬여서 좀 지체되긴 했는데, 다들 별 부상 없이 끝났어. 의뢰주도 수고비 명목으로 두둑히 챙겨줬고.”
‘나도 입만 열면 거짓말이군.’ 그래서 일까, 선뜻 세아에게 묻기가 힘들었다. 자신의 손을 조물거리다가 얼굴로 손을 뻗친 세아의 손길에 눈을 감은 채, 류 현은 어떻게 운을 떼야할지 고민했다.
“현아.”
“응, 누나.”
“너 거짓말 할 때 얼굴에 다 티 난다는 거 아니?”
“.....?”
류 현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세아는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류 현은 거짓말을 들켰다는 사실이나, 그 미소보다 세아의 눈이 자신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자신의 시선이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눈동자도 같이 움직였다. 시력을 잃기 전처럼.
“손으로 만지기만 할 때는 긴가민가했는데, 이렇게라도 보이니까 확 티가 나네. 현이 넌 여자 친구 생기면 절대 거짓말 하면 안 되겠다. 한 한 달만 사귀면 바로 알아챌 걸?”
“누나...눈이...”
“간병인분들한테서 들었잖니? 보여. 이렇게 말하니까 시력이 돌아온 것 같네. 이전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좀 특이하게. 음...누나도 잘 표현을 못하겠네.”
류 현은 잠깐 동안 할 말을 잊은 채, 입을 벌린 채로 히히 웃는 세아를 바라보기만 했다. 세아는 시력을 잃기 전보다 왠지 키가 더 커진 것 같은 동생의 이마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우리 동생, 이제 아빠보다 훨씬 더 커진 것 같네. 엄마가 항상 우리 현이 아빠 닮아서 키 작으면 안 된다고, 걱정하셨었는데. 너 기억나니?”
“언제부터...언제부터 보였어?”
자신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세아는 류 현의 질문에 대해서 고심하더니 툭 내뱉었다.
“흐리멍덩하게 윤곽만 보이기 시작한 건 한 두 달 전쯤? 그 왜, 현이 네가 신약이라고 가져다준 거 있잖니? 그거 먹기 시작한 지 한 일주일 지나고 나서?”
왜 그 때 말 안했어! 라고 다그치고 싶었지만 류 현은 끓어오르는 울화 같은 것을 내리누르며 다시 물음을 입에 담았다.
“지금처럼 보이기 시작한 건? 지금 어느 정도 보이는 거야?”
“음, 그렇게 물으면 대답하기 어려운 데...원래 눈으로 보던 건 색깔 빼곤 다 보이고...화련 씨가 쳐놓은 모기장 같은 것까지는 보여.”
“뭐?”
전혀 예상치 못한 세아의 대답에 류 현은 자신이 우려하던 것과 벌어진 일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