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88화 〉탐식마(貪食魔) (188/429)



〈 188화 〉탐식마(貪食魔)
“...류 현?”


드물게 술에 취했을 때나 느꼈던 몽롱한 기분에 빠져 있던 류 현이 정신을 퍼뜩 차린 건 승하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이게 대체 뭔...?’

정신을 차린 류 현은 당혹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첨탑이 시작하는 부분에 서있던 자신이 왜 첨탑 꼭대기에 있는 것부터, 자신을 부른 승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현이 승하의 저런 표정을 본 건 남극에서 내상이 터졌을  정도였으니, 무슨 일이 터진  분명했다.

‘일단 진정하자. 진정하고...이건 뭐야?’


티나지 않게 조용히 호흡을 고르던 류 현은  손이 뭔가를 움켜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상반신이 사라진 리치의 몸뚱이,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 개수로 봐선 7성 리치가 분명했다. 거기에 아직도 몸 안에 남아있는 고양감.


류 현은 예전에 있었던 사고를 토대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승하의 증언을  들을 필요도 없이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리치를 산 채(?)로 먹었구나! 하고 말이다.

‘미친, 엘더 리치도 아닌데 정신줄 놓고 쳐 먹었다고? 그것도 아직 잡은 것도 아닌데? 어, 잠깐 내상이 없네...? 어떻게?’


몸을 더듬어 봐도 느껴지는 이상은 없었다. 가슴이 빠듯해지는  같은 고양감이 눈치 없이  현의 기분을 끌어올리려 들었지만, 류 현은 그것을 내리 눌렀다.


‘그게 무슨 보약도 아닌데 어떻게 바로 흡수한 거지? 내상하나 없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다른 이유는 있을 수가 없었다. 멀쩡하게 움직이던 7성 리치를 씹어 삼키자마자 소화시킨  분명했다. 이 고양감은 그 외에는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마력의 양이 아니라, 다른 것들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질적인 우위가 주는  같은 고양감은 7성 리치가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았다.

류 현이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며 혼란에 빠져 있는 동안, 승하의 표정도 더욱 굳어져 갔다. 그녀의 머릿속도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방금 전 그녀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게 만든 섬뜩한 기운이나, 멀쩡하게 움직이던 7성 리치의 상체를 통째로 씹어버린 것이나 어떻게 봐도 정상이 아니었으니까.


‘정신없어서 제대로 느끼진 못했지만 아까 그건 나랑 ‘강림’수련  때  느낌이었어. 중간에 억지로 멈출  그 느낌...’

승하는 저도 모르게 왼쪽발을 뒤로 빼며 태세를 가다듬었지만,  본인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긴장상태였다.

‘그 때 분명히 평소에 쓸 때는 최대한 억누른 거라고 했었어. 아직까진 완전히 못 다룬다고 했었지.  현이 그런 걸로 거짓말할 녀석은 아니니까. 만약 지금 못 억누르게  거면...나 혼자서는 감당  돼. 젠장, 밑에 있는 녀석들도 다 지쳤을 텐데.’
“어...류 현?  괜찮아?”

복잡한 머릿속과 달리 입으로 튀어나온 말은 간략했다. 승하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진정되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 번 더 내뱉으면 다 정리 되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승하는 같은 말을 다시 담았다.


“괜찮아?”
“예에, 괜찮습니다.”
“혹시...왜 그런 건지 말해줄 수 있어?”
“예?”

 현은 생각지 못한 직구가 들어오자 저도 모르게 몸이 굳었다. ‘강림’을 처음 봤을 때도 꼬치꼬치 캐묻는  아니라, 대련제의를 하자 만세만 외치고 다른 의심갈만  부분을 잊은 것처럼 굴었던 승하였다.

 현 스스로가 이번 일이 정리되고 나면 털어놓겠다고 선언하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찌르고 들어올 줄이야. 류 현이 예상치 못한 공격에 벙쪄있는 동안 승하가 재빨리 수습했다.

“지금 곤란하면 이번 일 마무리 되었을 때는 어때?”

 현은 승하의 기세에 밀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아차 싶었지만, 어찌되든 간에 말하는 건 피할 수 없을 것 같아 무르거나 하진 않았다.

“예,  때.”
“오케이, 난 내려가서 성 안으로 진입할 건데  어쩔 거야? 아까 그것도 있으니까 그냥 빠지는 게 나으려나?”
“그 정도는 아니고 내려가서 한 손 보태야...”
“마스터!”


지은 죄가 있는 것도 아닌데, 류 현은 휙 날아오는 화련을 보고 움찔했다. 눈알을 굴려서 승하를 살폈지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류 현이 뭐라고 대꾸하기 전에 승하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니네 마스터 완전 멀쩡하니까 그렇게 허겁지겁 안 와도 돼.”
“‘연결’ 끊어졌었는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마스터,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저번처럼 또 그러는 거 아니죠?”

방금 전  현에게 질문을 던졌던 이와 동일인이 맞는지, 승하는 평소의 장난스러운 태도 그대로 히죽거리면서 화련을 맞았다. 승하와 같은 눈높이로 떠있는 화련이 역정을 냈지만, 승하는 실실 웃으며 대충 받아넘겼다.


“자자, 아직 사냥 안 끝났거든? 낯 뜨거운 짓은 사냥 끝나고 합시다아.”


허공에 떠있는 화련의 목에 팔을 걸고 쓱 당겨온 승하는, 화련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번  끝나고 하자. 이번 일 끝나면.”
“...대체 뭘 본 거에요?”
“음...그 때까진 모르는  나을 걸?”
“...?”

화련이 다시 물음을 내뱉으려고 했지만 승하가 그대로 첨탑에서 뛰어내리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

-사상자가  명도  된다고? 내가 잘 못 들은 것은 아니겠지? 알렉스?-
“정확하게는 아홉이야. 죽은 놈이 다섯, 부상자가 넷. 그 중 둘은 포션만 들이부으면 내일이라도 정상적인 활동이 가능할 정도지.”
-아니...이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닌 거 같네만 그게 말이 되나? 5성 이상 리치만 기백을 헤아린다고 하지 않았나?-
“말이 안 되지, 안 되고말고. 나도 생중계로 본 게 아니었다면  소리하는 놈을 미친 놈 취급했을 거야, 마틴. 하지만 사실인 걸 어쩌겠어?”

멋들어진 금발을 올백으로 밀어붙인 청안의 남자는  나쁜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진저리를 쳤다. 남자 혼자 차지하고 있기에는 지나치게 넓고 어두운 방이었으나, 뒤이어 터져 나온 목소리들이 휑뎅그렁한 방을 가득 채웠다.


-웨인 크로이츠가 세운 전공 기록은? 이거 아무리 봐도 조작 같은데? 협회 놈들 아무리 이미지 팔이로 먹고 사는 놈들이라지만 이건 너무 심하지 않나?-
“모건, 유감스럽게도 거기 나와 있는 수치들은 전부 사실이야. 정 의심스러우면 좀 있다가 영상을 보내줄 테니, 그거 보고 세어보든가 해.”
-최상위 플레이어가 이렇게 급격하게 실력이 늘 수도 있는 건가? 이건 완전히 다른 사람인데?-
-그 이상이지. 웨펀마스터가 이런 전력을 보유하고 있으면 광대들 2기고 뭐고 다 집어치워야해. 베니 에벌린이 한 트럭이 몰려가도 상대가  될 테니까.-
“뭐야, 자네들 아직도 광대놀음에 돈 낭비하고 있었어? 말도 잘 안 듣는 놈들 말고, 경호원들 보너스나 더 챙겨주는 게 나을  같은데.”
-그놈들은 그놈들대로 달리 쓸모가 있지 않나. 알렉스, 자네가 저번에 일란 볼코프를 쳐내야한다고 한 건 잊었나? 그럼 그 전에 그를 대신할 것들을 육성해야지.-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볼코프 그놈이 최근   간 한  뭐가 있어? 벙커에 들어가서 죽치고 있다는 보고 밖에  해? ‘위스프’ 그놈들은 글렀다니까. 민족주의니 뭐니 떠들어대던 놈들이 카이로에 얼굴이라도  번 디민 적 있어? 그놈들은 이미 끝장난 거나 다름없다니까.”
-알렉스 말이 틀린 건 아니지. 광대들을 재편하는 건 반대까진 안하지만, 베니 에벌린 보다 못한 놈들만 모여 있는데 거기서 키워봤자 뭐에 쓰겠어? 차라리 싹 갈아엎자고. 볼코프놈 명줄은  때까지만 붙여놓기로 하고.-
-덮어놓고 놈을 쳐내자고 할  아니라니까. 지금 그놈 말고 대사관에 불 지르는 데 쓸 수 있는 놈이 몇이나 되나? 남은 광대들? 그놈들은 사냥개가 아니라 마약 중독자야. 러시아 대사관에 불 지르라고 하면 네덜란드로 가서 대마를 피울 놈들이지. 관리하기 더 골치 아파지기 전에 쳐 내는 게 맞아. 차라리 볼코프놈을 더 밀어주면서 새 팀을 만들 시간을 벌자고.-
-나도 그 의견에 찬성. 알렉스, 네가 볼코프를 싫어하는 건 알겠는데 그놈이 필요한 게 현실이야. 너한테  놈 컨트롤하라고  일은 없으니까 그냥 신경 꺼.-
“젠장, 그놈 명줄 한  기네.”
-알렉스.  친구는 입만 열었다 하면 볼코프 치우자는 소리뿐이라니까. 다들 7성 리치 잡은 인간들이 있다는  잊었나?-

사흘 전에 있었던, 지중해의 유령섬이었던 검은 리치성의 함락.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장년의 남자가 언급한 것은  일이었다. 이 회의가 열린 이유  하나.

방안에 잠깐 동안이지만 정적이 맴돌았다. 정적을 깬 것은 알렉스라고 불린, 방의 주인인 금발 남자였다.

“유감스럽게도 그놈에 대해서는 말하고 자시고 할 수 있는 게 없어.  미친 동양인놈이랑 검성이 둘이서 7성 리치 마법을  받아내고, 접근해서 처리했다. 이게 내용의 전부거든.  둘에 대한 보고 보다, 웨펀마스터가 미쳐 날뛴 것에 대한 내용이 몇 배는 길어.”
-자네가 심어놓은 놈한테 돈을 적게 먹인 게 아니라?-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그런데 진짜인 걸 어쩌겠어. 웨펀마스터는 앞에서 길을 뚫었고, 그 둘은 전투 초반부터 첨탑만 보고 내달렸으니   없지. 7성 리치가 그 둘을 타겟팅  했으면 나한테 전투 영상이 들어오는 일도 없었을 테고. 좋게 생각하자고, 아무런 정보가 없는 것 보다는 낫잖아?”

금발의 남자, 알렉스는 짐짓 너스레를 떨며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듯 했으나,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손을 쓰려고 해도, 그 친구는 어제 벌써 돌아갔다고. 거기다가, 뭘 어떻게 매수할 건데? 누가 그 친구 매수할 방법을 알고 있나?”
-...끙, 그건 그렇지.-

여기저기서 침음성들이 터져 나왔다. 알렉스 그 자신도 비슷한 심경이었기에, 더 추궁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나마 그 친구가 뭘 가장 우선하는지는 알고 있지 않나. 검성같은 경우도 아니고 말일세.-

입을 연 것은 알렉스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패널에 얼굴을 띄우고 있는 노인이었다. 검은 기색이라고는 없이 단정하게 정리한 백발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있는 노인은, 착 가라앉은 눈으로 그렇게 말했다.

“누가 그걸 몰라서 손 놓고 있나. 어떻게 해볼 건덕지가 없으니 이러고 있지. 설마, 베니 에벌린 때처럼 하자는 건 아니겠죠?”

그럴 거면 나는 빼놓고 얘기들 해. 라며 고개를 내젖는 알렉스였다.


-베니 에벌린의 후계자도 못 찾은 마당에 어찌 그러겠나. 그 친구가 더 약해졌다면 모를까, 그런 것도 아니고 말일세.  말은 치료 쪽으로 진행해보자는 걸세.-
“영감님 일선에서 물러나시더니 소식이 영 느리시네. 고칠 수 있으면 진작 목줄이라도 채웠을 겁니다. 지연치료도 제대로 되는 경우도 거의 없는 판국에 치료는 무슨. 칼리프 클랜도 그런 식으로 접근하려다가 차단당한 판국에, 뭘 어쩌겠다고?”

불손하다면 불손한 태도였지만, 누구도 알렉스의 태도를 질책하진 않았다. 그의 말처럼 말을 꺼낸 노인은 일선에서 물러나서 가끔씩 얼굴을 들이미는 정도고, 플레이어 관련 일에 대해서는 알렉스를 따를 자가 없는 것이 사실이니 말이다. 이번 지중해 검은 리치성 공략현장의 동영상을 건져온 것도, 알렉스가 아니었다면 불가능 했으리라.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일이야. 검성도 그렇고, 그 류 현이라는 친구가 이끄는 팀원들도 그렇고, 어떻게 그 좁은 땅에서 꾸역꾸역 괴물이 튀어나오는 것인지...-

알렉스가 얼른 덧붙였다.


“진짜 이해 안 가는 일은 그거지. 그 좁아터진 땅에서 튀어나온 괴물들이 하나 같이 매수가 안 되는 미친놈인가 하는 거.”

다시금 침음성들이 터져 나오며 알렉스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거의 모든 이들의 동의를 얻어내었지만, 알렉스는 의기양양한 기분을 낼 수도 없었다.

-그래도 알아볼 수 있는 한 최대한 알아봐야지. 그 친구가 의료계랑 인연이 깊은 것 같지는 않으니 그거라도 위안 삼아봐야겠지.-
“리췐, 연구소 놈들을 아직도 믿어? 그놈들을 믿느니 볼코프 그놈을 믿겠다.”
-혹시 알아? 그 예산 먹는 하마들이 치료법을 찾아낼지? 잘  되더라도, 그래도 희망이 보이는 방법이라도 찾아내면 그걸로 꿰여낼 수 있겠지. 그 친구 이런 쪽으로는 일자무식 일거 아냐? 구분도 못  테니, 그럴싸하게 포장만 하면 되겠지. 설마하니  친구가 치료법을 알고 있겠어. 있으면 진작 실행했겠지.-
“...그거 느낌 별로인데. 할 거면 내 이름은 빼고 해.”
-나중에 이름 빼버렸다고 서운해 하지나 마.-
“그럴  없어.”


***
정말 도로 위를 미끄러져 나간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끝내주는 승차감을 자랑하는 리무진의 뒷자리 한켠을 차지한 남자의 표정은 별로 좋지 못했다. 남자의 기분을 달래기 위해서 말을 건넬 수 있는 자 또한 없었다.


운전기사는 고용주에게 거듭 주의를 받은 채로 왔기에, 정말 앞만 보고 운전 중이었고 또 다른 동승자인 작은 체구의 여자는 남자보다는 덜 했지만, 표정이 좋지 않은  마찬가지였다.

한 눈에 보아도 기분 좋지 않음을 온 얼굴로 표현하고 있는 남자, 류 현은 뿌득 이를 갈아붙이며 생각했다.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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